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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용할 수 없는 좋은 향기는 순간순간 갖가지 향기로 변해

전삼록 권사(1) / 덕소신앙촌

저는 1927년 함경남도 북청군 덕성면에서 5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친정에서 아무 종교를 믿지 않았던 저는 열여덟 살에 결혼한 후부터 시댁 어른들을 따라 그리스도의 교회(1930년대 한국에 들어온 미국의 개신교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시할머님의 오빠 되시는 분(동석기 목사)이 미국에 다녀온 후 덕성면에 세운 교회라고 했습니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남편은 교사 생활을 하는 한편으로 교회 일에 매우 헌신적으로 […]

하나님 뵈옵는 그날까지 죄와는 상관없이 성결히 살고파

안순식 승사(4) / 기장신앙촌

한번은 약국을 운영하는 고객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분이 옷을 사기가 망설여지는지 수십 차례나 입었다 벗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장사를 빨리 끝내고 신앙촌에서 일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는데, 고객이 계속 시간을 끌자 한시라도 빨리 신앙촌에 가고 싶어서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결국 옷을 사지 않고 “다음에 오시면 꼭 살게요.” 하기에, 순간 화가 나고 언짢은 기분이 들어 “신앙촌 […]

하나님을 따르기를 결심하고 다니던 장로교회에 발길을 끊다

안순식 승사(3) / 기장신앙촌

하나님께서 설교를 마치고 단에서 내려가시면 목사들과 여러 인사들이 등단하여 자신의 체험담을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윤치영 장관은 아내가 수차례의 큰 수술을 받고도 고치지 못했던 위장병이 하나님께 안찰을 받은 후 씻은 듯이 나았다며 군중들 앞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또 어떤 고위 관료는 은혜를 받고 자신의 생활이 변화되었다며 이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던 일들이 이제는 양심에 거리껴서 도저히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

은혜를 받고 바늘 끝만한 죄라도 안 짓겠다고 굳게 다짐해

안순식 승사(2) / 기장신앙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기한 광경을 직접 목격했으면서도, 미욱한 저는 집회 분위기에 익숙치 못하여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힘차게 손뼉을 치시며 찬송을 인도하시는데, 그런 것을 처음 봤던 저는 너무 어색해서 손뼉이 쳐지지 않았습니다. 예배가 끝날 때 “할렐루야!” 하며 팔을 올려서 영광을 돌리는 것도 영 내키지가 않아서 팔을 안 들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습니다. […]

홀연히 바닷가에 나타나셨던 그분을 초량집회에서 다시 뵙다

안순식 승사(1) / 기장신앙촌

저는 1925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위로 오빠 둘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늦둥이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지주(地主)인 부유한 가정에서 귀염둥이 막내딸로 자란 저는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다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제 나이 예닐곱 살 때, 독립 운동을 하는 아버지가 계시는 중국 하얼빈으로 온 가족이 이주했으며, 저는 거기서 빈강(濱江)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자격증을 얻었습니다. 부산 초량집회에서 박태선 […]

우상을 섬기던 저희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 그 은혜 못 잊어

이순자 권사(3) / 부산 가야교회

어머니는 우리가 미신을 섬겼던 것을 두고 “어떻게 해야 그 죄를 씻을 수 있겠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면 어떻게 이 죄를 벗고 가겠니?” 하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때 전도를 강조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되면서 저와 어머니는 같이 전도하기로 결심하고, 예전에 사당에 와서 제를 올렸던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사당을 섬겼을 때 저희 부모님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며 공경했던 그분들은 사당을 […]

아버지의 불같은 호통에도 마음은 호수처럼 고요해져

이순자 권사(2) / 부산 가야교회

사당을 정리할 때 부산의 여동생 집에 계셨던 아버지가 며칠 후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도착하시기도 전에 동네 사람들에게 사당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온몸을 부르르 떨며 노여워하셨습니다. 호랑이 양반으로 불릴 정도로 무서운 성격의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시는 것을 식구들이 가라앉히려 했지만 그 화는 도무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10년 넘게 지극 정성을 들였던 사당을 없애 버렸다는 사실에 분을 […]

가슴이 시원해지며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밀려와

이순자 권사(1) / 부산 가야교회

저는 1930년 경기도 수원에서 6남매의 셋째 딸로 태어나 건축 설계사인 아버지(故 이범순) 아래서 풍족한 생활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당시의 신식 직업인 건축 설계사로 활동하며 양복을 즐겨 입으시던 분이었는데, 태평양전쟁으로 혼란이 가중되면서 민간신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고서에 몰두하셨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8·15 해방 무렵, 저희 가족은 충청남도 연기군 서면 은암으로 이사하여 크고 좋은 기와집에 사당을 마련하게 […]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 기억하며 흐르는 눈물로 기도합니다

강봉임 권사(3) / 기장신앙촌

1961년 1월 당시는 소사신앙촌에 물을 공급하는 큰 우물을 건설하던 때였습니다. 새벽예배를 마친 후 사람들이 돌 하나씩을 이고 우물 짓는 곳으로 가져가면 하나님께서 인자하게 웃으시며 한 명 한 명에게 전부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어느 날 돌을 나른 후 안수를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줄을 섰을 때, 하나님께서 양쪽의 손목을 앞으로 모으시더니 “내가 이렇게 돼도 너희가 나를 […]

목사들이 갖은 비방을 해도 내가 받은 은혜는 잊을 수 없어요

강봉임 권사(2) / 기장신앙촌

당시 종갓집 맏며느리로 대식구의 살림을 맡아 하던 저는 3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깨와 무릎의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식구들과 일꾼들의 식사 준비, 빨래, 바느질, 베 짜기 등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쉼 없이 일하다 보면 종종 칼로 베는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으로 꼼짝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깨가 너무 아파서 팔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무릎이 아플 때는 가만히 누워 있어야 그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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