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으신 하나님 말씀 의지해 날마다 주께로 나가렵니다

박부희 권사(2) / 덕소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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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하실 때마다 “믿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성신을 받아 죄를 씻음 받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아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 하는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막연하고 허무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겉으로는 점잖은 척 예배를 보지만 남녀가 어울려 사교장 같은 교회에서 어떻게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큰올케가 전도관은 이단이라면서 제가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기 시작했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많은 친척 분들도 저를 만류하셨지만 저는 뜻을 굽힐 수가 없었습니다. ‘전도관에서 은혜를 받았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다른 길을 갈 수가 있겠나.’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당시 원효로제단에 다니던 아이들 중에는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한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피부병을 앓았는지 머리 정수리 부분이 심하게 헐어서 고름이 고여 있었고, 상처가 마치 곰보빵처럼 울퉁불퉁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가엽고 안쓰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심한 피부병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는 것이 꺼려지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안수를 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름이 잔뜩 고여 있는 상처 부위에 손을 얹으시고 한참 동안 기도를 해 주셨는데, 참으로 사랑이 가득하신 그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친부모라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는 안찰을 받은 후 심하게 헐어 있던 머리가 깨끗이 나았다며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그 후 1957년 11월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되면서 저도 입주하여 양말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신앙촌에서 생활하면서, 병약한 체질로 1년에 몇 번씩 심하게 앓았던 제가 약을 모르고 살 정도로 아주 건강해졌습니다. 특히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걸렸던 늑막염이 완치되지 않고 계속 재발해서 가슴 통증이 심해질 때마다 병석에 앓아눕곤 했었는데, 신앙촌에 입주한 뒤로는 ‘내가 언제 늑막염을 앓았지?’ 할 정도로 아픈 증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건강하고 부지런하게 생활하는 하루하루가 참으로 즐거울 뿐이었습니다.

1958년에는 신앙촌 내에 유치원부터 중·고등학교까지 차례로 세워지면서, 저는 시온 유치원에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유치원 아이들이 ‘벙어리 이발사’라는 연극을 연습해서 공연한 적이 있었는데, 이발사로 분장한 아이들이 발랄한 음악에 맞춰서 이발하는 흉내를 내는 연극이었습니다. 오만제단에서 공연했을 때 교인 분들이 연신 웃으시며 즐겁게 연극을 보셨고, 하나님께서도 무릎을 치시며 환하게 웃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1962년에 덕소신앙촌이 건설되어 1차로 입주한 저는 주일예배의 피아노 반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시작하시기 전에 묵도를 하실 때면 해먼드 오르간으로 찬송가를 연주했는데, 당시 장년 성가대를 지휘하셨던 홍지유 장로님(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 선생의 조카)이 저에게 해먼드 오르간의 연주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저는 어린이 성가대의 반주도 맡게 되어, 양말 공장에서 근무하는 틈틈이 반주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새 일주일이 다 지나곤 했습니다. 빼어난 실력을 갖추었던 어린이 성가대는 음악회와 방송국에 자주 초청을 받았는데, 방송국 녹음실에서 참새처럼 입을 벌리고 예쁘게 합창하는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어서, 가끔씩 꺼내 보면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에 흐뭇하게 웃음을 짓게 됩니다.

고름이 잔뜩 고여 있는 아이의 상처 부위에 손을 얹으시고
기도해 주시던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친부모라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저는 신앙촌에서 생활하면서 생명물로 시신을 씻겨 아름답게 피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었습니다. 덕소신앙촌에 사시던 이옥진 집사님이 1년 동안 병을 앓다가 숨을 거두셨을 때는 시신이 변화되는 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었습니다. 고인은 오랫동안 병을 앓아서 병색이 짙은 얼굴이었는데, 돌아가신 뒤에는 비쩍 마른 얼굴에 거무튀튀한 빛을 띠어 무서운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겁이 많은 저는 시신의 모습을 보면서 ‘저 모습이 생각나면 밤에도 잠을 못 자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명물로 깨끗이 씻은 후에 다들 와서 보라고 하여 고인의 모습을 봤더니, 뼈와 가죽만 남아 있던 얼굴에 통통하니 살이 올라 너무나 뽀얗게 피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발그스름한 입술은 입술연지를 바른 것처럼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습니다. 한숨 주무시는 듯 편안한 고인을 보면서, 불과 몇 시간 전에 제가 무서워했던 모습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흉하고 무서웠던 시신이 이슬성신으로 아름답게 피는 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크신 권능에 감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저는 덕소신앙촌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레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후배의 권유로 서울에 나가서 피아노를 가르치면서부터 제단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거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3, 4년 정도 답답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덕소신앙촌 집에 갔을 때였습니다. 수년 전에 축복을 받아 집에 보관해 두었던 생명물이 처음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맑고 깨끗한 것을 똑똑히 확인하면서 그때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습니다. ‘분명한 은혜를 주시는 참길인데 내가 왜 이 길에서 멀어졌던가?’ 하며 후회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고, 다시금 저 자신을 추슬러서 제단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동안에도 신앙촌 소비조합을 하고 싶어서 가끔씩 친척이나 지인들에게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1990년부터 소비조합을 시작하게 되어 지금까지 계속 활동하고 있습니다. 방문 판매를 하면서 고객들의 집을 다닐 때 마음속으로 가만히 찬송가를 부르다 보면 어느새 발걸음이 가벼워져서 빠르고 가뿐하게 걸어다닙니다. 어려서부터 무척 허약한 체질이었던 제가 지금은 나이를 잊어버릴 만큼 건강하게 지내고 있으니 하나님 앞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고객들을 만나다 보면 신앙촌에 대해서 종종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간혹 신앙촌을 잘못 알고 있는 분들에게는 제 경험담을 들려주곤 합니다. “저는 젊었을 때 이북에서 빈손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아무런 기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촌에서 살면서 부족한 것 없이 지내왔고, 지금은 덕소신앙촌이 재개발되어 아파트에서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신앙촌에서 수십 년 살아온 제 경험담인데, 여기에 무슨 잘못된 점이 있는가요?” 그러면 험담을 늘어놓던 분들도 어느새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신앙촌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볼 때면 저는 천막집회에서 하나님을 처음 뵈었던 때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기쁨에 가득 차서 찬송하는 사람들 속에서 저도 목이 터져라 찬송을 불렀고, 지난 죄가 낱낱이 떠오를 때는 뜨거운 회개의 눈물이 가슴에 북받쳤습니다. 그 은혜를 알고부터 구원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죄악으로 깜깜한 세상에 오셔서 구원의 길을 밝혀 주셨건만 그 크신 은혜를 간직하지 못하고 ‘철없는 어린애보다 더 못나게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에 자꾸만 눈물이 흐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낙원에 계신 지금도 변함없이 은혜를 내려 주시기에 다시금 힘을 내며 앞을 바라봅니다. 요즘 저는 길을 지날 때면 ‘높으신 하나님 말씀을 의지해 날마다 주께로 나가며~’ 하는 찬송가를 속으로 부르며 활기차게 걸어다닙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하나님 뜻대로 맑고 아름답게 살아서 날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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