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 보는 신앙체험기
양심을 지키려 할 때 하나님 함께 해 주셔

양심을 지키려 할 때 하나님 함께 해 주셔

생활비 마련을 위해 과일 장사 시작 주변에서는 주인이 보지 않는 사이에 더 좋아 보이는 과일로 바꾸라고 했지만,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 하지 않아 차라리 굶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어디선가 향기로운 냄새 날아와 1914년 황해도 옹진군 송림에서 태어난 저는 계속 송림면에서 살다가 20세 때 같은 고향 사람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하고 몇 년 후 저는 동네에서 5리 정도 떨어져 있는 감리교회의 집사, 권사들과 외국인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아 감리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처음에 제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반대하던 남편도 얼마 후부터는 저와 함께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 후 1945년 일제 치하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그 기쁨을 맛보는 것도 잠깐이고, 이남과 이북이 갈라지면서 이북에는 공산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마을의 식량, 가축 등을 수탈해 갔으며,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까지 탄압하여 저희가 다니고 있던 교회를 강제로 빼앗아 그들의 사무실로 사용하였습니다. 6․25 전쟁 후 행동의 자유 없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어 남쪽으로 내려오게 돼 또 교회에서 회계 일을 맡아보던 저희 남편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비난하는 그들에게 반박하다가 인민 재판을 당했으며, 그 과정에서 고문으로 인하여 반 죽은 상태로 풀려나왔습니다. 종교도 갖지 못하고, 행동의 자유가 전혀 없는 그런 세상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판단한 저와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밤에 몰래 배를 타고 남쪽으로 피난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이 많이 상해 있었던 남편은 피난 나오는 도중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갖은 고생을 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스로 부산에 도착한 저는 서대신동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곳에 정착하였습니다. 고향을 등지고 피난 나와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던 피난민들은 장로교회를 세워 같이 예배도 드리며 당시 여기저기에서 열리는 부흥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저도 그 피난민 교회에 다니며 부흥집회가 열린다고 하면 어디든지 찾아가 참석하였습니다. 저희 가족은 전 재산을 버리고 맨몸으로 피난 나온 탓에 생활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과 살아갈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시장에서 장사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사람과 함께 과일 장사를 하던 때에 그들과 도매상에 물건을 하러 가면, 같이 간 사람들은 이미 계산한 과일들을 주인이 보지 않는 사이에 좀 더 좋아 보이는 것으로 몰래 바꾸기에 바빴고, 저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였지만 저는 믿는다는 사람으로서 차마 제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사를 어떻게 하려느냐고 핀잔을 듣고 원망을 사면서도 차라리 굶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어디선가 너무나 향기로운 냄새가 날아와 코에 맡아졌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제가 가져간 물건은 그 사람들의 것보다 훨씬 잘 팔렸습니다. 또한 매우 힘들고 어려워 하나님을 찾으며 울 적에도 그 향기는 어김없이 맡아졌고, 그때마다 무슨 과일 향 같은 상큼한 냄새가 나기도 하였습니다. 하루하루 힘겹게 생활을 꾸려나가면서 길을 갈 때나 장사를 할 때, 그리고 땔감이 없어 이삭을 주워다 불을 피워 밥을 할 때도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을 때면 머리 위에서 퍼붓는 것 같이 그 신기한 냄새들이 진하게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을 때면 향기로운 냄새가 날아와 코에 맡아져 그렇게 지내던 중, 1955년경 어느 날 교회 사람들로부터 영주동 근처 반석교회에서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집회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과 함께 집회가 열리는 장소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한 분이 나와 준비 찬송을 한 뒤 박 장로님께서 등단하셔서 단상을 치시며 찬송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매우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이 향기는 그동안 내가 여러 번 맡았던 냄새다.’ 저는 너무나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박 장로님께서 예배 도중 쉭쉭 하고 축복을 하시니 그 좋은 냄새가 깊숙이 들이마셔지고 기분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그때 박 장로님의 모습은 달덩이같이 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상을 치시며 찬송을 인도하시자 그동안 여러 번 맡았던 향기가 진동해 또한 박 장로님께서 설교 말씀을 하시면서 단상을 내리치시니 커다란 불덩이가 사방으로 튀어나와 제 머리에도 와 닿았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고 너무나 놀라면서 ‘저분은 보통 분이 아닌 것 같다. 참 으로 신기하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잠시 후 박 장로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이 시간에 내가 단상을 치며 찬송하고 설교할 때 향취를 맡은 사람이 있습니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네” 하고 대답하자 다시 하시는 말씀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며 조심할 때, 향취를 맡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손 들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박 장로님께서 말씀하신 향취가 바로 제가 맡은 향기로운 냄새라고 생각하고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또 박 장로님께서 “피난민이 이 자리에 많이 참석하였을 텐데 그 사람들 중에 향취 맡은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박 장로님께서는 “피난민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여기에 나왔고, 또한 피난 나와서도 죄를 지을까 봐 두려워 울면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찾았으니, 향취를 맡은 사람이 많을 거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찾을 때 좋은 냄새를 맡고, 생수 체험을 하여도 그것이 무엇인지 그동안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오늘은 내가 이것을 깨닫게 해 주려고 한다”고 하시며 단상을 치셨습니다. 죄지을까 노심초사하며 하나님을 진실로 찾았을 때 맡았던 향기가 향취임을 밝혀 주셔 그러자 또다시 불덩이가 사방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고, 그 순간 제 목에서부터 무엇인가 시원한 것이 가슴으로 내려가 몸 전체가 시원해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한없이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일주일간의 집회를 마치고 돌아온 후, 저는 박 장로님께서 부산에 있는 기성교회를 순회하시며 인도하시는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량교회 집회를 끝으로 박 장로님께서는 기독교 총회의 방해로 시달리며 얼마 동안 부산 집회를 하시지 못하였습니다. 박 장로님의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기뻐 뛰었던 많은 사람들은 다니던 교회에 할 수 없이 나가게 되었으나, 박 장로님께 받은 은혜는 잊히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더 갈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니던 교회에서는 아무리 해도 진실한 기도가 되지 않고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니 다시 그 은혜를 받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랄 뿐이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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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원 집회 참석기] 아름다운 천국을 목적 삼고 참 진리의 길을 따르다

[광주공원 집회 참석기] 아름다운 천국을 목적 삼고 참 진리의 길을 따르다

1955년 1월 1일, 서울 무학교회 집회에서 시작된 하나님 초청 부흥집회는 한국 땅에 하나님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월 26일부터는 남산집회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순회 부흥집회가 열렸는데, 이는 천부교 역사의 초창기이자 성신의 역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을 수용할 만한 건물이 없어 천막을 치고 집회를 열어 천막집회로 불리는 이 순회 부흥집회는 1955년 한 해 동안 15회에 걸쳐 전국 각지에서 개최되었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13번째로 열린 광주공원 집회 장소를 찾아가 보았다. 당시 10대 내외의 나이로 집회에 참석했던 이은자, 조영순, 김순임, 차임정 4명의 권사(現 광주 서동교회)가 동행해 그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1955년 11월 25일부터 12월 1일까지 이어진 광주공원 집회는 전남 서동 광주공원 광장에서 열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비둘기 모양의 축복이 내린 모습이 이 집회에서 찍힌 사진이고, 윤치영 선생이 단상 앞에 나와 간증할 정도로 은혜가 많이 내린 집회가 광주공원 집회다. 오성민 관장의 신앙체험기를 보면, 장로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며 교인들 감시차 광주공원 집회에 참석했다가 하나님 말씀에 감화를 받고, 성신의 은혜를 맛보며 기성교회를 끊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하나님 집회 방방곡곡에 퍼진 하나님의 기사 이적 소식은 당시 기성교계에 큰 화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의 인파를 모여들게 하였다. 특히 광주집회는 지방 인사와 유지들이 많이 참석한 특징을 보이며, 일주일 정도 집회가 열리는 동안 날이 갈수록 참석자들이 늘면서 자리를 뺏길까 봐 철야를 하는 이도 2만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은자 – 집회가 열렸던 자리는 건물 하나 없는 야산이었어요. 저희가 사진 찍은 곳이 공원 입구였고, 현재의 계단이 아닌 비탈진 흙길을 올라가면 천막이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었어요. 지금의 시민회관 건물이 위치한 곳이 바로 천막집회 자리입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오순절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박태선 장로님 집회에 참석하라는 광고에 교인들이 모두 광주공원 집회에 참석해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었지요. 저희는 집회가 열리는 일주일 동안 참석했는데,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 떠나면 자리를 뺏길까 봐 금식하고, 철야를 했습니다. 조영순 – 16살에 일신방직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어요. 어느 날 불의 사자가 광주공원에 와서 집회를 하신다는 거예요. 혼자 생각에 ‘불의 사자? 그럼 세상을 다 태우시겠네’ 싶어서 한번 가보자고 한 것이 지금까지 신앙의 길을 걷게 된 계기였어요. 김순임 – 저는 그때가 9살이었어요. 엄마가 기성교회에 다니던 중 광주공원 집회에 다녀오시더니 박태선 장로님이 오셔서 예배를 드리면 병이 낫는다고 하셔서, 저와 외삼촌, 사촌 동생이 엄마를 따라 집회에 갔어요. 차임정 – 고1 때였어요. 당시 저는 엄마와 함께 광주에서 제일 큰 중앙교회를 다니고 있었어요. 엄마가 몸이 좋지 않으셨는데, 어느 날 하시는 말씀이 “감람나무라는 분 집회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병도 낫는다더라” 하시면서 집회에 가자고 하셔서 엄마를 따라 광주공원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 은혜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따르기로 집회에서 불치의 병을 고치고, 이슬 같은 은혜를 체험하고, 하늘의 향취를 맡은 사람들은 점차 모여들고, 모여들어 감람나무 하나님을 따르게 되었다. 이은자 – 광주공원 집회에 은혜가 참 많이 내렸어요. 집회에 참석한 지 3일째 되던 날부터 하나님께서 설교하실 때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나더니, 그 뒤로는 예배 시간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났어요. 나중에야 그 고약한 냄새가 죄 타는 냄새고, 향기로운 향취는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막집회에 참석한 이후에는 오순절교회에 다시 다니다가 지산동에 전도관이 생긴다고 한 때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전도관에서 예배를 드리다 보면 교회 여자 전도사님이 생각나는 거예요. 저를 예뻐하셨거든요. 그래서 한 주일은 오순절교회, 그다음 주에는 전도관, 이렇게 번갈아 다니다 보니 마음이 냉랭해지고 은혜가 안되는 것을 느꼈어요. 그 후부터는 교회에 발길을 끊고 전도관에만 열심히 다니게 되었습니다. 조영순 – 광주공원에 올라가니 천막 안에 많은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고 있었어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가운데 앉았는데, 곧 하나님께서 나오셔서 찬송을 인도해 주셨어요. 찬송을 한참 따라 부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너무 기쁜 거예요. 또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사이를 다니시며 안수해 주셨던 기억도 생생해요. 안수를 받고 몸이 둥둥 뜨는 듯한 느낌이었고, 이틀 동안 밥을 안 먹었는데도 전혀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그래서 광주공원 집회 이후에도 다른 곳에서 하나님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곳까지 쫓아가기도 했어요. 영산포 집회에서는 정말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되었어요. 하나님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올라오실 때 보니 하나님 주변에 뽀얀 연기가 따라다니는 거예요. 처음에는 “저것이 무엇이여?” 그랬어요. 그때는 정확하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거든요. 또 한번은 예배실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순간 천장을 보게 되었는데, 천장에 물이 송골송골 맺혀 있던 적도 있었어요. 초창기 때 하나님께서는 이슬성신 은혜를 내려주시며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셨어요. 김순임 – 엄마를 따라가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병 나은 사람은 일어나라고 하시니까 주변에 있던 앉은뱅이도, 봉사도 일어나더라고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같이 간 사촌 동생이 원래는 목에 몽우리가 있었는데, 예배드리고 나서 몽우리가 싹 없어졌다고 외삼촌이 동생의 손을 번쩍 드는 거예요.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서는 박 장로님이 은혜가 많으신 분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차임정 – 어머니를 따라 일주일간 집회에 참석하면서 보니 어머니의 몸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저는 하나님께서 단에서 말씀하실 때 이슬비가 내리듯 은혜가 내리는 것과 향취 체험을 하면서 이곳이 참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 뒤로 이분을 따라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중앙교회에 발길을 끊고 전도관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 천국을 목적 삼고 신앙을 지켜오신 어머니,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피게 해주셔 신앙의 본보기가 되어주신 어머니. 세월이 흘러 마지막 가시는 길에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하고 맑게 피어난 어머니의 모습은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실제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은혜를 주시는 분인지 깨달을 수 있었으며, 평소의 삶 속에서 신앙을 어떻게 지키고 실천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보게 하였다. 이은자 – 광주 서동교회를 지을 때 어머니가 세숫대야의 돌을 머리에 이고 나르던 모습, 새벽예배에 빠짐없이 다니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으셨던 것 같아요. 이후 어머니는 소사신앙촌에 입주해 지내시다가 교통사고 후 1년이 채 되지 않아 63세에 돌아가셨어요. 소사신앙촌 장례반 권사님들께서는 어머니가 신앙촌에서 가장 잘 피어 가셨다고 말씀하셨어요. 돌아가시기 직전에 찬송가 세 장을 부르고 가셨는데, 그중 하나가 ‘주안에 있는 나에게’ 찬송이었어요. 어머니가 숨을 거두신 후 입관식 전이었는데도 얼굴에 살이 붙고, 우윳빛이 되어 젊은 사람처럼 보였어요. 게다가 웃는 모습으로 가셔서 슬픔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날 하나님께서 향취로 어머니 곁을 지켜주셔서 큰 위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김순임 – 어릴 때는 어머니의 신앙생활을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제단 지어지기 전에는 집에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 예배드리고, 매일 새벽 4시만 되면 일어나 씻고 기도하는 바람에 불편하기만 했지요.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어머니의 신앙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어요. 그렇게 잘 피어서 가실 수가 없었거든요. 어머니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스스로 피어서 가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이 아니겠나”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어요. 천국을 목적 삼고 살아오신 어머니여서인지 입관예배를 드리기 전부터도 얼굴이 이미 뽀얗게 피어 생전보다 더 예쁜 모습에 ‘이것이 하나님의 권능이구나!’ 하고 놀랐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암 투병으로 뼈만 남았었는데, 얼굴이 말 그대로 흰떡처럼 하얗고, 피부가 19살처럼 살이 차올라 있는 거예요. 장로교회 다니는 친척분들이 편안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시더니 “너희 어머니 볼 것도 없이 천당 갔다” 하실 정도였어요. ‘저런 모습을 보여 주시려고 엄마가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따랐나보다, 하나님 앞에 공을 세우면 참 진리가 되는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임정 – 어머니가 69세에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때 그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생명물로 어머니를 씻겨 드렸는데, 얼굴에 화장을 해 놓은 사람처럼 입술도 빨갛고, 화색이 돌아 제 눈엔 20살쯤으로 보였어요. 당시 최성례 관장님께서 입관하고 계셨는데, 하나님께서 전화를 주셨어요. “내가 축복해 줄 테니 잘하라” 하시며 교회에 다니는 딸을 바꿔주라고 하셨대요. 제가 전화를 받자 “잘 폈지?” 물으셔서 “네. 너무 예쁘게 피었습니다” 말씀드렸더니, “그것 봐. 내가 해서 핀 거야. 내가 하나님이야. 잘 믿어야 돼.” 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When I try to keep my conscience, God is with me

Gong Deok-ryeol, Deaconess (1)

I started a fruit business to make a living. Even though people around me suggested changing the fruits I already paid for with the ones that looked better when the owner was not looking, I didn’t do so as it was against my conscience. Whenever I thought it was better to live hungry than compromise […]

감람나무 하나님의 증거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인간 창조의 근본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한 구원 얻는 방법을 알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죄를 씻어 주시는 권능을 보여주심으로써 틀림없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증거가 수없이 많지만, 이번 테마에서는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 이슬성신의 권능 하나님께서는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시고 성경 호세아서를 들어 이슬성신을 내리는 존재가 감람나무 […]

“하나님 은혜로 큰 권능 보여주시니 두려움이 놀라움으로 바뀌어”

(지난 호에 이어) 어렵사리 들어온 건설대인 만큼 제 각오는 대단해서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겠다는 자세로 일했습니다. 건설대로 일하며 참 신기했던 일은 자갈이나 시멘트 포대 등 무거운 재료를 운반할 때 이를 지켜보시던 하나님께서 쉭 하고 축복해 주시면 아주 가볍게 느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무거운 포대를 가뿐하게 들고 나르던 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 힘이 아니었고,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

곡식 한 알도 하나님의 조화로 맺어져

이번 추수감사절 사진전시실에는 1958년 소사신앙촌에서 무를 수확하는 사진이 전시되었습니다. 사진 속 모습처럼 추수의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느껴지는 추수와 관련된 체험기를 이번 호 특집에 모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만난 것은 평생의 복 추수감사절 사진전시실에 걸려 있는 사진을 보니 소사신앙촌에서 즐겁게 일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제 나이 스무살 때였습니다. 원래 저는 건설대로 들어갔지만, 소사신앙촌 무밭에 무 수확량이 많다는 소식을 […]

내 모든 사정 다 아시고 어려움을 이겨낼 힘 주시는 하나님

<신앙체험기 504회 소사동교회 김지희 권사>

제가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초등학생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는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좋아 보였고, 저도 종교를 믿으면 더 착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 집과 가까운 기성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다니고부터는 예배에 빠지지 않은 것은 물론 성경 공부, 기도 생활 등 극성맞다 싶을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믿음이라면 누구에게도 밀리고 싶지 않았고, 그것이 은혜받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

I came to recognize that God i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and the one who operates it

Jeong Soo-gil, Seungsa

I was born in Cheolsangun, Pyeonganbuk-do in 1939 as the first son of three brothers. After the Liberation Day of August 15, 1945, our family came down to the south and spent a period of refuge during the Korean War and finally settled in Seoul. A few years later, during my second year at Seoul […]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아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정수길 승사

저는 1939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8․15 해방이 되고 월남한 저희 가족은 6․25전쟁 중에 피난 생활을 하다 서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저는 서울사대부고 2학년 때 휴학을 하고 잠시 부산에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부산 영락교회를 스스로 찾아 나갔습니다. 사춘기 시절에 전쟁의 혼란과 고달픈 피난 생활을 겪었던 저는 종교를 통해 심적으로 […]

“허락해 주시는 귀한 은혜에 뜨거운 눈물 흘러”

<신앙체험기 503회 소사교회 김춘산 권사>

저는 1937년 중국 만주 도문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던 부모님은 제가 네 살 무렵 감리교 세례를 받게 하셨고, 저 역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듯 1947년 한국에 돌아와서도 집과 가까운 기성교회에 다니며 새벽기도 종까지 직접 칠 정도로 열심인 주일학생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용산 도원동교회에서 박태선 장로님의 집회가 열린다는 포스터를 우연히 보았는데, 신앙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저도 […]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친 것은 감람나무를 증거하기 위한 것

하나님께서 전국을 순회하시며 천막집회를 하실 때,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 집회에 참석하여 기사와 이적을 체험했습니다. 벙어리가 말을 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등 초현실적인 일 뿐 아니라 전염병으로 여겨져 가까이하기를 꺼리던 나병 환자들까지도 하나님께 안찰을 받거나 축복받은 물질로 대부분 완치되었습니다. 몇십 년 불치병으로 여기며 살아오던 사람들을 안타까이 여기셨던 하나님께서 그의 손길로 병을 고쳐주시자 사람들은 병고에서 […]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신앙체험기 502회 덕소교회 홍순호 권사>

1937년생으로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이 되던 해 전도관에 처음 가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교회나 신앙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감리교인이던 누나들이 교회에 가자고 할 때도 “하나님이 어디에 있나? 보여주면 믿겠다”며 거절하곤 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전도관을 다니게 된 것은 친구 종국이 덕분이었습니다. 종국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는데, 어느 날 종국이네 집에 가던 중 우연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