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체험기
“안수해 주시면 아픔이 씻은 듯이 사라져”

“안수해 주시면 아픔이 씻은 듯이 사라져”

저는 1948년 3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고집이 셌던 저는 어머니와 5남매가 집 근처 군산전도관에 다닐 때도 혼자만 따라나서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감기로 열이 심하게 났을 때 어머니가 전도관에서 가져오신 생명물을 마시고 몸이 나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저 시간이 지나 감기가 나은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혼자 남아 있던 저는 심심한 마음에 처음 군산전도관을 찾아갔습니다. 가족들이 제단에 다닌 지 1년 만인 1963년, 중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제단에 나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어느 일요일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던 중 갑자기 머리카락 타는 듯한 노린내가 코를 스쳤습니다. 곧이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향기가 진동했습니다. 과일 향 같기도 하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특별한 향기였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죄 타는 냄새와 하나님의 은혜의 향취라는 것을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체험을 통해 이곳에는 분명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배우며 제단에 다니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일학교 반사로 아이들을 돌보았고, 예배 시간에는 찬송에 맞춰 북을 치기도 했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관장님께서 반사 선생님들을 모아놓고 말씀 공부를 해주셨는데, 나이가 어린 저도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성경 한 번 제대로 펼쳐본 적도 없고 말씀도 잘 알지 못했던 저였지만, 어른들 틈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반사 선생님들이 성경을 읽으며 생긴 의문점들을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매주 듣다 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 여러 내용들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성경과 예수에 대해 밝혀 주시며 예수를 통해서는 구원이 없다는 말씀을 전해 주셨을 때,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하나님께서 순회 집회로 군산전도관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집회가 있던 날, 저는 몸이 좋지 않아 집에 누워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하나님을 뵙기 위해 먼저 집회에 갔고, 혼자 남아 있던 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힘든 몸을 이끌고 군산전도관으로 향했습니다. 예배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미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창문 밖 마당에 서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도 예배를 드린 뒤 안수 시간에 줄을 섰습니다. 제 차례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제 머리를 가볍게 쳐 주시더니 갑자기 “나가서 제단을 살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무슨 뜻인지 몰라 얼떨떨한 마음으로 밖으로 나왔습니다. 마당으로 나와 보니 안수는 거의 끝나 가고 있었고, 관장님들이 서 계셨습니다. 혹시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나 싶어 잠시 서성였지만 별다른 일이 없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하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 뜻을 알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 무렵 군산제단에는 탁구대가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평소 탁구를 좋아해 친하게 지내던 이금선(현 구로교회)이라는 친구를 제단으로 데려와 함께 치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탁구를 치러 제단에 왔던 금선이도 점차 예배에 관심을 가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금선이와 저는 신앙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금선이가 신앙촌에 가겠다고 저희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전까지는 신앙촌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어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금선이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도 같이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말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왔습니다. 신앙촌에 가겠다는 마음을 먹은 뒤, 저는 먼저 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먼 곳으로 자식을 보내는 것이 걱정되어 처음에는 안 된다고 하셨지만, 제가 쉽게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을 아시고 조용히 짐을 챙겨 주셨습니다. 며칠 후, 아버지께서는 저와 금선이를 부르셨습니다. 제게 왜 신앙촌에 가려는지 물으셨지만, 막상 설명하려고 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런 저에게 아버지께서는 더 묻지 않으시고 “가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떠나는 날에는 직접 짐을 챙겨 주시고 버스 타는 곳까지 배웅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1971년 5월 3일, 금선이와 함께 기장신앙촌에 입사했습니다. 신앙촌에 들어와 보니, 하나님께서는 평일 새벽마다 직접 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이면 저희는 덕소와 소사신앙촌을 비롯한 여러 제단에서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시는 하나님을 기다리기 위해 예배실에 모여 있곤 했습니다. 저 멀리서 차량의 불빛이 창문으로 비치면 하나님께서 돌아오시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 순간이 어린아이처럼 설레고 기뻤습니다. 신앙촌에서 지내는 하루하루는 은혜의 창파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저와 금선이는 제4봉제공장에서 단추 다는 작업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문득 고개를 들어 공장 안을 둘러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찌나 밝고 평안해 보였는지, 마치 천사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 좋은 곳을 내가 왜 이제야 왔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저는 신앙촌에서 느낀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편지에 담아 자주 집으로 보내곤 했습니다. 그해 여름, 업무차 부산에 내려오신 아버지께서는 시간을 내어 신앙촌을 찾아오셨습니다. 혹시 제가 힘들어 보이면 데리고 가실 생각으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신앙촌 곳곳을 안내해 드렸습니다. 여러 곳을 둘러보신 뒤 집으로 가신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께 “정균이가 너무 밝아 보이고, 천사처럼 보여 집에 가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정년퇴직을 앞두고 아버지께서는 “나도 정균이처럼 신앙촌에 들어와 살고 싶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후 저는 재단실을 거쳐 여러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고, 업무를 보고드리기 위해 하나님을 자주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심한 감기에 걸려 열이 오르고 콧물이 계속 흐르는 데다 왼쪽 편두통까지 심해 몸 상태가 무척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날도 하나님께 보고드릴 서류가 있어 집무실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아픈 것도 잊은 채 탁자 위에 서류를 펼쳐 놓고 보고 내용에만 정신을 쏟았습니다. 한참 보고를 드린 뒤 고개를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제 왼쪽 머리에서 손을 거두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보고에만 집중하느라 안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보고를 마친 뒤 사무실로 돌아와 평소처럼 업무를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한창 일하다 보니 아침까지만 해도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열이 나던 증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하나님께서 제 몸을 낫게 해주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눈에 다래끼가 심하게 나 안대를 한 채 보고를 드리러 간 적도 있었습니다. 눈이 심하게 부어올라 며칠 만에 쉽게 나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안대 위에 손을 얹으시고 한참 동안 축복해 주신 후, 하루 이틀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또 폐결핵으로 심한 고통을 겪는 한 여청을 데리고 하나님께 안찰을 받으러 간 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힘을 다해 안찰해 주셨고, 저는 그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안찰을 마치신 하나님께서는 그 여청을 먼저 밖으로 내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배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듯한 심한 기침을 쏟아내셨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저는 하나님께서 죄를 친히 안아 맡아 소멸시켜 주신다고 하신 말씀이 어떤 의미였는지 비로소 실감했습니다. 인간을 위해 그토록 큰 고통을 감당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죄송함과 감사함이 밀려왔습니다. 한 번은 외근을 다녀와 하나님께 보고를 드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밖에 나가 일을 보던 중 길가에서 들려온 유행가가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습니다.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떠나지 않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흐려지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고를 드리려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마치 제 속을 다 들여다보고 계신 듯, 방금까지 떠올리고 있던 유행가의 한 구절을 그대로 말씀하시며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직후부터 그토록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노래가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께서 겉으로 드러난 행동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까지도 모두 알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신앙체험기
하나님의 손길과 생명물의 권능에 감사드려

하나님의 손길과 생명물의 권능에 감사드려

1939년 11월생인 저는 전북 임실군 오수면에서 자라며 장로교회를 다니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특별히 신앙심이 깊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자연스럽게 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1957년 6월 무렵이었습니다.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던 친구가 고향에 내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문득 제게 “천국이 있다고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확신이 없다고 답하자, 친구는 자신이 전주전도관에 다니며 직접 목격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전도관 장례예배에 참석해 밤을 지새우며 지켜보았는데, 돌아가신 분의 모습이 환하게 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박태선 장로님께서 한 달에 한 번 전주전도관에 오셔서 생명물을 축복해 주시는데, 그 물에는 많은 이적이 나타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또 전도관에 가면 그 생명물을 직접 받아올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제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사람의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환하고 평온할 수 있다면, 나도 한번 그 신앙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주까지의 거리가 멀어 당장 찾아갈 수는 없었지만, 그때부터 전도관과 연락이 닿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 직장 때문에 남원에 가게 된 또 다른 친구가 주일에 남원전도관을 찾았다가 전도사님께 제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었습니다. 전도관에 가보고 싶어 하는 친구가 오수에 있다는 말을 들은 전도사님은 그길로 친구와 함께 바로 저희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당시에 그 전도사님은 남원 지역에서 개척 전도를 하고 계셨는데, 오수까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발걸음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전도사님은 자신도 과거에 기성교회 목사였으나, 박 장로님께 은혜를 받고 전도관 전도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또 생명물은 시간이 지나도 썩지 않으며, 돌아가신 분이 생명물로 아름답게 피어나는 모습도 직접 보았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들을수록 과연 어떤 분이시기에 그런 권능을 베푸실까 하는 생각이 들며, 꼭 한번 뵙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그러던 중 박 장로님께서 전주전도관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생명물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호리병을 준비해 전주로 향했습니다. 당시 태평동의 한 공장 건물을 임시 예배처로 사용하던 전주전도관에는 이미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군산 집회를 마치시고 다음 날 새벽 단에 서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사람들 틈에 앉아 철야를 했습니다. 마침내 새벽이 되어 박 장로님께서 예배를 시작하시자, 예배실 안은 안개가 낀 듯 자욱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많아 생긴 현상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청년회장이 “오늘 은혜가 많이 내렸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당시에는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안개 같은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은혜였다는 사실은 훗날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박 장로님께서는 안내 봉사를 맡은 학생들에게 안수를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안내를 하지는 않았지만, 염치 불고하고 안수를 받기 위해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안수를 받기 전부터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감동이 밀려왔고, 죄를 뉘우치는 회개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습니다. 그 순간 박 장로님이 보통 분이 아니시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안수를 해주시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라고 격려하셨고, 그 틈에서 제 차례가 되어 저도 안수를 받았습니다. 안수를 마치신 뒤에는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기셨는데, 그곳에는 큰 항아리 여러 개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그 광경이 신기해 어떻게 하시는지 처음부터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성신께서 함께하시고 성신의 불담으로 지켜 주신다는 말씀을 하시며 물을 향해 축복하셨습니다. 축복이 끝나자 사람들이 줄을 서서 생명물을 받기 시작했고, 저도 미리 준비해 간 호리병에 생명물을 받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이후 제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박 장로님께서 전주에 오시는 날이면 어김없이 전주전도관을 찾았고, 평소에는 집에서 약 10리 떨어진 오수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밤길을 걸어 제단으로 가는 길에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다 보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진한 향취 은혜를 자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1958년 초에는 신앙인들이 모여 사는 신앙촌을 건설한다는 소식을 듣고 2차 건설대에 지원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신앙촌에서 약 20리 떨어진 곳에서 벽돌 생산에 필요한 백토 캐는 작업을 맡았는데, 힘들다는 생각보다 신앙촌 건설에 힘을 보탠다는 기쁨이 더 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건설 현장을 자주 찾아오셔서 여러 차례 안찰도 해주셨습니다. 한번은 기와공장에서 작업하던 중 안찰을 해주시러 오셨는데, 저희가 서둘러 움직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그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다는 죄송함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하루는 안찰을 받으러 갔는데, 이미 많은 사람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준비하고 움직였는데, 하나님께서 제게 “게으르면 내 가지가 아니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제 마음에 깊이 남아 신앙생활은 물론 일상에서도 늘 부지런해야 한다는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또 배를 안찰해 주실 때는 하나님의 손이 닿는 순간 몸속에서 무언가가 위로 불쑥 솟아올랐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스르르 가라앉으면 안찰을 마치셨는데, 신기하게도 아픔은 전혀 없었고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께서 죄를 씻어주신다는 말씀의 뜻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고, 이후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더욱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15m 거리에서 축복하시자 하나님 손끝에서 나온 물줄기가 물통 속으로 들어가 또 한 번은 식당에서 일하던 때였습니다. 오후에 공장을 둘러보시며 축복해 주실 때, 저도 생명물 축복을 받으려고 큰 통에 물을 받아 하나님 쪽으로 가져가던 중이었습니다. 하나님과는 15m가량 떨어져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축복해 주시는 순간 손끝에서 뻗어 나온 굵은 물줄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제가 들고 있던 물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저는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크신지 더욱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신앙촌에서 생활하다가 입대하여 군 복무를 마치고, 1963년 제대 후 개척 전도사 발령을 받아 전주 마령제단에서 시무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나오던 아주머니가 아픈 딸을 데리고 제단을 찾아왔습니다. 예배를 마친 뒤 아이의 몸에 생명물을 발라 주었더니, 아파서 울며 보채던 아이가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아이가 평온하게 잠든 모습을 보고 아주머니도 안심하며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틀 뒤 아이가 깨끗이 나았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무렵 저는 전도된 청년들과 함께 제단 건축에 한창 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종각을 쌓는 작업을 하다가 그만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몸을 부딪히며 떨어졌는데 복부 쪽이 심하게 아팠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맹장에 문제가 있다고 했지만 별다른 치료 없이 나왔고, 5~6일이 지난 뒤 안찰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시는 덕소신앙촌으로 향했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하나님 집무실까지 올라가니 하나님께서 문 앞에 나와 계셨습니다. 안찰을 받으러 들어서자 하나님께서는 저를 보시며 웃으시더니 “급성이면 이미 갔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고는 안찰을 해주시며 이제 괜찮다고 다독여 주셨습니다. 아파서 절룩거리며 들어갔던 저는 안찰을 받고 언제 아팠냐는 듯 걸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 장례 때 생명물로 굳은 턱이 풀리고 팔다리가 부드럽게 펴져 1965년 오수전도관에 다니시던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덕소신앙촌 축복일 예배에 참석한 뒤 마령제단으로 돌아가던 길에 집에 들렀는데, 어머니께서 위독하신 상태였고 결국 그날 밤 숨을 거두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의 몸은 이미 차갑게 굳어 있었고 턱이 단단히 물려 있었습니다. 저는 축복일에 받아온 생명물을 수저에 떠서 입에 넣어드리려 했으나 대부분 얼굴로 흘러내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흘러내린 생명물로 얼굴을 닦아드리자, 놀랍게도 굳게 다물렸던 턱이 풀리며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졌습니다. 그제야 저는 생명물을 넉넉히 떠 넣어드리고 얼굴과 손마디, 발끝까지 온몸을 정성껏 닦아드릴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굳어 있던 팔다리가 부드럽게 펴졌고, 어머니의 얼굴은 생전보다 더 환하게 피어났습니다. 얼마 후 찾아온 동료 교역자들도 어머니의 모습이 곱게 잘 피었다고 했습니다. 평소 전도관에 냉소적이던 아버지조차 아름답다고 인정하셨고, 문상을 온 동네 사람들도 신기해하며 놀라워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저는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처음 전도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친구가 말해 주었던 장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돌아가신 분의 모습이 아름답게 핀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을 찾아갔던 제가, 이제는 어머니의 장례를 통해 그 권능을 직접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형편상 교역을 계속할 수는 없었지만, 오수전도관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세월이 흘러 2009년 전주제단이 새롭게 건축될 때에는 주변 환경을 정비하는 일에 힘을 보탰으며, 경주 천부교추모공원 조성 현장에서도 5개월간 기쁜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 기장신앙촌 축복일에 하나님께 축복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은혜 부어줄까?”라고 물으시며, “죄짓지 말고 그 세계에 같이 가자”라고 다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은 세월이 흘러도 제 마음에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육신을 입고 오셔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그 사랑을 생각하면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에 지금도 가슴이 아려옵니다. 앞으로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생명물의 권능을 체험하며 진정한 구원의 길을 찾아”

<신앙체험기 523회> 전농교회 인부옥 권사

저는 부모님 두 분 모두 감리교 교인인 가정에서 태어나, 1964년 결혼 전까지 왕십리 감리교회를 다녔습니다. 모태신앙으로 교회에 다니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었던 제가 전도관 교인이셨던 시어머니를 만나게 된 것은 신앙의 토대가 바뀌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결혼 후 한 달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몸이 쇠약해져 나중에는 […]

“하나님을 뵙고 은혜를 체험한 것은 인생 최고의 복”

<신앙체험기 522회> 기장교회 김보성 권사

1936년생인 제가 하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세 되던 1955년이었습니다. 전쟁 직후라 공장조차 드물던 시절, 영등포 경성방직에서 기술을 배우던 중 같이 일하던 친구가 다급히 저를 불렀습니다. 지금 서울 남산공원에서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부흥집회를 하시는데,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 지금 가지 않으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결교회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

“은혜로 함께해 주신 하나님의 손길”

<신앙체험기 521회> 성남교회 장원애 권사 2편

(지난호에 이어) 저는 새벽 제단을 쌓기 위해 제단 근처에 사시는 문삼섭 권사님 댁에 머물며 살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권사님의 어린 딸을 등에 업고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예배에 나갔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구역장 직분을 맡아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소사신앙촌 1차 건설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제가 지원하겠다고 나서자, 문 권사님께서는 젊은 아가씨가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만류하셨습니다. […]

“향취에 몸이 시원해지고 공중에 떠 있는 듯해”

<신앙체험기 521회> 성남교회 장원애 권사 1편

꿈에서 뵌 분을 광주공원 집회에서 만나 안수 받는 순간 몸이 가벼워지는 은혜를 체험해 지산 전도관에서 집회 30분 전 향취 맡고 앉아 있는지 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워 은혜 체험 거듭되며 마음속에 분명한 확신 자리 잡아 저는 1937년 전남 순천시 주암면 광천리에서 3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제 어린 시절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이 맞물린 격변의 시대라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혹시 모를 위급 […]

“기쁨으로 끝까지 구원의 길 가길 소망해”

<신앙체험기 520회> 기장신앙촌 이영선 권사

저는 1952년 부산 동대신동에서 2남 6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메리야스와 여성복, 군복 등을 만드는 의류 공장 세 곳을 운영하며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 직접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어머니(故 김용달 권사)로부터 여러 차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제가 3~4살 무렵, 어머니는 물도 제대로 삼키지 못할 만큼 […]

“눈물로 기도드릴 때 맡아지던 향취 은혜, 지금도 잊을 수 없어”

<신앙체험기 519회> 충주교회 김순득 권사

저는 강원도 원주시 귀례면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이사하시면서 세 살 무렵부터 충청북도 충주에서 자랐습니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스무 살이 되자마자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1967년 스물세 살에 첫아이가 태어났는데, 아이가 백일이 되기도 전에 남편이 군대에 갔습니다.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홀로 남겨진 저는 먹고 살기 위해 아이를 업고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해야했습니다. 시장에서 사과도 […]

은혜 안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일할 때 가장 큰 기쁨 느껴

<신앙체험기 518회> 서대구교회 구수웅 권사편

저는 1942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다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우(牛)시장에서 일하시고, 어머니는 마을 장터에서 나물을 팔며 살림을 꾸려가셨습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52년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이듬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시면서 저희 남매는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졌습니다. 살길이 막막해진 저와 형제들은 학업을 포기하고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

“은혜를 깨닫고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려”

<신앙체험기 517회> 영주교회 엄선희 권사 2편

(지난호에 이어) 당시 저는 전도관에 있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해서 예배시간이 되기도 전에 예배실에 가 있었습니다. 예배실에 가면 저처럼 먼저 온 사람들끼리 모여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에는 예배실 안에 이슬비 또는 소낙비처럼 이슬성신이 내렸습니다. 분명 비처럼 보이는데 바닥은 물론 옷도 전혀 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슬성신이 내리고 얼마 뒤에는 어김없이 하나님께서 […]

이슬 같은 은혜를 받으니 그 은혜를 계속 간구하게 돼

<신앙체험기 517회> 영주교회 엄선희 권사 1편

예배실에서 기도드리던 중 백합꽃 향기 같으면서도 산뜻하고 시원한 향 맡아져 향취 은혜임을 깨닫게 돼 노구산 집회에서는 사람들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할 정도로 이슬 같은 은혜가 집회장에 자욱이 퍼져 반사 활동 당시 예배실에 들어갔는데 박하사탕처럼 시원한 것이 목으로 넘어가고 가슴 속이 시원해지며 처음 맛 보는 기쁨이 솟아나 저는 1941년생으로 경기도 오산에서 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살던 집 바로 옆에는 앞마당이 유난히 넓은 […]

큰 위기가 올 때마다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뉴욕교회 안음전 승사

제가 처음 하나님을 따라 나오게 된 동기는 잊을 수 없는 감사한 기억 때문입니다. 1950년 당시 저희 가족은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서 살고 있었고 남편은 트럭 2대에 직원 4명을 두고 자그마한 운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6․25 전쟁이 발발했고 저희 가족은 일가친척이 있는 양평에 얼마 동안 피신해 있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살아보려던 중에, 또다시 인민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