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받으니 어렸을 적 죄된 행실까지 선명히 떠올라

박부희 권사(1) / 덕소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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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저는 1929년 황해도 연백군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5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감리교인이셨던 조부모님을 비롯해 일가친척들이 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친척 중에는 목사나 장로인 분들이 많았으며, 큰아버님(송암 박두성 선생)은 평생 동안 맹인들을 위해 헌신하시고 한글 점자를 창안하셔서 성경을 점역하기도 하셨습니다. 저희 집은 온 가족이 음악을 좋아해 저도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서 교회의 피아노 반주를 하곤 했습니다.

그 후 1950년에 6·25 전쟁이 일어나 갑작스런 폭격으로 어머니를 여의고, 저희 가족들은 난리 중에 가산을 챙기지 못한 채 거의 빈손으로 피난을 내려왔습니다. 목포에서 직장을 구한 저는 유달 유치원에 취직해 유치원 교사로 경험을 쌓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부산 동래에 있는 온천교회 부설 유치원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955년 5월 어느 날, 유치원에서 저를 보조해 주는 여 선생님이 ‘박태선 장로님 부흥집회’에 참석하느라고 이틀씩이나 유치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선생님을 만나서 다음 날부터 출근하게 하려고 집회가 열리는 부산 공설운동장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집회장에는 천막이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었으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던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인파였습니다. 저는 빼곡히 앉아 있는 인파의 맨 가장자리에서 천막 안을 둘러보면서 ‘세상에!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떻게 선생을 찾겠나.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박태선 장로님이 등단하시기 전에 목청껏 찬송을 부르고 있었는데, 손뼉을 치면서 찬송하는 것을 처음 봤던 저는 그 모습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있는 힘껏 손뼉을 치고 어떤 사람은 몸까지 들썩들썩하며 신나게 찬송을 부르는 것이 정말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엄숙하고 조용한 교회 분위기에만 젖어 있었기에 ‘무슨 찬송을 저렇게들 부르는 거지? 여기는 무식한 사람만 왔나 보다.’ 하며 냉소적인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웬일인지 무엇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미용실에서 ‘숯 파마’를 할 때 맡았던 머리카락 타는 냄새 같았습니다. 그때는 파마를 할 때 숯불로 파마 집게를 데워서 머리를 감아 주었는데, 숯 가루가 떨어지거나 열이 너무 강하면 머리카락이 타면서 냄새가 진동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집회장에서 그런 냄새가 맡아지니 어찌 된 일인지 의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한참 집회장을 구경하던 저는 아주 우연히 보조 선생이 있는 자리를 찾게 되어서 그 옆 자리에 간신히 틈을 내어 앉았습니다.

곧이어 등단하신 박태선 장로님의 인도로 우렁차게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속에서 저도 마지못해 사람들이 하는 대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저는 얼른 기회를 봐서 선생에게 이야기하고 유치원으로 돌아갈 생각밖에 없었는데, 찬송을 부르던 어느 순간에 제가 어렸을 때의 일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큰오빠가 잠시 가게를 보라고 하여 저희 집에서 운영하는 큰 가게를 봤던 적이 있었습니다. 가게의 진열장을 찬찬히 살펴보니 맨 위에는 제일 맛있는 고급 생과자가 진열되어 있었고, 갖가지 색깔이 섞인 예쁜 비누가 놓여 있는 것이 제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키가 작았던 저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마음에 드는 과자를 실컷 꺼내 먹은 후, 예쁜 비누를 제 방에 갖다 놓고는 이리저리 만지며 좋아했습니다. 그때의 제 모습이 마치 영화필름을 돌리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이는데, 그 행동이 죄가 된다는 생각이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아무리 저희 집이 운영하는 가게라 할지라도 허락 없이 몰래 과자를 꺼내 먹고 물건을 가져온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때는 죄인 줄 몰랐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모습이 연달아 떠오르는데 이전에 죄라고 여기지도 않았던 일들이 양심에 거리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지 안타까운 눈물이 한없이 쏟아져서 저는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모태 적부터 이십 년 넘게 교회에 다녔지만 그렇게 가슴이 아프도록 회개하며 뉘우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부산 공설운동장 집회에 사람을 찾으러 갔다가 얼결에 찬송을 따라하면서
미처 죄라고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선명히 떠오르는데 양심에 걸려
어떻게 하면 그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을까 안타까운 눈물을 쏟으며 깊이 회개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난 뒤부터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힘차게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집회장에 운집한 수만 명의 군중은 박 장로님의 인도에 따라 박자를 딱 맞춰 손뼉을 치면서 목이 터져라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렇게 찬송을 부르던 어느 순간 아주 시원한 것이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내려오면서 온몸이 말할 수 없이 상쾌하고 시원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에서 솟구치는 한없는 기쁨을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고, 어느새 저도 몸까지 들썩들썩하면서 아주 신나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후 집회가 끝날 때까지 일주일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철야를 했는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지만 전혀 배고픈 줄을 몰랐습니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과 함께 각자 받은 은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는 제가 집회장에 왔을 때 맡았던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바로 ‘죄 타는 냄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와 보조 선생은 예배 시간마다 어찌나 목청껏 찬송을 불렀던지 나중에는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아서 종이에다 글을 써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집회가 끝나는 마지막 날, 박 장로님께서는 다니던 교회에 돌아가서 열심히 봉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무런 연락도 없이 일주일이나 결근을 했으니 유치원에서 완전히 쫓겨나겠구나.’ 하며 앞으로 일할 곳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유치원에서 아무런 질책이나 말이 없어서 그대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보조 선생과 저는 “다니던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세요.” 하셨던 박 장로님 말씀대로 교회의 주일학교 일에 열심을 다하며 아이들을 더욱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저는 서울에서 큰오빠네 식구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제가 큰올케에게 하나님 집회에서 은혜를 받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큰올케는 무척 신기해하면서 “아가씨, 정말 은혜를 받았나 봐요. 얼굴이 얼마나 환하고 예뻐졌는지 몰라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서울에 올라온 뒤로 하나님께서 원효로 3가에 ‘전도관’을 세우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서 그곳으로 예배를 드리러 다녔습니다.

제단에 계속 다니면서 저는 성경 구절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 말씀이 무척이나 새롭고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야고보서에 기록된 ‘자유율법’을 풀어 주시며 ‘자유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는 하나님 말씀이 가슴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큰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던 큰어머니는 큰아버지를 도와 맹인들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었는데, 언젠가 하나님 집회에 참석하여 안찰을 받으신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찰을 하시며 손을 대시자마자 큰어머니는 참기 어려운 극심한 통증을 느끼셨고, 집에 돌아오셔서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안찰받을 때 그렇게 아팠을까? 그동안 좋은 일만 하면서 살았는데…….”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유율법을 모르셨던 큰어머니는 일생 동안 나쁜 일 하지 않고 선하게 살았으니 죄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도 교회에 다닐 때는 행동으로 나쁜 죄만 짓지 않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마음으로도 죄를 짓지 말라 하시는 자유율법은 참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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