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과 악신의 역사를 분명하게 구분지어 주신 하나님”
1940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에서 태어난 저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전도관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영해면에는 전도관이 없었는데 가까운 영덕전도관 사람들이 찾아와 전도 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중에는 서울에서 전도관을 다니던 영해면 출신 김차정 언니(現소사교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영덕 전도사님과 반사들, 그리고 차정언니는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앞으로 교회에 다니며 예배를 드리자 했고, 그 자리에 있던 저와 친구들은 흥미가 생겨 전도관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예배드릴 공간이 없어서 학교 건물의 창고를 빌려 예배를 드렸는데, 왠지 모르게 예배시간이 너무나 즐거워서 저와 친구들은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와 같은 찬송을 소리 높여 불렀습니다. 조용하던 빈 창고에서 주말마다 찬송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전도관을 못마땅해하던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하기도 했지만, 찬송 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고 나중에는 부지를 마련해 영해전도관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사이 저는 서울 이만제단 개관집회(1957.4.25.~5.1.)에도 참석했습니다. 그동안 전도사님을 통해 감람나무 박태선 장로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번에 박 장로님께서 서울 이만제단 개관집회를 여신다고 하니 저와 친구들은 호기심이 생겨 전도사님을 따라 서울 가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서울 용산구 청암동에 지어진 이만제단은 3층으로 된 건물이었는데 모든 층이 사람들로 빼곡해 보였습니다. 저희는 1층에 앉았고 잠시 후 박 장로님께서 단에 오르셨습니다. 그날 처음 뵌 박 장로님은 얼굴이 환하고 키가 훤칠하셔서 수천 명의 사람들 속에서도 바로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귀한 모습이셨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어 한참 찬송을 부르는데 어디선가 좋은 향기가 진하게 맡아졌습니다. 처음 맡아보는 향기에 ‘어디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지? 도대체 무슨 냄샐까?’ 궁금해하고 있는데 조금 지나자 개털을 태우는 것처럼 지독한 누린내가 났습니다.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또다시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박 장로님이 계신 단상 아래에 뽀얀 안개가 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눈이 침침해서 그런가 하고 눈을 비벼봤지만 단상 아래 앉은 사람들의 머리가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안개가 짙게 내렸습니다. 그때는 향취, 죄 타는 냄새, 이슬 같은 은혜를 알지 못할 때여서 제가 겪은 일들이 은혜 체험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개관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박 장로님은 일일이 안수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병자들은 일어나라”고 외치시자 집회장 이곳저곳에서 벙어리였던 사람, 앉은뱅이였던 사람 등 수많은 사람이 일어나 자신의 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기뻐하며 증거했습니다. 믿기 어려운 광경을 목격한 저는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 하고 크게 놀랐습니다.
이만제단 개관집회 때는 서울운동장에서 제2회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 (1957.4.25.~27.)도 같이 열렸습니다. 그때 농구 경기도 있었는데 박 장로님께서 직접 참가하셔서 모두의 관심이 쏠렸던 경기였습니다. 한창 재미있게 경기를 관람하는데 함께 온 언니, 오빠들이 밖에 좀 보라고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농구 경기가 진행 중인 운동장에는 비가 오지 않는데, 운동장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운동장에 도착한 사람들도 밖은 비가 오는데 운동장에만 안 온다면서 무척 신기해했습니다.
이만제단에 다녀온 저는 박 장로님께서 보통 분이 아니심을 깨닫고 더욱 열심히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으며, 가까운 지역에서 열리는 박 장로님 집회에는 꼭 참석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안동전도관 집회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안동전도관은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전도관 식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교회로 이어지는 길목에 줄지어 서서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하나님의 검은색 세단이 도착하자 사람들은 깃발을 흔들며 환호했고, 세단이 지나가자마자 예배실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너도나도 예배실로 달려갔습니다. 하나님 인도하시는 예배가 시작된 후 저는 이만제단에서 맡았던 향취를 안동전도관에서도 다시 맡을 수 있었습니다. 향취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좋은 향이어서 아무리 비싼 향수가 있다 한들 그만큼 진귀한 향은 없을 것이라 지금도 생각합니다. 가끔씩 길에서도 향취가 맡아질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허락해 주시는 은혜에 감사드리며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드렸습니다.
영주집회에 갔을 때는 기독교인들이 이야기하던 방언의 실체를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영주집회 당시 한참 예배를 인도하시던 하나님께서 갑자기 찬송을 멈추시더니 “거기 새카만 거 나가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다들 영문을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새카만 거 나가라”고 단상을 치시며 크게 꾸짖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남색 스웨터를 입은 60대 여성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이마에 시커먼 혹이 뿔처럼 튀어나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혹은 피멍이 든 것처럼 검붉은색이었고, 크기가 주먹만해서 얼핏 보기에도 무척 흉했습니다. 여자는 당황스러웠는지 고개를 숙이고 머뭇거리다가 사람들 손에 이끌려 이내 예배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알고 보니 그 여자는 기성교회에 다니며 방언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전부터 방언은 악신을 받은 것이라 매우 좋지 않은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방언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저는 그날 처음으로 방언의 실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듣기로는 방언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안찰을 받으면 시커먼 혹이 툭툭 튀어나오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그저 놀랍기만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성신과 악신의 역사를 분명하게 구별해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후 결혼하여 경북 울진군 후포면에 살게 된 저는 포항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포항교회의 권사님 한 분이 돌아가셔서 입관예배에 참석했는데, 고인의 입에 생명물을 넣어드리니 너무나 잘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목으로 물 한 모금 안 넘어가는 것이 상식인데 생명물은 넣어드리는 족족 들어가니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또한 생명물을 묻힌 수건으로 고인을 깨끗이 닦아드리자 굳어있던 몸이 부드럽게 움직이고 온몸이 환하게 피어났습니다. 특히 고인의 가슴 부근부터 피부에 혈색이 돌면서 피어나는가 싶었는데 찬송을 다 부르고 나니 어느새 얼굴까지 환하게 피어있었습니다.
1980년대 초에는 기장신앙촌에서 하나님께 안찰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배에 손을 살짝 대시기만 했는데도 배 속의 장기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당기고 저릿저릿하면서 무척 아팠습니다. 그러다가 아픔이 사라지고 배가 시원해질 때쯤 하나님께서 온화하신 목소리로 “죄지으면 안 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에게 말씀하시듯 죄짓지 말라고 안타깝게 당부하시던 목소리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2008년 영덕제단이 신축되면서 저는 영덕 천부교회로 소속을 옮겨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향취를 맡은 적이 있는데, 2014년 2월 축복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축복일을 맞아 신앙촌에 온 저는 감람나무 가지들에게 한없는 은혜를 부어주셨던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을 떠올리며 길을 걷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강한 향취가 코를 확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변함없이 함께해 주시는 은혜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깨달아 많이 행복했습니다. 임원으로서 만찬회에 불러주셨을 때 들려주신 귀한 말씀은 제 삶의 원동력이 되었고, 매 주일 예배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면 ‘부족한 내가 어떻게 이 귀한 은혜를 알게 되어 이런 행복을 누리나’ 늘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이제 다시 하나님 말씀을 따라 맑고 성결한 자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자유율법을 지켜 죄에서 벗어나라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며 매 순간 저의 마음과 행동을 돌아보며 살아가겠습니다. 구원의 길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