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은혜가 분명한데 어떻게 다른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강문형권사(3) / 인천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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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강문형 권사 / 인천교회

그해 10월에는 서울운동장(現 동대문 운동장)에서 제3회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전국의 교인들이 지역별로 팀을 나누어서 축구, 농구, 배구, 100m 달리기, 릴레이, 마라톤 등의 경기를 벌이는 동안 교인들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운동장에 들어와서 관람을 했습니다. 그때 순서 중에 ‘가장행렬’도 있었는데 가장행렬의 한쪽에는 이만제단 모형을 앞세우고 학생부터 어른까지 힘차게 찬송가를 부르면서 행진하였고, 다른 한쪽은 기성교회의 모형과 장님 목사를 따라서 더듬더듬 걸어가는 행렬이었습니다. 저는 이만제단의 아줌마 교인으로 분장해서 가장행렬에 참가했었는데, 행렬을 마친 뒤 하나님께서 주시는 빵과 과자를 사람들과 함께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만제단에서는 성가대가 파트별로 조직되어서 유년 성가대와 학생 성가대, 장년 성가대가 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유년 성가대는 서울중앙방송국(HLKA, 현재 KBS의 전신)에 출연해서 그 노래가 방송되기도 했는데, 참 예쁜 목소리로 노래를 잘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소속되었던 학생 성가대는 제단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특별 순서로 찬송을 부르곤 했습니다. 그때 200여 명의 학생 성가대원들이 함께 모여서 찍은 사진을 꺼내 볼 때면, 흑백사진 속에서 새하얀 교복 차림으로 웃고 있는 모습들이 그때의 즐거웠던 시간을 떠오르게 합니다.

당시 저희 할아버지는 전북 고창에서 장로교회의 장로로 재직하고 계셨는데, 어머니와 저희 형제들이 전도관에 나가는 것을 아시고는 집안이 발칵 뒤집어질 정도로 굉장히 노하셨습니다. 할머니도 농사일을 제쳐 둔 채 저희 집에 올라오셔서 어머니를 설득하셨지만, 어머니는 “제가 받은 은혜가 분명한데 어떻게 다른 길을 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시며 뜻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역시 전도관을 반대하셨던 아버지는 제가 다니는 숙명여고의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께 이야기를 하셔서 저는 점심시간마다 그분들에게 불려 가곤 했습니다. “문형아, 네가 웬일이니. 아버지 체면도 생각해야지. 다시는 그런 데 다니지 말아라.” 하시면서 전도관에 대해 떠도는 갖가지 나쁜 소문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들이 몰라서 저러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그런 이야기들이 절대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는 “저는 전도관에 계속 나가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매일같이 선생님들의 야단과 꾸지람이 계속되었지만 그래도 수업을 마치면 제 발걸음은 어김없이 이만제단으로 향했습니다. 그 후 저는 숙명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결혼 후에는 서울 성수동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1969년에는 시온합창단이 조직되면서 저도 합창단에 입단을 했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학생 때부터 사람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고 합창을 하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제2회 정기 연주회 때는 1500명의 대합창단이 김동진 교수님의 지휘로 연주를 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연습을 하면서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나의 진심으로 하나님께 찬송드리자.’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런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 제 목소리가 너무나 곱고 예쁘게 아주 높은 고음까지 매끄럽게 올라가서 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성껏 마음을 모아서 찬송할 때 그 노랫소리가 마치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처럼 느껴지며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맛을 안 뒤부터는 합창이 있을 때마다 더욱 열심히 참여하게 되었고, 1986년 세종문화회관에서 18회 정기 연주회를 할 때까지 계속 시온합창단으로 활동했습니다.

저는 1970년대 후반에 남편의 직장을 따라 인천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인천에는 산하에 지관 교회를 여러 개 거느리는 ‘중앙전도관’이 4군데 있었는데, 저는 2중앙 전도관인 주안제단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인회장으로 임명받은 후부터는 교인들의 장례가 날 때마다 입관예배에서 생명물로 시신을 씻는 일을 맡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천 도화제단에 다니시던 신 권사님이 오랫동안 병석에서 누워 지내시다가 숨을 거두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신 권사님의 따님이 저와 친구 사이여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저에게 먼저 기별을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장례 준비를 돕기 위해 이확실 권사님과 함께 그 집에 가서 고인을 모신 방에 들어갔는데, 고인은 오랫동안 누워 계시며 거동을 못하셨기에 어깨와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 심하게 부패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더 가기 전에 우선 시신을 씻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뻣뻣하게 굳어 있는 시신을 힘겹게 움직이며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노랗다 못해 푸르스름한 고름 덩어리가 욕창 속에 잔뜩 끼어서 닦아도 닦아도 고름이 줄줄 흘러내리는 비참한 모습이 너무도 보기에 안타까워서 저는 눈물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영모님, 이 영혼을 돌봐 주세요.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을까요. 성신으로 지켜 주시고 씻어 주셔서 하나님 품으로 가게 해 주세요.’ 부디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리며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이 계속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시신을 씻기는데 언제부터인지 제 몸이 가뿐가뿐하게 움직여지며 하나도 힘들지가 않았고, 온몸이 너무나 가볍게 느껴져서 마치 땅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구름 위에 붕 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옆에서 물을 떠다 주며 거들어 주시던 이확실 권사님은 제 얼굴이 달덩이처럼 뽀얗게 피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처음에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던 시신이 점점 노긋노긋하게 피면서 살아 계신 분을 씻기는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볍게 씻었습니다. 심하게 부패되어 닦아도 닦아도 고름이 줄줄 흘러내리던 욕창도 어느새 고름이 멈추어 꾸덕꾸덕하게 말라 있었습니다. 저는 이전에도 시신을 여러 번 씻겼지만 그렇게 얼굴이 뽀얗게 피고 입술이 살아 있는 핑크 색으로 물든 시신은 처음 보았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참혹한 시신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눈물이 쏟아졌었는데, 이제는 살아 계실 때보다도 훨씬 예뻐서 여든이 가까운 연세가 전혀 믿기지 않았습니다. 귀한 성신의 은혜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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