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세계 종교 탐구 <40>부활이라는 믿음에 대하여-②

세계 종교 탐구 <40>부활이라는 믿음에 대하여-②

▣ 부활을 역사적 사실이라 믿다 예수 부활의 진위에 대해선 많은 논란이 있어왔지만,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근거로 예수의 부활을 지지한다. 성경 속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주장, 죽은 예수가 제자들과 바울 앞에 나타났다는 주장. 예수 스스로 본인이 부활했다고 얘기하는 구절 등을 증거로 내세우며, 성경 안에는 부활에 대한 증언이 가득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서학자 바트 어만은 성경의 증언들이 역사적 가치를 가지기에는 부활 당시의 자료도 아니고, 공평무사하지도 않고, 일관적이지도 않다고 지적한다. 신약성경은 목격자들에 의해 쓰인 것이 아니라 예수 사후 35~65년이 지나서 쓰였고, 전해지는 과정에서 선전 목적으로 변경된 이야기를 포함한다. 이 때문에 복음서 사이의 진술들이 서로 다르기도 하고, 먼저 나온 복음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다음 복음서를 쓴 정황도 관찰된다. 부활은 성경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외경을 제치고 가장 신뢰할 만한 것으로 채택한 정경들 사이의 증언조차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예수의 처형 장면, 예수의 사망 일시, 예수 무덤에서 목격된 상황, 목격자, 목격자 수 등 주요 장면의 굵직한 묘사들이 복음서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또 어만이 지적한 것 중의 하나는 예수가 부활을 일으켰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또한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부활도 기꺼이 인정해야 하지만, 동시대 여러 기적을 일으키고 부활했다고 알려진 다른 종교 지도자와 신들의 사례는 성경에서 소개하지 않거나 악마 또는 예수를 방해하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공평하지 않고 편향적인 진술은 역사적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성경은 역사적 저술이라기보단 신학적 저술로 평가된다. 어만은 “역사 연구 규범은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든 증거를 보면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기를 요구한다”고 했다. 성경은 어떤 증거를 보여줄 수 있을까? 근대 들어 이성과 합리주의가 신을 부정하며 성경의 진위 여부가 도마에 오르자, 성경 내용을 역사적으로 실증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에 성경의 무대인 팔레스타인 땅에서 고고학적인 증거를 찾으려는 ‘성서고고학’이라는 학문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초반에는 성서 기록을 실증하겠다는 목적 아래 발굴품을 예단(豫斷)에 끼워 맞추는 작업이 횡행했고, 모든 발굴 성과를 성서 내용으로 수렴시키며 성서고고학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예단 없는 고고학 탐사를 목표로 한 2세대 고고학자들이 등장하고부터는 성서의 기록을 부정하는 증거들이 속출하기 시작했고, 2000년 7월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즈에는 ‘역사로서의 성서, 새로운 고고학적 시험에서 낙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자료1> 기사의 내용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고고학 발굴이 진행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공인됐던 성서 기록이 허구로 밝혀졌다는 고고학계 주장을 담은 것이었다. 성서의 역사성을 증명하려던 성서고고학이 오히려 성경의 역사성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성묘교회 또는 거룩한 무덤 성당이라 불리는 기독교 성당이 있는데, 예수가 묻힌 무덤이자 부활한 장소로 전해져, 4세기부터 기독교 성지 순례의 중요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 무덤이 실제 예수의 무덤이 맞는지는 공식적으로 진위 여부를 모른다고 하며, 이 성당이 있음에도 예루살렘 성벽 바깥에서 예수가 묻혔던 돌무덤이라 주장하는 곳이 또 발견됐는데, 그 증거는 성경의 묘사와 닮았다는 것이었다. 가톨릭에서는 성경 속 유적뿐만 아니라 유물들도 실존한다고 믿는데, 부활에 관련된 유물들로는 예수의 시체를 감쌌다는 수의, 예수의 피를 묻힌 천, 예수를 찔렀다는 창, 예수가 매달렸다던 십자가의 나뭇조각 등이 있다. 예수의 시체를 감쌌다는 천으로 유명한 토리노 수의는 1350년 갑자기 발견되었는데, 제작된 연대를 측정한 결과 예수가 죽었다는 30년이 아닌 1260∼139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정되었다. 예수의 피를 묻혔다는 천은 유리 원통에 담긴 채 12세기에 발견되었는데, 그 통도 예수가 죽었다는 1세기가 아니라 발견 주장 시기인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으며, 유물의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자료2> 또 성경의 진술대로라면 ‘한 명’의 병사가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찌른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예수를 찔렀다는 창은 튀르키예의 안디옥에서도 발견되었다고 보고되고, 바티칸 베드로 성당,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박물관, 아르메니아 바가르샤팟의 박물관 등에서도 서로 성경 속의 창이라며 전시하고 있다. 이 창들은 모두 다른 시기, 다른 장소에서 발견되었으며 형태도 다르다. 가톨릭에선 3개 모두 성창 유물로 인정하고 있지만, 어느 것도 진위 여부는 밝히지 않는다.<참고자료1>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의 나뭇조각이라 주장하는 것들은 너무 많아, 그것들을 다 모으면 배 한 척을 지을 수 있겠다는 조롱을 당하기도 한다. 이렇게 대부분 진위가 확인되지 않거나 가짜로 판명됐음에도 이 유물들을 직접 보기 위해 방문하는 가톨릭 순례자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토리노 수의의 진위 논란에 대해서는 종교의 수장인 현 교황 프란치스코까지 나서서 “진위 여부 보다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해명하는 등 기독교인들은 부활을 필사적으로 믿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라 노렌자얀에 따르면 숭배받지 못하는 신은 신화적, 허구적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이는 ‘왜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기에는 대대적 추종자들을 끌어모으면서 초자연적 존재로 숭배를 받다가 다른 장소 다른 시기에 가서는 단순히 신화나 허구적 이야기 속의 존재로 전락하는가?’ 하는 일명 ‘제우스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자료3> 이와 비슷하게 ‘산타클로스 문제’도 있다. 어린이에게 있어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는 산타클로스는 도덕적 심판을 하는, 자신을 어디서든 감시하는 막강한 신적 존재다. 하지만 이성이 발달한 성인이 돼서도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없다. 제우스처럼 신자들이 다른 종교로 개종 당해 신자를 잃었거나, 산타클로스처럼 이성적 판단으로서 거짓이 증명된 신들은 더 이상 숭배받지 못하고, 상상과 이야기 속의 인물로 전락하게 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종교들은 열렬한 추종자들이 독실하게 자신들의 신을 숭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회적 증거를 만들어, 자신들의 종교로 사람들이 개종하게 만든다. 그 증거란 특정한 신적 존재에 대한 진정한 헌신을 증명해주는 행동, 이를테면 고통스럽거나 비용이 많이 드는 의식, 행동에 대한 제약, 시간과 노력과 부의 희생 등을 말한다. 특정 신에 공개적 기도, 비용이 많이 드는 의식, 고통스러운 희생이 따르는 행위 등을 과시하는 행동을 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노출시키면 그 신에 대한 헌신이 쇠퇴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부활을 믿는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집단인 기독교에서는 해마다 부활절을 대대적으로 기념한다. 지난 3월 31일에도 세계 각국에선 기독교인들의 부활절 축제와 퍼레이드가 이어졌다.<자료4> 그런데 부활절은 성탄절과 함께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절기 중 하나지만, 둘을 대하는 다른 종교의 태도가 확연히 다르다. 성탄절에는 불교 사찰에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게시되는 등 다른 종교들의 축하 메시지가 발표되는 것과 달리 부활절에는 다른 종교에서 축하하는 경우가 없다. 신자가 아니고서는 부활까지 인정해 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인과 다른 종교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비현실적 사건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그 종교의 굳건한 신앙심의 증거일까? ▣ 믿음에 대하여 기독교는 믿음을 중시하는 종교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에서 예수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인 바울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장 1절)라고 얘기했다. 믿음이 실상이자 증거라는 가르침은 기독교적 믿음의 특징을 잘 요약하여 보여준다. 믿음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신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기독교는 인간과 신을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간주한다. 인간은 신의 지혜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인간 이성의 힘으로 다 인식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인식의 한계 너머의 것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게 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더 의심스러워 참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에서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이 나올 정도로 이성적 인식과 초이성적 믿음이 대립을 이루게 된다. 이성적 사유가 아니라면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기독교는 성경과 예수를 통한 ‘계시’를 주장한다. 성경을 인간의 이성적 사유의 결과가 아닌 신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우주의 기원과 인간의 타락, 예수의 출생과 기적 및 부활에 대해 인간 이성의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그것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여 조건 없이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기독교의 믿음은 ‘승인으로서의 믿음’으로도 분류되는데, 남의 말을 참말이라 혹은 정말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계몽주의와 더불어 과학사상이 발전하면서 진리를 사실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고, 성경에서 실제적인 사실이라 인정할 수 없는 것을 배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에 있는 것들을 사실이라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고, 결국 ‘믿음’이란 이처럼 성경에서 나오는 이야기 중 사실이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정말로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흔히 듣는 대로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은 사실 이런 종류의 믿음이다. 이런 종류의 믿음이란 모르기 때문에 믿는 것, 순리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믿는 것, 이른바 ‘지성의 희생이 없이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라도 인정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종류의 믿음을 ‘참된 믿음’이라고 하고, 이런 종류의 믿음이 없는 상태를 ‘의심’이나 ‘불신’으로 취급하고, 그것은 그대로 죄라고 여긴다.” 믿는다는 말은 알지 못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모르기 때문에 의심 가능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믿는다’고 말한다. 사람은 모르는 것을 마주했을 때, 의심하거나 믿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되는데, 여기서 믿음의 종류가 갈린다.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믿음은 증거를 생각하고 평가할 필요성을 회피하는 큰 변명이다.”라고 얘기한 바 있다. 이때 그가 비판한 것은 비이성적이며 맹목적인 믿음이다. 이에 반해 ‘이성적 믿음’이란 무비판적 맹신이 아니라 합리적 근거에 기반한 확신을 얘기한다. 인간이 스스로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알 수도 없기에, 믿음이 불가피하다면 사실과 증거에 기반한 이성적 믿음이 더욱 바람직한 믿음의 방향일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증거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은 모든 종교의 주된 악덕”이라며 “증거로부터의 독립은 옥상에서 외치는 자부심이자 기쁨”일 뿐이라고 얘기했다. 나아가 그는 “증거가 없는 것을 넘어 심지어 반대의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을 신앙이라 한다”며 비이성적인 믿음을 비판했다. 지난달 31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부활절을 맞아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세계 도처에 있는 ‘전쟁의 돌들’을 굴려 없애 버리자”고 전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활의 아침에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치우셨던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만이 생명으로 향하는 길을 막고 인간성을 전쟁과 불의 안에 가두는 돌을 굴려 없앨 권능을 갖고 계시다”며 교인들에게 예수가 부활했으며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듯 믿음을 과시했다. 그러나 전쟁을 막아달라는 기도는 작년부터 했었다. 작년 부활절,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모든 전쟁을 끝내주소서”라며 기도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도 기존 전쟁은 종식되지 않았고, 오히려 21세기 최악의 유혈 전쟁으로 불리는 새로운 전쟁이 추가적으로 발발하는 현실을 맞았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공개적 기도를 멈추지 않고 대대적인 기념의식을 지속하는 것은 예수를 제우스로 만들지 않기 위한 절박함인 것일까, 지성의 희생 없이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라도 인정하는 그들만의 참된 믿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일까? <참고자료2> 이번 기획 기사 속 말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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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 탐구 <39> 순교는 천국을 보장하는가-①

세계 종교 탐구 <39> 순교는 천국을 보장하는가-①

왼쪽 사진의 저 해골은 왜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보관함에 전시되어 있는 걸까? 저것은 17세기의 프랑스 선교사 장 드 브레뵈프(Jean de Brébeuf)의 해골이라고 한다.<자료1> 그는 캐나다 휴런 지역에서 원주민을 대상으로 선교하다 살해당한 인물인데,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를 순교자라 부르며 성인으로 추대하고 있다. 성당에서 해골을 마주친 어린 아이는 무섭다며 엄마에게 달려갈 정도로 일반인들에겐 죽은 사람의 섬뜩한 유해일 뿐이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성스러운 유물이다. 순교자와 그의 유물을 숭배하기까지 하는 것은 가톨릭만의 특징이나, 순교자를 영웅시하고 고귀하게 여기는 것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공통된다. 목숨을 바칠 정도로 자신의 종교를 추앙하는 신자들이 많아질수록 그 종교의 생존에 유리하다. 세계의 주요 종교들은 순교를 기쁘고 영광스러운 행위로 가르치고, 순교자들에게 종교의 궁극적 목표이자 최고의 가치인 구원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여러 종교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했는데, 종교의 주장대로 이들은 모두 천국에 갔을까?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다양한 순교 사례들을 살펴보며 그 판단의 토대를 쌓아 볼 것이다. ▣ 순교자에게 천국을 약속하다 먼저 종교들이 순교에 대해 어떻게 가르쳤는지 알아본다. 많은 종교에서 ‘순교를 하면 천국에 간다’, ‘순교는 영광되고 기쁜 일’이라고 가르쳤다.이는 기본적으로 경전에 명시되어 있다. 이슬람교의 경전 꾸란에서는 “하나님의 길에서 순교한 자가 죽었다고 생각지 말라. 그들은 하나님의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 곁에서 살아있노라.(꾸란 3장 169절)”, “하나님을 위해 성전(聖戰)에 참여하도록 하여 내세를 위해 현세의 생명을 바치도록 하라. 하나님은 그에게 커다란 보상을 주실 것이라.(꾸란 4장 74절)”,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기뻐하며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뒤에 올 순교자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곳에는 두려움도 슬픔도 없노라.(꾸란 3장 170절)” 등 순교를 권하는 구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는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순교를 중요시하는 종교다. 그들의 경전 성경에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마가복음 8장 35절)”,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요한계시록 14장 13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핍박받았느니라(마태복음 5장 12절)” 등의 내용이 여러 곳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유대인들이 믿어온 순교란 ‘키두쉬 하셈(םשה שודיק, Kiddush Hashem)’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란 의미다. 구약성경에는 ‘키두쉬 하셈’이란 단어가 나오진 않지만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라”, 또는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궁극적인 행위는 ‘율법을 어길 바에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형집행을 당할 때도 키두쉬 하셈을 외치며 죽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면 핍박도 즐거이 받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순교를 가르치는 데에는 경전의 지침 외에도, 순교한 자의 일화를 영웅담처럼 풀어내는 방법도 효과적이었다. 예를 들어 유대교에는 ‘아키바’라는 유명한 순교자가 있다.<자료2> 서기 135년, 로마인에게 공개적으로 고문당해 죽은 랍비 아키바는 “들어라, 오, 이스라엘이여, 여호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말을 하며 죽었다고 한다. 그는 토라 교육이 사형죄로 규정된 후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토라를 가르쳤고, 처형당하기 위해 끌려 나왔을 때도, 아침 쉐마(유대인들이 아침 저녁으로 암송하는 신앙고백 기도문)를 암송해 쇠빗으로 피부를 벗겨내는 고문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기독교에선 아예 순교자들의 영웅적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따로 출판하기도 했다. 1260년경 출판된 야코부스의『황금전설』은 유럽에 널리 퍼져있던 가톨릭 성인 전설을 한데 모은 책으로, 중세 당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베스트셀러였다. 발간되자마자 성직자들은 강론을 위해 읽었고 신자들은 신심 함양을 위해 이 책을 펼쳤다. 책의 내용은 대부분 어떤 인물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박해나 악마의 유혹, 잔인한 고문을 받다 순교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들의 죽음은 영웅스럽게 묘사되었고, 천국에 간다는 믿음에 오히려 순교를 기다리고 고통을 기뻐하는 모습들도 보여주었다. 이는 순교가 천국을 보장하는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심어주었다. 일례로 동정녀라는 아가타(Agatha, A.D 230년-251년)의 전설에서도 순교를 고대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칠리아 총독 퀸티아누스가 아가타를 탐했다. 아가타는 온갖 유혹과 협박에도 순교의 영광을 얻기를 갈망하며 매일 울면서 기도할 뿐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퀸티아누스는 그녀를 고문대에 대(大)자로 눕혀 놓고 고문하라 명령했다. 그러자 아가타는 “이러한 고통들은 나의 기쁨입니다. 마치 내가 좋은 소식을 듣고 있는 것 같으며, 내가 오랫동안 애타게 보고 싶어 하던 그 어떤 분을 보고 있으며, 위대한 보물들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화가 난 퀸티아누스는 사형 집행인에게 그녀의 젖가슴을 오랫동안 비틀어 짠 다음 절단하라 명령했고, 아가타는 가슴이 도려진 채 감옥에 갇혔다.” 이 전설 때문에 아가타는 보통 자신의 잘려 나간 가슴이 담겨진 접시를 받쳐 들고 있는 여성으로 묘사되며,<자료3> 강간 피해자, 유방암 환자, 수유하는 여인들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그녀의 유해라 주장하는 가슴, 손, 발, 대퇴골 및 기타 뼛조각들은<자료4> 위대한 순교자의 성유물로서 숭배받고 있다. ▣ 살인한 순교자도 천국에 가는가 순교를 권장하고, 천국을 보장해준다는 종교들의 가르침에 따라 실제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런데 본인만 일방적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경우도 많았다. 지난달 1월, 이슬람 무장단체 IS는 이란 케르만주 ‘순교자 묘역’에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했고, 이를 ‘이중 순교 작전’이라 명명했다. IS는 자살 폭탄의 의미를 ‘순교’라 성명하며 작전을 수행한 두 대원의 실명을 밝혔는데, 이는 그들을 ‘순교자’로 추앙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맨 처음 소개했던 가톨릭 선교사 장 드 브레뵈프를 비롯해 그의 동료 7명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원주민들에게 선교를 하다 살해당했다. 가톨릭에선 그들이 영웅적인 삶을 살다 순교하였고, 북아메리카 교회는 순교자들이 흘린 피로써 일어난 것이라며 추켜세웠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왜 이들을 죽였던 것일까? 1633년, 브레뵈프와 선교사들은 본격적으로 휴런 지역 선교에 나섰다. 그러나 유럽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던 휴런족에게 유럽인들과의 접촉은 치명적이었다. 1634년(이질과 결합된 천연두), 1636년(악성 인플루엔자), 1639년(천연두)의 전염병으로 인해 3만 명으로 추산됐던 인구가 1만 2천 명으로 줄어드는 재앙이 발생했다. 한 늙은 휴런족 여성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검은 로브(신부복을 입은 선교사를 지칭) 가 우리에게 주문을 걸고 우리를 죽게 만들고 있어요. 모두가 잘 지내던 마을에 들어왔어요. 도착하자마자 모두가 죽었어요. 그들은 다른 마을의 오두막집을 방문하러 갔고, 그들이 발을 디디지 않은 곳만 죽음과 질병을 피할 수 있었어요.” 반복되는 재앙으로 원주민들에게 선교사들의 존재는 불쾌해졌으며, 재앙을 몰고 온 악마라고 간주되었다. 휴런족은 전염병의 책임을 예수회에 물었고, 이에 가톨릭 신앙을 거부했던 것이다. 3만 명이던 원주민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갔지만, 덕분에 브레뵈프를 포함한 이 8명의 선교사들은 생전 그들이 원했던 순교를 하게 되었고,<자료5> 그들의 믿음대로라면 천국에도 가게 되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해 전사하는 것을 순교라 표현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교회는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에게 지난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받는 전대사(全大赦)를 주고, 전사자에겐 순교의 영광이 있을 것을 약속했고, 열성적인 신자들은 흔쾌히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게 되었다. 제1차 십자군 전쟁은 시작도 하기 전부터 피를 뿌렸다. 1096년 독일에서 출발한 십자군 무리는 라인강 계곡의 유대인 공동체를 초토화하고 수천 명을 죽였다. “보라, 여기에 메시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유대인이 있는데 우리는 이스마엘의 자손에게 복수하러 가고 있다. 먼저 유대인에게 복수하자.” 이것이 유럽에서 최초로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벌인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폭력은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교황의 면죄부를 받은 십자군은 무슬림과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유대인은 회당에 몰아넣고 검으로 죽였으며, 모스크로 피신한 무슬림 만 명도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사흘 동안 약 3만 명을 살육했다. 거리에 피가 냇물처럼 흘렀다. 프로방스의 연대기 기록자 아길레르의 레몽은 다음과 같이 학살 현장을 기록했다. “사람들은 무릎과 고삐까지 차는 핏물 속에서 말을 달렸다. 이 장소가 불신자들의 피로 가득 찬 것은 정의롭고 훌륭한 심판이었다.” 유대인 회당과 이슬람 사원엔 주검이 쌓였고, 죽은 자들이 너무 많아 시신을 처리할 수가 없었다. 다섯 달 뒤에도 예루살렘에서는 썩어가는 주검에서 나는 악취가 진동했다. 8차례의 십자군 전쟁은 약 17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세계 인구가 3억 명이었으며, 발달된 살상 도구도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얼마나 잔혹한 살육전이 일어났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성스러운 전쟁에 참가한 십자군은 사람을 죽여도 모든 죄를 용서받을 것이며, 죽더라도 천국에 갈 것이었다.<자료6> 십자군에 살해당한 무슬림과 유대인들도 십자군의 박해에도 개종을 거부하다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일텐데, 이들도 전사한 십자군과 함께 천국에서 만나게 되는 것일까? 또 순교로 죽임을 당한 자보다 죽인 자가 더 많더라도 그 순교자들은 천국에 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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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 탐구 <39> 순교는 천국을 보장하는가-②

세계 종교 탐구 <39> 순교는 천국을 보장하는가-②

▣ 비자발적 순교자도 천국에 가는가 순교라 하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라는 그 정의처럼 불가피하게 죽음을 불사하는 드물고 특수한 경우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순교라는 표현은 ‘전쟁과 전투, 우발적 살인, 집단 학살’ 등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다. 즉, 본인의 의지로 죽은 것이 아니더라도 종교를 이유로 희생된 경우 순교라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슬람 국가인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 보건부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사망자 수를 발표할 때, ‘순교자 수’라고 표현한다. 하마스는 “가자지구 순교자들이 흘린 피에 대한 복수”라며 이스라엘 군을 총격하기도 했다.<자료7> 이들에 따르면 현재까지 3만 1500명 이상이 순교했다.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가리켜 ‘순교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번 전쟁 이전부터 사용돼 왔으며, 이슬람 국가들의 기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반유대주의의 광풍에 휩쓸려 행하지 않은 일로 누명을 쓰거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순교라는 표현을 사용해왔다. 예를 들면 14세기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퍼져 유럽 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적이 있었다. 이때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 흑사병이 생겨난 것이란 악의적인 소문이 돌았고, 유대인들은 전 유럽적으로 혐오와 비난,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해되었는데, <자료8> 유대인들은 이를 순교라 표현했다. 반유대주의자들의 분노에 유대인들은 어차피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중세 기록자는 독일 노르트하우젠에서 일어난 유대인들의 집단 죽음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유대인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자신들이 순교를 준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기뻐하며 기독교인들이 파놓은 공동묘지 앞에 정렬했다. 하나님이 있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하나둘 무덤으로 뛰어들었고, 모두 들어가자 주민들은 무덤 안의 목조 뼈대에 불을 질렀다. 이들은 모두 함께 죽었다.” 그런데 종교들은 자신의 종교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야 할 것 같은데, 왜 오히려 순교라는 표현을 남발하는 것일까? 20세기에는 더 잔인한 학살인 홀로코스트가 유대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자료9> 유대인들은 이 또한 순교라 칭했다. 홀로코스트(Holocaust)는 본래 성경에 나오는 ‘번제(燔祭, 희생 제물을 불에 태워 바치는 제사)’의 영문명으로, 번제라는 단어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종교적 희생’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많은 유대인 사상가들은 홀로코스트가 야훼 하나님의 체면을 돌이킬 수 없이 손상시켜 놓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정의(正義)를 의심스럽게 만들었고 성서가 말하는 선택이 경멸스럽게 왜곡되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택하신 백성을 어떻게 이렇게 죽어가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고통스러워했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끊임없이 모색한 끝에 학살 속에는 분명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자신들의 집단적 죽음은 새로운 구속(救贖)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일종의 희생제라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겪은 참사를 단순한 희생으로 묘사하는 것보다는 인류의 구속을 위한 영웅적 순교로 해석하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에 홀로코스트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순교라는 표현은 억울하기만 할 수 있었던 죽음의 가치를 높여주었고, 이 순교를 다른 종교에서 가로채는 사건도 생긴다. 유대인 출신의 한 수녀가 홀로코스트의 순교자로서 가톨릭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건이다. 수녀 에디스 슈타인(Edith Stein)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지만 유대인 태생인 이유로 학살 대상에 포함되었고, 네덜란드로 도피를 시도하다 1942년에 체포돼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유대인들은 가톨릭교회가 그녀를 자신들의 성녀로 칭송하는 것을 속상해했다. 에디스 슈타인을 가톨릭의 복자(성인의 전 단계)로 추대하는 의식에 참석했던 그녀의 조카딸은 “에디스 슈타인이 개종했던 그리스도교는 우리(유대교)를 박해했던 자들의 종교였다.”며 거북함을 토로했다. 그 거북함은 ‘가톨릭인들이 홀로코스트에서 자신들도 유대인과 같은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슈타인을 상징물로 이용하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에서도 비롯되었다.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도 난데없는 에디스 슈타인의 가톨릭 순교자 추대는 논란거리였다. 그녀에게 순교의 의지가 있었다고 하기에는, 도망가려 했으나 실패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며, 그녀가 죽임을 당한 이유는 유대인이기 때문이었지 가톨릭 신앙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시복 시성 절차는 유례없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시성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의 순교는 유럽사의 극적인 상징이자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잇는 화해의 가교”라고 말했다. 현재 그녀는 십자가의 성녀로 불리고 있으며, 유럽의 수호성인 중 하나이다.<자료10> 이 상황에 대해『교황의 죄』의 저자 게리 윌스는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죄를 어느 정도 덜어내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수난을 기독교인의 수난으로 일부 가로챌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에디스 슈타인을 비롯해 위 소개된 이들이 과연 순교자라 할 수 있으며, 순교자라면 이들도 천국에 가는 것일까? ▣ 순교라 믿으면 천국에 가는가 순교는 믿음에 기반하여 존재하는 단어다. 순교는 자신이 속한 단체를 위해 죽는 이타심과 희생정신으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간다는 것에 궁극적 의미가 있다. 그런데 천국이란 개념은 믿음의 영역이다. 믿음이 없는 일반인에게 순교는 다른 의미를 가지며, 이에 따라 다른 단어로 대체될 수 있다. 황금전설을 읽은 한 철학박사는 혹독한 고문을 고통이 아닌 쾌락으로 여기고, 고통이 심할수록 더할 나위 없는 희열을 느끼는 순교자라는 자들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아가타의 젖가슴을 쇠젓가락으로 절단하는 자들이 사악하고 잔인한 압제자들일까? 아니면 그런 고통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지도록 어린 소녀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자들이 잔인하고 사악한 자들일까? 서로 먼저 고문당하고 참수되겠다고 앞을 다투는 모습이야말로 광기 중의 광기 아닌가? 고통을 쾌락이라고 한다면 순교야말로 포르노며 광기 아닌가?” 황금전설에서는 모범적 순교의 모습을 제시한 것이었지만, 비종교인의 입장에선 ‘종교에 정신을 지배당한 광신 행위’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순교가 입장 차이에 따라 상대적 가치를 가진다면 신자들의 믿음에 비신자들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실례인 것일까? 순교라는 단어가 믿음에 기반하여 존재하는 단어라면, 그 믿음이 진실한지 판단할 필요성이 있다. 믿음과 사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당신이 옳다고 믿는 것의 원인은 어린 시절부터 옳다고 지목된 것을 당신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다음에 그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데 있다.”라고 얘기했다. 즉, 믿음은 틀릴 수 있다. 믿음의 진실성을 가려내면, 그 믿음은 사실과 거짓으로 구분된다. 순교의 가치가 천국의 보장에 있다면, 천국에 보내줄 수 없는 종교는 순교를 주장할 자격이 없다. 그들의 권유는 ‘사기 행위’, ‘자살 및 살인 교사’, 살아 있는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과 다름없다. ‘범죄를 저지르는 집단들은 감히 천국을 논할 수 없다’는 명제는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이는 천국을 보내줄 수 없는 종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방증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다양한 사례들을 비롯해, 종교들이 행해온 역사적 자료들, 현재 종교들의 소식을 알려주는 뉴스 기사들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해 사실을 분석해 본다면, 전쟁을 일삼는 종교가 어디인지, 범죄를 저지르는 종교가 어디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보람이나 가치가 없는 죽음’을 ‘개죽음’이라고 한다. 최고의 가치를 얻기 위해 순교하는 것인데, 거짓에 속은 것이라면, 그들의 ‘믿음’은 숭고했겠으나, 개죽음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만들 뿐이다.

세계 종교 탐구 <38> 홀로코스트의 뿌리를 찾아서-②

세계 종교 탐구 <38> 홀로코스트의 뿌리를 찾아서-②

세계 종교 탐구 <38>

▣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다. 반유대주의적 유대인 학살 사건 중 가장 피해 규모가 큰 것은 독일제국에서 일어난 홀로코스트다. 홀로코스트는 체계적이고 치밀한 계획 아래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유대인들을 완전히 말살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인간의 광기와 잔인함의 극단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것은 분명히 히틀러와 나치독일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한 것은 기독교라고 본다. 기독교의 반유대주의가 대학살을 가능케 […]

세계 종교 탐구 <38> 홀로코스트의 뿌리를 찾아서-①

세계 종교 탐구 <38> 홀로코스트의 뿌리를 찾아서-①

세계 종교 탐구 <38>

“하마스를 지구상에서 쓸어버릴 것” “하마스는 사람이 아니다.” “하마스를 완전히 소탕시키겠다.” “하마스는 파괴돼야 한다.” 이는 언론에 표명한 이스라엘 지도부들의 입장이다. 작년 10월 7일 개전한 이래,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본거지가 있는 가자지구에 14만 번 이상 폭격을 가했고, 수많은 하마스 대원들을 사살했다. 문제는 폭격의 피해가 하마스 무장 대원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자지구 대부분이 완전히 파괴되며 인구의 85% 이상이 […]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교황이 히틀러에게 비밀 백채널을 제공하다 (*백채널: 비공식 루트)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교황이 히틀러에게 비밀 백채널을 제공하다 (*백채널: 비공식 루트)

1939년 8월, 폴란드 침공 계획을 마무리 짓고 있던 아돌프 히틀러는 교황 비오 12세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는데, 교황청 주재 독일 대사조차 이를 알지 못할 정도로 미묘했습니다. 이러한 회담의 존재는 비오 12세가 죽은 지 80년이 지나도록 바티칸이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했던 비밀이었습니다. 1981년에 완성된 12권의 제2차 세계대전 관련 교황청 문서에는 협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이들에 대한 지식은 […]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바티칸은 또 다른 홀로코스트를 지지하는가?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바티칸은 또 다른 홀로코스트를 지지하는가?

“바티칸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이는 10월 7일 하마스가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에 대한 바티칸의 입장을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 정권의 관계와 비교하는 12월 10일 자 논평의 제목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티칸이 유대인의 생명이 위협받는 것을 가만히 방관하던 것으로만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나쁘다고 경고합니다. 독일의 권위 있는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웹사이트에 게재된 […]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바티칸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Der Vatikan hat nichts gelernt)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바티칸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Der Vatikan hat nichts gelernt)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본 코너,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에서는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해외 종교 칼럼과 기사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1. 2023년 12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게재된 칼럼 ‘바티칸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를 독일어 원문과 함께 실었습니다. 2. 위 칼럼을 인용한 기사와 관련 자료들을 실었습니다. ※지면 관계상 이번 호『세계 종교 탐구』는 쉽니다. 독자분들의 […]

[우주로 한 걸음] 오타와大 연구팀  “우주의 나이, 138억 년보다 약 2배 많은 267억 년이다”

[우주로 한 걸음] 오타와大 연구팀 “우주의 나이, 138억 년보다 약 2배 많은 267억 년이다”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관측 데이터를 쏟아내기 시작하면서 비슷한 문제가 연이어 제기되고 있다. 초기 은하로 알려진 곳에서 거대 은하나 초거대 질량 블랙홀들이 발견되고 있는 점이다. 거대한 은하의 형성과 성장에는 방대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론상 초기 우주에는 작고 어린 은하만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이같은 발견은 ‘작은 은하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큰 은하로 진화해 간다’는 기존 우주론을 뒤엎는 결과로 […]

[우주로 한 걸음] 출처 불명 초고에너지 우주선(cosmic ray) 포착… 현대 물리학으론 설명 불가

[우주로 한 걸음] 출처 불명 초고에너지 우주선(cosmic ray) 포착… 현대 물리학으론 설명 불가

우주는 그 광대함만큼이나 끝없는 미스터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것은 새로운 진실을 찾아내는 과정입니다. 최근 우주과학계에는 정설로 받아들이던 이론에 어긋나는 미스터리한 결과들이 잇따라 발견되고 있습니다. 작년,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초기 우주로 알려진 곳에서 존재할 수 없는 거대 은하를 발견한 데 이어, 지난달에는 기존 이론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고에너지 우주방사선이 발견되었다는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우주로 한 걸음』에서는 […]

세계 종교 탐구 <37> 음란에 관한 종교의 가르침에 대하여-②

세계 종교 탐구 <37> 음란에 관한 종교의 가르침에 대하여-②

◆음란에 대해 종교가 가르친 것 지난 6월, 미국 유타주의 한 교육구에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서가에서 성경을 퇴출시켰다.<자료8> 음란하고 폭력적인 내용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민원을 제기한 학부모는 “성경에는 근친상간, 자위, 수간, 매춘, 강간 등이 기록되어 있다”며, 이는 “학교 도서관과 교실에서 음란물 콘텐츠가 포함된 모든 책을 금지한다”는 유타주의 법안에 반한다고 설명했다. 구약 성경은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공통 경전이다. […]

세계 종교 탐구 <37> 음란에 관한 종교의 가르침에 대하여-①

세계 종교 탐구 <37> 음란에 관한 종교의 가르침에 대하여-①

세계 종교 탐구 <37>

성욕이란 성적 행위에 대한 욕망으로, 종족 보존을 위한 동물의 본능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적으로 문란한 것은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비도덕적인 것으로 여긴다. 특히 종교에서는 세속보다 더 높은 수준의 금욕과 정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전 세계적으로 종교인들의 성범죄 소식은 끊이지 않고 있다. 서양에 비해 비교적 보수적인 우리나라만 해도 최근 10년간 종교인 흉악범죄의 90% 이상이 성범죄였으며, 성범죄로 검거된 […]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성학대 피해자들,  유엔과 바티칸에 조치 요구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성학대 피해자들, 유엔과 바티칸에 조치 요구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본 코너,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에서는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해외 종교 칼럼과 기사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1. 9월 18일 뉴스앤타임즈에 게재된 ‘바티칸의 사탄’은 원문과 번역본을 양면으로 실었습니다. 2. 10월 3일 스위스인포에 게재된 ‘성학대 피해자들, 유엔과 바티칸에 조치 요구’는 좌측에 번역본, 우측에는 기사 관련 정보를 실었습니다. ※지면 관계상 이번 호『세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