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세계 종교 탐구 <61>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한 죄, 말뿐인 사과로 충분한가②

세계 종교 탐구 <61>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한 죄, 말뿐인 사과로 충분한가②

▣ 외세의 힘을 빌려 천주교를 보호하다 제주 민란 사태를 보고받은 뮈텔은 서울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즉시 주한 프랑스 공사 플랑시에게 연락해 ‘제주에서 천주교인과 선교사들이 무고하게 공격받고 있다’며 보호를 요청했다. 플랑시는 이를 대한제국 정부에 전달했고 정부는 제주에 군병을 파견하기로 한다. 뮈텔은 급기야 한 신부가 살해됐다는 소문까지 전했고, 다급해진 프랑스 공사는 프랑스 해군 제독 포티에에게 군함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뮈텔과 긴밀히 교류하던 미국인 윌리엄 샌즈도 가담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샌즈는 당시 고종의 궁내부 고문을 맡아 황제의 정책과 대외 문제를 보좌하고 있었다. 그는 제주에서 상황을 확인하고 ‘반란군이 항복하려하지 않으니 그들을 굴복시키기위해 불가불 무력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며 고종에게 병력 증파를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 지원군이 본격적으로 도착하기도 전, 프랑스 군함 두 척이 제주 앞바다에 나타나면서 민란은 이미 진압 국면에 들어가 있었고, 이후 이재수 등 민군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민란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처럼 뮈텔의 요청에서 시작된 외교적 압박은 대한제국의 군병과 프랑스 군함이 동시에 제주로 향하는 군사 개입으로까지 확대됐다. 뮈텔의 대응은 외국의 군사력을 끌어들이는 무력적인 방법이었는데, 이는 제주민란으로부터 100년 전, 황사영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천주교의 태도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맞서 대항하는 선교 방식과 제국주의라는 막강한 배후를 갖고있었다는 배경에서, 그들의 선택은 구조적으로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평가된다.¹⁰⁾ 또한 뮈텔이 비판 받는 점은 정작 민란의 원인이 된 교폐는 외면한 채 천주교 신자들의 피해만 부각하며 보호를 요청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의 수장으로서 교폐를 청산할 의무와 권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봉세관의 수탈과 일부 천주교 신도들의 작폐를 시정해달라던 민란 주도자들의 요구에는 귀를 닫고, 무력 진압을 선택한 것이다. 민란 주도자들은 처음부터 무력 시위를 일으키지 않았다. 당시 제주에 유배돼 있던 대한제국기 관료 김윤식이 제주민란 현장을 기록한 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에 의하면 먼저 선제공격을 한 것은 천주교 측이었다. 당시 도민들은 봉세관의 수탈과 천주교도의 횡포 시정을 요구하며 민중 집회를 열었는데, 이를 민회(民會)라 불렀다. 5월 13일 일기에 의하면 한 신부가 모여있는 도민들을 찾아가 먼저 민회를 해산하면 교폐를 청산하겠다 제안하였으나, 도민들은 구체적 조건을 의논하고 관청의 도장까지 받아야 믿을 수 있다며 해산을 거부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4일부터 총격이 시작되었다. 김윤식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5월 14일, 천주교인들이 도민의 두목을 찾다가 총을 쏘니 도민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지므로 그 두목 6명을 잡아 신부에게 넘긴다.”, “5월 15일, 듣건대, 천주교인이 총을 쏘아 2명 또는 6명을 죽였다 하다. 또 대정군의 소식을 듣건대, 천주교인 수 백 명이 총을 쏘면서 성으로 들어가니 성 안이 텅비고 (…) 천주교인들이 군기고 문을 부수고, 총, 칼, 포, 화약을 차지하고 도민의 무리를 향하여 총을 쏘아 한 명을 죽이고 한 명은 배를 맞아 거의 죽게 하고 또 2~3명을 죽게 하다. 천주교인들이 칼을 차고 총을 메고 거리를 돌아다니니 그 기세가 당당하다.”¹⁰⁾ 이 사건은 민란 촉발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고, 1901년 10월 9일 재판에서 민란 지도자 이재수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천주교인들이 비록 다른 나라의 서적을 배웠다 하더라도 본래 우리나라의 신민이다. 그런데 한번 천주교에 들어가면 관청에서도 다스리지 못하고 백성들도 감히 거스르지 못했다. 남의 재물을 빼앗고 남의 소송에 간섭해도 아무도 감히 따지지 못했으며, 심지어 사람을 죽여도 제대로 죄를 묻지 못했다. 백성들이 세금의 폐단을 견디지 못해 함께 모여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 천주교인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데도 그들은 군기를 빼앗고 성을 점거해 총을 쏘았다. 이것이 역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가 죽인 자들은 바로 역적이지 양민이 아니다.” 이재수의 진술에 의하면, 천주교인은 종교를 등에 업고 같은 민족에 횡포를 부린 민족 반역자였고, 민란은 역적을 처단하는 일이었다.¹⁴⁾ <자료6> 뮈텔도 천주교 신자들이 저지르는 교폐 상황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뮈텔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재판 과정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횡포가 드러날 가능성’을 걱정했다.¹³⁾ 그리고는 그 폐단에 맞서 일어난 민란 주도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데만 주력했다. “나(뮈텔)는 그들이 엄한 벌을 받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플랑시 씨를 찾아갔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뮈텔은 플랑시, 샌즈, 크레마지(대한제국 정부가 고용한 프랑스인 법률고문)등 그와 가까운 인맥을 통해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제주민란 사건에서 드러난 뮈텔의 이러한 이중적이고 편향적인 대응은 교회가 주장하는 정의의 기준이 무엇에 따라 달라지는 지 투명하게 보여준다. ▣ 순교자 묘역, 정난주의 묘, 삼의사비 뮈텔은 주모자 처벌에 그치지 않고, 피살된 천주교도들에 대한 배상과 희생자 묘지용 토지 제공도 요구하였다. 이에 제주 황사평에는 천주교도들의 집단묘역이 마련되었는데, 오늘날 이곳은 ‘순교자’들이 묻힌 성지로 조성되었다. 제주시 외곽에 자리한 황사평 성지다. 입구를 지나 성지 안으로 들어가면 안내소와 묘역이 펼쳐지고, 중앙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황사평 순교자 묘역’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비석이 모습을 드러낸다.<자료7> 비석의 뒷면에는 이 비석을 세운 의미를 적어놓았는데, 비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이 곳 제주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신앙의 선각자들을 기억하고, 우리 역시 선배들의 순교정신을 받을어 복음 선포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면서 삼가 이 비를 세운다.” 제주민란의 교폐를 생각할 때, 또 오늘날 제주도에서의 선교활동이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어렵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당시 제주민란이 끼친 부정적 영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이 곳에 묻힌 이들이 ‘자신이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행위’라는 순교의 정의에 부합하는 인물일까? 이 질문의 답과는 상관없이, 이들을 순교자로 기리는 행위는 추모하는 이들로 하여금 교폐는 망각시키고, 교인이 살해되었다는 피해만을 각인시키는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제주에는 순교 정신을 기린다는 성지들이 더 있다. 그중에는 백서를 썼던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의 묘도 있다. 정난주는 남편의 죄에 연좌돼 제주로 유배되었는데, 천주교 신앙을 유지한 채 살았다는 이유로 오늘날 교회에서 ‘신앙의 증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2015년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순례길 ‘정난주 길’이 조성되기도 했다. 정난주의 묘를 소개하는 안내 표지판에는 그녀를 기리는 이유가 설명되어 있는데, 남편 황사영에 대한 설명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자료8> 표지판 속 황사영은 ‘선교를 위해 박해의 실상을 알리려다 장엄하게 순교당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백서를 소개할 때 ‘박해의 실상을 기술한 이 백서’라고만 짧게 소개하는 대목에서, 그들이 무엇을 기억시키고 무엇을 지우려는지 그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처럼 묘비나 안내판에 쓰여진 내용에는 묘역을 조성한 이들의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리고 제주 대정마을에 세워진 ‘삼의사(三義士)비’에도 그 비석을 세운 의미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삼의사비는 제주민란을 이끈 세 의사 이재수·오대현·강우백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그 뒷면에는 제주민란의 배경과 과정, 결과 등이 설명되어 있다. 비석에서는 민란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899년 제주에 포교를 시작한 천주교는 당시 국제적 세력이 우세했던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그때까지 민간신앙에 의지해 살아왔던 도민의 정서를 무시한 데다 봉세관과 심지어 무뢰배들까지 합세하여 그 폐단이 심하였다. 신당의 신목을 베어내고 제사를 금했으며 심지어 사형(사적 형벌)을 멋대로 하여 성소 경내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 이미 입은 피해와 억울함으로 분노한 민병들은 관덕정 마당에서 천주교도 수백 명을 살상하니 무리한 포교가 빚은 큰 비극이었다.” 비석을 세운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위 내용들을 새겨넣었을까. 삼의사비는 비문의 가장 첫 문장에 비석을 세운 의미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자료9> “여기 세우는 이 비는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이 비석이 주는 교훈은 시대를 관통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이 삼의사비가 세워져 있는 제주도에, 황사평 순교자 묘역이 공존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 제주민란 당시만 해도 뮈텔은 서양의 인맥이나 대한제국의 지도부와 접선해 그 권력을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1902년 뮈텔은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교황이 보낸 친필 축하서신을 고종에게 전달하기도 했는데, 이는 대한제국 정부와 로마 교황청 사이를 연결하는 중개자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외교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던 것이었다.¹³⁾ 그런 뮈텔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에 세력을 키워가던 일본이 그리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일본은 수백 년 동안 신자와 선교사들의 활동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천주교의 확산을 억제해온 역사가 있는 나라다. 16세기 말, 한때 가톨릭은 일본에서 빠르게 세력을 넓혔으나, 그 과정에서 개종 강요, 사찰 파괴, 노예 무역 등 각종 폐해와 사회적 충돌을 일으키며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전면 금지당했다. 공식적으로 금교가 해제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고, 그 무렵 한국에 파견된 뮈텔은 일본을 방문해 일본 순교자들의 시복 절차를 살펴보고 참고했던 만큼, 일본이 천주교를 배격해 온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당시 일본은 뮈텔의 고국 프랑스의 동맹국인 러시아와 대립 중이었으며, 뮈텔이 담당하고 있는 한반도에서도 세력을 넓히고 있었기에, 일본은 여러모로 경계해야 할 국가였다. 그런데 1905년 국제정세가 뒤집혔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같은 해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까지 장악하면서 한반도의 실질적인 권력이 빠르게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이전까지는 대한제국 정부와 협력해 교세를 확장하려했던 뮈텔은 새롭게 권력을 장악한 일본을 아군으로 삼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9년, 그들의 달라진 태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 생긴다.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인 ‘하얼빈 의거’가 일어났을 때였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 참고 자료 > 1)『뮈텔주교일기』 7권 2) 이기경, 『벽위편(闢衛編)』, 권2, 1785 을사추조적발사건. 3) 김선희,「천주교를 둘러싼 국가 척사론의 논리와 그 이격」, 2025 4) 김진소,『경향잡지』, 1989년 3월호, p. 91,92. 5) 앤서니 그레이엄 티그 譯 「황사영 백서」 6)『순조실록』, 순조 1년(1801년) 11월 5일 7) 위키백과, ‘황사영 백서’ 8) 우리역사넷, ‘황사영백서사건’ 9)『고종실록』, 고종 3년(1866년) 2월 8일 10) 이기석, 「1901년 제주민란 이야기」, 2011 11) 박찬식, 「1901년 제주민란에 나타난 교폐와 ‘물고자(物故者)’」, 2008 12)『뮈텔주교일기』 3권 13) 김태웅, 『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 2024 1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질품서 제34호」, 1901년 10월 9일

세계 종교 탐구
세계 종교 탐구 <60>노예무역의 주범이  배상 책임의 주체여야 한다②

세계 종교 탐구 <60>노예무역의 주범이 배상 책임의 주체여야 한다②

▣ 노예화의 허가자일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수혜자였다 수많은 가톨릭 국가들이 토착민들을 노예화하고 그들을 매매하는 것은 가톨릭교회에 직접적인 수혜로 이어졌다. 가톨릭은 정복지와 그에 따른 노예가 많아질수록, 동시에 교구·성당·성직자·세례받은 인구와 교회의 재정 기반도 확대되는 구조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교황이 칙서를 내려 신학적·법적·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해주면, 가톨릭 국가들은 원주민 대륙을 침탈할 때마다 성직자를 동행하여 토착민들을 개종시켰다. 이는 곧 가톨릭교회의 교세 확장과 부의 축적으로 이어진다. 1501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칙서「엑시미에 데보티오니스(Eximiae devotionis)」는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탈할 때 합법적으로 십일조를 거두게 했고, 그 십일조를 새 교회를 설립과 재정 지원에 사용하도록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가톨릭 신앙을 널리 전파하려는 경건한 열망에 따라, 최근 상당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 아메리카 제도와 그 지역들을 점령하고 회복하기 위해 더욱 힘쓰고 있습니다. 이는 그 땅에서 잘못된 믿음이 존재하는 곳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숭배와 경배를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계자들이 앞서 말한 제도들을 획득하고 회복한 뒤 그곳의 주민과 거주자들에게서 십일조를 자유롭고 합법적으로 받아 징수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그곳에 교구가 설치된 뒤에는 충분한 재원을 마련하여 교회들을 설립해야 합니다. 그 재원은 해당 교회의 성직자와 관리자들이 적절히 생계를 유지하고, 교회에 필요한 업무를 수행하며, 전능하신 하느님께 합당한 예배를 거행하고, 교구에 필요한 모든 의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교황이 칙서로 길을 열어주면, 교회는 열렬한 가톨릭 국가들이 가져다주는 개종자와 재정적 이익을 그대로 누릴 수 있던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또한 직접 노예를 소유하고 노동력을 이용하며 경제적 이익을 얻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 예수회는 아메리카 대륙의 최대급 토지·노예 소유 기관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1766년 스페인령 아메리카에 약 2,630명의 예수회원이 있었고, 멕시코에서만 농장 41곳, 대학 27곳과 다수의 교회를 소유했다. 칠레의 예수회 재산은 현금·물품·노예·가축·부동산 등을 합쳐 196만 1,148페소로 당시 식민지 정부의 1년 예산보다 많았다. 또 예수회 농장과 노예 노동에서 발생한 수입은 학교와 선교 사업을 유지하는 재원이 되었다. 이처럼 노예화와 노예무역은 가톨릭교회의 교세 확장과 부의 축적을 견인한 핵심 기반 가운데 하나였다. 케이티 제네바 캐넌의 논문『기독교 제국주의와 대서양 노예무역』에서 는 15세기 유럽 선교·정복의 구조를 세 단계로 설명했다. 먼저 현지 왕이나 추장을 만나고, 그다음 기독교에 복종하도록 요구하고, 만약 토착민이 자기 종교를 버리기를 거부하면 살해·굶주림·강간·질병·육체적 혹사·영구 노예화까지 “신이 승인한 종교적 의무”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논리가 형성됐다. 캐넌은 “God, glory, and gold”, 즉 “신, 영광, 황금”이 하나의 신적 섭리처럼 묶였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많이 개종시킬수록 구원을 얻는다는 사고와, 영토·노동력·자원을 확보하려는 현실적 욕망이 결합됐다는 뜻이었다. 종교 조직이 세속 권력 및 경제적 이익과 결탁했을 때, 그 조직은 어떤 폭력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구조를 갖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종교가 없는 경우보다 더 잔혹한 폭력이 가능해진다. 신의 이름이 붙은 폭력은 죄책감도, 한계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이 구조를 칙서와 교서 등을 통해 수백 년에 걸쳐 완성했고, 노예무역은 이 구조가 실증적으로 드러난 사례다. 종교와 세속 권력이 서로의 이해관계를 위해 결탁하는 구조는 더욱 교묘하게 진화하여 오늘날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남의 토지를 무단으로 침범하고, 대중을 선동해 이를 정당화하거나 부추기며, 각종 편법으로 타인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수탈하는 행위 등이 그것이다. 권력의 이런 몰염치한 행태는 갈수록 교묘해져서 법과 정의마저 자신들의 발 아래 두려는 횡포로 이어진다. 이러한 비상식적인 권력 행사의 배후에는 초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종교가 자리하고 있다. 종교의 역할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범죄를 가중시켰다는 점에서, 교황청의 책임은 더욱 막중하다. 그런데 사실 가톨릭교회를 비롯해 대부분의 가해국들은 자신들이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음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태도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잘못을 시인하고 심지어 노예무역을 비판하면서도 배상에 대한 약속은 외면한다는 것이다. ▣ 배상적 정의를 거부하다 2026년 3월 25일 미국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는 “아프리카인 노예 매매 및 인종적 차별에 기반한 아프리카인 노예화는 인류에 대한 가장 중대한 범죄임을 선언함”이라는 결의안(A/RES/80/250)이 찬성 123개국, 반대 3개국, 기권 52개국으로 채택되었다. 채택은 되었지만 미국의 반대표를 비롯해 대서양 노예무역의 주요 가해국인 포르투갈과 스페인,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의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기권을 택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들을 노예로 사고팔았던 일본도 기권국에 이름을 올렸다.<자료7> 전문가들은 이들이 찬성하지 않은 배경으로 이번 결의안이 과거의 책임을 오늘날의 구체적인 배상 문제로 연결한 점을 지적한다. 바티칸은 UN 회원국이 아니라 이번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5월 15일 발표한 교황의 회칙에서 배상에 대한 태도를 가늠할 수 있다. 레오 14세는 노예제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구조적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 선언까지 했음에도 배상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2022년 바티칸에 배상 청원서를 제출하고 변화를 기대했던 배상·치유 국제 연대는 이에 유감을 표했다. 배상에 대한 책임을 논할 때, 이를 거부하는 주요 논거 중 하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과거 조상들의 범죄에 대해 책임질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배상·치유 국제 연대의 청원서는 노예무역의 피해는 과거에 끝난 것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지속되고 있기에, 이는 오늘날에도 배상해야 할 채무임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였다. “6세기 이상, 30세대에 걸쳐 대서양 양안에서 아프리카계 후손들의 노동력과 지식을 약탈하고, 그로 인해 막대한 부를 축적해 왔습니다. 이러한 착취는 아프리카계 후손들이 벌어들인 소득과 부를 유럽계 후손들에게 대서양 양안에서 대대로 물려주어, 전자에게는 대대로 이어지는 빈곤을, 후자에게는 대대로 이어지는 부와 특권을 안겨주었습니다. 숫자적인 통계는 수 세기 동안 잃어버린 희망, 잃어버린 꿈, 그리고 잃어버린 생명의 고통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흑인의 생명을 그토록 심각하게 경시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깊은 정신적 고통을 이 통계는 조금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프리카와 그 국민들에게 저지른 죄와 잘못에 대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정신적 배상을 포함한 완전한 배상의 형태로 막대한 도덕적, 재정적 빚을 지고 있습니다.” 배상은 아직 청산되지 않은 빚이다. 과거의 착취를 통해 축적된 부와 이익은 오늘날까지 계승하면서, 그 과정에서 발생한 책임과 채무는 과거의 일로 떠넘기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며 양립할 수 없기에, 어떠한 논리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6월 18일, 가나에서 열린 ‘Next Steps’ 컨퍼런스의 고위급 회의에서 가나의 존 드라마니 마하마 대통령은 “역사는 죄책감을 물려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물려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라고 연설했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이익과 제도를 계승한 주체에게, 아직 청산되지 않은 책임을 묻자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피해를 입은 후손들의 목소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정체성을 잃었습니다. 조상의 땅에서 쫓겨났고, 우리 고유의 영성은 그들의 종교로 대체되었습니다. 사과는 됐으니, 도덕적으로 우리에게 빚진 것을 돌려주고, 그와 함께 보상도 하십시오.” 지금까지 사과를 해온 가해자들은 많다. 그러나 사과는 채무의 존재를 인정하는 말이지, 채무를 갚았다는 영수증이 아니다. 가톨릭교회와 가톨릭 국가들이 당시 발생한 부와 특권을 오늘날까지 물려받아 누리고 있는 이상, 아직 갚지 않은 책임도 함께 물려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배상을 거부하는 또 하나의 주요 논거가 있다. 당시에는 노예제가 불법이 아니었으므로, 후대의 법과 도덕적 기준을 과거에 소급해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미국이 UN 결의안에 반대표를 행사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주목할 것은 교황 레오 14세 역시 이번 회칙 176항에서 “과거의 사건을, 시간이 흐르면서 성숙해진 도덕적 기준이 마치 당시에도 존재했던 것처럼 시대적 맥락을 무시하고 판단할 수 없긴 하다”라고 전제하며, 책임을 인정하기에 앞서 시대적 한계를 먼저 내세웠다. 그러나 같은 방어 논리를 주장하더라도 세속 국가인 미국과 종교 수장인 레오 14세의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진리를 아는 종교라면 시대를 불문하는 보편적인 도덕과 죄의 기준을 제시했었어야 한다. 그러나 노예무역을 통제하는 법이 없던 시절, 가톨릭교회에서 제시한 것은 노예제의 허가와 축복이었다. 심지어 수백 년 뒤 노예무역을 멈춰 세운 것 역시 교회의 자성이나 선도가 아니라, 뼈아픈 실패를 딛고 깨어난 세상의 양심과 여론이었다. 그동안 진리의 길을 자처해 온 교회가 세속 국가와 똑같은 논리로 책임 감면을 유도하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명백한 모순이다. 종교를 자처해온 조직에게 이는 감면 사유가 아닌 오히려 배상의 무게를 더욱 가중할 뿐이다. ▣ 산정 불가 규모의 부당이득, 배상은 인간의 도리 2023년 경제·금융 컨설팅 업체 브래틀 그룹은 노예제 당시와 폐지 이후까지 이어진 피해를 합산해 대서양 노예제 배상액을 약 131조 달러(2023년 기준 약 17경 1,186조 원)로 추산하였다.<자료8> 많은 금액으로 보이지만, 이는 금전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피해만을 산출한 결과에 불과하다. 앞서 배상·치유국제 연대가 지적했듯 숫자적인 통계는 수 세기에 걸쳐 잃어버린 생명과 희망, 꿈,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이어진 정신적 고통까지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애초에 수백 년 이어진 강제 이주와 강제 노동, 끊어진 혈통과 사라진 언어, 조상의 땅에서 뿌리 뽑힌 정체성, 그리고 대를 이어 물려받은 빈곤과 차별 등의 이 모든 상실을 화폐 가치로 정확히 환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131조 달러는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참혹한 범죄의 대가를 그나마 최소한으로 가늠해 본 수치일 뿐이다. 또한 이 환산조차 어려운 천문학적인 금액은 그만큼 축적된 죄악과 피해의 규모가 막대하다는 방증이 될 수 있다. 빼앗은 것을 돌려주는 것은 거창한 도덕이 아니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오래되고 단순한 정의이며 원칙이다. 정당한 이유 없이 타인의 재산이나 노동으로 이익을 얻고, 그로 인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은 ‘부당이득(unjust enrichment)’이라 하며, 그 이익은 그 가치만큼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다. 피해자들은 아무 잘못도 이유도 없이 하루아침에 인간적 존엄과 미래를 송두리째 빼앗겼다. 명백한 잘못과 이유가 있는 배상조차 외면하는 이들이 감히 도덕과 선, 구원을 말할 자격이 있을까. 적절한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쌓아 올린 화려한 성당과 예술품, 역사와 권위는 결국 한 가지 사실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 이교도를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민족의 삶과 영혼, 미래를 파괴하고도 끝내 그 빚을 갚기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배상은 정의 실현을 위해 뒤늦게라도 이행해야 할 최소한의 양심과 책임이다. 인류에 돌이킬 수 없는 죄악과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도 배상마저 하지 않는다면, 역사는 가톨릭교회를 반인륜적 범죄의 책임을 외면한 파렴치한으로 기록할 것이다.

세계 종교 탐구
세계 종교 탐구 <60>노예무역의 주범이  배상 책임의 주체여야 한다①

세계 종교 탐구 <60>노예무역의 주범이 배상 책임의 주체여야 한다①

2022년 7월, 한 국제단체가 바티칸을 찾아갔다. 이들이 바티칸을 방문한 목적은 기도도 순례도 아니었다. 대서양 노예무역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함이었다. 교황청은 그자리에서는 후속 논의 의사를 밝혔지만, 이후 배상에 관한 어떠한 움직임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4년 뒤 상황이 달라진다. 2026년 3월 25일 유엔 총회에서 대서양 노예무역을 ‘인류에 대한 가장 중대한 범죄’로 규정하며 ‘배상적 정의(reparative justice)’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결의안은 교황의 칙서들이 직접 노예제를 승인하고 합법화했다며 가톨릭교회의 책임을 명시해 놓았다. 이제 바티칸은 전 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공개적·공식적인 행동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교황청은 국제적인 배상 요구에 어디까지 응답했을까?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2022년 바티칸에 제출된 배상 청원서를 중심으로 노예무역에 대한 교황청의 책임과 그 배상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 바티칸에 배상적 정의를 요구하다 2022년 바티칸을 찾아간 단체는 배상·치유 국제 연대(GCRH:Global Circle for Reparations and Healing)로, 아프리카 전역에서 배상적 정의와 인종 갈등 치유를 위해 활동하는 조직과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 네트워크다. 여기서 ‘배상적 정의’란 가해자를 처벌하는 ‘형벌적 정의’와 달리 피해자가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변상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배상적 정의는 금전 배상뿐 아니라 원상회복, 공식 사과와 피해 인정, 빼앗긴 재산·문화재의 반환, 피해 공동체 지원, 교육·기념사업,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 등의 조치를 포괄한다. 2022년 7월 18일, 배상·치유 국제 연대 대표단은 ‘교황청에 보내는 배상 추진 청원서(Presentment to the Holy See in Furtherance of Reparations)’를 제출하면서, 교황청 관계자들과 회의를 갖고 완전한 책임 인정과 사과, 노예화와 관련된 교황 칙서의 철회, 배상위원회 설치와 재정적 배상 등을 요구했다.<자료1> 이때 제출한 청원서 내용의 대부분은 교황청이 노예무역에 대해 배상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청원서는 “아프리카의 후손인 우리는 15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아프리카 대륙과 디아스포라 전역에서 아프리카인들에게 억압과 고통을 초래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명령, 축복, 묵인, 그리고 조장된 죄악에 대한 정의와 보상을 요구합니다.(We, descendants of Africa, seek redress for sinful actions ordered, blessed, condoned, and promoted by the Roman Catholic Church that paved the way for the oppression and suffering of African people on the continent and across the Diaspora from the 15th century to the present moment.)”라는 내용으로 시작하며, 배상을 요구하는 가장 첫 번째 이유로 교황들의 칙서를 꼽았다. 해당 내용을 발췌 및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15세기 유럽인들과 전 세계 사람들의 도덕적 양심을 형성하는 데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는 기관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비인간화하고, 상품화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을 도왔다. 예수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하는 로마 교황은 가톨릭 왕국(Reino Católico)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영토 확장 계획을 지지하고 지원했다. (가톨릭교도들의 입장에서는) 지상에 계신 그리스도인 교황이 아프리카에 대한 전쟁을 승인하고 아프리카 남녀노소의 대서양 인신매매와 영구적인 노예화를 지지하고 후원한다는 칙서를 발표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1452년, 교황 니콜라스 5세는 ‘둠 디베르사스(Dum Diversas)’라는 교황 칙서를 통해 포르투갈에게 아프리카 흑인들을 영구 노예로 만들 권한을 부여했다. 이후 여러 교황들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프리카 흑인들을 인신매매하고 노예로 삼는 것, 그리고 유럽의 제국주의와 아프리카 식민화를 정당화했다.” 청원서의 위 내용은 다른 가해국들보다 가톨릭에 더 무거운 책임을 묻고 있다. 국가와 상인에게는 실행의 책임을 묻는다면, 가톨릭에는 그 이전 단계의 더 근본적인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가톨릭 국가 군주들은 다른 나라를 정복할 때 교황에게 사전 또는 사후 허락을 구했다. 이는 영토 침탈과 노예화가 불법이 아니었던 당시에도 인간이 가진 보편적 양심으로서 그 행위가 죄악임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당시 도덕적 최고 권위기관으로 믿어져 온 조직에서 이를 금지했다면, 대규모의 대서양 노예무역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오히려 이 죄악을 그들 신의 이름으로 허락하고 축복했다. 이는 범죄 행위에 신학적·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유럽 전역에 대서양 노예무역이 횡행하게 되는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특정한 위치에 있는 자가 해악을 막을 능력과 권한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를 행사하지 않으면, 법률적으로 작위의무(作爲義務, Duty to Act)를 위반한 부작위범에 해당한다. 2026년 3월 25일 채택된 UN 결의안으로 국제사회의 책임 추궁이 거세지는 가운데, 5월 25일 발표된 교황 레오 14세의 회칙「마니피카 후마니타스(Magnifica Humanitas)」175항에서도 ‘인신매매 행위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거나 어떤 식으로든 용인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과거 노예제도 시대의 죄악에 공모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인정한 바 있다. 부작위만으로도 범죄인데, 당시 교황청은 노예화를 허가하고 정당화하는 데 최고 수준의 권위를 행사했다는 점에서 가장 우선 책임을 물어야 할 핵심 주체로 지목된다. 나아가 그 권위의 크기와 역사적 영향력을 책임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가장 무거운 제도적 배상책임을 물어야 할 주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대서양 노예무역의 책임은 흔히 포르투갈과 스페인,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노예무역에 참여한 국가와 상인들에게 집중되어 왔다. 이들이 가시적인 실행 주체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대서양 노예무역의 시초는 가톨릭 국가 포르투갈로 꼽히는데, 이에 청원서는 그 출발점이 되는 포르투갈부터 가톨릭의 막대한 영향 아래 움직였음을 명시한다. 다음으로는 가톨릭 왕국 포르투갈의 건국 배경을 짚어본 뒤, 포르투갈이 가톨릭에 크게 의존해 움직였음을 증명하는 청원서의 내용을 살펴본다. ▣ 가톨릭 국가 포르투갈, 대서양 노예무역의 시초가 되다 포르투갈은 유럽의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로, 그 건국 과정부터 가톨릭교회가 깊게 관여하였다. 원래 레온 왕국에 속한 작은 백작령이었던 포르투갈은 1143년 교황 특사 귀도 데 비코 추기경의 중재 덕분에 레온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4년 뒤인 1147년, 초대 국왕 아폰수 1세는 제2차 십자군과 연합하여 리스본을 정복하며 가톨릭 군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큰 공로를 세웠고,<자료2> 1179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포르투갈 왕국과 아폰수 1세의 왕위를 공식 인정하고, 그가 정복한 영토의 통치권을 확인하는 칙서「마니페스티스 프로바툼(Manifestis Probatum)」을 내린다.<자료3> 이로써 포르투갈은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가톨릭 왕국으로서 자리매김한다. 그 칙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는 훌륭한 아들이자 가톨릭 군주로서, 끈질긴 노력과 군사적 위업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적대하는 자들을 과감히 섬멸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지런히 전파함으로써, 거룩한 교회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로를 세웠으며, 그리하여 후세에 기억할 만한 이름과 본받을 만한 모범을 남겼음이 명백히 입증되었다. 교황청은 하느님의 섭리가 백성을 다스리고 구원하도록 선택한 이들의 정당한 간구를 효과적으로 들어주어야 한다. 사도적 권위로 그대의 고귀한 통치권에 포르투갈 왕국과 더불어, 하늘의 은총으로 그대가 이교도들의 손에서 정복한 모든 지역까지 포함함을 허락하고 확인한다. 또한 그대의 후계자들에게도 동일한 허가를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니 가장 사랑하는 아들로서 계속 거룩한 로마 교회의 영광과 봉사에 겸손하고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교회의 이익을 수호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데 힘쓰라.” 교황의 승인과 격려를 받은 포르투갈은 다른 나라들의 영토를 계속 침공하고 약탈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그런데 정복이 주는 이익은 영토 확장에만 있지 않았다. 붙잡은 포로들을 노예로 삼아 노동력을 착취하고 시장에서 매매하기도 하니, 노동력과 재산 등의 새로운 수입원이 함께 늘어났던 것이다. 침략과 노예화는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포르투갈은 마침내 그 무대를 더 넓은 곳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아프리카였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시장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415년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점령하면서부터다.<자료4> 배상·치유 국제 연대의 청원서는 세우타 점령 이후, 포르투갈의 침략 행위가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418년, 포르투갈 국왕 주앙(João) 1세가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기 위해 교황의 권위를 요청하자, 교황 마르틴 5세는 칙서「사네 카리시무스(Sane Charissimus)」를 통해 국왕을 지지했다.<자료5> 이 칙서는 1415년 세우타 점령을 칭찬하고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정복을 합법화했으며, 이후 아프리카에 대한 지속적인 지배를 정당화하는 교황 칙서들의 선례가 되었다.「사네 카리시무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인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널리 전파하려는 열정으로 불타고 있다. 이에 그는 그리스도교 병사들의 군대를 갖추어, 아프리카와 그 인근의 다른 지역에서 불신자들을 정복하기 위해, 그들이 점유하고 있던 영토와 지역으로 진군하였다. 가톨릭 신앙의 투사이자 지극히 용맹한 전사인 이 국왕은, 이들 불신자들을 상대로 자신에게 허락된 행복한 승리를 힘차게 계속 이어가기로 결심하였으며, 불신자들을 복종시키고,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땅을 참된 신앙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그는 이 일이 성공적으로 완수될 수 있도록 가톨릭교회에 겸손히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왕의 이처럼 구원에 유익한 계획을 주님 안에서 가장 큰 찬사로 높이 평가하며, (…) 이러한 십자가의 표지를 받아 앞서 말한 군대에 직접 자기 몸으로 참가하거나 그 여정 중에 목숨을 잃은 이들, 고해한 그들의 모든 죄에 대하여 완전한 용서를 베풀며, 의인들이 받는 영원한 구원의 보상 또한 더하여질 것임을 약속한다. 그리고 이번 원정에서 야만인들로부터 빼앗는 모든 지역은 포르투갈 국왕 주앙과 그 후계자들의 영토에 편입될 것이라고 정하였다.(Sane charissismus in Christo filius noster Joannes Portugalliae Rex illustris, Christianae propagationis affectibus inflammatus, instructis Christianorum militum aciebus ad debellandos, tam in Africanis, quam aliis partibus convicinis, Sarracenos et alios infideles, in detenta per eos territoria et loca processit. Cum autem idem Rex, Catholicae fidei pugil et athleta fortissimus, indultam sibi felicem victoriam in eosdem infideles viriliter prosequi decideret, ad subjugandos Sarracenos et infideles hujusmodi, redigendosque ad cultum ipsius verae fidei terras, quas occupant, nostras et Catholicae Ecclesiae pro tam felicis consummatione negotii partes adjutrices humiliter imploravit. Nos itaque tam salutare praefati Regis propositum maximis in Domino laudibus extollentes, (…) eisdem fidelibus, qui, crucis hujusmodi signo suscepto, praefatis exercitibus in personis propriis interfuerint pariter, et expensis, quique ut illis interessent sine fraude iter arripuerint, seu in ipso fuerint itinere vita functi, plenam suorum peccaminum, de quibus corde contriti, et ore confessi fuerint, veniam impertimur, et in retribuitione justorum salutis aeternae pollicemur augmentum. cuncta autem loca, quae in hac expeditione barbaris eripientur, Joannis Portugalliae Regis atque successorum ditioni adjunctum iri.)” 주앙 1세의 아들, 일명 항해왕자으로 불리는 엔히크(Henrique) 왕자는 아프리카에 유럽 식민지화의 씨앗을 뿌리고, 아프리카인들을 인신매매하여 노예로 삼는 원정대를 후원하고 지원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엔히크는 교황청의 후원과 지원을 받았고, 1420년, 교황 마르틴 5세는 엔히크를 그리스도 기사단의 수장으로 임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명목으로 아프리카 흑인들을 인신매매할 권한을 부여했다.(which gave him authority to launch the trafficking of Black African human beings in the name of spreading the Gospel of Jesus Christ.) 이에 1421년, 엔히크는 원정에서 포로로 잡은 아프리카인들을 교황 마르틴 5세에게 선물로 바쳤다. 1442년, 교황 에우제니오 4세도 항해왕자 휘하의 이교도 원정에 참여한 그리스도 기사단들에게 “모든 죄를 사면한다(full remission of sins)”는 내용의 교황칙서「일 리우스 퀴(Illius Qui)」를 발표했으며, 아프리카에서의 군사 행동은 교회의 관점에서 ‘정당한’ 전쟁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그리스도 기사단에게 확언했다. 미국의 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케이티 제네바 캐넌은 논문 『기독교 제국주의와 대서양 노예무역』에서 “아프리카인들을 대상으로 한 대서양 무역은 기독교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정리했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는 ‘개종과 노예화를 같은 의미’로 여겼으며, 개종자들을 노예로 만드는 데 아무런 인지적 모순을 느끼지 않았다. 실제로 노예무역에 가담한 국가들은 예외 없이 기독교 국가였으며, 비기독교 국가가 대서양 노예무역에 가담한 사례는 없다.<자료6> 대서양 노예무역에서 흑인을 인종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조직적으로 착취하는 시스템은 가톨릭, 개신교, 성공회를 가리지 않고 유럽 기독교 문명권 안에서 탄생하고 확산되었다.

세계 종교 탐구 <59>동아시아로 번진 노예무역과 조선을 덮친 전쟁의 지옥②

세계 종교 탐구 <59>동아시아로 번진 노예무역과 조선을 덮친 전쟁의 지옥②

▣ 임진왜란, 한반도를 지옥의 참상에 몰아넣다 1592년 임진년에 발발하여 1598년까지 이어진 일본의 조선 침략 전쟁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한다. 이 가운데 1597년 정유년에 일어난 재침략 전쟁이자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쟁은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따로 명명한다. 그런데 이 정유재란 시기에 왜군을 따라 조선에 건너와 전쟁의 참상을 모두 목격한 종군 승려가 있었다. 일본의 종군 승려 게이넨(慶念)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라는 일기에 자세히 […]

세계 종교 탐구 <59>동아시아로 번진 노예무역과 조선을 덮친 전쟁의 지옥①

세계 종교 탐구 <59>동아시아로 번진 노예무역과 조선을 덮친 전쟁의 지옥①

“수백 남녀를 가리지 않고 검은 배에 사들여, 수족을 쇠사슬로 묶고 배 밑바닥에 몰아넣으니, 지옥의 형벌보다 더하였다.” 이 광경은 마치 지난 호에서 살펴본 노예선의 참상, 아프리카 흑인들이 짐짝처럼 실려 갔던 그 죽음의 항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의 배경은 아프리카가 아니다. 이는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기관 오무라 유코가 남긴『규슈 원정기(九州御動座記)』의 기록으로,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포르투갈 […]

세계 종교 탐구 <58>가톨릭이 축복한 죽음의 항해, 악마의 노역,  그리고 교황의 사과 선언①

세계 종교 탐구 <58>가톨릭이 축복한 죽음의 항해, 악마의 노역, 그리고 교황의 사과 선언①

교황 레오 14세가 과거 노예제도에 직접 관여했던 가톨릭교회의 과오를 인정했다. 지난달 25일 발표한 새 회칙 ‘마니피카 후마니타스 (Magnifica Humanitas, 위대한 인간성)’에서 “고대와 중세 시대에는 교회 기관들조차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다”, “로마 교황청이 여러 차례 개입하여 유럽 군주들의 인간 예속을 정당화해 주었고, 특정 시기에는 이교도들을 노예로 삼을 권한을 부여하기도 했다”며 교황청의 역사적 책임을 시인한 것이다. 외신들은 이를 […]

세계 종교 탐구 <58>가톨릭이 축복한 죽음의 항해, 악마의 노역,  그리고 교황의 사과 선언②

세계 종교 탐구 <58>가톨릭이 축복한 죽음의 항해, 악마의 노역, 그리고 교황의 사과 선언②

▣ 교황들의 칙서로 노예제를 축복하다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이러한 잔혹 행위와 대학살의 가해자는 지금까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가톨릭 왕과 군주들(Catholic kings and princes), 그리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등 다른 주요 유럽 기독교 국가 정부로만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도덕적 권위를 지녔어야 할 교회와 교황이 오히려 이러한 잔혹 행위를 […]

세계 종교 탐구 <57>성수의 성스러움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②

세계 종교 탐구 <57>성수의 성스러움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②

▣ 소금으로 부패를 막으며 성스러움을 연출해오다 우선 현행하는 성수 예식에서 성수를 어떤 식으로 축복하는지 살펴본다. 가톨릭교회의 미사 공식 전례서인 『로마 미사 경본』의 ‘성수 예식’에 따르면, 사제는 성수를 만들 때 축성할 물이 담겨 있는 그릇을 앞에 놓고, 신자들을 바라보며 기도문을 낭송한다. 이때 다음과 같이 죄 사함과 병 치유를 구하는 구절이 낭송된다. “믿음으로 이 성수를 사용하는 저희의 […]

세계 종교 탐구 <57>성수의 성스러움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①

세계 종교 탐구 <57>성수의 성스러움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①

2024년 12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프랑스 코르시카 섬을 방문했다. 교황이 코르시카를 찾은 것은 가톨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당일 아침 거리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바티칸 공보실에 따르면, 교황은 교황 전용차 포프모빌을 타고 군중 사이를 천천히 이동하다가 성 요한 세례당에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는 포프모빌 위에서 군중을 향해 성수라며 가져온 물을 뿌렸다. 성수채 끝에서 물방울이 […]

세계 종교 탐구 <56>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사기다②

세계 종교 탐구 <56>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사기다②

▣ 숨겨왔던 위조 사기, 과학의 발달로 발각되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교회는 수의의 진위 검증에 대해 과학계와 언론의 거센 압박을 받게 된다. 연대 측정 분야에서 획기적인 기술이 개발되며 아주 작은 표본만으로도 정확한 연대 측정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가장 확실한 과학적 검증 방법인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왜 허가하지 않느냐”, “가짜인 것이 들킬까봐 숨기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1980년대 […]

세계 종교 탐구 <56>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사기다①

세계 종교 탐구 <56>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사기다①

지난 호에서는 예수의 처형 사건에 대한 1세기 역사 기록이 전혀 없었다는 증거들을 살펴보았다. 1세기 초, 성경의 주장대로 추종자들을 대거 거느렸던 영향력 있는 신흥 종교 지도자가 반역죄 판결을 받고 공개 처형되었다면, 이는 분명 특기(特記)되었어야 할 사건이다. 그러나 반란 사건을 비롯해 일개 범죄자의 재판과 처형까지 기록으로 남겼던 당시 로마 당국, 역사가, 저술가들의 기록에서, 예수의 기록은 찾아볼 수 […]

세계 종교 탐구 <55>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거짓이다②

세계 종교 탐구 <55>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거짓이다②

▣ 예수의 십자가형을 기록했다는 문헌은 조작이었다 1세기 유대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 중 가장 방대한 기록을 남긴 인물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AD 37 ~ AD 100)다. 요세푸스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창세기부터 서기 66년까지 유대 민족의 역사를 집대성한『유대 고대사』인데, 유대 고대사에는 여러 정치적 사건들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자료7> 예를 들어『유대 고대사』19권에는 서기 41년 칼리굴라 황제의 암살 사건을 다뤘는데, 칼리굴라가 누구에게 […]

세계 종교 탐구 <55>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거짓이다①

세계 종교 탐구 <55>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거짓이다①

지난 6일, 아르헨티나 산후안 대성당은 수십 년 동안 분실되었던 한 성유물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것은 기독교에서 ‘예수가 못박혔던 십자가 파편’이라 주장하며 ‘성십자가’라 부르는 유물이었다. 산후안 대성당이 보관하던 것은 두 조각의 작은 나무 파편이었는데, 1944년 지진으로 행방불명 되었다가 최근 근처 학교의 예배당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자료1> 대성당 측은 이를 성당으로 다시 가져오며, 그 이유를 “시민들과 매일 성당을 찾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