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도로 끓는 마음이면 무엇이나 됩니다 (박옥수 사장/시온쇼핑 영주동 매장)

박옥수 사장 / 시온쇼핑 영주동 매장
발행일 발행호수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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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자갈치시장 상가 2층의 런 고객에 주문 받은 이불을 배달하러 들어가는 박옥수 사장.

부산의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을 누비며 요구르트 ‘런’을 배달하는 박옥수 사장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지금이 행복하다.
“요구르트 ‘런’을 먹으면서 제가 건강해졌어요. 제가 먹고 좋으니까, 건강을 얻었으니 ‘건강을 나눠주러 간다’고 말합니다.” 배달길에 만난 커피 장사 아저씨가 “건강을 나줘주는 신앙촌 아줌마가 왔어요~”하며 반긴다.
박 사장은 ‘런’을 판매하면서 늘 행복하며 즐겁다고한다. “‘런’ 홍보하면서 신앙촌도 홍보하니까 좋죠, 나는 ‘런’ 팔고 나서 부자됐어요.” 매일 개인 배달해야 되는 것이 힘들 법도 한데, “즉각 현금이 수금이 되잖아요. 장사하는 분들이라 본인들 쇼핑할 시간이 없잖아요. 이것저것 주문도 들어온답니다.”
기자가 동행한 날도 매트에 맞추어 주문한 이불과 베갯잇을 배달하고 똑같은 주문을 또 받았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고 싶었으나 유학자 집안의 완고하신 아버지의 반대로 다닐 수 없었다. 서울에 살던 대학생 오빠가 1955년 새까맣게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찾아간 한강 모래사장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방학때마다 내려와 아버지와 어머니를 전도했다. 드디어 1957년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상경해 이만제단에서 예배를 드렸다. 박옥수는 그렇게 다니고 싶던 교회, 그것도 이렇게 큰 교회에 나가게 되어 감사의 눈물을 예배 처음부터 끝까지 흘렸다. 아버지도 은혜를 받고 그날로 술, 담배를 끊으셨다.

1958년 신앙촌에 입주했다. 편물부에 있으면서 서른살이 되면 소비조합을 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딱 서른살이 되던해 소비조합을 시작했다. 처음 나간 날부터 공치는 날은 없었다. 긍정적이었다. 뭐든지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기장신장촌을 건설하시며 소비조합도 옮겨간다고 하셨다. ‘부산은 바닥도 좁고 먼저 시작해 잘하는 소비조합들과 함께 내려가면 안 될 것 같아’ 선수를 쳤다. 먼저 내려와 영도에 시온쇼핑을 차렸다.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소비조합을 옮기시지는 않았다. 그렇게 부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박 사장은 앉아서 오는 손님을 기다리지 않았다. 양말 대도매를 시작했다. 공장에서 미처 물건을 만들어내지 못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다. 한때는 건빵을, 한때는 수예부 이중 신 줄장미수 이불을 크게 팔았다. 시중엔 그런 물건이 없었다. 대히트를 쳤다. 그러면서도 ‘나는 언제 한번 1등을 해보나’ 늘 꿈꿔왔다. 수출이 터졌다. 러시아에 양말 수출이 되면서 저녁이면 수금한 현금을 들고 들어오기 무거울 정도로 호황이었다. 2년 내내 1등을 했다.

박 사장 성격을 아는 주위의 사람들은 외상 장사를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박 사장에게 딱인 아이템이 나왔으니 바로 요구르트 ‘런’이었다. 개인고객 배달을 해보자고 했을 때도 ‘그래 해보자’ 하고 달려들었고 목표한 대로 역시 해냈다.
“마음 먹은 대로 된다 안합니까”라고 반문하는 박사장은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도 했다. “그러나 마음이 끓어야해요. 99도만 해도 안 돼요, 100도가 돼야합니다.” 순수한 정열, 순정파 박 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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