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코드 찍고, 온라인 주문… 코로나가 가져온 일상의 변화

QR코드 찍고, 온라인 주문… 코로나가 가져온 일상의 변화

지난해 12월부터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장기화되면서 우리의 일상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뉴 노멀(New Normal, 변화에 따른 새로운 표준)이라 불리는 시대. 올 한해 코로나로 인해 바뀐 사회 현상과 천부교 문화를 되짚어봅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체온을 재셔야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 마스크는 호흡기 질환 환자나 감기를 예방해야 되는 경우처럼 특별한 경우에 사용했지만, 이제는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건물 안에 입장할 수가 없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손소독제와 체온측정계는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으로 자리잡았고, 출입기록을 남기기 위해 QR 코드를 찍는 것 또한 입장을 위한 필수 절차가 되었다. 천부교는 교인들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에 두고 국가와 지역사회의 방역 지침을 철저하게 준수할 뿐 아니라 방역 지침보다 엄격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참석자 동선 체크를 통해 선제적인 관리에 중점을 두었다. 이와 더불어 이전의 대규모 행사에서 소규모 집중 교육 프로그램으로 체질을 개선해 교육에서도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전에는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대면 교육 위주였다면, 차츰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교육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중부지역에서는 송년을 맞아 어린이와 학생들이 영상으로 함께 노래하는 ‘언택트 합창’ 을 선보이기도 했다. 집에서 물건이나 음식을 주문하거나 배달 받는 이른바 ‘언택트 소비’는 최근 몇 달 동안 일반적인 소비 방식이 되었다.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소비조합들도 얼굴을 보고 물건을 전달하기보다는 현관 앞이나 택배함에 넣어두고 연락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했다. 또 11번가, G마켓, 이마트 몰, 롯데ON 등 온라인 제휴몰에서도 신앙촌 선물세트 등의 주문량이 늘었다고 한다. 언택트는 소비를 넘어 사회전반으로 퍼져 문화생활마저도 즐길 수 있게 됐다. 다양한 전시, 공연이 인터넷으로 실황 중계되고, 소비자는 방 안에서도 쉽게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다. 천부교와 신앙촌에 관한 영상이 올라오는 유튜브 채널과 블로그도 코로나19 유행 이후 더욱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코로나는 우리의 많은 부분을 바꿔놓았다. 리서치 기관 입소스(Ipsos)에 따르면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보다는 이를 기회 삼아 새로운 세상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응답이 86%나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모든 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비전과 시스템을 갖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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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탄생한 날 다스베이더와 해골 우주 전사가?”

“예수 탄생한 날 다스베이더와 해골 우주 전사가?”

12월 11일(현지 시각), 바티칸의 베드로 광장에 전시된 예수 탄생 조각이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로마가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은 해마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 이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동방 박사의 이야기를 구현한 조각상을 베드로 광장에 전시해 왔다. 그 조각상이 올해는 스타워즈에 나오는 다스베이더(주요 악인)나 해골 전사, 공상 과학 만화에 등장할 법한 우주인 등의 기괴한 모습으로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이다. 언론에 보도된 반응을 보면, “전 세계적인 조롱의 분출을 만들어 냈다.(미술사학자 엘리자베스 레브)” “우습고 끔찍하다. 더 화가 난 사람들은 그것을 악마적이고 이교도적이며 우상숭배자라고 한다.(가톨릭 헤럴드)”는 등이 있다. 바티칸이 제시한 파격적인 조각상은 인터넷상에서도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고, 이에 영감을 얻은 네티즌들은 다스베이더가 바티칸 광장으로 가는 길을 묻는 사진을 제작해 SNS에 올리기도 했다. 바티칸이 원한 것이 폭발적인 관심이었다면 일단 그 목표는 성공한 듯하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를 예수가 탄생한 성스러운 날로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제 사람들은 ‘다스베이더가 바티칸에 찾아오는 날’로 크리스마스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추수감사절 사행시공모 수상작 발표

추수감사절 사행시공모 수상작 발표

신앙촌의 아름다움 공유하는 “가을 담기 공모전” SNS로 진행

신앙촌의 아름다움 공유하는 “가을 담기 공모전” SNS로 진행

다양한 사진과 영상 출품돼 신앙촌 가을의 정취 느낄 수 있어 신앙촌 가을 담기 공모전이 개최되어 신앙촌 주민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이번 공모전은 가을을 맞아 신앙촌의 아름다운 풍경을 공유하자는 취지로 마련되었다. 또한, 코로나19 상황으로 야외 외출을 자제하고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평범하고 따뜻한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SNS로 공모전을 진행하였다. 가을 담기 공모전은 가을을 맞은 신앙촌을 연상케 하는 사진, 영상 등 자신이 선호하는 분야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제출할 수 있었다. 출품된 사진 200여 점과 다수의 영상 중에서 예술성, 창의성, 독창성 등 심사 기준에 따라 수상작이 선정되었다. 최우수상은 “매일이 새로운 오늘” 이란 제목의 사진과 영상을 출품한 입사생 조순영 씨가 받았다. 우수상은 입사생 오지영 씨, 식품여고 1학년 팀, 장려상은 신앙촌 여청 최서아 씨 외 3명이 수상했다. 수상자들에게는 신앙촌 상품권이 수여되었다. 조순영 씨는 “식품단지를 걸으면 하루의 피로가 싹 사라집니다. 눈으로 직접 봤던 아름다운 식품단지를 카메라에 모두 담을 수는 없었지만 경이로웠던 그날의 기분을 모두와 함께 느껴보고 싶었습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코로나ㆍ독감 동시 유행 ‘트윈데믹’ 대비해야

코로나ㆍ독감 동시 유행 ‘트윈데믹’ 대비해야

코로나 확산세에 독감 겹치면 의료시스템으로 감당 어려워 인플루엔자(독감) 동시 감염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전파력을 두 배 이상 증가시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전 세계 일일 확진 환자 수가 31만 명을 넘어설 정도로 코로나19 확산세가 거센 상황에서 독감 유행까지 겹치면 현재의 의료시스템으로는 감당이 어려울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11일(현지시간)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독일 막스플랑크 생화학연구소와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는 최근 계절성 독감과 코로나19의 공동순환 시뮬레이션 모델을 개발했다. 두 바이러스의 유행 양상을 담은 데이터는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노르웨이 등 유럽 국가에서 추출된 것이다. 분석 결과, 코로나19에 감염된 환자는 평균 2명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했지만 독감에 동시에 걸린 경우는 평균 4, 5명에게까지 전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감의 전형적 증상인 기침과 재채기가 코로나19 전파를 촉진할 것이라는 예측도 많다. 연구진은 인체가 두 바이러스를 동시에 상대하는 만큼 상태는 더욱 나빠질 것으로 봤다. 독감 감염이 면역체계를 자극해 코로나19 바이러스 침입을 부분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일부 학자들의 기대 섞인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앞서 5월 구글과 미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도 독감 바이러스가 인체에서 안지오텐신 전환 효소2(ACE2)의 양을 크게 증가시켜 코로나19에 더 잘 감염되는 상태로 만든다는 공동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ACE2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체내 숙주세포와 결합하는 데 사용되는 주요 수용체다. 진단 과정에서의 혼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논문은 동시 감염은 따로 감염된 경우보다 코로나19 진단율이 30~50%가량 떨어지는 결과가 나왔다고 밝혔다. 코로나19 잠복기가 평균 5일 이상인 반면, 독감은 하루 이틀뿐이라 동시 감염 환자가 코로나19 검사를 했을 때는 독감 증상이 이미 사라진 상태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봄철 코로나19 1차 유행 이후 신규 확진자 수가 줄어든 것 역시 봉쇄령과 거리 두기 조치 외에 독감 시즌이 지나간 영향이 컸다고 연구팀은 추정했다. 코로나19 확진ㆍ사망 1위인 미국은 ‘트윈데믹’ 가능성에 촉각을 세우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앞서 지난달 로버트 레드필드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국장은 “코로나19와 독감이 동시 발생하면 우리가 겪어본 최악의 가을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의료기관의 부담을 덜어줄 방법 중 하나로 독감 백신 접종을 대폭 확대하는 방안이 거론된다고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SCMP에 따르면 중국도 통상 연간 전체 인구의 2%에 해당하는 3,000만 명분의 독감 백신을 공급해왔으나, 올해는 특수 상황을 고려해 공급량을 늘리기로 했다. 코로나19의 가파른 재확산세는 독감 시즌에 대한 우려를 더욱 키우고 있다. 국제통계사이트 월드오미터 자료를 보면 11일 기준 글로벌 코로나19 일일 확진자 수는 31만692명을 기록해 4일 세운 사상 최고치를 다시 경신했다. 특히 인도와 유럽의 확산세가 심상치 않다. 인도는 전 세계 신규 확진자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고, 유럽에서도 프랑스의 일일 확진자가 1만 명을 돌파하는 등 여름 휴가철 이후 환자가 급증하는 추세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선 백신 개발이 시급한 상황인데, 다국적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와 영국 옥스퍼드대는 당국의 안전 승인을 받아 영국과 브라질에서 지난 8일 중단했던 임상시험을 재개하기로 했다고 12일 밝혔다.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에서 1단계로 하향 조정

20-50 신앙촌 소비조합 세미나

2020년 2/3분기 사업시상식

伊, 가톨릭 사제 노숙자에 피살

총회 소집 공고 – 한국천부교신도연합회

교인 등록 추가 공고 –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

신도 등록 추가 공고- 한국천부교신도연합회

신앙체험기

인간의 죄를 소멸하시는 권능의 하나님 깨달아

인간의 죄를 소멸하시는 권능의 하나님 깨달아

하나님을 처음 뵌 것은 1955년 3월, 스물두 살의 봄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서울 아현동 집에서 언니(故이옥자 권사, 의정부교회)와 함께 일명 ‘요코’라 불리는 기계를 들여 가내수공업으로 스웨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언니가 기계로 스웨터를 짜면, 저는 밑단을 마무리하고 다려서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언니와 함께 만든 스웨터의 인기가 날로 높아져서 바쁘지만 보람차게 일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루는 언니가 하는 말이, 요즘 박태선 장로님에 대한 이야기로 서울 장안이 떠들썩하다며 그분이 하시는 남산 집회에 같이 가 보자고 했습니다. 그때는 집과 가까운 공덕동 장로교회에 꾸준히 나가고 있던 때라 부흥집회에도 참석하면 좋을 것 같아 흔쾌히 언니를 따라나섰습니다. 집회가 열리는 남산에 도착해보니 굉장히 큰 천막이 수십 개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저와 언니도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곧 예배가 시작되었고 박태선 장로님께서 단에 오르셨습니다. 매우 유명하신 분이라 하니 호기심이 생겨 단에 오르신 박 장로님을 유심히 보았는데, 인자한 얼굴에 키가 훤칠한 신사분이셨습니다. 특히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와 밝고 환한 얼굴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박 장로님은 손뼉을 치시며 큰 소리로 찬송을 인도하셨습니다. 제가 다니던 장로교회에서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찬송을 불렀기 때문에 그 모습이 조금 낯설었지만, 금세 익숙해져서 함께 손뼉을 치며 신나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 후 이어지는 설교 말씀도 장로교회에서는 듣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장로교회 목사의 설교는 유명인이나 세상 이야기를 비유 삼아 착하게만 살면 구원 얻고 천국 간다는 식이었는데, 박 장로님은 죄를 해결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명쾌하고 가슴에 와 닿아서, ‘과연 박 장로님은 다르구나’ 하고 말씀에 푹 빠져 집중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강대상을 ‘탕’ 하고 치시는데, 그 순간 강대상에서 하얀 구름이 몰려나와 사람들을 향해 쫙 퍼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구름은 박 장로님이 강대상을 치실 때마다 뭉게뭉게 퍼져서 사람들 사이로 안개같이 흩어졌습니다. 그 신기한 광경이 무척 놀라웠고, 또 사람들이 단상 앞에 나와 각자 무슨 은혜를 받았다며 실감 나게 이야기하는데, 얼마나 재미나는지 집에 갈 생각도 잊은 채 철야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밤을 새워 찬송하고 기도를 하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피곤과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날이 밝아 이틀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왜 그리도 하염없이 눈물이 나는지 계속 울면서 ‘하나님, 이 죄 덩어리가 왔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며 기도하던 중 머리카락이 타는 것처럼 고약한 냄새가 났습니다. 어디서 이런 지독한 냄새가 나나 궁금한 것도 잠시, 냄새는 사라지고 몸이 공중에 둥둥 뜨는 듯한 기분이 들며 마음이 한없이 기쁘고 즐거워졌습니다. 그 당시는 ‘참 신기한 일이다’ 하고 의아해하고 말았는데, 나중에 주변 사람들을 통해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남산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은혜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집에서도 저는 왜 그리 마음이 기쁜지 얼굴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기쁨 덕에 제 입에서는 찬송이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코에서 향긋한 냄새가 맡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달콤한 미제 풍선껌이나 꽃향기 같기도 했지만 그 향기는 그런 향기에 비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바로 그 순간 이것이 남산집회에서 들었던 향취 은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무도 좋은 그 향기는 코 밑에서 동글동글 회오리바람처럼 불어왔고, 이틀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집에서 청소를 하거나 빨래를 할 때도 계속 향취가 맡아졌고, 기분이 어찌나 좋은지 계속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집회에 처음 참석한 제게 귀한 은혜를 부어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저는 틈만 나면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리고, 일을 할 때도 찬송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남산집회를 다녀와서 이틀 동안은 향취가 끊이질 않더니, 셋째 날부터는 가슴이 후끈후끈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인 것처럼 가슴 속에 큰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듯했습니다. 처음에는 가슴이 뜨거운 게 이상해서 손으로 문질러 봤지만 여전히 뜨거운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고, 낮이고 밤이고 이어져 일주일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어느 순간 가슴 속 뜨거움이 사라지고 목으로 단물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물이 그렇게 달고 시원할 수 없었습니다. 단물이 마셔지면서 기분이 둥둥 떠서 날아갈 듯이 기쁘고, 배 속까지 시원해짐을 느꼈습니다. 남산집회에서 만난 분들이 ‘은혜 받으면 달고 시원한 생수가 마셔진다’고 하시던 바로 그 생수를 내가 체험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대상을 치시자 하얀 구름 같은 것이 몰려나와 사람들 사이로 흩어져 집에 돌아와서도 말로 표현 못할 좋은 향취 맡고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은혜를 체험 받은 은혜가 분명하니 은혜를 주시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돼 박 장로님 집회에 다녀오고 저는 다니던 공덕동 장로교회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3년을 다닌 교회였지만 예배 시간에 그 어떤 은혜도 받지 못했고, 설교 말씀을 들어도 제 마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박 장로님의 집회에서 확실한 은혜를 체험하니 기성교회는 생명의 말씀도 없고 은혜도 없으며, 모든 것이 형식에 불과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서울 원효로에 박 장로님께서 전도관을 세우시게 되면서 거기 다니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는 마포 언덕에 웅장한 이만제단이 건설되었습니다. 이만제단에서 울리는 은은한 음악 종소리를 들으며 새벽예배를 가는 길은 하루 일과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새벽예배를 가다 보면 어김없이 진한 향취가 맡아졌고, 새벽예배를 드리고 나면 마음속 기쁨과 감사함이 충만해져서 더욱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만제단에 다니면서부터는 설교 말씀을 더욱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특히 화를 내는 마음과 고집부리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전까지는 화를 내고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박 장로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죄를 더욱 예민하게 구분하게 되었고, 고집과 혈기처럼 죄된 마음을 버려야만 의로움을 입어 구원에 이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56년 결혼 후 의정부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만, 다행히 그곳에서도 가까운 전도관을 찾아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처음 의정부제단은 건물이 없어 천막을 치고 가마니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는데, 교인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땅을 마련하고 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교회를 건축하는 사람들에게 밥을 해서 가져다주며 공사를 도왔습니다. 번듯하게 지어진 의정부전도관을 보니 마음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습니다. 의정부에 살던 시절 한번은 소사신앙촌에 가서 하나님께 안찰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한 명, 한 명 안찰해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 손이 닿자마자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손이 아주 살짝 닿은 것 같았는데 사람들이 왜 그리 아파하는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런데 제 차례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엄지손가락을 제 눈에 대시자마자 별이 번쩍하며 눈알이 빠질 듯이 아픈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꾹 참고 안찰을 다 받으니 어느새 가슴 속이 시원해지면서 향취가 맡아졌습니다. 안찰을 받을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은 죄가 성신에 대항하는 까닭이고, 안찰을 받은 후 속이 시원해지는 것은 죄가 소멸되었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소멸하는 권능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1981년 하나님께서 예수의 허풍을 지적하시고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을 때도 한 치의 의심 없이 ‘옳습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하고 기뻐했습니다. 이슬 같은 은혜를 직접 보고, 향취를 맡고, 안찰을 통해 받은 은혜가 너무도 분명했기에 죄를 씻어 구원을 주시는 진짜 하나님이심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저는 계속 신앙생활을 하며 귀한 이 길을 따라오고 있습니다. 요즘은 집에서 찬송가 185장을 자주 부릅니다. ‘인애하신 여호와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하는 가사가 죄의 길에서 저를 돌이켜 불러주신 하나님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인자한 얼굴로 웃으시던 하나님 모습이 선명합니다. 이슬 같은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뵙고, 또 그 은혜를 받았던 시간은 억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죄도 모르고, 은혜도 몰랐던 철부지 같은 제게 한없는 은혜를 부어 주시며 구원의 길을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 마음속에 추한 것을 물리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며 아름답고 성결한 마음 주시기를 오늘도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찬란한 빛으로 오시는 그날 빛 앞에 서는 자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주 안에 행복을 누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주 안에 행복을 누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건설대에서 일을 배우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 후에는 원하는 사람만 작업하러 나오라고 했는데, 저는 몹시 피곤해서 그만 들어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식사하는 동안 피곤이 점점 사라지더니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한 것이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이 가뿐하고 기운이 솟아올라 다시 현장에 나가 신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저녁 식사 시간에 하나님께서 건설대 식당을 향해 한참 동안 축복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주셔서 그렇게 몸이 가벼웠구나!’ 하며 마음 깊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건설대에서 일하며 다치거나 아플 때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은 일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못에 발이 심하게 찔려서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할 때 친구 부축을 받고 하나님께 갔는데 “쉭! 쉭!” 하시며 축복해 주시자마자 곧바로 지혈이 되고 아프지 않아서 그길로 혼자 뛰어 온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국으로 순회 집회를 다니시는 중에도 건설대에 자주 오셔서 안수와 안찰로 힘을 주셨고, 반 별로 생명물을 축복해 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저는 신앙촌에 들어간 후로 늘 좋은 일이 있는 것처럼 싱글벙글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웃에 사시는 어른들은 저를 보시고 “너는 언제 봐도 웃는구나.” “신앙촌이 그렇게 좋아?” 하며 같이 웃곤 하셨습니다. 건설대에서 땀 흘려 일할 때도, 제단에서 찬송을 부를 때도, 신앙촌 거리를 걸을 때도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이 샘솟는 것 같았습니다. ‘찬송가 가사에 있는 것처럼 주 안에 행복을 누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설대 일로 몸이 피곤해 쉬려는데 피곤이 점점 사라지고 개운해져 하나님께서 건설대 식당을 향해 한참 동안 축복해 주심을 알게 돼 신앙촌에서 기쁘게 생활하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영어의 몸이 되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국에 전도관이 세워지고 신앙촌까지 건설돼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몰려오자 특정 종교계와 그들을 등에 업은 일부 정치인들이 합세해 아무런 죄도 없이 옥고를 치르시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루는 새벽예배에 가려고 준비하는데 “쉭! 쉭!” 축복하시는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깜짝 놀라 문을 열고 나가 봤지만 아무도 없었고 집 안에는 어느새 향취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축복해 주시는 소리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했습니다. 새벽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원해지고 몸이 얼마나 가벼운지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둥둥 떠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그 일을 잊어버리고 지냈는데 하나님께서 영어에서 돌아오셔서 예배를 인도하실 때 “그동안 내가 축복해 준 사람들이 있다.” 하시며 축복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손들어 보라 하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축복 소리가 생생히 들렸던 일이 떠올라 ‘은혜를 주셨구나!’ 하며 손을 번쩍 들고 보니 여러 사람이 손을 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어에 계실 때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됐습니다. 새벽예배를 가려고 준비하는 중에 `쉭! 쉭!` 축복해주시는 소리가 크게 들려 어느새 향취가 진동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이 시원하고 가벼워져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시며 은혜를 내려주심을 절실히 느끼게 돼 1962년 두 번째 신앙촌인 덕소신앙촌이 건설되면서 저도 덕소에 입주해 몇 년 동안 지냈습니다. 그 후 스물일곱 살에 결혼하면서 서울로 나오게 되었고 경기도 파주로 이사하고부터는 파주전도관에 다녔습니다. 그때 서울에 살던 남동생은 천호동제단에 다니며 아버지를 모셨는데 1977년 아버지가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는 제단에 다니지 않으셨지만 남동생과 저는 입관예배를 드리며 전도관식으로 장례를 치르자고 했습니다. 입관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생명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아버지 입에 넣어 드렸더니 한 방울도 흘러나오는 것 없이 다 들어갔습니다. 또 생명물로 깨끗이 닦아 드리자 주름살이 다 사라지고 얼마나 곱게 피었는지 청년처럼 젊어 보였습니다. 특히 원래 까무잡잡했던 피부가 뽀얗고 환하게 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모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며 “너희 아버지에게 화장을 해 드린 거냐?” 하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천호동제단 관장님과 교인들이 오셔서 입관예배를 드린 후에는 더욱 환하게 피었고, 온몸이 살아 계신 분처럼 노긋노긋 부드러워서 앉혀 놓고 수의를 입혀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비록 하나님을 모르셨지만 하나님께서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셔서 아름답고 편안한 모습으로 가셨습니다. 돌아기신 아버지를 생명물로 닦자 주름살이 사라지고 뽀얗고 곱게 피어 입관 예배 드리니 몸이 노긋노긋해져 앉혀 놓고 수의를 입혀 드릴 정도 그즈음 저는 파주에서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앙촌 담요 인기가 얼마나 좋던지 물건을 갖다 놓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이 팔렸습니다. 신앙촌 물건을 찾는 사람들이 많으니 고객을 만나다 보면 어느새 하루해가 저물었고,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바빴습니다. 소비조합을 열심히 하면서 경제적으로 풍족해져서 딸아이 둘을 대학교에 보내고 부족함 없이 뒷바라지할 수 있었습니다. 소비조합을 하는 동안 저는 항상 마음속으로 신앙촌을 그리워했습니다. 매일 기도드릴 때마다 ‘하나님! 저도 신앙촌에서 살게 해 주세요.’ 하는 말로 끝을 맺었는데, 1999년 드디어 기장신앙촌에 입주하게 됐을 때는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스무 살에 소사신앙촌에 들어가 싱글벙글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때처럼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저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볼 때면 ‘하나님을 뵙고 참 행복하게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를 잃은 후로 춥고 외로웠던 제 마음을 포근히 감싸 주셨던 은혜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주시는 은혜 잘 간직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그보다 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이 있을까 싶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저를 이 길로 불러 주신 사랑에 감사드리며 하루하루 그 뜻대로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유효순 승사님 신앙체험기)

신앙체험기 특집

천부교회를 찾아서

뉴스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홀로코스트의 진범(眞犯)은 누구인가? (上)

홀로코스트란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유대인 학살을 뜻하는 용어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를 들으면 강제 수용소에서 착취당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유대인의 모습이나, 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의 텅 빈 눈동자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만큼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영상과 사진, 각종 문헌을 통해 생생히 알려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료1,2,3,4,5> 그러나 홀로코스트에 대해 아직 베일에 싸인 듯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있는데, 홀로코스트의 뜻이 “불에 의한 파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나치가 유대인을 불에 태워 ‘소각’하면서 세상을 정화시킨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랜 세월 세상을 지배해 온 집단이 ‘악을 처리하는 방식’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이 집단은 유대인을 향해 ‘예수를 살해한 종족이자 악의 근원’이라고 지목해 왔을 뿐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유대인을 학살한 전범(戰犯)들을 법의 심판을 피해 안락한 삶을 누리도록 보호하고 은닉해 주었다. 이에 기획기사에서는,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알지 못하는 홀로코스트의 진범 (眞犯)에 대해서 두 편에 나누어 조명해 본다. 먼저 홀로코스트라고 하면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를 떠올리는 것은 히틀러가 학살의 광기에 사로잡힌 독재자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격렬한 제스처와 함께 “유대인을 절멸시켜야 한다!”고 외치는 히틀러의 모습이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돼 있지만, 흥미로운 것은 히틀러가 자신의 일생을 기록한 자서전에서도, 히틀러의 생애를 탐구한 학자들의 연구에서도,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의 광기에 사로잡힐 만한 근거나 경험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이렇게 적었다.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처음으로 특별한 느낌을 갖게 한 것이 언제였는지 말하기란 곤란하다. (…) 나는 중세의 유대인 박해를 생각하면 기가 죽는다. 이것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자서전에서 밝히기를, 심경에 일대 반전이 일어나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고 술회하면서도 정작 변하게 된 명료한 근거나 경험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못했다. 히틀러 연구자인 이언 커쇼는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히틀러가 왜 그렇게 미친 듯이 유대인 학살에 집착했는지 모르고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도 모른다.”라고 했다.(이언 커쇼, <히틀러1>, 교양인. 2012년, p.118.)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가 유럽을 정복하겠다는 야망과 광기에 사로잡힌 것은 각종 사료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이지만, 유대인 말살에 집착한 것은 그 계기가 명확하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히틀러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독일 작가이자 역사가 브리지트 하만) 그렇다면 히틀러와 나치가 처음으로 정권을 잡았던 1933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본다면 유대인 말살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933년 4월, 히틀러 정부는 가톨릭 교황청과 ‘제국종교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비밀리에 교섭을 시작했다. 이 협약은 교황청이 히틀러 정부의 정치 활동을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지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것으로, 정치권의 아웃사이더로 평가받으며 지지 기반이 약했던 나치와 히틀러에게 이 조약을 성사시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히틀러와 교황청이 맺은 이 조약은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하자마자 전 세계 여러 나라 중에서 최초로 맺은 조약이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사활을 걸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 정부가 교황청과 교섭을 시작하던 4월, 나치당원들은 범국가적인 유대인 차별 운동에 돌입해 유대인의 가게를 불태우기 시작했고, 히틀러 정부는 ‘사법시험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켜 유대인 변호사들의 활동을 금지했는데 이는 유대인을 차별하는 첫 번째 법률이었다. 이때부터 4월 한 달에만 유대인의 교사와 판사 활동 금지, 유대인 참전 용사와 그 가족의 연금 차단 등의 정책이 계속해서 발효되었다. 유대인을 차별하는 법률이 시행되자 ‘누가 유대인이고, 누가 가톨릭 신자인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때 가톨릭 사제들은 그들이 갖고 있던 결혼 증명서와 세례식 증서를 나치당에 넘겨 주었고, 나치는 이를 사용해 유대인을 색출하고 차별하는 근거로 삼았다. 나치가 반유대 정책을 대대적으로 파급시키는 동안 가톨릭 교황청은 히틀러 정부와 성의 있게 교섭에 응했고, 마침내 7월 20일 33개 조항으로 구성된 제국종교협약에 조인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추기경 폰 바오로하버는 “교황과 히틀러간의 협약은 헤아릴 수 없는 축복입니다. 예수여! 히틀러를 보호하소서.”라고 감격스러워했으며, 나치 또한 로마가톨릭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정치적 지배권을 강화시켰다는 것에 만족스러워했다. <자료6> 이후에도 히틀러 정부는 유대인을 차별하는 법률을 계속해서 제정해 유대인은 가톨릭 신도와 결혼할 수 없고(독일의 혈통과 명예 보호법) 공무원이 될 수 없으며 (직업공무재건법), 대학교의 학위를 받을 수 없도록 했는데(독일 학교 및 대학의 과밀을 방지하기 위한 법), 이와 판박이 같은 선례가 로마가톨릭교회에 있었다. 가톨릭 교회법에 따르면 유대인은 가톨릭 신도와 결혼할 수 없고(306년 엘비라 종교회의) 공무원이 될 수 없으며(535년 클레르몽 종교회의), 대학교의 학위를 받을 수 없었던 것(1434년 바젤 평의회)이다. <자료7> 이처럼 교회법이 시행된 시점을 보면, 유대인 차별은 4세기부터 유구한 역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4세기는 로마가톨릭이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받아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던 때인데, 흥미로운 것은 가톨릭이 이런 힘을 갖기 전까지 로마제국에 유대인을 차별하는 법률이 없었고 로마시민들과 법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아 유대인이 로마인과 결혼할 수도 있고 로마의 공직을 얻을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보면 로마가톨릭 교회가 정치적인 세력을 갖게 되면서부터 유대인 차별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역사적으로 로마가톨릭을 시작점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이 창궐해 혼란과 공포가 극심하던 시기에 벌어진 사건이 있다. 당시 로마가톨릭은 순식간에 죽음을 몰고 오는 흑사병이 타락한 인간을 향한 신의 회초리라고 했고, 이에 따라 대규모 참회 집회가 늘어났지만 가톨릭교회에 사람이 모이면 모일수록 흑사병은 도리어 더 빨리 퍼졌다. 신의 분노를 풀겠다며 스스로를 채찍으로 때리는 ‘채찍질 고행단’이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자 병균은 더욱 빨리 전염되었다. <자료8> 온갖 대책에도 떼죽음이 멈추지 않자 채찍질 고행단을 비롯한 가톨릭 신도들은 유대인을 ‘이 모든 악의 근원’으로 지목하기에 이르렀고, 유대인을 감금하고 끔찍한 고문으로 자백을 이끌어냈다. 유대인들 입에서 “악마의 사주를 받아 우물에 병균을 퍼뜨렸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고문은 계속되었고, 고통을 이기지 못한 유대인이 시키는 대로 자백하면 유대인을 남녀노소 구별 없이 시나고그(유대인 회당)에 가두고 불을 붙여 몰살시켰다. <자료9> 이 같은 학살이 1348부터 2년간 유대인 공동체 1000곳 이상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유대인 학살을 지칭하는 홀로코스트(Holocaust)는 ‘불에 의한 파괴’이며 이는 인간이 신의 분노를 풀기 위해 악의 근원을 불태워 죽이는 것을 어원으로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중세의 사건이 홀로코스트의 진정한 발화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연구한 역사가 라울 힐베르크는 ‘유대인 학살은 정신의 문제이자 공감의 문제’라고 분석했다. 행정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유대인 전체를 학살한다는 계획은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는 일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치는 기괴할 만큼 극단적인 효율성으로 학살을 수행했는데 이 효율성은 유대인을 파괴해야 한다는 정신과 공감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치의 SS대원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극단적인 효율성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유대인의 재산 몰수와 수송을 책임지고 있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1942년 나치 고위급 회의에 참석한 후 유럽 전역에서 ‘최종 해결’ 해야 하는 유대인의 숫자를 표로 기록했다. 최종 해결이란 곧 대량학살을 의미했고 그 목표 숫자는 1,100만 명에 달했다. <자료10> 아이히만은 독가스실이 운영되는 ‘절멸 수용소’를 향해 기차 노선을 운행하고 유대인을 어떻게 수송할 것인지 계획을 작성했는데, 전쟁 막바지에 기차로 끊임없이 군수 물자를 운송하는 속에서도 극도의 효율성을 발휘해 유대인이 기차를 타고 신속하게 독가스실로 직행하도록 했다. <자료11> 그는 자신이 기차에 태운 유대인의 숫자가 수백 만에 달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전쟁이 끝난 후 나치 전범(戰犯)들은 뉘렌베르크 재판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범죄에 대한 재판을 받았지만 아이히만은 처벌과 추적을 피해 교묘하고도 치밀하게 종적을 감췄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60년, 아이히만은 유대인 정보기관이 집요하게 추적한 끝에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됐는데, 이 가공할 범죄자의 탈출과 은닉을 실행한 세력이 로마가톨릭 교회라는 사실이 그때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아이히만 은닉에 주도적인 임무와 책임을 부여 받은 사람은 두 명이었는데 알로이스 후달이라는 주교와 신분 세탁을 위해 서류를 만든 안톤 베버라는 신부였다. 서류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히만은 주세페 시리 대주교가 관할하는 제노아의 수도원에서 은밀하게 생활하며 완벽한 보호를 받았다. 아이히만은 1960년 체포된 후 심문을 받았을 때 “아르헨티나로 가는 동안 가톨릭 사제들이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계속해서 도와주었다.”고 증언했다. <자료12,13> 아이히만은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국제 적십자사가 발행한 여권을 소지했는데, 이는 교황청의 난민 지원 위원회가 난민들의 이민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적십자사를 통해 여권을 발급해 준 덕분이었고, 이것이 신분 세탁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자료14>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로 도주한 후 15년간 가족들과 안락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것은 안전한 은닉을 가능하게 해 준 로마가톨릭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힘입은 것이었다. 로마가톨릭에서 구출한(?) 사람은 아이히만뿐만이 아니었다. 악명 높은 소비보르와 트레브린카의 절멸 수용소 지휘관으로 1백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프란즈 스탕글도 로마가톨릭의 손길에 숨겨진 인물이었다. 패전의 기운이 짙어지자 폴란드 국경을 넘어 도망치던 스탕글은 아이히만과 마찬가지로 후달 주교를 만나 안전한 은닉처를 찾았을 뿐 아니라 후달 주교가 두 손을 들어 스탕글을 환영했다고 하니 얼마나 큰 위로를 주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료15> 또한 나치의 SS 연대장이었던 발터 라우프는 움직이는 가스 차량을 이용해 9만 7천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자였는데 역시 후달 주교의 도움으로 추적자들을 피해 달아날 수 있었고, 교황청 직속의 수녀원(convents of the Holy See – 발터 라우프는 1963년 칠레 대법원 증언에서 가톨릭 사제의 도움을 받아 약 18개월 동안 “교황청 직속 수녀원”에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에 은신하다가 결국 시리아로 도망쳐 1984년까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자료16> 요컨대 로마가톨릭의 보이지 않는 손길은 홀로코스트의 설계자와 실행자를 구원한 것이었고, 그 손길로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다른 나라에 세워진 독재 정권의 정치적 고문 역할을 하면서 또다른 홀로코스트의 발화점이 된 인물도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후술하기로 한다. 최근 미국 가톨릭 주교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사형 집행에 반대하며 “우리는 죽음을 야기해서는 안 되며 생명을 수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형은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예수의 부르심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미국이 사람을 죽이는 시대로 회귀하려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찢어집니다.”라고 호소했다. 나치가 갈고리 십자가를 앞세우고 학살을 했던 시대처럼 사람을 죽이는 시대로 회귀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의 생명조차 존중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은 듣는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지만, 역사상 가장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진범이라면 그 정도 사형수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용서를 베풀어 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그들의 호소와 용서는 섬뜩할 뿐이다. <자료17>

하나님 말씀 경전<br />
하나님 말씀 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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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시작, 한 해의 마무리! 신앙촌에서 김장을 하다

겨울의 시작, 한 해의 마무리! 신앙촌에서 김장을 하다

신앙촌은 신앙인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는 도시로, 생산·교육·종교 활동을 위한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본지에서는 ‘윤 기자의 리얼 신앙촌 체험’을 통해 신앙촌의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 편집자주 # 9월 12일, 아기 배추를 만나다 한일영농에서 배추를 심는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밭으로 달려갔다. 처음 가본 배추밭. 이랑마다 아기자기한 모종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여리디 여린 연두빛의 모종만 봐서는 배추인지 상추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12월에는 다 자란 배추를 수확할 수 있다고 하니 꾸준히 지켜보기로 했다. # 9월 22일, 배추가 무럭무럭 자라길 배추밭에 EM효소를 주러 갔다. EM은 유익한 미생물을 말하는데, 농약 대신 효소를 주면 배추도 잘 자라고, 벌레도 잘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밭에 가보니 저번에 봤던 귀여운 배추 모종들이 아주 조금 자라 있었다. 호미로 모종 옆에 구멍을 뚫고, 숟가락으로 효소를 넣어 묻어줬다. 흙을 토닥토닥 다듬어주며 크고 튼실한 배추가 되길 속으로 바랐다. ̒배추야 얼른 무럭무럭 자라렴. #12월 2일, 드디어 배추 수확하는 날 오늘은 배추 수확하는 날. 자주 가보진 못했지만 나름 틈틈이 밭에 들러 애정있게 지켜 본 배추를 뽑으러 간다. 그런데 밭에 도착해서 본 배추는 내가 아는 배추가 아니었다. 겉잎을 떼어내기 전 원시적인 모습을 한 배추는 무척이나 크고 무성했다. 올해는 배추가 풍년이라 더 크다고 했다. 배추는 앞으로 꺾으면 뿌리까지 쑥 빠지는데, 그때 겉잎과 뿌리를 한꺼번에 잘라낸다. 하얀 배추 밑동이 드러나자 그제야 마트에서 보는 배추 같았다. 한참 배추를 뽑는데 새참으로 찐 고구마 한 솥이 왔다. 일하던 영농식구들 모두 솥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의 맛은 진정 꿀맛이었고, 웃음이 절로 났다. 고구마 먹고 힘이 난 우리는 한 줄로 서서 릴레이로 배추를 옮겼다. 손발이 착착 맞는 다는게 이런 기분일까? 배추를 트럭에 한가득 싣고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왔다. # 12월 5일, 김장의 시작, 속 만들기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김장하러 가기 전, 친구가 양말을 하나 더 신고 가라고 조언해줬다. 김장하다 물에 젖으면 발이 시려울 수 있다고 했다. 종합식당에 도착하니 앞치마, 장화, 마스크 등을 갖춰 입으라는 안내문구가 붙어있었다. 키는 아담하지만 부피는 아담하지 않은 나를 위해 적당한 중사이즈 앞치마를 골랐는데, 누군가 더 긴 걸 고르라고 했다. 짧은 앞치마는 일하다 물이 장화 속으로 떨어질 수 있으니 장화까지 덮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여러 김장 선배들 덕분에 최적의 아이템으로 무장할 수 있었다. 오전에 할 일은 배추를 절이는 일. 커다란 통에 배추를 꽃잎처럼 차곡차곡 예쁘게 펼쳐서 쌓고, 줄기 쪽에 소금을 착착 뿌렸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배추는 금새 숨이 죽어 일하다가 돌아보면 높이가 낮아져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도 될 만큼 커다란 통 7개를 채우고 나서 다음 조와 교대를 했다. 오후에는 김치 속을 만들었다. 물과 고춧가루, 생강, 새우젓, 청각, 쪽파, 무채 등을 넣고 잘 섞이도록 버무렸다. 표현하자면 갯벌을 두팔로 계속 휘젓는 느낌이었다. 꽤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속을 만들고 나니 벌써 하루가 다 갔다. 내일은 김치를 만드는 날. 기대가 된다. 아니 사실 조금 걱정된다. # 12월 6일, 대망의 김장하는 날 드디어 김치를 만들러 간다. 신앙촌 김장은 규모가 커서 주민들이 오전과 오후로 팀을 나눠 자원봉사를 한다. 오전에는 입사생 봉사팀이 절인 배추를 깨끗이 씻어놨다고 했다. 오후에는 나를 포함한 여청, 소비조합팀은 배추에 속을 넣기로 되어 있었다. 도착해보니 봉사자들은 벌써 준비를 마치고 완전 무장해 있었다. 하얀 모자, 하얀 앞치마, 하얀 마스크에다가, 김장의 상징 분홍 고무장갑까지… 김장을 위해 모인 파워레인져 같았다. 든든한 그 모습에 김장 초보인 나는 마음이 놓였다. 배추 앞에 섰지만 어찌해야 할 지 몰랐다. 속을 많이 넣으면 짜고, 조금 넣으면 간이 안 배니 적당히 넣어야 한다는데, 그 적당히가 어느 정도인지 초짜에겐 어려운 주문이었다. 곁눈질을 해가며 옆 사람과 비슷한 색이 나오게 했다. 잘 하고 있는 건가 궁금해서 앞에 언니에게 물어보니, 배추 겉 잎부터 속을 넣으면 편하다고 했다. 처음부터 물어볼걸 그랬다. 반대로 하고 있었다. 배추를 뒤집어 잡고 다시 속을 넣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옆에 쌓인 배추가 줄지를 않는 것이었다. 손이 점점 무뎌지고 느려졌다. 하지만 밝은 표정으로 즐겁게 일하는 어른들을 보며 다시 힘을 냈다. 4시쯤 되자 슬슬 끝이 보였다. 마무리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기도 전에 신앙촌 사람들은 일사분란하게 배추 조각을 치우고 대야를 닦고 뒷정리를 했다. 항상 느끼지만 이곳 사람들은 손이 광장히 빠르고 일을 잘한다. 짐을 나르면 이삿짐센터 뺨치고, 김치를 담가도 공장 수준이다. 식당에서 저녁식사로 우리가 담근 김치와 떡국이 나왔다. 익은 김치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직접 담가서인지 김치가 참 맛있었다. 따끈한 떡국과 갓 담근 김치에 하루의 피로가 모두 녹아났다. # 에필로그 사실은 김장을 하며 민폐가 될까봐 꽤나 걱정했다. 실수를 한다든지, 손이 너무 느려서 남에게 피해를 준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많이 노력했지만 역시나 손이 느리고 서툴렀다. 하지만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따뜻하게 도와줬다. 무거운 것은 같이 들자고, 어려운 것은 도와준다고, 또 허리 아프면 잠시 쉬라고…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마음의 짐을 덜고 김장 파워레인져의 일원으로서 기쁘게 김장을 마쳤다. 배추의 속을 채우듯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동지애를 느꼈다면 요즘 말로 오글거리는 것일까? 아무튼 겨우내 먹을 김장을 하고 마음이 부자가 된 나는 오늘 내가 담근 것이 김치가 아닌 행복일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마음 속에  늘 그리던 ‘신앙촌’

마음 속에 늘 그리던 ‘신앙촌’

추수감사절을 맞아 19년 만에 찾아온 신앙촌은 마음의 고향 9년 만에 신앙촌에 왔습니다. 신앙촌 소비조합을 하다 미국으로 이민 간 후 유치원을 운영하며 바쁘게 살아왔지만, 언제나 가슴 한켠에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죄송함이 있었습니다. 늘 그리워했던 신앙촌이었기에 더는 미룰 수 없단 생각이 들어 어려운 상황에도 망설임 없이 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었습니다. 2주간의 격리를 마치고 신앙촌 가는 길. 예전의 기억대로 초입에 무성한 소나무길을 떠올리며 들어섰는데, 기억과 달리 다양하고 풍성한 나무들이 저를 맞이했습니다. 신앙촌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밝은 기운이 넘쳤고, 여유롭고 환한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더 아름다워진, 그리고 더욱 젊고 힘이 넘치는 신앙촌. 제가 떠나있는 동안 축복받은 도시 신앙촌은 참 많이도 발전해있었습니다. 신앙촌에 머무는 꿈결 같은 시간 동안 반가운 얼굴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시온 합창단을 함께 했던 친구, 존경하던 관장님, 친하게 지내던 권사님 등 만나는 분들마다 정말 잘 왔다고 요구르트 런을 한가득 주셔서 그것만 먹어도 배부르겠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온정 넘치는 마음, 다정한 말 한마디, 느껴지는 진심에 내가 신앙촌에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며 변하지 않는 진리, 자유율법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살아왔는가. 자유율법의 수준이 100이라면 나는 단 5라도, 10이라도 지키려 노력했는가. 양심에 비춰 돌이켜보니 부끄럽기만 한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받으면 자유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말씀을 듣고 구원의 소망을 다시금 마음 속에 품어봅니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추수감사절날 신앙촌에서 만든 추억을 가슴에 품고, 올 한해를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이 다짐.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진실로 노력할 것을 깊이 다짐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시온오케스트라와 함께해 온 시간, 순수한 열정과 노력”

“시온오케스트라와 함께해 온 시간, 순수한 열정과 노력”

입사생의 출발과 함께 시작된 시온오케스트라는 신앙촌 사원들로 이루어진 현악부와 관악부가 독자적으로 활동하다가 1996년 추수감사절 무대에서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연주를 선보이며 창단되었다. 지금도 매해 절기뿐 아니라 신앙촌의 크고 작은 행사에서 활발히 활약하고 있다. 시온오케스트라와 오랜기간을 함께한 홍기정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다. 20년 넘게 시온오케스트라를 가르친 베테랑 바이올리니스트 제자들과 호흡 맞춰 천부교 절기 무대의 음악 순서에서 합창 교향곡과 경기병 서곡, 인터메조 연주해 “지금껏 봐온 시온오케스트라는 대단한 열정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에요. 사원들로 구성되었기에 연주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처럼 시간을 할애할 수 없는데도 매년 연주회를 해내잖아요. 그 자체가 대단한거예요. 바이올린을 40여년 한 저 또한 음악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할 수 있거든요. 시온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음악을 정말 좋아하는 마음과 열정이 너무 좋기 때문에 이 어려운곡들을 해낼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정말 박수를 쳐주고 싶어요.” 바이올리니스트 홍기정 씨는 부산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수석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는 중견 음악가이다. 시온오케스트라가 창단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98년부터 단원들의 레슨을 맡으며 지금까지 20년 넘게 시온오케스트라와 함께해 오고 있는 홍기정 씨에게 올해는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지금까지 바이올린을 가르치기만 했는데, 올해 5월 이슬성신절에 시온오케스트라의 무대에서 처음으로 연주를 하게 되었고 11월 추수감사절 무대에도 서게 되었어요. 이슬성신절을 앞두고 시온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연주하기 위해 연습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올해가 베토벤이 탄생한 지 250주년이 되는 해라 제가 몸 담은 악단에서도 합창 교향곡 연주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시온오케스트라는 어떻게 할지 궁금하더라구요. 4악장은 프로 음악가들도 하기가 어려운데 그 연습이며 편성이며 합창을 해낼 수 있을지, 또 분량을 적절히 줄여서 편곡을 했다고 하니 더 궁금하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너무 재미있었어요.” 베테랑 바이올리니스트가 재미있다고 느낀 것은 바로 25분 분량의 합창교향곡 4악장을 10분이내로 발췌하고 다양하게 구성한 악보였다. 그 후 객원 연주자로 함께하겠냐는 제의를 받고 단번에 승낙했다고 한다. “합창단도 연주하기에 좀 어렵지 않을까 했는데 그 높은 고음이 가뿐하게 올라가더라고요. 요즘 같은 시기에 비대면으로 연습해야 하니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내는 청소년부터 중저음을 담당하는 중년층까지 여러 연령대가 모여서 합창을 하는 것도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11월 추수감사절 무대에 함께하겠냐는 제의를 받았을 때 너무 좋았죠.” 추수감사절 음악 순서의 서막을 연 ‘인터메조’는 지휘자 없이 연주자들의 호흡만으로 청중에게 다가가는 음악이었다. 조용하면서도 깊이 있는 분위기, 평온한 감정 속에 기쁨이 녹아 있는 인터메조를 연주하기 위해 ‘어떻게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인터메조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하는데 집에 가서 연습을 진짜 많이 했어요. 여기 비브라토를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어떻게 해야 좋은 소리가 날까 하면서 고민을 하는 거예요. 사실 3분 정도의 짧은 곡인데 진짜 공을 많이 들였어요 관객들에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가 관건이었거든요.” 45년 경력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제자들과 호흡을 맞춰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며 노력과 정성을 다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사이에 공감대와 공통점이 있어서일 것이다. 홍기정 씨는 신앙촌 사람들의 순수한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하며 “아마 우리 사이에 그런 공통점이 있어서 22년 동안 함께한 게 아닐까요?” 하며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은 조화롭고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과 닮은 듯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권능 잊을 수가 없지요”

“하나님의 놀라우신 권능 잊을 수가 없지요”

문둥병에 걸린 이웃 사람이 전도관 다니며 씻은 듯이 나은 것 직접 보고 놀라워 이번 추수감사절에 소사교회 배태란 권사와 함께 신앙촌을 찾은 정수복 씨는 십 대 소녀 시절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한다. “1957년 제가 열여섯 살 무렵 전라북도 산골(완주군 소양면 명덕구 삼태동) 에서 살 때였어요. 아랫동네 아주머니(유 집사님) 한 분이 시집에서 지독한 문둥병에 걸려서 친정에 돌아왔는데 눈썹도 다 빠지고 얼굴 피부가 심하게 짓물러 고름이 툭툭 터진다고 했어요. 어린 마음에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았고, 그분의 친정 식구들도 옮을까 무서워서 방에 가둬 놓았다고 했어요. 그런데 몇 달이 지났을까, 아주머니 한 분이 동네 길거리에서 북을 치고 다니면서 ‘전도관에 나오세요! 귀한 은혜 받으세요.’ 하고 외치기에 뭐 하는 분인지 동네 어른들에게 물어봤더니, 저분이 문둥병 아주머니라는 거였습니다. 어른들 이야기로는, 전주전도관이라는 곳에 다니면서 씻은 듯이 문둥병이 나았고 그때부터 열성적으로 전도한다고 했습니다. 눈썹이 조금 옅은 것 외에는 아무리 봐도 건강하고 젊은 아주머니일 뿐, 문둥병을 앓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고, 북을 치며 신나게 외치는 그분의 얼굴은 빛이 나는 듯 환해 보였지요. 문둥이가 나았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온 동네가 들썩들썩했고, 그 댁의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전부 전도관에 다니게 됐다고 했습니다. 그분 댁은 유복한 편이었고 집 마당도 학교 운동장만큼 넓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전주전도관에서 청년들이 찾아와 그 댁 마당에서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멍석을 깔아 놓은 마당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동네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고, 소양면 사람들이 대부분 전주전도관에 다닐 정도로 크게 부흥이 되었습니다. 저도 일주일에 한 번씩 그 댁 마당에서 예배를 드리다 보니 아주머니와 가까워졌지요. 아주머니는 신앙촌 캐러멜을 자주 주시며 ‘축복 캐러멜’이라고 하셔서 그 달콤하고 맛있는 캐러멜을 소중하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로 전주전도관에 다니면서 2주일에 한 번씩 전주에 오시는 하나님을 뵙고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 시간에 강대상을 ‘탕’ 치시면 불이 번쩍번쩍 나오던 일, 단상에서 마이크를 들고 힘차게 말씀하시던 모습, 예배 후 떠나시기 전에 큰 항아리에 떠 놓은 물을 향해 축복을 해 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릅니다. 한번은 이리(익산)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을 때 며칠 동안 밥 한 번 먹지 않았다는 것을 집회 끝나고 알게 되었습니다. 한창 먹을 나이였는데 밥 생각을 잊어버리고 전혀 배고픔을 몰랐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지요.” 정수복 씨는 어린 시절의 놀라운 체험을 오랜 시간 마음속에 간직하며 지냈는데 6년 전 부천시로 이사한 후 집 근처 공원에 운동하러 갔을 때 또 한 번 놀랐다고 한다. 정수복 씨는 “길을 가다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니 ‘신앙촌 상회’ 간판이 보여 그 길로 신앙촌 상회(부천시 중동)에 들어갔습니다. 배태란 권사님을 그때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이번 추수감사절에도 오게 되고 모든 것이 감사한 마음입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배태란 권사는 정수복 씨를 처음 만난 날 반가운 마음에 그 주에 교회로 초대했고 이제는 든든한 열매가 되어주어 스스로 교회도 오고 시간과 마음을 드리는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면 도리어 배울 점이 많다고 하며 이런 분이 열매인 것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주니어

아하! 맞춤법 … 일상 속 맞춤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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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밥을 먹기엔 너무 피곤한가요? 안 먹어서 피곤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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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성경박물관 최고(最古) 성경사본 ‘사해문서’ 알고보니 가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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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종화 권사님 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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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X-마스의 상징 산타클로스, 벨기에서 선물 대신 코로나 옮겨

X-마스의 상징 산타클로스, 벨기에서 선물 대신 코로나 옮겨

예수가 태어났다는 12월 25일이 되면 그 전야에 선물을 들고 어린이를 찾아오는 산타클로스에 대한 이야기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2월의 산타클로스는 원래 예수 탄생과는 상관없는 인물이었다. 산타클로스(Santa Claus)의 탄생지는 네덜란드이며, 네덜란드인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 평생을 바친 니콜라스가 죽은 날(12월 6일)을 네덜란드식 애칭인 ‘신터 클라스(Sinter Klass)의 날’로 정해 기념했다. 예수 탄생과 상관없었던 신터 클라스가 오늘날과 같이 크리스마스의 상징으로 변신한 것은 네덜란드인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다. 사실 가슴 가득 흰 수염을 늘어뜨린 채 붉은 털옷을 입고 인자하게 웃는 통통한 할아버지는 코카콜라의 작품으로 붉은색은 코카콜라의 로고 색을, 흰 수염은 콜라 거품을 상징했다. 콜라 판매량이 줄어드는 겨울 시장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으로 코라콜라가 1931년 만든 이미지다. 또한 뉴욕 맨해튼 34번가에 있는 메이시 백화점도 산타를 X-마스 판촉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산타 퍼레이드를 시작해 90년 동안 적극 활용해 왔다. 산타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면역력이 있다는 WHO의 발표 그러나 벨기에서는 산타클로스가 요양원에서 코로나 퍼뜨려 이후 일부 언론에서는 산타 면역력이 ‘착한 거짓말’이라고 해 이처럼 X-마스의 마스코트로서 세계 곳곳을 누비던 산타가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지금은 위기에 봉착한 듯하다. 전염병을 막기 위해 전 국가적으로 봉쇄 조치를 단행하고 있는 지금, 산타에게 문을 열어 줄 수 있느냐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이다. 영국 신문 가디언에 따르면 WHO의 마리아 밴커코브 박사는 14일 진행된 코로나19 브리핑에서 ‘산타는 매우 늙었고 과체중인데 올해 전 세계에 선물을 배달할 수 있을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산타가 나이가 많아서 걱정하는 건 이해하지만 그는 코로나19 면역을 갖추고 있다”고 웃으며 답했다. 밴커코브 박사는 “우리는 산타와 짧은 대화를 나눴고, 그는 매우 잘 지내고 있다. 부인인 산타 여사도 잘 지내고 있다”고 농담하면서 “그들은 지금 정말 바쁘지만, 산타는 면역력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 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NIAID) 소장도 지난 11월 USA 투데이 인터뷰에서 “산타는 선천적 면역력을 가졌기 때문에 코로나19를 옮기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 세계 방역을 책임진 권위자들의 대답에 산타는 마음 놓고 순록 썰매를 끌 수 있는 자유를 얻은 듯했다. 그러나 벨기에 요양원에서 뜻하지 않은 참사가 벌어졌다. 14일 CNN 보도에 따르면, 벨기에 북부 제2의 대도시인 앤트워프의 한 요양원에서 무려 75명의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 확진판정을 받은 대부분의 환자들은 요양원에 거주하는 노년층이었고, 요양원 직원도 일부 포함돼 있다. 역학조사 결과 감염경로의 시작은 확진판정이 나오기 3일 전, 해당 요양원을 방문했던 산타클로스였다.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있던 산타클로스는 요양원에서 장시간 머물며 노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등 밀접하게 접촉했다. 슈퍼 전파자였던 산타클로스는 선물 대신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급속히 전파한 후 요양원을 떠났고, 3일 후부터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요양원 거주자 61명과 직원 14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고, 결국 한 명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사건이 알려진 후 모 신문은 ‘산타클로스는 면역이 있어 안심하고 만나도 된다.’고 했던 WHO의 마리아 밴커코브 박사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착한 거짓말”이라는 제목을 선정했다. 누군가에게 죽음의 X-마스를 선사했다면 그것은 정말 착한 거짓말이 될 수 있을까.

성모마리아 얼굴이 샌드피플? 스페인서 또 ‘코미디 복원’

난징 대학살의 진실

“그냥 한글 만들어진 날 기념하는 거 아냐?”알고 보면 더욱 자랑스러운 한글과 한글날

“이탈리아 4세 남아, 작년 11월 이미 코로나19에 감염”

“이탈리아 4세 남아, 작년 11월 이미 코로나19에 감염”

아이에게 체취한 검체를 검사 결과 코로나19와 동일 바이러스 12월 말에 발생한 중국 우한 첫 사례보다 2개월 가량 빨라 이탈리아 “중국의 공식 발표 전 이미 코로나19 퍼져있었을 수도” 이탈리아에서 이미 작년 11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가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코리에레 델라 세라 등 현지 언론이 1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북부 밀라노대 연구팀이 작년 9월부터 올 2월 사이 홍역 진단을 받은 환자 39명의 구강 검체를 다시 분석한 결과 한 표본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검출됐다. 해당 환자는 유치원생인 4세 남자아이로 작년 11월 21일부터 기침을 동반한 감기 증상을 보이다 30일 구토·호흡 곤란 등으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해 밀라노 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그다음 날엔 온몸에 발진도 생겼다고 한다. 당시 의사는 이 아이의 구강에서 채취한 검체를 토대로 홍역 진단을 내렸다. 홍역은 코로나19와 마찬가지로 주로 비말을 통해 감염되는 급성 전염병으로 고열과 발진 등의 증상이 일반적이며, 폐렴 등과 같은 합병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밀라노대 연구팀이 최근 해당 검체를 재분석한 결과는 달랐다. 연구팀은 당시 홍역 진단을 받은 환자들이 실은 코로나19 감염자들일 수 있다는 가설 아래 병원 실험실에 냉동 보관된 검체를 다시 꺼내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활용되는 코로나19 진단 방식인 분자 검사를 시행했다. 연구팀은 검사 결과를 재확인하고자 바이러스의 유전 정보가 담긴 리보핵산(RNA)을 추출해 분석했는데 코로나19와 100% 동일했다고 한다. 이번 연구 결과는 이탈리아의 코로나19 발병 시점을 약 3개월가량 앞당기는 것이다.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이탈리아의 코로나19 첫 환자는 2월 21일 롬바르디아주 코도뇨지역에서 확진 판정을 받은 38세 남성이다. 연구에 참여한 마리오 라빌리오네 교수는 “올 2월 말 이탈리아 북부에서 폭발적으로 코로나19 확산이 진행됐는데 이는 그 이전 수주 또는 여러 달 동안 바이러스가 돌고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연구팀은 이 소년은 진단 전후 다른 나라로 출국한 사실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해 늦가을쯤 이미 그곳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바이러스가 작년 가을부터 자국에서 유행하고 있었다고 추정할 만한 연구 결과가 여러 차례 나온 바 있다. 다만, 현지 언론은 이에 대해 이탈리아가 코로나19 사태의 시발점임을 시사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중국 정부가 작년 12월 말 바이러스 존재를 대외적으로 공식 발표하기 훨씬 이전에 바이러스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을 가능성을 강조한다. 반대로 중국 언론들은 최근 이탈리아 등의 연구 결과를 활용해 바이러스가 해외에서 유입됐다는 주장을 강화하는 등 바이러스 기원 논란을 증폭시키는 모양새다.

새로운 위협 ‘코로나 변종’ , 치료제와 백신 개발에 고전

‘코로나 시대’ 에어컨·선풍기 안전하게 사용하는 방법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개발, 어디까지 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