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천부교 여학생 드림캠프

2023 천부교 여학생 드림캠프

교육과 실습, 재미 콘셉트 프로그램 ‘쿠킹 클래스’ 가장 호응도 높아 신앙촌의 가치 알게 된 유익한 시간 지난 2월 20~21일, 2023 천부교 여학생 드림캠프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맑게 사는 여학생’이라는 주제로 신앙촌에서 개최됐다. 대전교회 문시연 양(중2)의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사단조 3악장’ 특순으로 문을 연 드림캠프는 특강 시간을 비롯해 여학생들의 관심도와 만족도가 높은 프로그램들로 채워졌다. 천부교 여학생이 갖추어야 할 마음 자세와 행동에 대한 특강에서 이성희 관장(부천교회)은 “눈에 보이는 것은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쉽게 구분할 수 있지만, 생각이나 마음 등 눈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들은 우리가 쉽게 구분하기 힘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맑은 생활이란 바로 죄짓지 않는 생활, 즉 자유율법을 지키는 생활입니다”라며 천국에 가려면 죄를 이기는 맑은 생활을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은 이후 장소를 옮겨 마라탕과 로제떡볶이를 직접 요리하는 ‘쿠킹 클래스’에 참여했다. 요리에 앞서서는 깜짝 오프닝 쿠킹쇼로 셰프가 직접 나와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만들기를 선보여 학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학생들이 요리하는 동안에는 하루 네 컷 타임과 요리 심사도 진행돼 여학생들만의 발랄함과 열의에 찬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합창 연습과 ‘단합 게임’, 책 속 암호를 해석해 미션을 수행하면서 이야기 나누는 ‘맛있는 수다’ 시간도 친밀감을 더했다. 둘째 날에는 아침 예배 후 신앙촌의 가치에 대한 특강이 이어졌고, 키링 만들기, 앙케이트, 인생 네 컷 시상으로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이날 참석한 학생들은 “즐겁고 유익한 캠프였으며, 왜 맑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신앙촌상회 부평시장점 신규 오픈 “전도와 사업의 기반 되길 바라”

신앙촌상회 부평시장점 신규 오픈 “전도와 사업의 기반 되길 바라”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 홍보의 기회가 많은 곳에 부평중앙상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마땅한 자리가 나지 않아 여기저기 찾아보던 중 좋은 곳에 신앙촌상회 자리를 얻게 되어 너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중앙상회가 생기니 부평교회 권사님들이 더욱 반가워하셨습니다. 지인들을 모시고 상회에 오시고, 판매할 때도 함께 신앙촌 제품을 설명하고 홍보해주시니 우리 중앙 식구들의 마음이 점점 하나가 되어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앙촌상회를 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 전도와 사업의 기반이 되는 신앙촌상회 부평시장점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부평시장점 서유실 팀장 <신앙촌상회 부평시장점> 인천 부평구 부흥로 304번길 35-7, 1층 33호 070-8883-1440

구원을 향한 노력의 선

구원을 향한 노력의 선

3월 여성회 축복일 파트모임 활발 지금이 전도의 기회, 사명 다할 때 만찬회 특순봄기운이 느껴지는 지난 4~5일 신앙촌에서 3월 여성회 축복일 예배가 있었다. 이번 축복일에는 전국의 교인들을 위한 다양한 파트별 모임이 준비되었다. 소비조합 세미나시간에는 신앙촌 제품 교육이, 같은 시각 소예배실에서는 새교인을 위한 ‘행복한 모임’ 두 번째 시간이 마련되었다. 오후 시간에는 소비조합 만찬회와 4월 전도의 날을 앞두고 전도세미나도 진행되었다. 이상미 관장(여성협회)은 특강을 통해 가톨릭 성범죄의 대부분이 성직자로부터 이뤄졌으며 그 대상이나 피해자 수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설명했다. “가톨릭과 예수교의 부패가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는 지금이 전도의 기회입니다. 지금 전도하지 않으면 그들은 또 교묘히 범죄를 감추고 사람들을 다시 죄의 길로 끌고 갈 것입니다. 전도는 감람나무 가지의 사명입니다. 절실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성신의 은혜를 널리 전하는 저희들이 꼭 되어야겠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축복일 예배가 있던 5일에는 이영심 관장(전농교회, 중부 총무)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저희에게 참된 구원의 길을 알게 해주셨습니다.구원의 길을 찾은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을 향한 노력의 선을 넘어 온 힘을 다해 열심히 뛰는 것입니다. 만 번 생명을 내걸고 뛰고 노력해야 하며 사력을 다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자격을 주시기 위한 노력의 선인 것입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일을 해야 하나님 은혜가 가서 자기 죄가 씻어진다고 하셨습니다. 허락해 주신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겨 선한 일속에서 열심히 뛰며 담대하게 구원의 길을 가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하나님 앞에 늘 감사드리며 구원의 말씀과 기쁨의 은혜를 힘차게 전하는 저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신앙촌 사원들, ‘스마트공장·자동화산업전’ 방문

신앙촌 사원들, ‘스마트공장·자동화산업전’ 방문

신앙촌기업 사원들이 3월 8일부터 10일까지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23 스마트공장·자동화산업전’ (스마트팩토리·오토메이션월드 2023)을 관람했다. ‘연결된 공장(We Connect Your Factory)’ 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산업 디지털 전환에 필요한 스마트 팩토리, 빅데이터, 인공지능(AI), 클라우드 컴퓨팅, 산업용 로봇 등 미래형 스마트 제조 기술의 최신 트렌드를 한 눈에 살펴보는 좋은 기회가 됐다. 또한 전시에서는 제품·기술 전시뿐만 아니라 디지털 전환 관련 최신 글로벌 기술 트렌드, 국내외 우수 적용 사례 등을 소개하는 콘퍼런스와 신제품·신기술을 공개하는 세미나도 함께 진행되어 산업 디지털 전환에 관심있는 신앙촌 사원들은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했다. 다음은 전시회를 관람한 생명물식품 (주) 사원의 소감이다. <2023 스마트공장·자동화 산업전을 다녀와서> ‘AI 기반 스마트공장 구현 기술’ 세미나에서는 최신 기술을 활용한 데이터 수집, 인공지능을 활용한 해석과 판단으로 더 정확한 의사 결정과 시스템 제어가 가능해짐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인공지능을 이용한 불량 검출, 사람과 협업하여 구동하는 로봇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미래산업은 우리 주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특히 메타버스 공간에서 가상솔루션을 체험한 후 현장에 접목한다는 내용이 인상 깊었다. 현재 4차 산업혁명의 화두는 단연 인공지능(AI)이다.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생활가전에도 AI가 접목된 것처럼, 세상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기에 우리 생명물식품(주)도 변화와 흐름에 발맞춰 한 걸음 더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인도네시아 또 화산 폭발…화산재 3km 높이까지 솟구쳤다

인도네시아 또 화산 폭발…화산재 3km 높이까지 솟구쳤다

화산재 분출하고 용암도 흘러 반경 7km까지 접근 제한돼 인도네시아 므라피 화산이 또 다시 폭발했다. 3월 11일(현지시간) AFP 통신 등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국가재난방지청(BNPB)은 이날 중부 자바섬 족자카르타 인근 므라피 화산이 폭발했다고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이번 폭발로 화산재가 정상에서 최고 3㎞ 높이까지 솟구쳤으며 용암이 경사면을 타고 1.5㎞까지 흘러내렸다. 폭발로 인한 인명 피해는 없지만 화산 인근 마을의 집과 도로가 온통 하얀 재로 뒤덮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당국은 인근 마을 8곳이 화산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분화구를 기준으로 반경 7㎞까지 접근 제한구역으로 설정했다. 압둘 무하리 인도네시아 기상청 대변인은 “위험 지역 내 접근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라며 “제한구역이 더 넓어지면 주민들에게 대피 권고가 내려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므라피 화산은 지난 1930년 대폭발을 일으켜 당시 1300명의 사람이 사망했으며, 2010년에도 대폭발로 35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최근에도 므라피 화산은 수시로 화산재와 용암을 분출하고 있으며, 산사태와 지진이 반복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외에도 하와이에서 두 번째로 큰 킬라우에야 화산이 휴지기를 거쳐 다시 폭발할 위험이 높다는 보도도 있었다. 3월 11일 AP통신 등에 따르면 미국지질조사국(USGS)이 킬라우에아 화산 밑의 얕은 지층에서 지진폭풍이 감지되었으며, 이는 화산 분화구의 폭발이 재개될 징조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킬라우에아 화산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화산 중 하나로 2021년 9월부터 분출을 이어왔다.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에 있는 냐물라기라 화산도 3월 13일 저녁 (현지시간)부터 화산활동을 시작했다고 고마 시에 있는 화산관측소가 발표했다. 관측소는 “냐물라기라 화산 분화구 중심지를 향해서 얕은 수위의 마그마가 집결하는 것이 관찰되었다”고 밝혔다. 지진 소식도 이어졌다. 3월 7일에는 필리핀 남부 민나다오섬에서 규모 6.0과 규모 5.6의 지진이 시간차를 두고 발생해 일부 건물이 무너지고 수백명이 대피하는 소동이 발생했다. 3월 9일에는 러시아 동단 캄차카 반도 근해에서 규모 5.1 지진이 일어났다. 이외에도 14일 오전에는 태평양 섬나라 파푸아뉴기니 동부 인근 해저에서 규모 6.2의 지진이, 오후에는 칠레 아라우카니아 해안 인근에서 규모 5.6 지진이 발생했다고 유럽지중해지진센터(EMSC)가 밝혔다. 이들 지역은 모두 인도네시아와 같은 불의 고리 지역에 속하는 곳이다. ■불의 고리란? 서쪽의 일본·대만·동남아, 북쪽의 러시아 캄차카와 미국의 알래스카, 동쪽의 미주 대륙 서부와 남미 해안 지역, 그리고 뉴질랜드 등 태평양 연안지역을 아우르는 고리 모양의 지진·화산대인 환태평양 조산대를 이르는 말이다. 세계 활화산과 휴화산의 75%가 불의 고리에 몰려 있으며, 전 세계 지진의 80~90%도 이곳에서 발생한다.

[모아보는 뉴스] 수녀가 소년을 방으로 데려가면 신부가 성폭행 外

[모아보는 뉴스] 수녀가 소년을 방으로 데려가면 신부가 성폭행 外

01. 수녀가 소년을 방으로 데려가면 신부가 성폭행 미국 남성 2명이 오크 클리프 고아원에서 어린시절 사제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댈러스의 가톨릭 교구와 성육신 말씀의 자선 수녀회를 고소했다. 그들은 교구와 수녀회가 어린이를 보호하지 못했고 학대를 은폐했다고 주장하며, 100만 달러 이상의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소송한 남성 중 한 명은 1962년~1967년까지 사제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이 자선 수녀회 수녀인 브리짓은 잠자리에 든 소년을 깨워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아야 한다며 지하실에 있는 방으로 데려가 술을 주고 옷을 벗으라고 지시한 후 어둠 속에 남겨두면 맥길 신부가 와서 소년을 성폭행 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한 명도 9세 때인 1967년부터 1971년까지 같은 수녀가 소년을 방으로 안내하고 술을 주고 옷을 벗기고 어둠 속에 두면 맥길 신부가 와서 성폭행하는 유사한 패턴으로 당했다고 설명했다. 02. 대구대교구 신부 성추행 재판… “솜방망이 처벌” 천주교 대구대교구 산하 사회복지법인 한국SOS어린이마을의 대표이사였던 이 모 신부는 최근 강제추행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2018년 이 신부가 20대 신입 여직원들의 신체를 여러 차례 강제로 만졌고, “나도 여자 좋아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재판부는 이 모 신부에게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고, 40시간 성폭력 치료 강의도 명령했지만 신상 정보공개와 취업제한 명령은 면제됐다. 피해자 중 한 명은 “솜방망이 처벌”이라며 “사제라는 이유를 양형 사유로 밝혔는데 더 강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03. 아동성폭행 피해자, 사제가 “살인”했다고 느껴 호주 멜버른의 가톨릭 대주교는 대법원 판사가 사제에 의한 아동성폭행 피해자에게 19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결정한 것에 지불금이 과도하다고 항소를 했다. 피해자는 신부가 자신을 “살해”했다고 느꼈고, 예전의 어린 소년은 영원히 사라졌다고 말했다. 또한 어렸을 때 당한 학대가 그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피해자의 변호사는 대법원 판사의 손해배상 판결이 피해자가 겪은 학대에 비례하여 공정하다고 했고, 그 학대는 피해자 삶의 모든 측면에 “파멸적인” 영향을 계속 끼쳤다고 말했다. 앤드루 키오 판사는 가해자인 데스몬드 개넌 전 신부의 학대가 “끔찍하다”며 “거의 절대적인 권력과 권위의 위치에 있는 성인에 의한 어린 아이를 육체적으로 혐오스럽게 폭행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04. 아동성폭행 피해자들의 소송을 영구적으로 중단하려는 호주 가톨릭의 노력 호주 가톨릭 교단은 아동성폭행 피해자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소아성애자 신부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 가해 신부가 죽었기 때문에 성학대 혐의를 제기하거나 증인으로 부를 수 없어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아동성폭행 피해자의 변호사인 숀 맥카시는 학대 주장을 저지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소아성애자 신부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이러한 유형의 접근 방식은 절대적으로 비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가톨릭 교단은 소아성애 성직자들의 죽음을 이용하여 피해자들이 제기한 민사 소송을 중단시키려 하고 있다. 05. 여론조사 결과, 교황이 정치에 너무 관여해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초기 열정은 희미해졌다. 마크리 동맹 야당 연합의 미겔 앙헬 피케토는 최근 교황의 사회적 견해가 “아르헨티나에 대해 터무니없다”고 말하면서, 교황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사유재산이 부차적 권리라고 말하며 가치를 중요하지 않게 만드는 계획”에 찬성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황이 공산주의를 조장한다고 비난한 극우 의원 하비에르 마일리는 최근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사람들의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이 세금을 내야한다고 말한 것을 비판했다. 마일리는 교황에게 트위터를 통해 “항상 악의 편에 서 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의 종교적 신념에 대한 2019년 전국 여론조사에서 프란치스코에 대한 열정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코니켓 연구소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약 40%가 교황에게 무관심하고 27%가 그가 정치에 너무 관여하고 있다고 답했다. 아르헨티나 교황이 나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었던 가톨릭 신자 마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로페스도 “저는 실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빈곤과 범죄가 증가하고 분열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합니다. 저는 그가 단체로서 우리를 화해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반대로 그는 그것을 심화시켰습니다.” 06.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성직자 ABC 방송국은 호주 데미안 신부의 행동에 대해 12명 이상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음과 같은 소아성애자의 행동 방식을 폭로했다. ▶ 고해성사의 비밀을 악용하여 침실 고해성사를 하는 것에서부터 프리맨틀의 한 가톨릭 학교에 잠금 장치가 있는 고해성사실을 만드는 것까지 아이들을 격리시켰다. ▶ 신부가 신에 버금가는 존재로 여겨지고, 집에서도 환영받으며, 그들의 권위가 의심받지 않는 저소득 가톨릭 지역에서 발생한다. ▶ 사랑과 성폭력의 경계를 흐리게 한다. ▶특히 아버지가 없는 취약한 아동을 대상으로 한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아마 데미안 신부가 아이들의 생일을 기록한 검은 일기장을 갖고 있었다는 폭로일 것이다. 생일 고해성사를 받을 때 학대를 당했기 때문에 생존자들은 생일을 기억하는 것이 끔찍하다고 말했다. 테일러 변호사는 이러한 행동을 “계산적이고 조직적인 그루밍”이라고 설명했고 “자신이 누구를 언제 학대할 것인지 계산적으로 결정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는 신부와 함께 그를 은폐한 카르멜수도회도 고소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파괴했고, 내 영혼을 파괴하는 사례라면, 여기에는 정의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당시 마약과 술로 어린 시절의 경험을 마비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3월 전국 소비조합 축복일 예배

은혜 받을 조건 만들어 나가야

[나침반] 호주 가톨릭 신부, 아이들 생일 적어놨다가 생일날 맞춰 성폭행 外

“AI에게 기도하고 죄도 고백해”…가톨릭성인 챗봇 등장

법원, 천부교 비방 영상 올린 가톨릭 신부에게 삭제 권고

KBS <사사건건> 반론보도문 게재

SBS 프로그램 <당신이 혹하는 사이> 반론 보도문 게시

신도 등록 추가 공고- 한국천부교신도연합회

신앙체험기

“하나님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며 끝까지 따라가고 싶습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며 끝까지 따라가고 싶습니다”

1940년생으로 인천이 고향인 저는 아주 어렸을 때 이런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 어디 계신지 잘 모르지만 우리 아버지 약주 좀 못 잡수시게 해주세요.” 온 가족의 만류에도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술을 드시던 아버지를 멈추게 하려면 하나님의 도우심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하지만 그때는 진짜 하나님도 모르고, 은혜도, 구원도 모를 때였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은 1956년, 열다섯 살의 가을이었습니다. 하루는 동갑내기인 조카가 같이 전도관에 가자고 하였습니다. 전도관이 뭐 하는 곳인지 물었지만, 조카는 가보면 안다고 길을 재촉했습니다. 조카의 성화에 못 이겨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인천의 한 짠지 공장(단무지 공장)이었습니다. 인천전도관이 지어지는 중이어서 임시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다는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먼저 와서 앉아있었고, 다들 박태선 장로님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조카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박 장로님은 굉장히 유명하신 분으로 그분이 인도하시는 예배에서는 기사이적이 일어난다고 하여 그 많은 인파가 몰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박 장로님께서 등단하셨습니다. 장로님이라 하여 연세 지긋하신 분일 거라 짐작했는데, 예상과 달리 훨씬 젊은 분이 단에 오르셔서 의외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 장로님은 큰 소리로 예배를 인도하셨으며,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찬송을 따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던 중 문득 박 장로님의 목소리가 바닷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예전에 맛 조개를 잡으러 바닷가에 갔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썰물이 저만치 빠져나갔을 때 뒤에서 들려오던 물이 구르는 듯한 바닷물 소리가 꼭 장로님의 음성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박 장로님은 정말 보통분이 아니시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몇십 년 후 하나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다는 성경 구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을 때에도 저는 이분이 진짜 하나님이심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인천전도관이 지어진 후에는 매주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상쾌한 바람과 함께 너무나 좋은 향기가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예배실에 꽃다발을 들고 온 사람이 있는 줄 알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그런 사람은 없었고, 그 향기는 꽃향기라고 하기에는 그동안 맡아본 일이 없는 귀한 향기였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향취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비로소 제가 체험한 것이 향취 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매주 전도관에서 예배를 드리다 보니 인천 각 지역에서 온 여학생들과 많이 친해졌습니다. 친구들과 저는 일요일마다 이른 시간부터 교회 입구에 줄을 지어 서 있었는데, 차에서 내리시는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제단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신 하나님께서는 환하게 웃으시며 저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하는데, 너무나 진하게 풍겨서 어디까지 이 향기가 퍼져나갈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또 예배가 끝나면 하나님께서 안수를 해주셨는데, 하나님의 손이 머리에 닿는 순간 제 속이 뻥 뚫린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몸이 가볍고 시원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귀한 은혜를 체험한 저와 친구들은 전도관 다니는 것이 몹시 즐거워서 예배 시간보다 훨씬 앞서 교회에 도착해 하나님 오시기를 기다리며 저희끼리 즐거워했습니다. 1957년 4월 25일부터는 서울 용산구 청암동에 위치한 서울중앙전도관(이만제단) 개관 집회가 열렸습니다. 동시에 제2회 전도관 체육대회도 개최되어 낮에는 서울운동장에서 배구, 농구 등 운동을 하고, 저녁에는 이만제단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개관집회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 중 어느 아침 예배시간이었습니다. 그날은 정말이지 은혜의 창파를 이룬 날로 기억됩니다. 저를 포함해 인천에서 온 친구들은 예배실 2층에 앉았고, 1층에는 인천 소래에서 온 친구 한 명이 따로 앉아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다리가 굽어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제단에 올때도 동생에게 업혀 와야 할 정도로 다리를 전혀 쓰지 못하는 친구였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병자들은 일어나라’고 외치시자 여기저기서 병이 나은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벙어리였는데 말을 하게 되었다 하고, 어떤 사람은 아픈 몸이 나았다고 하는 등 너무나 신기한 장면이어서 유심히 지켜보던 중 1층에 앉아있던 다리 아픈 친구가 천천히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2층에 있던 저와 친구들은 일제히 탄성을 지르며 1층으로 뛰어 내려갔습니다. 그 친구는 아직 다리를 덜덜 떨고는 있었지만 분명히 일어나서 제 발로 서 있었습니다. 친구는 감격한 목소리로 앉은뱅이였던 자신이 이렇게 스스로 일어나게 되었다며 마이크를 통해 큰 소리로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했고, 저희는 그 친구를 에워싸고 발을 동동 구르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소래에서 온 친구는 그 후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이 걸어 다니며 밝은 얼굴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병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그날, 저는 또 하나 분명히 목격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뽀얗게 내리는 이슬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병자들은 일어나라고 하실 때 예배실 안에 안개가 끼더니 점점 자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실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개는 점점 짙어져서 나중에는 앞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예배실을 가득 메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신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직접 체험한 그 은혜는 너무나도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앞으로 이분을 따라가야겠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서울중앙전도관 개관 집회가 있었던 그해 말에는 소사신앙촌이 건설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앙촌 건설을 위해 많은 교인들이 소사에 와서 일손을 보탰습니다. 저와 친구들도 건설에 도움이 되고자 시간을 내어 소사에 가서 땅 고르는 작업을 도왔습니다. 땅에서 자갈을 캐서 한곳에 모아두면, 어른들이 자갈을 트럭에 실어서 날랐는데, 그 땅에 오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오만제단을 지을 예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큰 소쿠리에 찐 고구마를 한가득 가지고 오신 하나님 모습이셨습니다. 환하게 웃으시며 고구마를 가져왔으니 많이들 먹으라고 하시는 말씀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꿀맛 같은 고구마를 먹고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소사신앙촌에 이어 덕소신앙촌이 완공되면서 저는 1966년 덕소신앙촌에 입주해 카스텔라 공장 포장반에서 일했습니다. 당시 신앙촌 카스텔라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공장은 늦은 시간까지 불을 밝혔고, 직원들도 보람과 자부심을 갖고 힘든 줄 모르고 일했습니다. 인천전도관에서 예배드릴 때 상쾌한 바람과 함께 너무나 좋은 향기가 맡아져 이만제단에서는 앉은뱅이였던 친구가 두 발로 일어나고, 뽀얗게 내리는 이슬성신을 눈으로 보게 돼 가슴이 옥죄고 아프던 증상도 축복해 주신 음식을 먹고 완쾌되어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려 이후 저는 덕소신앙촌을 나와서 결혼을 하고 살다가 언제부턴가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소화가 잘 안된다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쌀밥 외에 다른 반찬은 일절 못 먹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옥죄고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면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만 했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찾아가 보았지만 원인은 알 수가 없었고, 세 발짝만 걸어도 쓰러질 지경이어서 교회는커녕 일상생활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졌습니다. 꼼짝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1976년의 어느 날, 저를 전도했던 조카가 찾아왔습니다. 조카는 전도관에 가보자고 했지만, 저는 몸이 너무 아파서 못 갈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조카가 돌아가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은데 교회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 일요일에 큰맘 먹고 집을 나섰는데, 다행히 쓰러질 듯 아프거나 피곤한 느낌이 들지 않아서 동생과 함께 무사히 노량진 전도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동생의 부축을 받아 예배실 맨 앞에 자리를 잡았는데, 앉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애타게 부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한참 울고 있는데 예배가 시작되었고, 하나님께서 단에 서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웠던 하나님을 다시 뵈니 너무나 기쁘고 또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배가 끝날 무렵, 하나님께서 다음 주부터는 축복을 해주신다고 하시며 축복받을 물건을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우유와 설탕을 가지고 그다음 주 일요일에 노량진 전도관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축복받을 물건들을 가져왔고, 그 물건들을 한곳에 모아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가 끝나고 물건들을 모아놓은 곳에 가셔서 쉭쉭 하고 세 번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서 축복받은 우유에 설탕을 타서 한 컵 마셨습니다. 그런데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배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이었습니다.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배가 들썩거릴 정도로 덜덜 떨려왔습니다. 밤새도록 끓던 배가 어느새 잠잠해져서 화장실에 갔더니 변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한 것에 비해, 너무 많은 양이 나와서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계속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다 보니 배 속이 텅 빈 듯 가볍고 시원했습니다. 그 뒤로 제 병세는 점점 호전되어 예전과 같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렸고, 그 후로 집과 가까운 천호동에 있는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꾸준히 교회에 다니다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무척 바빠진 저는 교회에 가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바쁘게 살며 건강을 챙기지 못했더니 또다시 몸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증세가 심각해져서 병원에 가보니 담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운 좋게 바로 수술을 해서 살아날 수 있었지만, 위는 여전히 딱딱하게 뭉쳐서 늘 아팠습니다. 그게 2005년쯤이었습니다. 수술을 집도해 준 의사 선생님은 유산균음료를 많이 먹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마트에서 사다 준 유산균 요구르트는 너무 달아서 위가 더욱 쓰리고 아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달지 않은 유산균음료를 찾던 중 신앙촌에서 요구르트 런이 출시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요구르트 런을 꾸준히 마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누가 꽉 쥐고 있는 것처럼 뭉쳐있던 위가 편안하게 움직이면서 소화가 되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요구르트 런을 먹으면서 위가 아파 그동안 먹지 못했던 매운 김치, 쫄깃한 떡도 잘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력을 되찾고 오랜만에 천호 천부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간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머리가 멍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뒤 축복일이 되어 신앙촌에 갔는데 신기하게도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 뒤로도 예배시간마다 머리가 멍하다가, 신앙촌에 가면 머리가 맑아지는 일이 한동안 반복되더니 어느 날은 신앙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머리가 번쩍 뜨이면서 정신이 환하게 맑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동안 들어오지 않던 하나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오고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예배시간에 멍해지는 증상은 씻은 듯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동안 많은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해 생긴 일인 것 같아 너무나 죄송했고, 다시 맑은 정신을 되찾게 해주심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는 더욱 신앙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신앙촌에서 만들어지는 복된 물건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이 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친한 소비조합 사장님을 따라다니며 일을 도와드리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물건은 어떻게 구입하는지, 배달은 어떻게 하는지, 홍보는 어떤식으로 하는지 조금씩 배우게 되면서 마침내 2010년 신앙촌상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요즘도 저는 신앙촌상회를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요구르트 런을 마시고 건강을 회복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신앙촌상회를 운영하며 하루하루 활기차게 살아가는 지금이 저는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지독히도 몸이 약했던 제가 하나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허락해 주셨던 귀한 은혜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하고 죄송하기만 한 삶이지만, 남은 생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맑고 성결한 삶,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삶, 하루하루 하나님께 더욱 가까워지는 삶을 살며 끝까지 따라가는 제가 되겠습니다.

“죄짓지 말라 하신 하나님 음성을 늘 새기며 살아가겠습니다”

“죄짓지 말라 하신 하나님 음성을 늘 새기며 살아가겠습니다”

1942년생인 저는 전남 광주 광산구에 있는 산속 마을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마을은 깊은 산중에 있어서 그런지 교회나 절이 없었고, 가족은 물론 마을 사람들도 종교를 가진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역시 신이라든지 천국이라든지 종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전도관을 다니게 된 것은 1957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직장을 구하러 먼저 서울로 간 여섯째 언니(기연수 권사, 나주교회)를 따라 무작정 상경하였습니다. 그때 언니의 나이가 스물셋, 제가 열여섯이었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배운 기술도 없던 저와 언니는 각각 다른 집의 가정부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저는 빨리 돈을 모아서 가족들과 함께 살 집도 얻고, 더 좋은 직장도 구해야겠다는 희망을 안고 낯선 서울 땅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언니를 만났는데, 언니가 대뜸 앞으로 일요일마다 전도관에 함께 다니자는 것이었습니다. 언니의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어느 날, 언니가 일하는 집에 전도관 사람들이 심방 예배를 보러 왔다고 합니다. 언니도 자연스럽게 함께 앉아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전도관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을 들으니 눈물이 흐르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쁨이 마음에 넘치도록 차올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언니는 그렇게 기쁜 적은 처음이었다며 하나님의 은혜가 전도관에 임하는 것이 확실하니 같이 다녀보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은혜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확신에 찬 언니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어 함께 서울중앙전도관에 다니기로 하였습니다. 처음 가본 서울중앙전도관은 공사가 한창이어서 건물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는 불의 사자로 유명하신 박 장로님께서 인도해 주셨는데, 찬송을 부르던 도중 어디선가 시원한 향기가 맡아졌습니다. 맡으면 맡을수록 기분이 좋아지고, 가슴속까지 와닿는 듯한 그 향기는 신기하게도 예배 시간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참 이상하다. 도대체 무슨 향기일까?’ 그때 저는 예배실에서 진하게 맡아지는 그 향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통해 그것이 향취 은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어느 날은 예배를 마치고 박 장로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안찰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쭉 지켜보니 장로님께서 배에 손을 살짝만 얹으시는 것 같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프다고 발버둥 치거나 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두려운 마음으로 안찰을 받았는데 저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은혜를 받지 못했나 보다’하고 약간 실망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얼마 뒤 신기한 은혜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1957년 4월에는 서울중앙전도관이 완공되었는데, 이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하여 일명 이만제단으로 불렸습니다. 이만제단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대형 음악종을 도입했습니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에 은은하게 들려오는 이만제단의 아름다운 음악 종소리는 참으로 듣기 좋았습니다. 예배 시간에 저는 이만제단 2층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한참 찬송을 부르다가 앞을 보니 박 장로님 계신 단상 쪽에 소나기가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새로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건물 실내에서, 그것도 단상 쪽에만 비가 내리는 것이 이상해서 처음엔 잘못 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비가 떨어져도 단상이 젖거나 아래에 물이 고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제야 비가 아닌 이슬은혜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이슬 같은 은혜를 제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은혜가 전도관에 임하신다고 했던 언니의 말은 참이었고, 구원은 전도관에 다녀야 얻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은혜를 확실히 체험한 저는 지방에 있는 가족들을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에 고향인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마침 박 장로님께서 지방 순회를 하시던 때라 운 좋게 광주전도관에서도 박 장로님이 인도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던 중 찬송을 인도하시던 박 장로님께서 박자에 맞춰 단상을 손으로 내리치셨습니다. 그러자 단상 쪽에서 불꽃이 튀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불의 사자’라고 불리시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성신의 불꽃이 박 장로님의 손에서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니 실로 경외감이 들었습니다. 전에도 장로님께서 인도하시는 예배에서 향취와 이슬같이 내리는 은혜를 체험했기에 저는 이분이야말로 진짜 하늘의 권능을 가지고 오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후 저는 어머니를 적극적으로 전도하여 얼마 뒤 어머니와 언니, 저 셋이 함께 소사신앙촌에 입주할 수 있었습니다. 1960년 즈음, 가족과 함께 소사신앙촌에 입주한 저는 제과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 언니와 함께 살 집도 생기고, 바른 양심으로 양질의 제품을 생산하기로 소문난 신앙촌 기업의 일원으로 근무하게 되니 그 기쁨과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제과 공장에서 당시 신앙촌의 인기 제품이었던 캐러멜 포장일을 맡았는데, 신앙촌 주택 그림이 컬러로 인쇄된 캐러멜 상자가 참 예뻤던 기억이 납니다. 1962년에 덕소신앙촌으로 이주하고 나서도 제과공장 캐러멜 반에서 일했는데 그때는 훨씬 좋은 자동화 기계가 생겨 캐러멜 포장이 한층 수월해져서 더욱 신나게 일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덕소에서 지내는 동안 계속 눈길이 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건설대였습니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신앙촌의 건물을 짓는 그들은 항상 활기차고 힘이 넘쳐 보였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박 장로님, 즉 하나님을 은혜를 주시는 영적인 어머니와도 같다는 뜻의 ‘영모님’이라고 부를 때였는데, 영모님께서도 직접 현장에 나와 건설대원들과 함께 일하시는 모습을 보니 그들이 더욱 부러웠습니다. 고민 끝에 저는 제과 공장 공장장님께 건설대로 옮기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고, 처음에는 반대하시던 공장장님께서도 나중에는 제 뜻을 존중해주셔서 마침내 건설대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중앙전도관에 처음 간 날 찬송을 부르던 중 가슴 속까지 와 닿는 시원한 향기가 맡아져 어느 날은 하나님 계신 단상 쪽에 소나기가 떨어져 자세히 살펴보니 단상이 젖거나 물이 고이지 않아 그제야 이슬 같은 은혜임을 깨달아 기장신앙촌 건설대로 일하던 중 높은 곳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는데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니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돼 건설대원이 되어 제가 한 일은 철근 엮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작업 중 하나였는데, 먼저 땅을 파서 단단한 지반이 나오면 자갈을 고르게 펴서 깔았습니다. 그 위에 철근을 엮어 올리고 시멘트를 부어서 건물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972년도에 기장신앙촌 1차 건설대로 선발되어 간 이후에도 철근 엮는 일을 계속 했는데, 1동 건물을 지을 때는 땅이 갯벌과도 같아서 작업이 전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작업 현장에 늘 함께하시며 기운을 북돋아 주시니 저를 포함한 건설대원들은 힘든 줄도 모르고 의욕적으로 일했습니다. 또 건설대원들은 A, B반으로 나누어 어느 반이 더 빨리, 더 잘하는지 시합을 할 때가 자주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 싶은 마음에 반끼리 똘똘 뭉쳐서 손발을 척척 맞춰가며 일하니 더욱 신나고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한참 일에 몰두하다가 우연히 고개를 들어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에는 흙탕물이 여기저기 묻어있어서 서로의 모습에 한바탕 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1동 건물 3층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콘크리트를 담아놓았던 제 옆의 리어카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제 쪽으로 굴러오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잡을 새도 없이 리어카는 빠르게 저를 들이받았고 저는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래는 뾰족한 바위들을 모아놓은 곳이었기에 그대로 떨어지면 저는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추락하면서 바위들을 살짝 비켜난 곳으로 떨어졌는데, 그곳은 깊은 물웅덩이가 있는 곳이라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진 탓에 허리에 충격이 가서 움직이지 못하는 저를 곧바로 달려온 건설대 언니들이 의무실로 옮겨주었습니다. 한참 의무실에 누워있었는데 급히 들어오시는 하나님이 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은 부산에서 바이어를 만나고 돌아오시는 길이었는데 신앙촌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시자마자 경비원에게 혹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으셨다고 합니다. 건설하던 사람이 3층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하나님은 한걸음에 의무실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친 허리를 강하게 축복해주시며 저를 향해 인자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죄짓지 말아야 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참 축복을 받고 나니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움직일 수 있었고,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도 모두 놀라고 신기해했습니다. 저는 그날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목숨이니 앞으로는 말씀하신 대로 작은 죄라도 범하는 일 없이 바르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며칠 후 몸이 완전히 회복된 저는 오랜만에 건설대 언니들과 함께 죽성 바닷가에 놀러 갔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던 해녀 한 분이 친근하게 다가와 어디서 오신 분들이냐고 물었습니다. 신앙촌에서 왔다고 하니 해녀 아주머니는 “신앙촌 건물 3층에서 사람이 떨어졌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대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건설 현장에 고용된 외부 목수들이 제가 떨어진 상황을 보고 죽었다고 생각해서 헛소문을 퍼뜨린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해녀에게 웃으면서 “거기서 떨어진 사람이 저인데요? 저는 하나님께 축복받고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어디서 잘못된 소문을 들으신 것 같아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해녀 아주머니는 무척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더니 이내 머쓱한 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1976년도에 결혼하여 고향인 광주로 돌아온 저는 보험회사에 다니면서 신앙촌 이불, 메리야스, 간장 등을 판매하며 소비조합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1981년도에 하나님께서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는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습니다. 그동안 많은 은혜를 직접 체험했던 저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셨던 권능이 진짜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무지한 저에게 그토록 귀한 축복을 한없이 베풀어주셨던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과 함께 두려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을 위해 열어주신 귀한 이 길을 따라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85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소사신앙촌, 광주를 거쳐 저와 함께 나주로 이사오신 이후에도 꾸준히 신앙생활을 해오셨기에 나주교회 관장님을 포함해 많은 전도관 식구들이 와주셨습니다. 입관 당시 어머니께 생명물을 수저로 넣어드리면 그대로 잘 넘기셨고, 안색도 환하게 피어나셨습니다. 또한 굳었던 몸이 노긋노긋하게 움직여서 앉혀 놓고 수의를 입혀드릴 수 있었습니다. 환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피어난 어머니를 보니 크신 권능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더욱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언니와 함께 전도관에 첫 발을 내딛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전도관에 다니며 하늘의 은혜를 직접 체험한 저는 구원의 소망을 갖게 되었고, 그 은혜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저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죄 짓지 말라 하셨던 부드러운 그 음성을 가슴 깊이 새기며 항상 맑고 성결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벌써부터 기쁜 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 9월부터 시작된 나주 천부교회의 개축공사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나주교회가 아름답고 깨끗하게 완공되면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을 예정입니다. 지금껏 받아오기만 했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할 수만 있다면 제 마음은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던 그 순간, 전도관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었던 그 기쁨의 환희를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뜨거운 마음으로 전도하는 제가 되겠습니다.

신앙체험기 특집

천부교회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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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촌의 선한 생산 활동에 관심”

신앙촌 방문한 이화여대 사회학 최신덕 교수 1964년 10월 16일자 제366호 신앙신보에는 신앙촌을 방문한 이화여대 최신덕 교수의 기사가 실렸다. “그곳에 사는 분들이 어쩌면 그렇게 부러워 보이는지요. 얼굴엔 화평한 기운이 넘치는 천사 같아 보이고 목소리는 명랑하며 온통 생활이 행복에 젖어 보이더군요.” 이대 최신덕 교수는 신앙촌을 돌아보고 무엇보다 신앙촌 사람들이 소유한 행복감을 한없이 동경한다고 했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 아름답게 꾸며진 신앙의 동산 안에서 하나 둘 뛰어노는 어린이들의 티 없는 모습들이며 땀 흘려 명랑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한 얼굴을 대할 때 최 교수는 무엇보다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화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하는 최 교수가 신앙촌에 관심을 가진 것은 종교 사회학을 전공, 연구하는 교수의 입장으로 신앙촌을 한번 연구하고 싶었을 뿐 아니라, 제자들 중에도 모범된 학생 몇이 신앙촌에 사는 고로 그 아름다운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이라 했다. 마침내 신앙촌을 처음 찾은 것은 작년 8월 경. “모든 것이 좋았어요. 모든 것이 정말 놀라웠어요.” 사회학자로서 추호만큼의 가감도 없는 사실 그대로를 예리하게 살펴보겠다고 다짐한 교수가 신앙촌을 한눈에 보고는 감탄사 외에 다른 말이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외국 원조 받는 상황에서 아름다운 두 도시 ‘장관’ 인간의 힘이 아닌 신의 역사임을 느낄 수 있어 최 교수가 관찰한 바, 신앙촌 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자 장점은 선한 생산 활동이라 했다. 부(富)는 의의 방편이 될 때 최선(最善)이고, 악의 수단이 될 때 최악이 된다는 최 교수는 신앙인의 선한 생산 운동에 각별한 관심을 표하였다. “오늘날의 한국적 여건에서 그와 같은 생산 활동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외국의 원조를 더미로 받고, 은행의 융자를 수십억씩 얻어 쓰면서도 공장 하나 제대로 돌리지 못해 비틀거리는 현실 아닙니까?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아니하는 그 가운데서 그 아름다운 도시를 두 개나 건설하고, 공장들을 일으켜서 수만 신자가 완전 흡수되어 잘 입고, 잘 먹고, 잘살며 신앙에 전념하는 별천지를 만들어 놓았으니…” 물론 인간의 힘이 아닌 신의 역사지만, 이끄는 분이 얼마나 애쓰며 안타까이 고군분투하였겠느냐고 진정 어린 느낌을 토로하였다. “오늘의 신앙촌을 이룬 원동력― 신자 한 명 한 명이 우주가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을 확고한 체험적 신앙을 소유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나도 그곳에서 한번 믿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솟아올랐어요. 특히 오만제단으로 향하는 돌층계와 양편에 줄지어 서 있는 조명등은 마치 천국 가는 길을 상징하듯 잊을 수 없었습니다.”

신앙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br />
신앙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신앙신보 속 천부교 역사
“청년 대집회에서 구원의 참 길을 밝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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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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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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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사람들

“우리는 신앙촌에 졸업여행 왔어요!”

“우리는 신앙촌에 졸업여행 왔어요!”

지난 2월 16일, 신앙촌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경상남도 통영의 다솜어린이집 7세 반 친구들이 졸업여행으로 신앙촌 기업 견학 프로그램에 참가한 것이다. 원래 견학은 부산, 울산 등 가까운 지역에서만 신청받는데, 졸업을 앞둔 아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하고 싶었던 이윤선 원장 선생님의 요청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이윤선 원장 선생님을 통해 들어본다. 어떻게 신앙촌 견학을 오게 되셨나요? 예전에 부산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해서 신앙촌 견학에 대해 잘 알고 있었어요. 아마 2003년부터 1년에 한 번은 꼭 신앙촌 견학을 갔던 거 같아요. 그때 신앙촌에 대한 기억이 무척 좋아서 이번 졸업여행지로 신앙촌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견학은 어땠나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신앙촌 견학은 인기가 무척 많아서 예약이 금방 다 차버렸어요. 원하는 날짜를 잡으려면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그래서 신청 기간 전부터 선생님들과 계획을 짜서 빨리 예약하려고 준비했던 기억이 나요. 처음에는 스타킹 공장을 견학했는데, 스타킹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참 신기하더라고요. 요구르트 런 공장이 만들어지고 나서는 런 공장을 견학했습니다. 제조공정을 보니 믿음이 생겨서 그때부터 급식으로 런을 신청해서 먹게 되었어요. 아이들이 런을 좋아하나요? 12년 전에 통영으로 내려갔는데요. 통영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씩 요구르트 런 급식을 해요. 학부모님들께 듣기로는 아이들이 마트에 가면 아무리 많은 요구르트가 있어도 꼭 런을 집어온대요. 그만큼 아이들이 잘 먹고 좋아한다는 뜻이죠. 또 저희 어린이집은 아이들 반찬 만들 때도 신앙촌 두부와 간장을 사용하는데, 조리사 선생님도 신앙촌 제품이 맛있고 품질이 좋다고 칭찬하시더라고요. 교육철학은 무엇인가요?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즐겁고 밝은 마음으로 튼튼하게 자라는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통영은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며 자라기에 무척 좋은 곳이에요. 교육적인 면에서는 저도 엄마된 입장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는데요. 교육 욕심에 스무 개 넘는 학원에 보내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다 키워놓고 보니 자기가 관심있고 좋아하는 일은 알아서 찾기 마련이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다솜어린이집 아이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밝고 건강한 어린이로 성장시키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해 주세요. 견학 가이드해 주시는 분도 아이들이 알기 쉽게 잘 설명해 주시고 무척 친절하셨어요. 또 아이들 먹을 식사와 간식도 정성스럽고 맛있게 준비해 주셔서 정말 좋았습니다. 아이들이 즐거운 시간 보낼 수 있게 해주신 신앙촌에 감사드립니다.

“책임감을 갖고 겸손하게, 열심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책임감을 갖고 겸손하게, 열심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지난 2월 여성회 축복일, 신규 신앙촌상회 오픈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의 격려와 축하의 박수 속에 꽃다발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 김현옥 사장의 가게를 이어받은 신앙촌상회 신길6동점의 강선미 사장이다. 그전까지는 어머니를 돕는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신앙촌상회 사장님으로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강선미 사장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소비조합인 어머니 보고 자라며 신앙촌상회까지 이어받게 돼 어릴 때부터 소비조합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강선미 사장은 책임감과 성실함, 그리고 바른 양심으로 일하는 소비조합의 모습을 봐왔다고 한다. “가끔 새벽에 눈이 떠지면 제 머리맡에서 무릎 꿇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시던 어머니가 보였어요. 어머니는 수십 년 동안 소비조합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부지런히 살아오셨어요. 한결같은 그 모습을 저는 늘 존경해왔습니다. 그래서 연로해지신 어머니를 대신해 상회를 이어받게 되었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자식들이 대를 이어 가업을 물려받지 않느냐며 강 사장이 미소지었다. 실제로도 강 사장은 어머니가 평생을 일궈온 상회를 앞으로 본인이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큰 책임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또 소비조합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만큼 본사의 방향을 정확히 이해하고 따르려 노력한다고 했다. “가끔 본사에서 진행하는 런 데이나 두부 데이 같은 미션을 하니까 어떻게 판매해야 할지 다방면으로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또 이번 달에는 현대백화점에서 런 판촉 행사도 직접 해보기로 했는데요. 처음 해보는 일들이지만 두려워하기보다는 해보자는 마음으로 도전하려 합니다.” 강 사장은 지난달부터는 소비조합 세미나에도 참석하고 있다고 했다. “세미나에 참석한 지 이제 두 번째인데, 요구르트 런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셔서 귀에 쏙쏙 들어오더라고요. 또 광석을 판매하는 사장님들 영상이 무척 인상깊었습니다. 저도 제품에 대해 심도있게 공부해서 제대로 판매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너무 많다는 강 사장에게 앞으로의 각오를 물어보았다. “수십 년 전부터 일하신 선배님들에 비하면 저는 이제 막 발을 내디딘 단계라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고 열심히 일하고 싶습니다. 또 어머니와 함께 도란도란 웃으며 즐겁게 생활해 갈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복된 길

복된 길

하나님 의지해 나가는 신앙생활 저는 가족들이 모두 하나님을 믿어 관장님과 반사 선생님으로부터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 좋은 조건에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으면서도 별로 와닿지 않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축복일에 입사생과 다른 지역 대학생들이 모이는 자리가 마련되어 대화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저보다 더 간절하게 하나님을 따라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동안 제가 너무 편하게 신앙생활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의 신앙생활엔 공백이 많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나오긴 했지만, 한동안 쉬기도 하고 꾸준하질 못했습니다. 특히 축복일에 빠진 적이 많았기에 참여하지 못한 일들이 많습니다. 천부교 체육대회도 작년에야 처음 선수로 뛰게 되었습니다. 끝나고 나니 준비를 더 잘하지 못한 아쉬움이 컸습니다. 나중에는 이 아쉬움조차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해 평생 의문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바른길을 알면서도 성실하게 따르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한 권사님은 체험기에서 ‘영원한 천국을 아는 것만 한 복이 없다’라고 하셨는데 그때에야 ‘내가 복을 받은 사람이구나’하고 제대로 와닿았습니다. 이제 저는 교회에서 때때로 선생님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그런 호칭이 어색하게만 느껴지고 부족한 저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관장님과 다른 선생님의 도움으로 함께 일을 하다보니 변화가 조금씩 느껴졌습니다. 그전까지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기도문을 더 자주 외우고 하나님 말씀도 되새겨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낙심하지 말라’ 하신 말씀이 마음속에 떠오릅니다. ‘기를 쓰는 자는 낙심하지 마세요. 주 나를 이끌어주시니’ 이 말씀이 힘을 불어넣 어 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을 믿고 매사에 두려움보다는 믿음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지만, 남들보다 늦은 만큼 이제부터라도 채워나가겠습니다.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베푸는 교역자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베푸는 교역자

지금까지 여러 제단을 거치면서 많은 아이들을 만나며 기쁘고 행복했던 일, 안타깝고 아쉬웠던 일 등 여러 일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2명의 아이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예전에 제가 김천에 시무할 때 또래에 비해 똑똑하고 영리한 6살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 12월 축복일 도관 모임에서 새해 다짐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동생과 함께 축복일에 가끔 참석했던 그 아이는 축복일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언니들 앞에서 똑소리 나게 발표했습니다. 큰 학생들도 축복일 개근이 쉽지 않은데 어린아이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론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1년 후 그 아이는 자신이 앞에 나와 다짐했던 대로 축복일 개근을 했고, 저는 크게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도 일요일 예배와 축복일 예배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전도와 말씀 공부도 열심히 했던 그 아이는 시간이 흘러 이제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축복일에 아이들을 챙기고 있는 반사 선생님이 된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으면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하나님 의지하며 하나님 일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가기를 바라봅니다. 교역 생활하며 만났던 아이들 하나님 안에서 성장하길 기도해 또 한 명의 기억나는 아이는 제가 순천에서 시무했을 때 만났던 아이입니다. 일요일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아이는 평소에도 친구들을 교회에 초대하려 노력했고, 전도의 날에는 여러 명의 친구들을 전도하며 무척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함께 경전 말씀도 읽고 말씀 퀴즈도 풀면서 어려운 부분을 설명을 해주면 초등학교 3학년임에도 집중해서 듣고 똘똘하게 정답도 척척 잘 맞혀서 놀란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놀라웠던 것은 경전 제3부 4장 자유율법과 신앙촌 부분을 읽고 나서였습니다. “관장님, 저도 신앙촌에서 살고 싶어요.” 진지한 아이의 말에 “왜 신앙촌에서 살고 싶니?”라고 되물으니 “신앙촌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고, 자유율법도 잘 지킬 수 있는 곳이니까 저도 신앙촌에서 살고 싶어요.”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읽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고 순수한 마음이 예뻐 보였습니다. 하지만 고학년이 되자 순수했던 아이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왔습니다. 말 한마디에도 예민해지고 얼굴이 어두워져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쯤 저는 안성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이동을 하고 보니 아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더 해 줄 걸 하는 후회와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의 변화에 실망하고 잔소리하기보다는 아이의 상황에 대해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기다려줬더라면 아이들도 자신의 변화에 좀 더 고민하고 생각했을 텐데 저의 마음이 조급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 아이가 교회와 축복일에도 열심히 나오며, 친구들도 전도하고, 체육대회 경기에도 참여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너무 기뻤습니다. 저의 걱정과는 달리 ‘잘하고 있구나’ 생각했고 기특했습니다. 앞으로도 사춘기를 잘 견디고 어려운 상황도 지혜롭게 넘기며, 예전의 밝고 씩씩한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예뻐하시는 여학생이 되기를 마음속으로 응원해 봅니다. “교인을 대할 때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사랑이다. 끊임없는 인내와 사랑으로 대하라” 하신 하나님 말씀대로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베풀 줄 아는 교역자, 늘 하나님께 먼저 구하고, 진심으로 무릎 꿇을 수 있는 교역자가 되겠습니다.

주니어

2023 천부교 여학생 드림캠프

2023 천부교 여학생 드림캠프

교육과 실습, 재미 콘셉트 프로그램 ‘쿠킹 클래스’ 가장 호응도 높아 신앙촌의 가치 알게 된 유익한 시간 지난 2월 20~21일, 2023 천부교 여학생 드림캠프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맑게 사는 여학생’이라는 주제로 신앙촌에서 개최됐다. 대전교회 문시연 양(중2)의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사단조 3악장’ 특순으로 문을 연 드림캠프는 특강 시간을 비롯해 여학생들의 관심도와 만족도가 높은 프로그램들로 채워졌다. 천부교 여학생이 갖추어야 할 마음 자세와 행동에 대한 특강에서 이성희 관장(부천교회)은 “눈에 보이는 것은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쉽게 구분할 수 있지만, 생각이나 마음 등 눈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들은 우리가 쉽게 구분하기 힘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맑은 생활이란 바로 죄짓지 않는 생활, 즉 자유율법을 지키는 생활입니다”라며 천국에 가려면 죄를 이기는 맑은 생활을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은 이후 장소를 옮겨 마라탕과 로제떡볶이를 직접 요리하는 ‘쿠킹 클래스’에 참여했다. 요리에 앞서서는 깜짝 오프닝 쿠킹쇼로 셰프가 직접 나와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만들기를 선보여 학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학생들이 요리하는 동안에는 하루 네 컷 타임과 요리 심사도 진행돼 여학생들만의 발랄함과 열의에 찬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합창 연습과 ‘단합 게임’, 책 속 암호를 해석해 미션을 수행하면서 이야기 나누는 ‘맛있는 수다’ 시간도 친밀감을 더했다. 둘째 날에는 아침 예배 후 신앙촌의 가치에 대한 특강이 이어졌고, 키링 만들기, 앙케이트, 인생 네 컷 시상으로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이날 참석한 학생들은 “즐겁고 유익한 캠프였으며, 왜 맑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소아의 졸업이야기

소아의 졸업이야기

변화된 모습

변화된 모습

떼굴떼굴 ‘다른 그림찾기’ <2623호 정답자 발표>

떼굴떼굴 ‘다른 그림찾기’ <2623호 정답자 발표>

오성민 관장님 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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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도서추천> “오늘은 무슨 책을 읽을까?” 요즘 읽을만한 도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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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노 사전에서 노력이란, 힘들고 어려운 일일수록 치열하게 열심히 해내는 것이다 세이노의 가르침 세이노 | 데이원 | 2023.03.02. ‘세이노의 가르침’은 수백억 대의 자산가인 ‘세이노’가 카페와 언론사 등에 연재했던 글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은 원래 세이노의 독자들이 제본서를 제작해 돌려 읽던 것이었는데, 유튜버들 사이에서 유명해지면서 정식으로 출판된 것이다. 2000년 무렵부터 글을 써온 그는 단순한 재테크 비법뿐 아니라 성공을 위한 삶의 자세에 대해 실용적 조언을 건넨다. ‘Say No’라는 그의 필명처럼 그의 책은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새롭게 생각해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릇된 ‘식탐’을 올바른 ‘식욕’으로 바꿔줄 획기적인 프로젝트 당신이 배고픈 건 착각이다 무라야마 아야  | 시드페이퍼 | 2015.04.28. 운동은커녕 제대로 된 끼니 챙겨 먹기도 힘든 현대인들은 대체 어떻게 건강을 관리해야 하는 걸까? 저자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식단을 책임지는 스포츠 영양사로서, 우리 몸 본연의 흐름에 충실한 식욕 조절법을 제안한다. 살을 빼기 위해 먹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기보다는, 적절한 운동과 제대로 된 식단으로 ‘먹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덜 하게 만들어 몸에 꼭 필요한 영양소만을 채워주면 건강하면서도 날씬한 몸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기에 대해 정직하게 쓴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정직하게 쓰는 일이기도 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사상 | 2016.12.15. 하루키는 전업 소설가로서 살아가고자 결심한 전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이후 생활의 일부가 될 만큼 하루도 쉬지 않고 달리기를 이어왔다.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처음 시작한 달리기는 하루키에게 강인한 체력과 집중력, 그리고 지구력을 선사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계속 달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달리는 소설가로 불리는 하루키가 달리기를 축으로 인생과 문학에 대해 품고 있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입에 착착 감기는 맛 신앙촌간장으로 만든 연어장

담백함과 고소함의 끝판왕! 신앙촌 국산콩 순두부 명란 찌개

<도서추천> 무슨 책을 읽을지 고민이라면?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책 추천

이제는 4세대 유산균? 뭐가 다른가요?

이제는 4세대 유산균? 뭐가 다른가요?

최근 4세대 유산균이라 불리는 포스트 바이오틱스가 등장하면서 다른 유산균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어떤 것이 더 좋은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포스트바이오틱스에 대해 알아보자. ■ 포스트바이오틱스란? 우선 프로바이오틱스의 개념부터 알아야 한다. 프로바이오틱스는 장내에서 활동하는 유익균, 즉 생균이다. 생균은 살아있는 균을 말하는데 장까지 살아서 간다는 광고 문구가 이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대로 포스트바이오틱스는 사균이 포함된다. 사균은 유산균의 활동으로 만들어진 분해물로서 유산균 배양물이라고도 한다. 프로바이오틱스를 1세대 유산균, 유산균의 먹이가 되는 프리바이오틱스(프락토올리고당 등)를 2세대 유산균이라 한다. 프로바이오틱스와 프리바이오틱스를 합친 것을 3세대 유산균 신바이오틱스, 프로바이오틱스와 프리바이오틱스, 거기에 사균을 추가한 것을 4세대 유산균 포스트바이오틱스라고 말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사균은 좋은 것인가? 사균은 그 명칭 때문에 제 기능을 못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흥미롭게도 사균은 염증을 억제하고, 면역과 당뇨 등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사균이라는 개념이 최근에야 발견된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물질이고, 이를 활용한 제품도 진작에 상용화되었다. 다만 최근 마케팅의 일환으로 포스트바이오틱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균은 프리바이오틱스처럼 생균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좋은 포스트바이오틱스 고르는 방법 전문가들은 3세대 유산균, 4세대 유산균이라는 개념이 마케팅의 산물일 뿐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현재는 포스트바이오틱스는 국내 사용기준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사균 단 한 마리만 첨가해도 포스트바이오틱스라고 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식약처에서 포스트바이오틱스에 대한 정의나 기준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일반적인 프로바이오틱스에 대해서만 제대로 알고 제품을 선택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루 10분 체조로 건강 지켜요!

이제부터 운동 시작! 걸을까? 달릴까? 고민 말고 둘 다 하세요!

장내 유익균이 노화 방지 등 건강 수명에도 도움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