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촌의 아름다움 공유하는 “가을 담기 공모전” SNS로 진행

신앙촌의 아름다움 공유하는 “가을 담기 공모전” SNS로 진행

다양한 사진과 영상 출품돼 신앙촌 가을의 정취 느낄 수 있어 신앙촌 가을 담기 공모전이 개최되어 신앙촌 주민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이번 공모전은 가을을 맞아 신앙촌의 아름다운 풍경을 공유하자는 취지로 마련되었다. 또한, 코로나19 상황으로 야외 외출을 자제하고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평범하고 따뜻한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SNS로 공모전을 진행하였다. 가을 담기 공모전은 가을을 맞은 신앙촌을 연상케 하는 사진, 영상 등 자신이 선호하는 분야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제출할 수 있었다. 출품된 사진 200여 점과 다수의 영상 중에서 예술성, 창의성, 독창성 등 심사 기준에 따라 수상작이 선정되었다. 최우수상은 “매일이 새로운 오늘” 이란 제목의 사진과 영상을 출품한 입사생 조순영 씨가 받았다. 우수상은 입사생 오지영 씨, 식품여고 1학년 팀, 장려상은 신앙촌 여청 최서아 씨 외 3명이 수상했다. 수상자들에게는 신앙촌 상품권이 수여되었다. 조순영 씨는 “식품단지를 걸으면 하루의 피로가 싹 사라집니다. 눈으로 직접 봤던 아름다운 식품단지를 카메라에 모두 담을 수는 없었지만 경이로웠던 그날의 기분을 모두와 함께 느껴보고 싶었습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천부교 역사와 함께 달려온 ‘신앙신보’ 65주년 맞아

천부교 역사와 함께 달려온 ‘신앙신보’ 65주년 맞아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이야기하며 미래를 향하는 신앙신보가 되겠습니다.” 천부교의 역사와 함께 달려온 신앙신보는 1955년 1월 26일 창간되어 65주년을 맞았다. 종교 주간지로는 서울에서 두 번째로 정식 등록된 신앙신보는 1955년 2월 7일 창간호를 발행하고 1978년 제1000호 발행과 2004년 시대 흐름에 맞춘 인터넷 신문 서비스 개시를 거쳐 2005년 1월 지면을 8면으로 최종 확장하며 전통 종교신문으로 자리 잡았다. 또 1994년 1월 16일(제1871호)부터 신앙체험기가 게재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연재가 계속되고 있다. 신앙신보는 천부교의 국내외 이슈와 행사, 『하나님 말씀』경전, 천부교 역사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어린이를 위한 주니어 코너를 함께 운영 중이다. 또한 신앙신보 홈페이지는 천부교의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한다는 점을 인정받아 ‘웹 어워드 코리아 2018’에서 방송∙신문 분야 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둔 바 있다. 65주년을 맞아 신앙신보에서는 과거 신문에 실렸던 인물들을 만나보았다. 2008년 7월, 2260호 신앙체험기의 주인공 주채경 권사. 올해 101세의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척 정정한 모습이었는데, 취재진을 보자 12년 전과 변함없는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이날 주 권사와 함께 만난 사람은 2013년 리더스쿨 기사에 실린 고가영 양이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가영 양은 올해 스무살이 되어 향상음악회에 참가, 우수상을 받아 2585호 신앙신보에 다시 한 번 실렸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는 말이 무색하게 금방 공감대를 형성했다. 특히 주 권사가 체험기의 내용을 생생하게 이야기할 때는 마치 당시 은혜의 현장에 와 있는 듯한 벅찬 감동이 전해졌다. (오른쪽 사진) “하나님 집회에 참석했을 때 이슬 같은 은혜가 뽀얗게 내리던 일, 코 끝에 진한 향취가 맡아지던 체험은 평생 잊을 수 없지요. 여전히 하나님이 너무 좋고 정말 감사드리고 또 무척이나 그리워요.” 주 권사의 진심이 담긴 마지막 말에 고가영 양을 비롯해 주변에 있던 취재기자들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신앙신보 관계자는 “우리는 진정한 구원의 역사, 직접 체험하는 은혜의 순간들을 기록하는 천부교의 언론으로서 사명을 다하고자 합니다” 라고 하며 “천부교 역사의 중심에서 하나님 말씀을 널리 전하고, 천부교인들의 아름다운 삶을 함께 나눠 어두운 세상에서 진실을 전파하는 역할을 다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65주년을 맞은 소감을 밝혔다.

코로나ㆍ독감 동시 유행 ‘트윈데믹’ 대비해야

코로나ㆍ독감 동시 유행 ‘트윈데믹’ 대비해야

코로나 확산세에 독감 겹치면 의료시스템으로 감당 어려워 인플루엔자(독감) 동시 감염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전파력을 두 배 이상 증가시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전 세계 일일 확진 환자 수가 31만 명을 넘어설 정도로 코로나19 확산세가 거센 상황에서 독감 유행까지 겹치면 현재의 의료시스템으로는 감당이 어려울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11일(현지시간)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독일 막스플랑크 생화학연구소와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는 최근 계절성 독감과 코로나19의 공동순환 시뮬레이션 모델을 개발했다. 두 바이러스의 유행 양상을 담은 데이터는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노르웨이 등 유럽 국가에서 추출된 것이다. 분석 결과, 코로나19에 감염된 환자는 평균 2명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했지만 독감에 동시에 걸린 경우는 평균 4, 5명에게까지 전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감의 전형적 증상인 기침과 재채기가 코로나19 전파를 촉진할 것이라는 예측도 많다. 연구진은 인체가 두 바이러스를 동시에 상대하는 만큼 상태는 더욱 나빠질 것으로 봤다. 독감 감염이 면역체계를 자극해 코로나19 바이러스 침입을 부분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일부 학자들의 기대 섞인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앞서 5월 구글과 미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도 독감 바이러스가 인체에서 안지오텐신 전환 효소2(ACE2)의 양을 크게 증가시켜 코로나19에 더 잘 감염되는 상태로 만든다는 공동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ACE2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체내 숙주세포와 결합하는 데 사용되는 주요 수용체다. 진단 과정에서의 혼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논문은 동시 감염은 따로 감염된 경우보다 코로나19 진단율이 30~50%가량 떨어지는 결과가 나왔다고 밝혔다. 코로나19 잠복기가 평균 5일 이상인 반면, 독감은 하루 이틀뿐이라 동시 감염 환자가 코로나19 검사를 했을 때는 독감 증상이 이미 사라진 상태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봄철 코로나19 1차 유행 이후 신규 확진자 수가 줄어든 것 역시 봉쇄령과 거리 두기 조치 외에 독감 시즌이 지나간 영향이 컸다고 연구팀은 추정했다. 코로나19 확진ㆍ사망 1위인 미국은 ‘트윈데믹’ 가능성에 촉각을 세우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앞서 지난달 로버트 레드필드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국장은 “코로나19와 독감이 동시 발생하면 우리가 겪어본 최악의 가을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의료기관의 부담을 덜어줄 방법 중 하나로 독감 백신 접종을 대폭 확대하는 방안이 거론된다고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SCMP에 따르면 중국도 통상 연간 전체 인구의 2%에 해당하는 3,000만 명분의 독감 백신을 공급해왔으나, 올해는 특수 상황을 고려해 공급량을 늘리기로 했다. 코로나19의 가파른 재확산세는 독감 시즌에 대한 우려를 더욱 키우고 있다. 국제통계사이트 월드오미터 자료를 보면 11일 기준 글로벌 코로나19 일일 확진자 수는 31만692명을 기록해 4일 세운 사상 최고치를 다시 경신했다. 특히 인도와 유럽의 확산세가 심상치 않다. 인도는 전 세계 신규 확진자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고, 유럽에서도 프랑스의 일일 확진자가 1만 명을 돌파하는 등 여름 휴가철 이후 환자가 급증하는 추세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선 백신 개발이 시급한 상황인데, 다국적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와 영국 옥스퍼드대는 당국의 안전 승인을 받아 영국과 브라질에서 지난 8일 중단했던 임상시험을 재개하기로 했다고 12일 밝혔다.

은혜 안에서 기쁨으로 살아가는 시온입사생

은혜 안에서 기쁨으로 살아가는 시온입사생

시온입사생회가 입사 33주년을 맞이했다. 1987년 8월 7일,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더 맑은 신앙생활을 하자는 취지로 발족된 시온입사생회는 지금도 신앙촌 기업 등에서 일익을 담당하며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입사생들은 33주년을 맞아 “크신 사랑 주의 은혜 속에 기쁨으로 길이 살게 합소서”라는 슬로건 아래 신앙촌에서 생활하는 기쁨과 감사함을 되새기며 구원을 향한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또 시온여청회에서는 입사 33주년을 축하하는 기념화환을 입사생회에 전달하였다. 올해 입사 20주년을 맞은 최선희 씨는 “신앙생활과 일, 소중한 관계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려볼 수 있는 성숙한 모습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정소희 씨는 “지난 10년을 돌아보니 아쉬움이 남습니다. 앞으로의 시간은 후회와 아쉬움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했고, 김현지 씨도 “신앙촌에서 경험했던 모든 일들은 세상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값진 보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견고한 모습으로 전진하는 입사생이 되겠습니다” 라고 입사 10주년을 맞이한 소감을 밝혔다. 이날 시온입사생회는 나를 돌아보고 타인을 이해하자는 취지로 함께 가는 우리, MBTI 성격유형 알아보기 테스트도 SNS로 진행했다. 이재동 관장(시온입사생 담당)은 “입사생은 신앙촌의 귀한 가치를 알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곳에서 받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 속에서 항상 기쁨과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입사생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성경의 주인공은 감람나무 하나님

성경의 주인공은 감람나무 하나님

7월 25일, 학생축복일을 하루 앞두고 신앙촌에 천부교 어린이와 학생들이 도착했다. 어린이와 학생들은 ‘SUMMER 어드벤처’에 참가하여 워터림보 등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었다. (관련 기사 8면) 오후에는 여청·대학생을 대상으로 경전 퀴즈대회와 특강이 열렸다. 퀴즈대회를 앞두고 신앙촌 내 휴게 공간 곳곳에서 경전을 읽으며 공부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관련 기사 6면) 또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을 위한 드림캠프도 마련되었다. 시온식품여자고등학교 선배들과 함께 진학과 진로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26일, 축복일 예배에서 유명숙 관장 (마산교회)은 “성경에는 자유율법과 이슬성신, 감람나무가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해석해 주시기 전까지 누구도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썩을 것을 썩지 않게 하는 이슬성신의 권능을 보여주시니 우리는 성경의 주인공이 감람나무 하나님이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라고 설교했다. 예배 후에는 추수감사절 음악순서를 위해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함께하는 주니어 합창단 연습이 있었다. 또 샛별부 디저트 만들기, 엘리트 여청 모임 등 파트별 프로그램이 있었다.

천부교회 학생회 교육, 온라인과 병행하며 효과 높여

천부교회 학생회 교육, 온라인과 병행하며 효과 높여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점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마무리하고 6일부터는 일상과 방역의 조화를 위해 생활 속 거리두기를 이행한다고 발표했다. 전국의 천부교 학생회는 이와 같은 생활 속 거리 두기 지침을 준수하는 한편, 어린이와 학생들을 위한 온라인 교육을 통해 교육 효과를 높이고 있다. 2월 초부터 천부교 측은 입구 체온측정, 손 소독제 비치, 2m 좌석 간격 유지, 참석자 동선 체크 등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며 예배를 드려왔다. 코로나 사태로 촉발된 사회적 거리두기는 천부교회의 교육 방식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지금까지 교육 방식이 교회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하는 대면 교육이 주를 이뤘다면 코로나 이후에는 온라인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교육 받는 학생들이 온라인 상의 활동에 익숙한 세대들인 만큼 온라인을 통한 대화와 피드백이 활발히 이루어져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온라인 교육은 카카오 라이브톡으로 진행되며 지역별로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1부 예배에 이어 2부는 하나님 말씀퀴즈, 3부는 다양한 비대면 놀이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된다. 온라인예배에 참여한 김민경 양(중1, 목동교회)은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새로웠어요. 또 요즘 유행하는 수란 도시락 만들기, ASMR을 친구들과 채팅하면서 같이 해볼 수 있는 것이 재미있어요”라고 했다.

하루만에 폭염에서 폭설로.. 美 덴버, 롤러코스터 탄 여름

伊, 가톨릭 사제 노숙자에 피살

15년 이상 수컷 근처도 안 갔는데…알 낳은 美 동물원 비단구렁이

美 대성당 예수상 공격당해

총회 소집 공고 – 한국천부교신도연합회

교인 등록 추가 공고 –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

신도 등록 추가 공고- 한국천부교신도연합회

신앙체험기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던 삶이 하나님 뵌 후로 새 삶을 살게 돼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던 삶이 하나님 뵌 후로 새 삶을 살게 돼

1968년 3월 제 나이 마흔한 살 때였습니다. 우연히 길 가던 아주머니와 이야기하다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춘천에 오셔서 집회하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집회하시면 병자들이 낫고 신기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했는데, 저는 교회에 다니지 않아 박 장로님이나 부흥집회를 몰랐지만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구나 하며 재미나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시내 곳곳마다 집회 포스터가 붙었다며 저한테도 같이 가자 했습니다. 박 장로님 집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하니 호기심이 생겨 따라가게 됐습니다. 집회가 열리는 춘천전도관은 산언덕에 있어 멀리서도 한눈에 보였습니다. 산언덕에 오르니 우렁차게 손뼉 치며 찬송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배실에 사람이 가득 차 저희는 제일 뒷자리 신발 신는 곳에 겨우 앉았는데, 막상 예배에 참석하고 보니 손뼉 치는 것도 찬송하는 것도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 멀리 단상에 박태선 장로님께서 나오셔서 설교 말씀 하시는 동안에도 사람이 많아 그런지 음성이 잘 들리지 않았고 저는 얼른 집에 갈 생각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자 아주머니가 “오늘 박 장로님께서 안찰해 주신대요.” 하며 꼭 받아 보라 했습니다. 이런 기회가 드물다며 자꾸 권하는 말에 긴가민가하다가 많은 사람이 안찰 받으려고 몰려드는 것을 보고 궁금한 마음에 저도 안찰 받는 줄에 섰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눈에 손을 대시자마자 너무 아프더니 차차 통증이 사라지고 온몸이 시원하고 가벼워 나는 것 같아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기쁘고 즐거워져 차례가 되어 박 장로님께서 두 눈에 손을 대시자마자 얼마나 아픈지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세게 누르시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손을 얹으실 뿐인데 너무 아파 소리 치고 싶은 것을 겨우겨우 참았습니다. 그토록 아프던 통증이 차츰차츰 사라지더니 온몸이 시원해질 때 박 장로님께서 손을 떼셨습니다. 안찰을 받고 나오자 발이 땅에 닿는지 안 닿는지 모를 정도로 몸이 가벼워 훨훨 나는 것 같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저는 안찰이 뭔지 잘 모르면서도 ‘이렇게 몸이 가볍고 좋으니 다들 받으려고 하나 보다.’ 하며 전도관을 더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두 달쯤 지나 서울 창신동으로 이사했을 때 마침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전도관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숭인동에 있는 3중앙 전도관에 같이 가자 하시기에 선뜻 따라나섰습니다. 몇 번 새벽예배에 참석해 보니 관장님 설교 말씀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라 하시며 자유율법을 지켜서 행동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짓지 않아야 된다 하셨습니다. 저는 자유율법을 지키면 양심적이고 좋은 사람이 될 것 같아 그 말씀대로 살고 싶었고, 내일은 무슨 말씀을 해 주실지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청계천으로 이사해서도 먼 길을 걸어 다니며 새벽예배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 1971년 무렵, 하나님께서 일요일마다 서울에 있는 중앙전도관을 순회하시며 예배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 가시는 중앙을 따라다니며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3중앙 전도관에서 예배를 마친 후 하나님을 따라 5중앙으로 갔습니다. 청량리에 있는 5중앙은 대로변의 큰 건물이었는데 예배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이 도로까지 차고 넘쳐 조금만 늦어도 자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3중앙 교인들과 같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단상과 가까운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한참 찬송을 부를 때 소나기가 “쏴아~” 하며 머리 위에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장독을 열어 놨는데 어떡하지?’ 걱정하다 몸을 만져 보니 보송보송할 뿐 전혀 젖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빗방울이 피부에 와닿는 것처럼 느껴졌고 온몸이 말할 수 없이 시원한 것이었습니다. 또 아주 좋은 향기가 진동하는데 예배 후 집으로 돌아올 때도 계속 맡아지며 나중에는 목으로 시원하고 달콤한 물이 꿀꺽꿀꺽 마셔졌습니다. 교인들에게 예배 시간에 소나기가 내리고 좋은 향기가 계속 진동한다 했더니 “은혜 많이 받으셨네요.” “참 기쁘고 좋지요?” 하고 한마디씩 건넸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빗줄기가 내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형용할 수 없이 좋은 향취를 맡게 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한참 찬송을 부를 때 머리 위로 소나기가 쏟아져 몸을 만져보니 전혀 안 젖어 또 좋은 향기가 계속 맡아지며 목으로 시원하고 달콤한 물이 꿀꺽꿀꺽 마셔져 하나님 은혜는 빗줄기처럼 느꺄지기도 하고 향취로 맡아진다는 것을 그때 알아 그 후 3중앙에서 예배드릴 때였습니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편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하는 찬송을 부르며 괴로운 인생길이란 가사가 마음에 들어와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남편의 사업 실패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전북 김제가 고향이었지만 먹고살 길을 찾아 춘천으로 서울 판잣집으로 떠돌아다니며 마음이 늘 괴로웠습니다. 세상 어디도 편히 쉴 곳 없는 처지가 찬송가 가사 그대로였습니다. 찬송을 부르면 부를수록 눈물이 쏟아져 어깨까지 들썩거렸는데 남 보기가 창피스러워 그치려고 해도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머리 위에서 “쏴아~” 하며 소나기가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아! 은혜 주시는구나!’ 하며 흐르는 눈물을 더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예배 시간 내내 울다가 누가 볼까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방에 앉아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본향 하늘나라’ 찬송을 생각하는데 아주 좋은 향취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금세 방 안을 가득 채운 것처럼 진하게 맡아졌습니다. 또 은혜 주신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해서 그 자리에 엎드려 울었습니다. 한참 울고 나니 그동안 겪은 설움이 눈물에 다 녹아 나온 것처럼 마음이 그렇게 가볍고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도 힘든 살림은 마찬가지였지만 고생이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살이가 고달파도 제단에 가면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평안해지니 하루하루를 기쁘고 감사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3중앙 권사님 두 분과 함께 전도관에 갈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두 분은 병원에서 고치지 못했던 병이 하나님께 안찰 받고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하셨는데, 저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소화가 안 되는데…….’ 하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속상한 일을 많이 겪으면서 위장이 점점 나빠져 제대로 먹지를 못했습니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 보니 위가 너무 약해진 상태라며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지 말아야 될 음식을 작은 책자로 만들어 줬습니다. 책자에는 대부분 먹지 말아야 될 음식이었고 먹어도 되는 음식은 손에 꼽을 만큼 몇 가지가 안 되어 끼니 때마다 미음을 쑤어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소화가 안 돼?”하며 안수해 주신 후로는 언제 위장이 아팠던가 싶게 속이 너무나 편안하고 아무런 문제 없이 소화가 잘돼 그 후 축복일이 되어 기장신앙촌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 안수해 주셔서 줄을 서서 한 명씩 안수를 받았습니다. 제 차례가 됐을 때 하나님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왜? 소화가 안 돼?” 하고 말씀하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마치 제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 답을 해 주시는 것 같은 음성이셨습니다. “네” 하고 대답하자 머리에 손을 얹으시며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날 축복일 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오니 몹시 허기져서 보이는 대로 밥과 반찬을 꺼내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안수를 받은 뒤부터 언제 위장이 아팠던가 싶게 속이 너무나 편안한 것이었습니다. 전날만 해도 미음조차 겨우 삭였던 제가 찬밥에 김치와 야채를 먹어도 아무 문제 없이 소화가 잘됐고 그때부터 병원과 약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제 생각을 곁에서 들으신 것처럼 말씀해 주시던 음성이 떠오르곤 합니다. 건강을 되찾게 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돌아가신 분을 생명물로 씻기고 나니 차갑고 뻣뻣했던 몸이 부드러워지고 푸르스름했던 피부도 맑고 환하게 피어 주무시는 듯 편안하고 깨끗한 모습 돼 저는 전도관에 다닌 후로 입관예배에 참석하며 돌아가신 분이 아름답게 피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됐습니다. 그중 기억에 남는 분은 2005년에 돌아가신 김보예 권사님이십니다. 보통 입관예배 때면 교인들이 찬송을 부르고 장례반 권사님이 고인을 생명물로 씻겨 드렸는데, 그때는 장례반이 없어 교인들 여러 명이 같이 씻겨 드렸습니다. 저는 그때 돌아가신 분을 처음으로 씻기게 됐습니다. 며칠 동안 영안실에 있었던 고인은 몹시 차갑고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피부도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굳은 몸을 여러 명이 힘들게 움직이며 씻기기 시작했는데 생명물로 씻길수록 부드러워지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고, 다 씻기고 나자 팔이며 다리가 자유자재로 움직여졌습니다. 푸르스름한 빛을 띠던 피부도 어느새 순색으로 맑고 환하게 피고 발그스름한 혈색이 감도는 입술은 살짝 미소를 짓고 계셨습니다. 온화하게 미소지으시던 생전의 모습보다 더 곱고 예뻐서 저도 따라 미소를 짓게 됐습니다. 주무시는 듯 편안하고 깨끗한 얼굴을 보며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 깊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길을 따라온 세월이 어느새 50년이 흘러 저는 구순이 넘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고생하며 살다가 하나님을 뵙고 새 삶을 살게 됐습니다. ‘하나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하는 찬송이 그대로 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 귀한 은혜로 함께해 주시는 사랑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하겠습니까. 앞으로 남은 시간 헛되이 보내지 않고 가르쳐 주신 대로 맑고 바르게 살 것을 다짐해 봅니다. 허락해 주시는 은혜 늘 간직하며 그날에 기쁨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죄를 씻어 구원을 주시는 이 길이 무엇보다 가치 있음을 깨달아

죄를 씻어 구원을 주시는 이 길이 무엇보다 가치 있음을 깨달아

1965년 무렵으로 기억됩니다. 하나님께서 덕소신앙촌 주일 예배 시간에 말씀하시기를, 어린 시절부터 기억나는 대로 자신이 죄지은 것을 회개하라 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성신으로 씻음 받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지만 회개하지 않고 죄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구원 얻을 수 없다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전도관에 나와 자유율법을 배우기 전에는 죄가 죄인지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지으면 안 되는 자유율법 기준으로 어린 시절부터 돌아보니 회개할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남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일부터 사소한 것까지 떠올라 몇 날 며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배 시간에 죄를 회개하고 성신으로 씻음 받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를 지으면 안 되는 자유율법 기준으로 돌아보니 시기하고 질투했던 일부터 회개할 것이 너무 많아 몇 날 며칠 회개의 기도를 드려 그 즈음 공장별로 안찰해 주셨는데 저는 안찰 받을 때 하나님 손이 닿자마자 몹시 아팠지만 차츰차츰 통증이 사라지고 나중에는 온몸이 그렇게 상쾌하고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안찰하실 때 엄한 음성으로 죄를 지적하시는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습니다. 우리의 죄상을 낱낱이 아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죄를 씻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를 씻어 주시는 것이 이렇게 확실하구나!’ 하고 실감하면서 구원이 막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를 안 짓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성신으로 씻어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 어디서 이런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성신을 주시는 이 길이 가장 귀하고 가치 있다는 깨달음이 마음 깊이 자리 잡아 신앙생활에서 중심을 잡게 해 주었습니다. 당시 저는 주일학생을 가르치는 반사를 했는데 자유율법을 지키고 은혜 받으려고 하는 것은 어린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설교 시간에 하나님께서 기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날은 예배실에 남아 기도드리는 어른들 틈에서 아이들도 작은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자유율법을 배운 후에는 “미워하면 안 돼!” 하며 친구와 다투지 않는 모습이 그렇게 기특하고 예쁠 수가 없었습니다. 안찰 받을 때 하나님의 손이 닿자마자 몹시 아팠지만 차츰차츰 통증이 사라지고 나중에는 온몸이 그렇게 상쾌하고 시원할 수가 없어 1970년 기장신앙촌이 건설되면서 하나님께서는 덕소에서 기장까지 먼 거리를 매일 다니셨습니다. 기장에서 하루 종일 건설을 진두지휘하신 후에도 다음 날이면 어김 없이 덕소신앙촌 제단에서 새벽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해 12월 기장신앙촌에 입주해 보니 산을 깎아 만든 부지에 공장 건설이 한창이었습니다. 제가 입주했을 때 건설대 포함해 종업원이 400명 정도였는데 공장이 다 완공된 후에는 7,000여 명이 근무했습니다. 저는 수출 제품을 만들었던 봉제 공장을 거쳐 간장 공장, 메리야스 공장 등에서 근무했습니다. 같이 일했던 직원 중에 지금은 공장장이 되었거나 여성회 교역자로 활동하는 분도 있습니다. 20년 가까이 신앙촌에서 생활하는 동안 겪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데 그중 특별히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1981년경 저는 메리야스 공장 원서무로 매달 이틀 정도 밤을 새우며 일했습니다. 지금처럼 컴퓨터가 아니라 수기로 작성하고 계산하던 시절이라 재고 파악, 손익 계산, 세무 보고 등에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새워 일할 때였습니다. 하나님 사택이 메리야스 공장 맞은 편에 있었는데 저녁 9시가 되자 “쉭! 쉭!” 하시며 축복하시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일에 몰두하다 문득 귀를 기울여 보면 축복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습니다. 자정을 넘어 새벽 3시, 4시까지 쉬지 않으시는 축복 소리를 들으며 뜨거운 눈물이 솟아 올랐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밤새워 신앙촌을 축복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제가 직접 축복 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1초도 주무시지 않고 축복하신다는 것을 내 귀로 똑똑히 들었으니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많은 사람 앞에서 증거해야겠다!’ 그 후 1983년 여성회 교역자로 발령받으면서 바라던 대로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서울 마포교회를 시작으로 교역 생활을 하면서 그때 일을 빼놓지 않고 이야기합니다. 온몸의 피부가 시커멓던 고인의 몸에 수시로 생명물 바르고 찬송을 부르자 먹장 같던 피부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연해지고 맑아져 뽀얀 피부가 돼 서울 화곡교회에서 시무할 때는 두 가지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하나는 화곡교회에서 솔선수범하시며 본이 되시던 이소용 승사님의 입관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처음 그 댁에 가서 고인을 봤을 때는 온몸의 피부가 먹같이 시커멓게 된 모습이었습니다. 교인들과 찬송을 부르고 수시로 생명물을 고인의 몸에 발라 드렸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피부색이 확연히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시커멓던 피부색이 자주색이 되고 분홍색이 되었다가 점점 연해지고 맑아져서 뽀얀 피부가 됐습니다. 피부가 몇 시간 만에 확실히 바뀌는 것을 보며 참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간암으로 고생하셔서 얼굴에 병색이 완연하던 분이었지만 입관예배를 마친 후 승사님의 얼굴은 더할 수 없이 환하고 깨끗해 보였습니다. 포근한 잠자리에서 편안히 주무시는 것 같은 승사님을 보면서 은혜로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또 한 가지는 기장신앙촌 축복일에 가서 안찰을 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축복이 귀하다 하시며 안찰해 주셨는데 그 순간 코끝에서 꽃향기보다 진한 향취가 바람처럼 불어와 맡아졌습니다. 그 향취가 예배 마치고 신앙촌에서 나와 부산역에 갈 때까지 계속 따라오는 것처럼 맡아져서 ‘부족한 저에게도 귀한 은혜를 주십니까!’ 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전에 안찰을 받고 마음이 한없이 기쁘고 즐거워진 적도 있었고, 쇳덩이에 발등을 찍혀 다쳤을 때 축복을 받고 흉터 하나 없이 말끔히 나은 일도 있었는데, 계속해서 향취가 진동한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이 귀한 은혜를 전하라는 뜻인가 보다고 생각하며 전도에 더 열심을 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찰해 주시자 코끝에서 꽃향기보다 진한 향취가 신앙촌에서 부산역까지 계속 맡아져 ‘이렇게 귀한 은혜를 주십니까!’ 감격스러워 교역자가 된 후로 신앙촌에 올 때면 정문에서부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교인들과 함께 전도를 위해 뛰어다니다 신앙촌에 오면 하나님 세워 주신 신앙의 터전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습이 하나하나 떠올랐습니다. 매주 일요일이면 기장신앙촌에서 소사, 덕소 신앙촌을 거쳐 서울의 중앙전도관까지 다니시며 예배를 인도해 주셨던 일, 수출 바이어를 직접 만나시고 수십 개 공장을 지휘하시던 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축복하시며 격려해 주시던 모습……. 이 터전을 세우기 위해 한없이 희생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또 신앙촌에서 보고 배운 것은 교역 생활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습니다. 출장비를 부지불식간에 1원이라도 가지면 도적죄가 된다고 했던 것을 생각하며 작은 죄도 분별하며 정확하고 맑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덕소신앙촌에서 바쁘고 즐겁게 일했던 것을 생각하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힘을 내게 되었습니다. 2015년 덕소신앙촌 여성회 관장으로 발령받아 1년 반 남짓 시무했던 기간은 저에게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제단 앞에서 생명물을 축복해 주시던 하나님 모습과 기쁨에 가득 차서 찬송을 부르던 20대 시절이 어제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랜 세월 은혜 주시며 지금까지 이끌어 주셨으니 결실을 맺는 교역자가 되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죽성교회에서 시무하는 저는 교회 신축을 준비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신앙촌에서 가장 가까운 죽성 천부교회를 깨끗이 단장해 많은 수를 전도하는 것이 저와 죽성 교인들의 목표입니다. 초창기부터 따라오신 세대부터 신앙촌 소비조합을 하는 젊은 세대까지 교인들과 함께 귀한 은혜 속에서 보람 있게 살기 위해 노력을 다하고자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주신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힘껏 달리겠습니다.

신앙체험기 특집

천부교회를 찾아서

뉴스
순교(殉敎)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죽음을 불사하는 신앙인가? 죽음을 숭배하는 사교(邪敎)인가?

1612년 10월 8일, 일본의 통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네덜란드 국왕<자료1>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가톨릭 신부들은 일본인을 가톨릭으로 끌어들인 후 종교를 빌미로 큰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톨릭의 생각대로 되는 것입니다.”(야마모토 시치헤이,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당시 네덜란드는 일본과 무역 거래를 하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는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80년 전쟁을 치른 것을 비롯해 가톨릭 광신분자들이 일으키는 테러와 학살을 직간접적으로 겪었는데, 가톨릭이 전쟁을 부추길 것이라고 일본에게 경고한 것이었다. 그때 가톨릭은 일본에서 번영을 구가했다. 이전 통치자인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톨릭 보호 정책을 펼쳐 선교사를 후대했기 때문에 가톨릭 신도는 나날이 증가해 60만 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즈음 일본 인구가 2500만 명으로 추산되니 인구의 2.4%가 가톨릭 신도였다는 것인데, 2017년 기준으로 가톨릭 신도가 인구의 0.3%에 그치는 것을 보면 당시는 일본의 가톨릭 전성시대라 할 수 있었다. 일본의 통치자 자리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 국가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 선봉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보내 전쟁을 부추긴다는 사실을 이전부터 알고 속으로 우려했으나, 신중하게 인내하며 의도를 드러내지 않았다. 마침 그때 가톨릭의 위험성을 경고한 네덜란드 국왕의 편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톨릭 금지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편지를 받은 지 두 달 후인 1612년 12월 22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격적으로 ‘가톨릭 선교사 추방문’을 발표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기리시탄 다이묘(キリシタン だいみょう)라 불리던 가톨릭 영주들이 선교사를 비롯해 가톨릭 세력을 비호하고 있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가톨릭 유력자 148명까지 필리핀 마닐라로 추방해 버렸다. 이후 일본은 250년간 가톨릭 금지 정책을 펼쳤고 이를 통해 가톨릭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종교라는 사실이 일본인의 의식에 뿌리 깊이 박히게 되었다. 가톨릭 금지 정책을 시행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의 어떤 면을 가장 우려했을까. 그의 명령으로 반포된 ‘가톨릭 선교사 추방문’ 내용 중에 가톨릭의 핵심을 찌른 문장이 있다. “가톨릭 선교사는 모든 정책과 법령을 위반하고 정법(불교)을 비방하며 의(義)가 없고 선(善)을 파괴한다. 형인(刑人, 순교자)을 보면 기뻐하며 달려가 배례한다. 순교를 종교의 본질이라 여기는데, 사법(邪法=사교)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자료2,3,4> 다시 말해 올바른 정신이라면 참혹한 죽음을 보고 슬픔과 고통을 느끼는 것이 마땅할 텐데, 죽음을 보고 기뻐하며 숭배하는 모습에서 사람의 정신을 기만하는 가톨릭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고, 바로 이 때문에 가톨릭이 사악한 종교라는 것이다. 이 같은 도쿠가와 시대의 정책은 『하데우스(破提宇子, 가톨릭의 신을 파괴하다.)』라는 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 책의 저자인 후칸사이 하비안(1565년~1621년)은 가톨릭과 순교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 준다.<자료5,6> “순교는 가톨릭을 위해 몸과 생명을 먼지처럼 버리는 것이니 무서운 일이다. 가톨릭은 군대를 파견해 다른 나라의 탈취를 도모하는데, 천 년 후에도 가톨릭이 일본을 탈취할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우리 골수에 가톨릭의 사악함을 새겨야 한다.” 통치자 입장에서 가톨릭이 군대를 앞세워 일본을 탈취하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일본인이 가톨릭에 세뇌되어 영혼을 기만당하고 생명을 먼지처럼 버리는 것이었다. 보통 일본인은 ‘할복’으로 죽음을 명예롭게 여긴다고 알려져 있지만, 할복은 무사 계급에 한정된 것이었고 또 할복이 명예를 담보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죽음에 이르는 형벌’이었지 순교와 같이 ‘죽음을 숭배하는 의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순교의 실체를 꿰뚫어 본 하비안은 ‘가톨릭의 사악함을 골수에 새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우려했던 상황은 현실이 되었다. 1637년 시마바라(島原)라고 하는 작은 도시에서 가톨릭 신도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자료7> 이를 진압하기 위해 그들이 결집한 성으로 들어간 정부군은 충격에 휩싸였다. 정부군이 들이닥치자 가톨릭 신도들은 기쁨이 넘쳐 흐르는 얼굴로 죽음의 순간, 즉 순교라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순교는 집단 자살과 다르지 않았고, 다만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타인이 끊게 만든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죽음을 찬미하고 집단 자살을 선택하는 모습에서 충격을 받은 일본 정부는 이후 숨어 있는 가톨릭 신도들을 색출하며 더욱 철저하게 가톨릭을 금지했다. 순교(殉敎)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표준국어대사전)”이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은 순교라고 하면 ‘죽음까지 불사하며’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와 달리 가톨릭에서는 ‘죽음 그 자체’를 신앙이라 여기며 숭배한다. 순교의 한자를 보면 ‘따라 죽는 것(殉)을 가르친다(敎).’는 뜻으로 가톨릭의 본질을 나타내는데, 가톨릭에서 말하는 순교란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이며 “죽음을 강제하는 사고방식(종교학대사전)”이기 때문이다. 순교를 의미하는 라틴어 마르티리움(Martyrium)은 ‘증거’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마르티리온’ (μάρτυριον)에서 왔다. 이에 의하면 순교는 그 자체로 ‘증거’가 된다는 뜻이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고결한 ‘증거’가 되며, 바로 이 때문에 가톨릭은 끊임없이 순교자를 ‘성인(聖人)’으로 기념하고 추앙하고 있다.<자료8> 이처럼 죽음을 신앙의 증거로 숭배하고 찬미하는 사고 방식은 가톨릭의 발생 시점, 즉 예수의 십자가 처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십자가형은 예수 출생 전 로마 시대부터 집행된 사형 방식으로 이보다 더 혐오스럽고 경멸을 받는 처형은 없었다. 알몸인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려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통당하고 새들이 날아와 맨살을 쪼아 먹기도 했다. 십자가에 매달린 채 썩어 가는 시체를 직접 보고 그 악취를 맡아 본 사람들은 십자가 형벌에 관련된 모든 것을 혐오스러워했고, 십자가라는 말 자체를 역겨워했다.<자료9> 십자가형을 받은 자들은 가장 극악한 범죄자의 본보기였으며 예수 또한 같은 이유로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다. 따라서 당대의 사람들이 보기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불쾌하고 혐오스러우며 기괴한 일이었다. 특히 유대인 입장에서는 그들이 믿는 가장 높은 신(야훼)에게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이 십자가형을 받아 피 흘리며 죽어 갔다는 것은 극도로 경악스러운 이야기였고, 신성모독을 넘어 발광 중의 발광이었다. 심지어 예수를 따르는 가톨릭 신도조차 예수가 죽은 과정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그 끔찍하고 비참한 장면을 아무도 그림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 사후 시간이 흐르면서 313년 가톨릭이 공인되고 십자가형이 폐지되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먼저 ‘십자가에서 처형된 인간이 어떻게 신이 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가톨릭은 ‘예수와 야훼가 하나의 본체’라는 선언(325년 니케아 공의회)으로 해결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십자가형의 폐지로 그 광경을 실제로 확인할 수 없게 되자 가톨릭은 십자가형을 ‘혐오스러운 사형 방식’에서 ‘죽음에 대한 승리 방식’으로 위장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의식을 혼동시키는 계략과 술수가 집요하고 은밀하게 계속되면서 신도들은 십자가형에서 잔인한 공포를 느끼고 시선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형을 영광스럽게 여기며 우러러보게 되었다. 그 계략 중의 하나가 바로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세뇌시키는 ‘순교 전설’이었다. 가톨릭 교황 젤라시오 1세(Gelasio I, 492~496 재위)는 미사 중에 순교자를 기념하는 관습을 전파시켰는데, 순교 장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성인(聖人) 전설’이 미사 중에 낭독되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口傳)됐으며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시각적으로 묘사되었다. 또 가톨릭교회는 순교자를 기리는 축제를 열어 순교자의 수난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축제를 시작했다. 여러 형태로 반복되는 순교 이야기는 신도들에게 ‘사이코드라마’처럼 작용해 신도들이 예수나 순교자들이 겪었던 죽음을 적극적으로 상상하며 동참하게 만들었고, 이는 곧 죽음에 대한 숭배와 갈망으로 이어졌다. “나는 나를 죽여 줄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나는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처럼 나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 있는 은총을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될 수 없다면 천한 장소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독일의 수녀 안나 카타리나 에머리크(Anna Katharina Emmerick, 1774년~1824년)의 이야기를 보면 십자가형을 곧 은총으로 여기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을 진심으로 갈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썩어 가는 시체가 매달린 혐오스러운 형틀이 구원과 은총의 상징으로 변신에 성공한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의 역사 저술가인 톰 홀랜드는 “이름 없는 범죄자의 처형을 바탕으로 발흥한 종교가 어떻게 하여 이처럼 세상을 바꾸어 놓는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교주로 내세운 초기 가톨릭 신도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순교할 각오를 드러냈을 때, 이를 본 로마의 사법당국은 가톨릭 신자들이 괴상하고 변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골의 장소’라는 뜻을 지닌 골고다 언덕에서 이름 없는 범죄자의 처형을 바탕으로 발흥한 종교는 지난 2,000년 동안 스스로 ‘보편적(catholic)’이라고 부를 만큼 세상의 지배자로 군림해 왔다. 자신들의 신앙이 보편적이라는 광적인 신념 덕분에 미지의 바다를 건너 대륙을 탐험할 수 있었고, 예수를 알지도 못하는 그 대륙의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강제하고 그들의 문화와 역사와 생명까지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었다. 톰 홀랜드에 의하면 이 세상은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죽음을 정복하고 구원의 은총을 내려 줬다고 신봉하는 이 세상은 아직도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다. 이 세상이 다시 뒤집혀 진리를 올바로 바라보게 된다면 이전의 지배자는 능수능란한 기만술로 여전히 보편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모든 위장술이 벗겨지고 썩어 가는 악취를 풍기며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될까? ———————————————————————————————————– 80년 전쟁이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지배하에 있었던 네덜란드 지역의 17개 주가 1567년~1648년 스페인에 대항해 벌인 독립 전쟁을 말한다. 중세 이후 네덜란드 지방은 모직물공업과 중계무역으로 번영했으며 신교의 등장 이후에는 칼뱅파의 신교도가 급증했다. 1556년 스페인의 왕위에 오른 펠리페 2세가 가톨릭의 수호자임을 내세우며 네덜란드 지방의 신교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나섰으며 1567년부터는 네덜란드에서 8000명 이상을 종교재판으로 처단했다. 이 같은 가톨릭의 탄압에 항거하는 네덜란드 지방의 저항 운동은 독립전쟁 양상으로 발전했고 80년간의 전쟁 끝에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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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주년 미니인터뷰 “신앙신보를 읽으면 신앙촌에 와 있는 것같이 기쁘다.”

65주년 미니인터뷰 “신앙신보를 읽으면 신앙촌에 와 있는 것같이 기쁘다.”

신앙신보를 매개로 세대간의 대화 신앙신보 창간 65주년을 맞이하여 그간 신앙신보를 꾸준히 읽어온 독자를 모셔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Q.신앙신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허정일: 신앙신보는 하나님 말씀을 뭇 사람들에게 전하고 또한 우리 천부교의 역사가 간직된 보물창고와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온 분들에게는 고향의 향수처럼 신앙의 안식처가 되어줬고, 후배들에게는 천부교의 역사와 선배님들의 신앙체험을 통해 든든한 신앙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윤휘영: 올해 창간 65주년이라는 기사를 읽고 신앙신보를 새로 보게 됩니다. 6.25전쟁 이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창간되어 나이로 표현하자면 제게는 할아버지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 긴 역사에 새삼 놀라게 되었습니다. Q.본인에게 신앙신보는 어떤 의미인가요? 허정일(이하 허): 제가 교역자 생활을 할 때는 하나님 집회 참석하여 설교내용을 메모해도 모든 것을 다 기록할 수 없어 항상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때 마침 신앙신보가 매우 좋은 설교 자료가 되어주었습니다. 표승연: 신앙신보는 제게도 신앙의 교과서였습니다. 특히 2면에 하나님 말씀은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천부교회나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인데, 학교 앞에서 기성교회 선생님이 저에게 초대장을 주면서 교회에 가자고 하는 거예요. 그때 문득 신앙신보에서 읽었던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떠올라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에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까 봐 두려워했다는데, 그 다른 사람들은 누구예요? 그때 사람이라고는 아담, 해와, 가인밖에 없었잖아요”라고 물으니 잘 모르겠다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더라고요. Q.신앙신보 기사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윤: 만화 시리즈로 나왔던 “단비야 천부교회에 가자”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어릴 때에는 글보다 시각적 이미지가 더 눈에 잘 들어오고 쉽게 이해가 되었거든요. 지금 연재 되는 ‘다시 쓰는 세계사’도 그림과 사진이 커서 더 좋은 것 같아요. 표: 저는 2002년도에 실린 서울대 사회과학 대학장 한상복 박사님의 기사가 인상 깊었어요. “박사님은 왜 천부교가 온 기성 종교로부터 박해를 당한다고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한상복 박사님은 천부교는 기독교와 그 교주를 부인하는 역사상 유례 없는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기사를 읽고 그동안 어떤 종교도 예수를 부인하고 성경의 허구를 밝힌 종교가 없었는데, 진짜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들어 왔던 하나님 말씀이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새롭고 위대한 말씀인지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Q.허정일 부사장님은 1978년부터 42년간 지인들에게 신앙신보를 보내셨는데요. 받으시는 분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허: 그동안 가족, 친구, 은사님들께 신앙신보를 보냈는데요. 보내기 전과 후가 무척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천부교와 신앙촌에 대해 막연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신앙신보를 읽고 천부교의 교리가 무엇인지, 신앙촌은 어떠한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의구심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앙촌을 직접 방문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중 조선형이라는 친구는 신앙신보를 받으면 반가워서 저한테 전화를 해요. 최근에는 전화해서 “신앙신보 잘 받았다. 신앙신보를 보면 신앙촌에 와 있는 것처럼 마음이 기쁘고 편하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가고 싶어도 못 가지만 코로나가 끝나면 또 가겠다. 그때 만나자.”라고 했습니다. 제 지인들이 신앙신보를 통해 천부교와 신앙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마음이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볼 때 제 마음도 뭉클해집니다. 신앙신보를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금 절실히 느낍니다. Q.끝으로 신앙신보에 바라는 점이나 하고 싶으신 말씀 부탁드립니다. 허: 신앙신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매개체이자 전도의 다리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부교인에게는 신앙생활의 지표가 되고,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통해 진리의 길로 안내하는 신앙신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윤: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신앙신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무신론자이신데 신앙신보를 통해 아버지와 건전한 대화도 하고, 전도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아! 그리고 제가 보름 후면 군대에 가는데요, 군부대로 신앙신보를 꼭 보내주세요. 표: 저도 전도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고 싶어요. 외가 쪽에 제가 가장 좋아하고 친한 외삼촌이 있는데, 그 삼촌에게 신앙신보를 보내볼 생각입니다.

[시온입사생회 33주년] 시온 입사 20년을 맞은 저에게 물어봅니다.

[시온입사생회 33주년] 시온 입사 20년을 맞은 저에게 물어봅니다.

‘과연 나는 귀한 신앙의 터전인 신앙촌에서 그 가치를 깨달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을 깨닫고, 끝까지 따라가고자 입사생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신앙촌이란 울타리 안에서의 삶은 너무나 감사하고 좋았습니다. 입사 초, 어린 시절부터 함께 걸어온 친구들과의 기쁨은 뭐든 열심히 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러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많이 매달리면서 이겨내고,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챙기면서 가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 길은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줘서 가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 그 가치를 깨닫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입사생으로서의 길을 끝까지 가기 위해 초심을 떠올리며 ‘나에게 무엇이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였다면 입사생으로 20년을 지내면서 지금의 저는, ‘과연 나는 귀한 신앙의 터전인 신앙촌에서 살아갈 자격을 갖추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시고 지어주신 귀한 “입사생” 이란 이름으로 멀게만 느껴졌던 입사 20주년이 저에게도 찾아왔습니다. 먼저 지금껏 신앙촌 안에서 보호받으며 키워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무척 노력하고 애써 달라” 하신 하나님 말씀을 새기고 신앙촌의 주체가 되어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책임감 있는 자세로 노력하며 살아갈 것을 다짐해봅니다. 해마다 새로 들어오는 고등부 동생들의 입사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잊고 지냈던 저의 입사 초 마음과 다짐이 떠오르며 동생들의 마음이 전해져 눈시울이 붉어지곤 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 사모하는 마음 변치 않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제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어 늘 나와 동행하시니 참 막역한 내 친구” 찬송가 88장 가사처럼 저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 사랑 잊지 않고 하나님 은혜 안에서 함께하는 제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신앙촌에 오니 기분이 좋네요

신앙촌에 오니 기분이 좋네요

차민주 씨(제주 교회 대4, 맨 왼쪽)는 최윤정 양(초5)을 1년 전에 전도하였고 그 이후로 꾸준히 축복일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윤정이는 밝고 유쾌한 성격에 교회 동생들도 잘 챙기는 따듯한 아이예요”라고 소개해 주었다. 40회 이슬성신절을 맞아 윤정 양이 전도를 했다. 윤정 양은 “이번에 어머니와 동생, 고모까지 함께 신앙촌 와서 기뻐요”라고 말하며 “엄마도 신앙촌에 오셔서 정말 즐거우셨대요”라고 기쁜 목소리로 얘기했다.

신앙촌에서 성장해 가는 딸에게

신앙촌에서 성장해 가는 딸에게

식품 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한주연 양의 가족들이 이슬성신절을 맞아 3대 모녀를 주축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이번에 이슬성신절에 처음 참석한 아버지께서는 주연 양이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좋았습니다’라고 짧지만 내심 기특함이 묻어있는 말을 전했다.

주니어

아하! 맞춤법 … 일상 속 맞춤법 <2>

아하! 맞춤법 … 일상 속 맞춤법 <2>

다음은 뚜농이라는 친구와의 대화 내용입니다. 이 대화에서 맞춤법이 틀린 곳은 모두 몇 군데일까요? 1.부숴짐[X] → 부서짐[O] ‘부수어지다’의 준말로 ‘부숴지다’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단단한 물체가 깨어져 여러 조각이 나다’라는 뜻의 ‘부서지다’라는 단어가 이미 있기 때문에 ‘부수어+지다’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 참고로 ‘떨어트리다’와 ‘떨어뜨리다’ 모두 맞는 표현입니다. 2.안절부절하다[X] → 안절부절못하다[O]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는 뜻의 동사는 ‘안절부절못하다’입니다. 하나의 단어이므로 ‘안절부절 못하다’로 띄어 쓰지 않습니다. 3.단언컨데[X] → 단언컨대[O] ‘단언컨대’는 ‘단언하다’에 ‘-건대’라는 연결 어미가 결합한 형태인 ‘단언하건대’가 축약된 것(‘하’ 앞이 모음이거나 ㄴ,ㄹ, ㅁ, ㅇ인 경우 거센소리로 축약)입니다. ‘-건대’란 ‘뒤 절의 내용이 화자가 보거나 듣거나 바라거나 생각하는 따위의 내용임을 미리 밝히는 연결 어미’로 ‘요컨대, 짐작건대, 바라건대’ 등으로 쓰입니다. 4.칠칠맞다[X] → 칠칠치 못하다[O] ‘칠칠맞다’는 ‘칠칠하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칠칠하다’는 ‘성질이나 일 처리가 반듯하고 야무지다’라는 뜻으로 이를 부정할 때는 ‘못하다’, ‘않다’를 사용합니다. 5.던지[X] → 든지[O] ‘던지’와 ‘든지’의 구별법은 간단합니다. ‘던지’는 추측할 때, 과거를 떠올릴 때 사용하고, ‘든지’는 무언가를 선택할 때 사용합니다. 6.설겆이[X] → 설거지[O] ‘설겆이’를 발음대로 쓴 것으로 오인하여 오히려 맞춤법이 틀린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전에는 ‘설겆이’가 표준어였으나 ‘설겆다’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아 88년 맞춤법 개정 시 고어(古語)로 처리되고, 널리 사용하는 ‘설거지’가 표준어로 되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맞춤법이 조금 틀렸다고 해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거나 문제가 생기진 않습니다. 일부러 변형시키는 게 유행이기도 한 요즘이지만, 올바른 맞춤법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아침밥을 먹기엔 너무 피곤한가요? 안 먹어서 피곤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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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성경박물관 최고(最古) 성경사본 ‘사해문서’ 알고보니 가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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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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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성신절을 준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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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돌밥돌밥’ 고민 타파 ‘두부’ 간편 레시피

‘돌밥돌밥’ 고민 타파 ‘두부’ 간편 레시피

‘돌밥 돌밥’은 최근 주부들 사이에 유행하는 신조어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늘면서 ‘돌아서면 밥 차리고 돌아서면 밥 차린다’는 의미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외식까지 자제하면서 주부들의 일상이 바뀐 탓이다. 이같은 주부의 고충을 덜어줄 ‘간편한 레시피’를 찾는 이용률이 증가하는 추세다. ‘신앙촌푸드’ 유튜브 채널에서도 간편하면서 영양까지 챙긴 레시피를 공개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hh1Ln3OcgS_wNGOwxuzQFw) 01 마파두부덮밥 재료 -두부 100g -다짐육 200g -굴소스 1큰술 -대파 1뿌리 -두반장, 고추기름 3큰술 -전분물(물4큰술+전분4큰술) ① 달군 팬에 고추기름을 넣고 대파를 넣어 볶는다. ② 다짐육을 넣어 같이 볶는다. ③ 두반장 3큰술 굴소스 1큰술을 넣어 볶는다. ④ 물 500ml를 붓고 두부를 넣어끓인다. ⑤ 전분물을 넣어 걸쭉하게 만든다. 02 두부스파게티 재료 -두부 100g -토마토소스 500g -양파 1/4개 -느타리버섯 -파슬리 가루 -파스타면 1인분 ① 두부 물기를 제거한 후 으깬다 ② 으깬 두부를 넣어 살짝 볶는다 ③ 토마토소스를 넣고 소스 완성 ④ 끓는물에 파스타면을 8분간 삶기 ⑤ 소스에 면을 넣어 함께 볶는다 03 두부유부초밥 재료 -두부 400g -시판 유부피 -초밥 속 소스 & 조미 볶음 ① 두부를 으깬다. ② 고슬하게 지은 밥에 유부초밥 세트에 들어있는 배합초, 후레이크와 으깬 두부 넣고 섞는다. ③ 조미액을 살짝 짜낸 유부에 ②의 밥을 넣는다.

드라이브 스루로 축복? … ‘성수’ 물총 쏘는 신부

전염병보다 더 위험한 가짜뉴스 주의보

美 전역서 ‘콜럼버스 동상 수난시대’

새로운 위협 ‘코로나 변종’ , 치료제와 백신 개발에 고전

새로운 위협 ‘코로나 변종’ , 치료제와 백신 개발에 고전

한 가닥 염기서열로 된 ‘RNA 유전자’ 바이러스는 증식 과정에서 수많은 변종이 빠른 주기로 나타난다. 설계도가 엉클어져 불량이 나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바이러스가 생존을 위해 발 빠르게 변신하는 경우도 있다. 사스, 메르스,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 에볼라, 스페인독감, 인플루엔자 등이 모두 RNA 바이러스인데 이들보다 더 빠르고 변칙적으로 변종을 만들어내는 게 바로 코로나19다. ▷ 요즘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난해 말 중국 우한에서 처음 등장했던 코로나19와는 크게 다르다. 코로나19는 유전자 염기서열 차이에 따라 크게 S, V, L, G, GR, GH형으로 분류된다. L은 우한에서 처음 등장한 원형이고 S, V는 약간 변이된 수준이다. G계열 세 유형은 중국에서 미국·유럽·아프리카 등으로 건너간 뒤 크게 변이된 것인데 70%가량이 GH형이다. 한국도 4월 경북 예천의 성지순례단 집단 감염, 5월 초 이태원 클럽 이후 최근 광주와 대전의 집단감염까지 GH형이 주종을 이룬다. ▷ 중국 연구팀이 최근 완치자 41명의 혈액에서 항체를 추출해 변종 코로나19에 투여한 결과 3명의 항체는 바이러스 무력화에 실패하고 한 항체의 대응력은 거의 ‘0’으로 나타났다. 완치자 혈청이 약발이 듣지 않을 정도로 변이가 이뤄진 이 바이러스가 바로 GH형이다. GH형은 세포 침투력이 2배 이상 높고, 전파력은 10배 이상 늘었다. 한국도 GH형이 많은 지역은 확진자 한 사람이 전파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재생산지수(R0)’가 1.34로 전국 평균 1.06보다 월등히 높았다. ▷ 지금 나타나는 변이는 자가 복제 과정상의 오류에 의한 것이어서 변이 정도가 제한적이지만 코로나19가 다른 코로나와의 ‘재조합’까지 이뤄지면 완전히 다른 변종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이혁민 연세대 의대 교수). 현재도 변종 코로나19는 세포를 뚫고 들어가는 ‘스파이크 단백질’이 변이 전보다 4, 5배 많다. 공성전(攻城戰)에서 성에 걸치는 갈고리가 많고 끝이 뾰족해 침투가 쉬워진 격이다. 무증상 감염이라는 ‘스텔스 기능’에 이어 조준 사격할 ‘타깃’마저 수시로 변신해 치료제와 백신 개발에서 고전이 불가피하다.

‘코로나 시대’ 에어컨·선풍기 안전하게 사용하는 방법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개발, 어디까지 왔나

아직도 손 씻을까 말까 망설이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