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부교 소사 제2교회 신축 중

한국천부교 소사 제2교회 신축 중

경기도 부천시 옥길동에 위치한 소사 제2교회가 현재 신축 공사를 진행 중이다. 4월 말에 외부 공사가 완료되면 이후에는 실내 공사가 예정되어 있다. 소사 제2교회의 김용환 관장은 “어려운 중에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여 주심을 알기에, 올가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앙촌 봄맞이 산책

신앙촌 봄맞이 산책

화사한 꽃과 싱그러운 봄기운을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 올해 신앙촌은 더욱 특별한 봄을 맞이했다. 벚꽃과 유채꽃은 물론 영산홍, 겹벚꽃까지 봄꽃들이 동시에 개화하며 보기 드문 장관을 이룬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 신앙촌에서는 교인들을 위한 다양한 봄맞이 프로그램을 개최했다. 4월 7일 여성회 축복일에는 군락지와 식품단지, 산책로를 걸으며 봄기운을 만끽하는 ‘봄나들이’ 시간이 있었다. 각 장소에는 풍선 터트리기, 주사위 던지기 등 미니게임이 마련되어 산책을 더욱 즐겁게 만들었다. 가장 인기를 끈 곳은 ‘인생 네 컷’ 포토존으로 옛날 교복과 가방, 뽀글이 가발을 포함한 재미있는 소품을 착용하고 사진을 찍는 코너였다. 오희숙 권사(노량진교회)는 “교복 입고 사진 찍으니 학창 시절로 돌아가서 도시락 먹던 생각이 나요. 오늘 하루 종일 정말 많이 웃었어요. 이렇게 특별한 시간을 마련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여성회 축복일에 ‘인생 네 컷’ 코너가 있었다면 학생 축복일에는 ‘판다 월드’가 있었다. 4월 14일 학생축복일 예배가 끝난 후 군락지에는 ‘봄꽃 드림랜드’가 열렸다. 드림랜드는 컬러, 게임, 디저트 등 다섯 가지 테마로 구성된 체험형 프로그램이다. 특히 판다 월드는 요즘 화제가 된 판다를 테마로 구성되었는데, 대나무와 판다 소품으로 만든 포토존과 사과, 당근, 죽순을 먹어볼 수 있는 판다의 최애 간식 맛보기 코너, 귀여운 판다 굿즈를 만나볼 수 있는 코너까지 있어 어린이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벚꽃 눈 내리는 산책로에서 싱그러운 봄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노란 유채꽃밭과 벚꽃 만발한 군락지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세상 근심을 잊고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신앙촌에서 행복한 시간을 누리게 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4월 여성회 축복일 소감 中 따사로운 봄날, 신앙촌에서 만난 사람들 신앙촌 산책로 걷는 걸 너무 좋아해서 올해도 왔습니다. 걷는 것을 좋아해서 평소에도 운동 삼아 아파트 단지를 자주 가는데 꽃이 핀 신앙촌 산책로는 정말 비교도 안 되게 아름답네요. 기분도 좋고 운동도 되고 일석이조입니다. 김진자 권사(강릉교회) 초가집에 여러 번 왔어도 방에 들어와 본 것은 처음인데요. 이렇게 좋은 곳인 줄 몰랐어요. 불을 때 주셔서 바닥도 따끈따끈하고, 향긋한 나무 냄새도 나고 너무 행복하고 감동적입니다. 몸이 날아갈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박선순 권사(소사교회) 마음이 너무 즐겁고 기뻐요. 이렇게 맑고 화창한 날에 저희가 어디서 이런 좋은 곳을 구경하겠어요. 항상 저희에게 예쁜 것, 좋은 것, 즐거운 것 모두 다 해주시는 신앙촌에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유경옥 권사(동두천교회) 벚꽃이 만개한 군락지에서 옛날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으니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기분이 남달라요. 오늘 또 오랜만에 덕소신앙촌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와 만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추억에 잠기기도 했거든요. 오래된 친구와 함께 그 시절을 떠올려 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심순희 권사(송탄교회) 산책로를 천천히 걸어보니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고 너무 좋아요. 땅이 푹신푹신하니까 발에 무리도 안 가고 좋습니다. 매일 신앙촌에 사는 분들은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저도 오늘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김해임 권사(전농교회) 벚꽃 핀 신앙촌을 보고 싶어서 이번 축복일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직접 보니 꽃에 둘러싸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 풍경을 눈에 담아 가려고 계속 둘러보고 있어요. 보면 볼 수록 마음의 평화를 얻는 곳이란 생각이 들어요. 너무 감사해요. 장명옥 권사(성남교회) 솜사탕을 처음 만들어 봤는데 도우미 선생님이 쉽게 알려주셔서 잘 만들어졌어요. 가장자리에서 동그랗게 막대를 돌리다가 점점 커지면 제자리에서 돌돌 돌리면 돼요. 직접 만들어서 재미있었고, 딸기 맛 솜사탕이라서 더 좋아요. 송은비 양(초3, 가좌교회) (준비된 판다 간식을 맛보고) 앗! 푸바오가 먹는 간식이라고 해서 죽순이랑 당근이랑 사과 먹어봤는데 생각보다 맛있지는 않네요. 그래도 사과는 맛있었어요! 백서은 양(초3, 전농교회) 퍼스널컬러 테스트를 해봤는데 제 피부톤은 가을 웜톤이 나왔어요. 제 얼굴에 어울리는 색이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해요. 앞으로 가을 여자처럼 입고 다녀야겠어요! 손복련 양(초6, 진해교회) 음료 완판했어요! 평소 바리스타에 관심이 많았는데 신앙촌에서 바리스타 과정을 배워볼 기회가 생겨서 신청했어요. 오늘은 아메리카노, 블루 레모네이드, 아이스 초코를 만들어서 판매했는데 직접 음료를 만드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봄꽃 드림랜드에 사람들이 많이 와서 무척 바빴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유나 양(중3, 가야교회)

[모아보는 뉴스] 친조카들 성학대한 주교, ‘작은 게임’이다 外

[모아보는 뉴스] 친조카들 성학대한 주교, ‘작은 게임’이다 外

[모아보는 뉴스] 01. 판사, 수녀들이 당한 학대 교황에게 전달하라 [모아보는 뉴스] 02. 가톨릭 수녀들은 성학대 피해자이며 가해자 [모아보는 뉴스] 03. 교황, 교도소에서 여성 발 씻기고 입맞춤 [모아보는 뉴스] 04. 친조카들 성학대한 주교, ‘작은 게임’이다

“우주는 팽창만 하지 않는다”  새로운 단서 발견

“우주는 팽창만 하지 않는다” 새로운 단서 발견

우주의 팽창을 가속화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암흑 에너지에 대한 이론에 큰 결함이 있는 것으로 천문학자들이 밝혔다고 미 뉴욕타임스(NYT)가 4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암흑 에너지는 우주 생성 이래 강도가 변하지 않는 상수 에너지로 간주돼 왔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암흑 에너지가 강해지거나 약해지고 역전되기도 하며 아예 소멸되는 경우도 있음이 드러났다. 이번 연구가 사실로 확정되면 변하지 않는 암흑 에너지에 의해 우주가 무한정 확대되면서 모든 별과 은하가 원자 단위까지 분해돼 우주의 모든 생명체, 빛, 에너지, 나아가 생각마저 사라지는 혼돈 상태가 될 것이라는 기존의 예측이 뒤집어질 수 있다. 새로운 사실은 암흑에너지분광장치를 이용한 국제합동연구팀(DESI)이 발표한 일련의 논문들에 의해 제시됐다. 연구팀은 지난해 110억 년의 우주 시간에 걸쳐 있는 4000만 개 은하의 위치와 속도를 기록하는 3차원 지도를 작성하는 5년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 4일 600만 개의 은하를 담은 첫 지도를 미국 물리학회와 이탈리아 렌콘트레스 데 모리온드 총회에서 발표했다. DESI 책임자인 마이클 레비 박사는 “지금까지 우주 모델에 대해 기본적인 합의가 있었으나 암흑 에너지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연구자들이 자신들이 만든 지도와 기존의 천문학 자료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암흑 에너지가 상수이며 변화하지 않는다는 우주 표준 모델에 들어맞지 않음을 발견했다. 암흑 에너지가 변하는 것으로 봐야 자료와 더 잘 일치한 것이다. 우주의 팽창 속도가 갈수록 빨라진다는 암흑 에너지 이론은 1998년에 처음 제기됐다. 우주가 팽창하는 만큼 암흑 에너지도 증가해 팽창이 가속화하면서 빛조차 사라진다는 설명이다. 암흑에너지 이론을 바탕으로 우주가 70%의 암흑 에너지와 25%의 찬 암흑 물질 및 5%의 원자 물질로 구성돼 있다는 L.C.D.M. 우주 표준 모델이 뿌리내린 것이다.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이 가동되면서 L.C.D.M. 우주 표준 모델이 일부 퇴색했으나 아직 무너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암흑 에너지가 상수가 아니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과학자들은 우주가 얼마나 빨리 팽창하는 지를 측정함으로써 암흑 에너지의 항상성을 검증하고자 했다. 이 계산 결과를 모두 종합하는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암흑 에너지가 상수일 경우 우주 팽창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7개로 분할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최근 3개 시간 단위 내에 있는 은하계들이 더 가까워진 것으로 보임에 따라 암흑 에너지가 변화할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팔랑케-델라브루이 박사는 “암흑 에너지 특성이 단순한 우주 상수가 아니라는 단서를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라고 밝혔으며, 존스홉킨스대 리스 박사는 이번 연구가 입증되면 우주의 나이나 크기에 대한 모든 이론이 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이례적인 물난리

전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이례적인 물난리

러시아에서 최악의 홍수가 발생했다. 로이터 통신은 겨울 전에 이미 범람한 상태였던 러시아 우랄 지역과 카자흐스탄 북부 지역에 폭우가 내린 데다가 거대한 눈이 빠르게 녹으면서 주변 강의 수위가 계속 상승, 피해가 확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4월 15일(현지시각) 크렘린궁은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홍수로 인해 쿠르간·튜멘주의 수위가 극에 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랄산맥과 시베리아가 만나는 지역에 위치한 쿠르간주에서는 얼음이 녹으며 쏟아져 내려오는 물과 카자흐스탄에서 흘러온 13억㎥의 물이 토볼강에 유입되어 수위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 이는 쿠르간이 약 한 달간 침수됐던 1994년 홍수보다 두 배 많은 양이며, 홍수로 인해 쿠르간주 주민 1만 2천 782명이 대피했다. 토볼강의 수위 상승으로 튜멘주 8개 마을에도 대피령이 내려졌다고 AFP 통신이 전했다. 또한 이심강의 수위도 빠르게 높아지고 있는데, 이심강이 흐르는 카자흐스탄 북부 페트로파블롭스크의 일부 지역들도 완전히 침수돼 약 1천 채의 주택이 물에 잠겼다. 현지 당국은 5천 명 이상의 주민이 대피했고, 전력과 수도 공급도 중단됐다고 밝혔다. 한편, 알렉산드르 쿠렌코프 러시아 비상사태부 장관은 이날 오렌부르크주 오르스크를 방문했다. 오르스크는 4월 초 폭우와 함께 우랄강 댐이 무너져 침수된 지역으로, 여전히 3천 725채의 주거용 건물이 침수돼 있고 2천 500명 이상이 대피한 상태다. 4월 16일에는 덥고 건조한 사막 기후인 중동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1년 치 비가 12시간 동안 쏟아져 내려 도로 등이 물에 잠기는 피해가 발생했다고 미국 CNN이 보도했다. 두바이 국제 공항도 활주로와 여객기가 물에 잠기고, 항공편 수십 편이 지연되거나 결항하는 등 한때 운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두바이 공항 기상관측소에 따르면 이날 두바이 전역에는 12시간 동안 거의 100㎜(약 4인치)에 달하는 폭우가 내렸다. 유엔(UN)에 따르면 이는 평소 두바이에서 1년 동안 관측되는 강우량에 해당한다. 소셜미디어에는 물에 잠긴 도로에서 차를 버리고 대피하는 운전자들, 쇼핑몰 안에 빠른 속도로 물이 차오르는 영상들이 게재되었다. 두바이에 쏟아진 이례적인 폭우는 현재 아라비아반도를 관통해 오만만으로 이동 중인 폭풍 전선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폭풍 전선의 영향으로 인근 국가인 오만과 이란 남동부 지역에도 이례적인 많은 양의 비가 내리고 있다. 오만에서는 4월 14일부터 계속된 비로 홍수가 발생하여 지금까지 최소 17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오만 국가재난관리위원회가 밝혔다.

50년 이상 아동 성학대 저질러 온 칼디섬의 소아성애자 사제들

50년 이상 아동 성학대 저질러 온 칼디섬의 소아성애자 사제들

영국 웨일즈 해안에서 떨어진 ‘거룩한 섬’으로 이름난 가톨릭 수도사 공동체는 50년 이상 이어진 대규모 아동 학대 스캔들의 중심에 있다. 이곳에서 3세 정도 유아에게 가해진 성학대의 어두운 역사를 알지 못한 채 매년 수천 명의 관광객이 칼디섬을 방문한다. 칼디섬 성학대 생존자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역사적인 수도원에서 강간당했고, 화려한 정원에서 성적 학대를 당했으며,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지옥에 간다는 위협을 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강간당했을 당시 10세였던 피해자 케빈 오코넬(61세)은 메일온라인과의 인터뷰에서 3살 정도의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산업적 학대’를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곳 수도사들 중 누구도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고, 공개 조사 요구는 무시되었는데 이는 소아성애 사제 중 한 명이 사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오코넬 씨는 몇 주 전 섬에 거주하는 주민으로부터 익명의 편지를 받았다고 밝혔다. 편지에는 어린 소녀가 성희롱과 여성 혐오를 당했지만 그 어떤 조사도 없었고, 혐의는 수도원장에 의해 기각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오코넬 씨는 “이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또 합니다”라고 했다. 칼디섬에서 ‘강간 또는 성적 학대’를 당한 50명의 ‘생존자’ 대부분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신고했으며 이를 증명할 범죄 조회 번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 중 누구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 오코넬 씨는 “우리는 최고의 변호사들을 데려왔고 여전히 공개 조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어린아이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정의가 없다는 것은 역겨운 일입니다”라고 했다. 민사법원 소송에서는 가해자 중 한 명인 타데우스 코틱 신부가 1972년부터 1987년까지 그들을 성적으로 학대한 사실이 밝혀진 후 여섯 명의 피해자가 보상금을 받았다. 케빈 오코넬을 강간하고 학대하고, 오코넬의 누나 레베카를 성폭행한 것도 타데우스 신부였다. 그러나 타데우스 코틱 신부는 성스러운 섬에서 어린이들을 학대했다는 혐의로 어떠한 형사 고발도 받지 않은 채 1992년에 사망했다. 오코넬 씨는 “저 역시 보상으로 돈을 제안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돈이 아닌 진실을 원한다고 말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오코넬 씨는 너무나 많은 생명을 앗아간 아동 학대에 대한 전면적인 공개 조사를 위해 계속해서 투쟁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이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4월 학생 축복일 예배 드려

남성회 축복일

대구 성추행 신부 징계 ‘솜방망이’

브라질, 체감 62.3도 폭염 뒤 300mm폭우

2023 전국 신앙촌상회 우수 매장 선정

법원, 천부교 비방 영상 올린 가톨릭 신부에게 삭제 권고

KBS <사사건건> 반론보도문 게재

SBS 프로그램 <당신이 혹하는 사이> 반론 보도문 게시

신앙체험기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시간이 가장 귀하다는 것 깨달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시간이 가장 귀하다는 것 깨달아”

1929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저는 장성하여 결혼한 후에도 줄곧 서산에서 살았습니다. 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1962년이었는데 처음에는 순전히 아들의 병을 낫게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남들보다 일찍 결혼해 딸 넷을 둔 저희 부부는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그 뒤로 아들 둘을 더 나았습니다. 그렇게 첫째 아들을 얻었을 무렵의 일입니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아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계속 앓아눕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 가고 약을 써도 아이의 병은 좀처럼 나을 기미가 안 보였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절에도 가보고, 굿도 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희 부부의 수심이 깊어져가던 어느 날 아이 때문에 애태우는 사정을 안타까이 여기셨던 이웃집 할머니가 전도관에 가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관에서 은혜를 받아 병이 나은 사람이 많다면서 저희 아이의 병도 나을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 저와 달리 아내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며 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전도관에 나가 기도를 드리면서부터 아이의 증세가 눈에 띄게 호전되더니 금방 나아서 다시 방긋방긋 웃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전도관에 간 것도 아닌데 병이 나으니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아내는 무척 고마워하며 그 뒤로도 계속 전도관에 다녔습니다. 그 후로 전도관 사람들이 저희 집에 와서 정성껏 예배를 드려주며 제게도 전도관에 와보라고 권유하기에 마음이 동한 저는 아내와 함께 서산 지곡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처음 전도관에 갔을 때는 찬송도 모르고, 기도도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멀뚱멀뚱 앉아 있었습니다. 가만히 있기 어색해서 어설프게 손뼉을 치며 우물우물 찬송을 따라 부르다가 ‘역시 나는 성격상 교회랑 안 맞나 보다’ 하는 생각을 했는데, 예배를 마친 후 처음 온 저를 반갑게 맞아주는 교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들의 선량하고 따뜻한 마음씨에 감화되어 전도관에 조금 더 다녀봐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전도관에 꾸준히 다니면서 예배를 드리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기쁘고 즐거워진다는 것을 느낀 저는 매주 일요일 예배 시간만을 기다릴 정도로 전도관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전도관에 다니자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했던 첫째 아들의 병이 낫게 되어 전도관에 함께 다니기 시작해 예배 시간에 향취를 맡으니 속이 시원해지면서 몸이 한없이 가벼워져서 하늘로 둥둥 뜨는 느낌 들어 고인의 모습을 살아있을 때 보다 더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생명물의 경이로움에 눈물이 나서 말을 잇지 못해 그런데 다섯 살이 된 첫째 아들이 또다시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의 눈동자가 점점 하얘지면서 앞을 못 보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아내는 아이의 눈을 고치기 위해 큰 병원 안과에도 가보고, 용하다는 약을 쓰기 위해 논 서마지기까지 팔았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그 사이 아들의 눈은 더욱 심각해져서 검은자위가 거의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때마침 대전에서 하나님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된 저는 지체 없이 아이와 함께 첫차를 타고 대전으로 향했습니다. 집회에 참석해 안수 받는 시간만을 기다렸는데 그날은 예배를 마친 후 전도사님들만 안수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전까지 왔는데 안수를 못 받는다고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안수를 받지 못하면 아이가 평생 장애를 안고 살게 될 것만 같아 저는 염치 불고하고 아들을 안고 전도사님들 사이에 줄을 섰습니다. 이윽고 제 차례가 되어 하나님 앞에 아들을 내려놓자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머리를 손으로 ‘탁’ 하고 쳐주셨습니다. 그때 ‘아들의 눈을 안찰해주시면 더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 내어 말씀드리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응. 됐어. 이제 가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쉬운 마음으로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이의 눈동자가 다시 까맣게 돌아와 반짝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놀랍고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어제 하나님께서 아이의 머리를 안수해 주셨을 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새벽예배까지 빠짐없이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전도관에 가려면 논과 밭을 지나가야 해서 가는 데만 30분이 넘게 걸렸지만 힘들거나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겨울에는 흰 눈이 길 위에 높게 쌓여서 발이 푹푹 빠지는데, 그 눈을 헤치며 걷다 보면 발이 꽁꽁 얼었습니다. 그럴 때는 논 옆에 쌓인 지푸라기를 모아 불을 피워서 발을 녹이고 갈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그렇게 평소처럼 새벽예배를 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배실에서 기도를 드리는데 생전 처음 맡아보는 좋은 향기가 났습니다. 누가 꽃이라도 사다 놨나 예배실 안을 둘러봤지만 그렇게 진하고 좋은 향이 날만 한 것은 없었고, 두리번거리는 와중에도 향기는 계속해서 맡아졌습니다. 저는 그것이 향취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중에 사람들에게 말하니 향취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향취를 맡을 때 마음에 기쁨이 샘솟으면서 가슴에 얹혀있던 무언가가 쑥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더니 속이 시원해지면서 몸이 한없이 가벼워져서 걸을 때도 하늘로 둥둥 뜨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은 이처럼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기쁘고 즐거운 것이었습니다. 지곡전도관에 다니던 시절에 가장 인상 깊었던 은혜 체험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생명물로 시신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입니다. 병을 앓다가 돌아가신 남자 권사님의 입관 예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입관 예배 시작 전에 전도사님은 고인의 입에 생명물을 넣어드리고, 생명물을 적신 수건으로 고인의 몸도 깨끗이 닦아드렸습니다. 교인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고 나니 돌덩이처럼 딱딱했던 시신의 몸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얼굴도 환하게 피어났고, 입술에는 혈색이 도는 것이 눈을 뜨고 곧 살아날 것만 같았습니다. 편안히 주무시는 듯한 고인의 모습을 보니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고인의 모습을 살아있을 때보다 더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생명물의 경이로움에 저는 눈물이 나와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각오와 다짐이 제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날이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기장신앙촌에 가서 하나님께 직접 안찰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눈과 배를 안찰해주시는데 말도 못 하게 아팠습니다. 분명히 손만 살짝 갖다 대시는데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고통스러워하자 하나님께서는 “이 고집 좀 봐. 고집 좀 버려. 안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성격이 급하고 고집이 세던 저는 ‘그동안 지어온 죄가 많으니 아플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통이 멎을 때쯤 하나님께서는 안찰을 끝내셨고 저는 ‘그 죄를 씻어주시는 분은 얼마나 힘드시겠나’ 하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습니다. 그 후로 화부터 내는 성격이 많이 고쳐졌습니다. 가끔 성질을 내려다가도 하나님 말씀을 떠올리며 ‘아이고, 내가 또 화를 내려고 하는구나!’ 하며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서울로 이사 가서 서대문교회에 다니던 저는 2000년도쯤부터 신앙촌 인근 동부리와 신천리에서 자원하여 경비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신앙촌 밤하늘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무수히 떠 있는 환한 빛기둥은 땅으로 쏟아질 것처럼 길게 뻗어 있었고, 신앙촌 인근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 볼 정도로 밝게 빛났습니다. 저는 그 찬란한 광경을 보며 너무나 놀랍고 감사했습니다. 또한 신앙촌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는 귀한 땅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저는 경주에 있는 천부교 추모 공원 등에서 근무하다가 현재는 서울로 돌아와 서대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의 병이 나은 것이 고맙고 신기해서 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직접 은혜의 기쁨을 체험한 후로 구원의 진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은혜를 받고 간직하는 생활을 할 때면 어디를 가나 한없는 기쁨이 마음속에 넘치고, 길을 걸을 때도 공중을 걷는 듯이 몸이 가벼워져서 한 발짝만 가도 두 세발짝을 가는 듯 느껴졌습니다. 특히 교회에 가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드릴 때 은혜를 허락해 주신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까지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시간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동안 분에 넘치는 은혜를 받으며 이 길을 따라왔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자유율법을 지키며 맑고 성결하게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허락해 주시는 시간동안 귀한 성신의 은혜를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계신 단상 앞에 눈송이 같은 이슬성신이 내려”

“하나님 계신 단상 앞에 눈송이 같은 이슬성신이 내려”

저는 1937년 인천광역시 동구 창영동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던 어머니를 따라 감리교회를 다녔는데 1956년경 어머니께서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 집회에 참석하신 후로 제게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집회에 다녀오신 후로 “앞으로는 박태선 장로님 교회에 가야 한다. 박 장로님은 보통 분이 아니시다. 거기가 진짜다”라고 하시며 저도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 말로는 집회에서 향취를 맡았다고 하시는데 그게 무엇인지 저로서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오래 다니던 교회를 두고 다른 교회에 가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어머니의 확신에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박 장로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도착한 곳은 인천의 한 짠지 공장에 마련된 예배실이었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사람들로 가득 찬 예배실에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예배를 드렸고, 늦게까지 남아 철야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참 기도에 집중하고 있는데 과거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6.25 전쟁 당시 폭격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하던 때의 기억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먹을 것이 없어 모두가 굶주리고 있던 때에 미군들이 배에 구호 물품을 싣고 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구호 물품 나눠주는 곳에 가보니 넓은 바닥에 강냉이, 수수 가루 등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가져가게 했습니다. 당시 열다섯이었던 저는 커다란 보자기에 강냉이 가루를 가득 퍼담았고,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다시 가서 한 번 더 퍼왔습니다. 저는 그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뒷사람은 생각도 않고 너무 욕심껏 퍼왔던 제 행동이 부끄럽고 후회되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려웠던 그 시절에 큰 구루마에 장작을 가득 싣고 가는 사람 뒤를 따라가다가 몰래 장작 한 개비를 뽑아 달아난 뒤 저잣거리에 가서 돈이나 떡으로 바꾼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사람들은 그때는 다들 어려웠던 시절이라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 말에 위로받고 잘못을 애써 외면해 왔습니다. 하지만 철야기도를 드렸던 그날은 너무나 추하고 더러웠던 과거의 죄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하고 오랫동안 울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지독한 탄내가 났습니다. 예배실 안에서 날 만한 냄새가 아니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기도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코를 손으로 감싸 쥐며 어디서 타는 냄새가 난다고 하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것이 바로 죄타는 냄새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죄가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고 과연 박 장로님이 세우신 교회는 무언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열심히 다녀보기로 했습니다. 그 후 숭의동에 인천전도관 건물을 새로 짓기 시작했고 저도 작게나마 일손을 보태게 되었습니다. 저는 친구들과 바닥에 구들장 까는 일을 맡았고, 구들장 위에 바른 시멘트가 마르기를 기다리면서 친구들과 밤새 찬송을 부르며 즐겁게 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불렀던 찬송가 ‘나의 갈길 다 가도록’은 지금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인천전도관이 지어지고 얼마 뒤에 저는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며 찬송을 부르시던 중 단상에서 눈송이 같은 것이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몽글몽글한 눈송이들은 흩날리면서 예배실로 퍼져나갔고, 저는 신기한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옆에 있던 어머니께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눈송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말로만 듣던 이슬 같은 은혜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슬비 또는 안개 같은 은혜를 봤다고 했는데 제 눈에는 꼭 눈송이 같아 보였습니다. 1957년 4월에는 서울 중앙전도관 낙성 집회(1957. 4. 25.~5. 4)가 있었습니다. 낙성 집회 기간에는 제2회 전도관 체육대회(4. 25~4. 27)도 함께 열려 서울운동장에서 배구, 농구, 축구, 릴레이 달리기 등 다양한 종목의 경기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인천 대표로 경기에 출전하여 배구와 육상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배구 등 경기에 직접 참여하실 때면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날은 전국의 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선의의 경쟁을 벌였던 즐겁고 가슴 벅찬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집회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는데 하루는 하나님 말씀을 듣던 중 아주 좋은 향기가 바람처럼 저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향이었기에 저는 그것이 어머니가 전에 맡았다는 향취 은혜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카시아 꽃향기보다 더 진하고 좋은 그 향기를 조금 더 맡고 싶었지만 향기가 어느새 사라져서 저는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향기를 잡을 수만 있다면 잡아두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얼마 뒤 하나님께서 소사신앙촌을 만드신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인천전도관 식구들 중에서도 건설대로 자원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생겨났고, 저도 뒤늦게 자원하여 소사신앙촌 건설대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땅을 파서 건물의 기둥 세우는 일을 했는데 일을 하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고, 식사 준비를 위해 커다란 쌀가마니를 번쩍번쩍 들면서도 무거운 줄 몰랐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현장에 오셔서 건설대원들에게 자주 안수를 해주셨고, 안수를 받은 건설대원들은 힘이 나서 더욱 신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몸이 약했던 제가 어떻게 건설대 일을 했을까 싶지만, 그때는 힘든 줄도 모르고 즐겁기만 했습니다. 함께 일하던 건설대원들도 ‘참 신기하다. 무거운 것도 가뿐하게 들리는 것이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참 많이 하곤 했습니다. 소사신앙촌 건설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서 저는 메리야스 공장으로 부서를 옮겨 일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촌 메리야스가 품질 좋기로 입소문을 탔던 때라 공장은 활기차게 운영되었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그만큼 보람을 느끼며 기쁘게 일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는 오버로크 작업자들에게 일감을 가져다주기 위해 원단을 나르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원래 다니던 길이 아닌 기계 바로 옆을 지나가다가 빠르게 회전하는 기계의 모터에 치마 끝자락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치마가 모터 속으로 휘말리면서 저는 몸의 중심을 잃게 되었고, 다리까지 모터에 감겨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다행히 그 순간 모터가 멈춰서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다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저는 정신을 잃었고, 그 뒷이야기를 동료들을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사고를 목격한 동료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저를 업고 바로 하나님 앞으로 데려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저를 축복해 주시더니 “이제 일어나라!”고 하셨고, 그 순간 제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신이 드나?”라고 물으셨고, 저는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괜찮다고 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저는 꾸벅 인사드린 후 두 발로 걸어서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다리를 크게 다쳐 정신을 잃었던 제가 스스로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다리를 보니 피부에 난 상처에서 진물이 나오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솜을 붙여 놓았습니다. 며칠 후에 솜을 떼어보니 깨끗하게 아물어서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후 저는 고향인 인천으로 내려왔다가 백령도로 이사를 가게 됐는데 그곳에는 전도관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삶이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십여 년 동안 교회에 가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예배를 드리지 못하니 마음이 괴롭고 답답했던 저는 다시 인천으로 이사를 갔고, 그리웠던 인천전도관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 후 1970년대 초반에 기장신앙촌에 내려가 하나님께 안수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 오래 교회에 가지 않았던 저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죄송했습니다. 혹시 꾸중하지는 않으실까 걱정하며 안수를 받는데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죄짓지 마. 죄지으면 안 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무딘 마음으로 생활했던 제 모습을 다 아시고 하신 말씀인 것 같아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죄송했습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하나님을 따라야겠다는 뼈아픈 결심도 그날 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점점 심해져서 머리 빗질도 못 하고, 세수도 못 할 정도로 심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가보니 등뼈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뒤로 많이 물러난 상태라며 수술을 권했습니다. 저는 수술을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보라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축복일 날 버스 맨 뒷자리에 누워서 기장으로 내려갔습니다. 기장에 도착해서 축복을 받으러 가는데 하필 하나님 계신 곳 바로 앞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넘어진 저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며 “괜찮아?”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시더니 넘어진 저를 향해 강하게 축복해 주신 후 이제 됐으니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신기하게도 허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에 통증이 사라져 버린 저는 기장 내려올 때 버스 뒷좌석에 누워서 왔던 길을 집에 돌아갈 때는 똑바로 앉아서 갔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제가 하나님께 축복받고 병이 씻은 듯 나았다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회자되었습니다. 저 역시 너무나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었기에 집에 가는 내내 마음속으로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얼마나 많이 기도드렸는지 모릅니다. 인천전도관에 다니던 시절부터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배를 마치신 하나님께서 예배실 안에 가득한 그 많은 사람을 한 명도 빠짐없이 안수해 주시면,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병이 나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증거하는 사람들의 환희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놀랍고 신기한 광경이었는데 제게도 그 크신 권능을 베풀어주셨음이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따르며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깨달은 뒤로 어디를 가나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왔고, 천국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진정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그 귀하신 뜻을 따라 맑고 성결하게 살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하겠습니다.

신앙체험기 특집

천부교회를 찾아서

뉴스
소사신앙촌 ‘주인 없는 상점’

첫 번째 신앙촌인 소사신앙촌에는 만여 명의 교인들이 입주했습니다. 신앙촌에서 살고자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왜 정든 고향보다 새롭게 지어진 신앙촌에서 살기를 원했을까요? 초창기 신앙촌에 살았던 강명수 승사의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서울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세상의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 하나님 집회에서 낫는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지요. 우리 언니도 병원에서 고치지 못했던 폐병이 하나님 집회에서 깨끗이 낫게 되었어요. 저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저는 천부교회에 열심히 다니게 되었고 그 후로 소사신앙촌이 건설되면서 언니와 함께 신앙촌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신앙촌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주택은 빨간 벽돌로 지어진 예쁜 양옥이었고 그에 맞는 가구와 찬장까지 구비된 최신식 주택이었지요. 그때 우리나라는 6·25 전쟁을 겪고 얼마 되지 않아 정말 가난하고 어려웠어요. 버려진 고아도 많았고 하루 세 끼 밥을 먹기도 어려웠지요. 그런 때에 세워진 아름다운 신앙촌은 사람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되었어요. 관광객들이 줄을 이어서 소사신앙촌을 찾아왔답니다. 신앙촌 제품은 하나같이 한국의 선단 제품이라 인기 절정이었으므로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신앙촌 카스텔라는 최고 인기 식품이고, 물건을 사기 위해 머리 싸움을 하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을 진열, 판매하는 무인상회도 설치했었습니다. 글자 그대로 ‘주인 없는 상점’으로, 물품만 진열하고 하루 종일 열어 놓은 다음 저녁에 계산해 보면 완벽하게 정확했습니다. 그만큼 유리알처럼 맑고, 정확하게 산 것입니다.” 주인 없는 상점의 전통은 지금도 신앙촌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촌은 자유율법을 지키기 위한 곳. 신앙촌 사람들은 자유율법을 지키는 삶을 지향합니다.

신앙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br />
신앙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신앙신보 속 천부교 역사
Welcome to Shinangc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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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세계 종교 탐구 <40>부활이라는 믿음에 대하여-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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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침반] 영국 칼디섬 가톨릭 수도원 본부 사제들, 3살 아기 포함 대규모 아동 성학대. 십자가가 애들을 낚싯줄에 꿰어 납치한 거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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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포럼

선거 후 대통령이 해야 할 일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1955년 9월 16일 인천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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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사람들

“기름에 구워도, 생으로 먹어도  너무 맛있는 생명물두부로 바꿨어요”

“기름에 구워도, 생으로 먹어도 너무 맛있는 생명물두부로 바꿨어요”

식당은 음식이 맛있고 친절해야 더 맛있는 음식으로 고객 만날 것 경기도 시흥시 은계지구에 위치한 ‘은계동 갈매기’. 원래 옥길동에서 갈매기집을 운영하던 김영순 사장이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동료 박정숙 주방장과 이 지역에 새로 차린 식당이다. 은계동 갈매기에서는 얼마 전부터 된장찌개에 들어가는 두부를 신앙촌 제품으로 바꿨다고 한다. 김 사장은 “가까운 곳에 동태탕 전문점이 있는데, 그 집 동태탕에 들어간 두부가 참 부드럽고 맛있더라고요. 사장님께 어디 제품이냐고 물으니까 신앙촌 거래요. 저희 손님들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 신앙촌 두부로 바꾸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박정숙 주방장은 신앙촌 두부의 장점으로 부드러움과 고소한 맛을 꼽았다. “다른 두부보다 아무래도 좋죠. 부드러운 데다가 부쳐 먹어도 맛있고, 생으로 먹어도 맛있더라고요. 더 달라고 하는 손님들이 계셔서 된장찌개에 두부가 큼지막하게 썰어나갑니다.” 두 사람은 생명물두부 맛이 워낙 좋아서 평소에도 두부전이나 조림반찬으로 만들어 먹고 있다며, 손님상에 올리는 것보다 둘이 먹은 두부의 양이 더 많을 것이라며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신앙촌의 다른 제품도 사용해 본 적이 있는지 묻자 김영순 사장은 “신앙촌 제품은 뭐든지 기본적으로 품질이 다 좋아요. 사람들도 다 알지 않아요?”라고 하며 개인적으로는 요구르트 런을 주문해서 먹고 있다고 했다. 박정숙 주방장은 과거 신앙촌 담요를 샀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제가 20대 시절에는 신앙촌 담요가 인기여서 여러 개 샀었죠. 결혼할 때도 혼수로 신앙촌 담요를 사서 시아버지께 드렸는데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시골 분이셨는데 맨날 얼굴에 부비면서 보들보들 솜털 같다며 활짝 웃으셨던 기억이 나요. 핑크색에 두껍고 털도 안 빠지고…그 제품이 그렇게 좋았어요.” 이야기를 나누다가 식당에 온 순간부터 계속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갈매기살은 도대체 어떤 부위인가? 김 사장은 “갈매기는 갈비와 삼겹살 사이에서 나오는 고긴데요. 특수부위라서 돼지 한 마리를 잡아도 많이 나오는 부위는 아니에요. 기름기는 적은데 부드럽고 쫄깃해서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요”라고 설명했다. 이어 “어린 학생 손님 중에는 한참 맛있게 먹고 나서 ‘네? 돼지고기였어요?’라고 되묻는 분들도 있었어요. 하하. 진짜 갈매기 고기인 줄 알았대요”라며 웃었다. 은계동 갈매기의 대표 메뉴는 마늘 갈매기살이다. 박정숙 주방장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다진 마늘을 사용한 비법 양념을 고기와 함께 바락바락 주물러서 3일간 숙성시킨 후 손님들에게 나간다고 했다. 잘 숙성된 갈매기살을 석쇠 불에 구워서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라고. “손님들이 너무 맛있다고 해주시더라고요. 맛이 짱이래요. 맛있게 잘 먹었다며 배를 두드리며 나가실 때 정말 뿌듯하고 일하는 보람을 느껴요.” 김영순 사장에게도 가장 보람된 순간을 물었다. 질문을 듣고 잠깐 생각에 빠진 김 사장. 잠시 후 그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지며 입을 열었다. “저는 식당을 운영하면서 맛과 친절, 두 가지를 모두 잡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했어요. 그러다 보니 단골도 많이 생겼는데 음식이 맛있고, 가게 분위기가 편안하고 좋다면서 자주 오시더라고요. 오실 때마다 저희보고 식사는 했냐며 빵이나 대추쌍화차 같은 간식도 주시고, 매장이 바쁠 때는 고객들이 직접 서빙까지 하시는 거예요. 그 마음들이 너무 고마워서 반찬이라도 더 푸짐하게 드리려고 노력하게 돼요. 사람들의 따뜻한 배려와 정을 느낄 때 ‘아직 살만한 세상이구나, 식당 하길 잘했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도 더 맛있는 음식으로 정성껏 고객을 대하겠다는 은계동 갈매기의 번창을 기원한다.

“신앙에 힘이 되어주는  가장 든든한 벗”

“신앙에 힘이 되어주는 가장 든든한 벗”

광주 서동교회의 조계순, 조순자, 조계임 권사는 비슷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매지간이다. 막내인 조계임 권사의 전도로 오랜 시간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온 세 사람은 광주에서 소비조합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제는 조계순, 조계임 권사의 딸인 최민선, 양수영 권사까지 소비조합에 합류하며 더욱 큰 시너지를 내고 있다는 이들. 함께여서 더욱 든든하다는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소비조합으로 일하면서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신앙생활 가족과 함께 구원의 길을 함께 갈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려 은혜를 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가족 가장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남편을 통해 전도관을 알게 된 조계임 권사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전도관에 다니는 남편의 말이 황당하게만 느껴졌다고 한다. “전도관에는 이슬 같은 은혜가 내린다는 둥, 향취가 맡아진다는 둥 알아듣기 힘든 소리만 하는 거예요. 결혼 전에 성당에 다녔지만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때는 남편한테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도 말라며 면박을 주기도 했어요.” 그렇게 못 믿겠으면 직접 가서 스스로 판단해 보라는 남편의 말에 조계임 권사는 전도관 예배에 참석했다. 그날 예배 시간에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전도사님의 설교가 마음에 와닿아서 새벽예배까지 가게 됐다는 조계임 권사는 이후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새벽예배에 갔더니 관장님이 조그만 컵에 생수를 따라 주시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물을 한 컵씩 마시더라고요. 저도 줄을 섰는데 가까이 갈수록 정말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거예요. 과일 냄새 같기도 한데 하여튼 기가 막히게 좋은 냄새예요. 물을 마시면 그 향기로운 냄새가 목으로 넘어가고, 다 마신 후에도 침을 삼키면 참기름보다 고소한 맛이 나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사실은 제가 선천적으로 냄새를 잘 못 맡았거든요. 그런데 물에서 그렇게 진한 향기가 나니까 얼마나 놀라워요. 참 이상한 일이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 물은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생명물이었고, 제가 향취 은혜를 맡은 거였어요.” 조계임 권사는 생명물을 계속 맛보고 싶어서 매일 새벽예배 시간만 기다렸다고 한다. 또한 꾸준히 생명물을 마신 이후로는 일상생활에 불편이 없을 정도로 냄새도 맡게 되었다고 했다. 은혜를 체험한 조계임 권사는 언니들을 전도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는 은혜를 알았는데 언니들은 모르잖아요. 전도관에서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어야 하는데 우리 언니들은 어떡하나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기도 드렸어요. 그리고 언니들에게 전도관에 다니자고 권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계임 권사의 간절한 기도 덕분일까? 그 후 전도관에 차례로 다니게 된 조계순, 조순자 권사는 동생의 바람대로 은혜도 체험했다고 한다. 조순자 권사는 큰오빠가 돌아가셔서 입관 예배를 드렸던 때를 떠올렸다. “큰오빠의 장례를 천부교식으로 했어요. 입관 예배를 마치고 본 오빠의 얼굴이 너무 환하게 피고, 주변에는 향취가 진동해서 저희 모두 깜짝 놀랐어요. 산에 올라가서 관을 내려놓을 때까지 향취가 계속 맡아져서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드렸는지 모릅니다.” 조계순 권사는 기장신앙촌에 가서 예배 시간에 체험한 은혜 이야기를 들려줬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는데 표현할 수 없이 좋은 향취가 맡아지더라고요. 향기를 맡으니까 몸이 하늘로 붕붕 떠오르는 듯하고 기분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런 체험은 또 난생처음이었어요.” 가족이 모두 소비조합으로 활동해 현재 세 사람은 광주에서 소비조합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맏언니인 조계순 권사는 “신앙촌상회에서 일하는 저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노인정에 가도 화투만 치고 좋은 게 없는데 저는 상회에서 손님들 맞이하며 활기차게 일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나 봐요”라고 했다. 몇해 전부터는 조계순 권사의 딸인 최민선 권사가 정년퇴직 후 자연스럽게 소비조합으로 함께 일하고 있으며, 조 권사가 신앙촌상회를 보는 동안 최민선 권사는 배달이나 영업을 한다고 했다. 반대로 조계임 권사는 운전을 잘하는 본인이 배달을 가고, 딸인 양수영 권사가 상회에서 판촉을 한다고 했다. 조계임 권사에 의하면 양수영 권사는 지나가는 고객 한 명에게도 진심으로 요구르트와 간장 선물세트를 홍보한다고 했다. 조 권사의 신앙촌상회에 딸이 항상 있다는 것을 아니까 고객들도 더 많이 방문하는 이점이 있다고 했다. 이에 양수영 권사는 “그동안 어머니께서 일궈놓은 터전, 만들어놓은 단골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에요. 어머니는 항상 시간을 아껴서 부지런히 일하시는 분이셨거든요. 그 덕에 제가 수월하게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인터뷰 중 양수영 권사는 어머니 조계임 권사를 ‘삶의 귀감이 되는 분’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일을 해야만 하는 성격이세요. 정말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분이시거든요. 신앙생활을 할 때도 늘 힘이 되어 주세요. 어머니는 예배 시간에 들은 하나님 말씀 중 감동받았던 부분을 종이에 적어서 꼭 저한테 보여주시더라고요. 그때마다 저도 느끼는 것이 많아요. 저로서는 어머니와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최민선 권사도 어머니인 조계순 권사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저희 엄마도 대단하세요. 연세도 많으신데 상회에 1년 365일 출석하시거든요. 눈이 오고 비가 와도 새벽예배는 꼭 가시고요. 그런 모습이 늘 존경스러워요.” 최민선 권사는 어머니가 ‘신앙의 멘토’라고 했다. 최 권사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는 절대 큰소리 내지 않는 분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어머니가 늘 져주기만 하고, 손해를 많이 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엄마는 도대체 왜 그러냐고 화를 내면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혈기를 부리면 죄를 짓는 것이다. 큰 소리로 싸워서 이기면, 이기는 것 같아도 나 자신에게 지는 것이고, 싸우지 않으면 진 것 같아도 자기 자신에게 이긴 것이다’라고요. 신앙인으로서 본받아야 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있어 기쁘고 감사해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고 따뜻해지는 그 이름, 가족.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그동안 말로는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하나 둘 씩 쏟아져 나왔다. 조순자 권사는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 동생인 조계임 권사가 큰 힘이 되어줬다고 했다. 그는 “신앙이 나태해지려고 할 때마다 동생이 힘을 많이 줘서 지금까지 따라올 수 있었어요. 지금도 교회와 집이 멀다 보니 축복일에 갈 때는 동생 집에서 자곤 하는데요. 신경 쓸 일이 많을 텐데도 항상 챙겨주니 미안하면서도 고맙고 많이 의지가 돼요”라고 했다. 그러자 조계임 권사는 “형제간에 무엇이 미안해! 참말로!”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늘 부지런히 일하고 한결같은 신앙생활을 해온 어머니를 둔 두 딸도 바라는 것이 있었다. 양수영 권사는 “어머니가 좀 더 오래 건강하셔서 신앙촌상회를 오래도록 같이하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사이에 제 몫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스스로 조금 더 성장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최민선 권사는 “어머니가 바라시는 것이 딱 하나 있으세요. 끝까지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신앙촌상회를 하고 싶으시대요. 어머니가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그때까지 제가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드리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모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조계순 권사는 끝으로 “이 길이 참 길이고,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가족을 이끌어주셨는지 지금 생각해도 너무 감사해요.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라며 미소지었다.

감람나무를 따라 신앙의 길을 걷다

감람나무를 따라 신앙의 길을 걷다

종교 전향으로부터 온 큰 변화 감람나무 존재를 실감하고 전도와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 1940년에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저는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큰형님(故 임종덕)의 영향으로 가족 모두 안식일교회에 다니던 중, 1957년 여름방학 때 광주에서 기숙 생활을 하다가 집에 돌아온 저는 큰 변화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형님이 전도관으로 전향하면서 저희 집 2층은 전도관 예배실로 사용되고, 아래층은 신앙촌에서 생산되는 간장, 성냥, 양초 등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운영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보성으로 전학하여 저녁마다 반사 공부와 말씀 공부를 병행하면서 성경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자만심은 감람나무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 2층 예배실에서는 하나님을 모신 집회가 세 차례나 열렸습니다. 이 집회들은 저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깊이 실감하게 해주었고, 제 신앙에 새로운 힘을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집이 협소하여 극장이나 향교에서 집회를 열기도 했는데, 집회가 있기 전에 형님은 마이크와 홍나팔을, 저는 제작한 커다란 마이크 배터리를 메고 동네 곳곳을 돌며 집회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후 박한윤 관장님이 부임하시면서 제단을 짓게 되어 방과 후에 제단 정지 작업을 도왔습니다. 제단이 지어짐과 동시에 이제는 전도를 위해 힘을 쏟아야 했습니다. 주일학생 전도를 위해 매주 토요일마다 동네를 누비며 심방을 했습니다. 찬송가 괘도를 만들고, 반 표지판도 벽에 걸고, 요절을 필사해 공과 책도 만들었습니다. 매주 늘어나는 숫자는 감당 못 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재미있고 신이 났습니다. 어느 사이 저는 과거 기성교회에 젖어 있던 땟물은 다 빠지고 감람나무 하나님의 은혜에 흠뻑 젖어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겨울철 철야 기도를 하는데도 추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온몸이 후끈 달았습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 저도 모르는 사이 눈물, 콧물이 마룻바닥을 적셨습니다. 한번은 신앙촌에서 생산되는 몇 가지 제품을 자전거에 싣고 5일 장 세 곳을 돌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회천 5일 장을 다녀오는 중간지점인 99굽이 고갯길에서 자전거 체인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날은 저물어가고 갈 길은 아직 먼데 난감했습니다. 겨우 자전거를 끌며 집에 오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주는 것처럼 조금도 힘들지 않고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어린 내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셨다는 생각에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어린이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나는 주의 화원에 어린 백합꽃이니 은혜 비를 머금고 고이 자라납니다. 주의 은혜 감사해 나는 무엇 드리리 사랑하는 하나님 나의 향기 받으소서” 1958년에 노구산 집회에 참석했을 때는 두 번의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눈 안찰을 받을 때는 하나님 손이 눈에 닿기만 했는데도, 눈을 찌르는 듯한 아픔이 있었고, 눈 앞에 별이 번쩍번쩍했습니다. 그 후 몸 안찰을 받았을 때는 극심한 통증으로 몸이 활이 되다시피 했지만, 그 후 주교부장 자격으로 안찰을 받을 때는 전과 같은 통증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손으로 죄가 씻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여러 세대가 소사신앙촌에 입주하고 난 후 보성에 남은 저는 제단 신축공사를 총괄하여 아담하고 튼튼한 제단을 완성했습니다. 그 후 보성제단은 60년 전 그때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2017년 여성회 교회로 새단장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1962년 8월 군에 입대하면서 저는 어느 곳이든 제단이 있는 곳으로 배치되기를 기도드렸습니다. 소정의 훈련과 교육과정을 모두 마치고 전방지역인 전곡에 배치되었는데, 일요일 낮에 제단을 찾으려고 무작정 전곡 시내를 향해 걸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찬송가 ‘영원한 하늘나라 들어가려고’를 부르면서, 손뼉 치며 찬송을 부르는 교회가 어디 있는지 아냐고 물었는데, 운이 좋게도 제단을 찾아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부대가 양평 용문으로 이동해 행정반 서무반장이 되면서 사무실에서 기도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에 큰 지장없이 군 복무를 마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군 제대 후에는 교역자 권유를 받았지만,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것인지 알기에 계속해서 못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젊음을 불태워 일할 곳은 교역자의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소사신앙촌 사진관에서 근무하며 교역자의 길을 걷기 위한 소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새교인에서 교인으로 계기 만들어 준 진주교회 전도의 날

새교인에서 교인으로 계기 만들어 준 진주교회 전도의 날

전도의 날을 통해 천부교회에 나와 집사 임명을 받은 사람도 있다. 하점순 집사는 진주교회 박명하 권사의 전도로 2008년 진주교회에 첫발을 내디딘 후 2014년 성직을 받았다. 박 권사는 하점순 집사와의 인연을 이렇게 회상했다. “예전에 한 달에 한 번씩 교회 전도 행사를 할 때 하점순 씨를 알게 되었어요. 그 당시 또래 8~9명이 함께 나오셨는데, 하점순 씨가 그중 한 분이었어요. 집이 교회와 가깝고, 성품이 착하셔서 집에도 왕래하고, 건강 챙기시라고 런도 가져다드리면서 더욱 친해졌습니다” 얼마 뒤, 조남일 관장이 진주교회에 시무하게 되면서 하 집사는 교회와 더욱 가까워졌다고 한다. “같이 교회에 다녔던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을 두는데, 저는 하나님 말씀이 와닿았어요. 관장님께서 말씀을 잘 풀어서 설명해 주셨거든요. 또 저에게 마음을 써주시니 고마운 마음도 컸고요.” 조남일 관장도 하점순 집사를 특별하게 생각했다. “집에서 40년 동안 한복 짓는 일을 하다 보니 세상에 때 묻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바탕이 순수하고 착하신 분이구나’ 생각이 들어 많은 일을 함께 하기 시작했어요. 매달 전도 행사를 준비할 때면 시장에 같이 다니고,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찬송도 부르고, 말씀도 들려준 거예요.” 그 후 하점순 집사는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새벽예배를 쌓기 시작했다고 조 관장이 전했다. “새벽에 태워 와서 예배드리고, 같이 식사하고, 다시 집까지 태워주면서 새벽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더라고요. 또 한번은 추수감사절 즈음, 일요일 예배시간이 아침 11시인데, 8시에 교회에 와서 기도하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유를 물었더니 집주인과 기성교회에 가기로 했지만,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서 서둘러 천부교회에 온 거라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신앙을 키우며 성실하게 예배에 참석하던 하 집사는 집사 임명을 받기 전이었지만 어느 날 향취를 맡았다고 한다. “새벽예배 때 교회 문을 열었는데, 모과 향기 같은 좋은 냄새가 나는 거예요. 관장님께 향기 나는 것으로 청소했는지 여쭤봤더니 아니라고 하셨어요. 예배실로 올라갔는데도 그 향기가 진동했습니다.” 하 집사의 향취 체험은 집사 임명을 받은 후에도 또 한 번 있었다고 한다. “진주교회의 허순자 권사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였어요. 입관실에 들어가려는 순간 허브 향과 여러 가지 좋은 비누 향 같은 것이 확 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그 향기는 들어가는 동안 계속되다가 들어간 순간 멈췄어요. 1분 내외의 순간이었지만 ‘이렇게 좋은 향기가 어디 있을까, 하나님께서 향취를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천부교회에 나온 지 6년 만에 집사 성직을 받은 하 집사는 조남일 관장과 같이 다니며 하나님 앞에 기울이는 자세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었다고 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고 생각하니 다른 길로 갈 수 없었어요. 다른 종교에서도 10년 동안 저를 찾아왔지만, 어디를 살펴봐도 우리 하나님밖에 없다는 생각에 마음속으로 천부교를 택한 거예요. 이 세상에 태어나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죄만 짓고 살았더라고요. 죄가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 말씀에 비춰보면 죄였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욕심이 죄인데, 정직하게 살면서 생전에 죄를 조금 더 벗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부교회에 나와 죄 안 짓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는 하점순 집사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 집사를 진주교회의 보배로 부르고 있다. 이번 전도의 날에도 박 권사와 함께 천부교회에 처음 오는 분들을 위해 정성을 모은 하 집사에게 박 권사는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하 집사님은 제가 부탁하면 언제나 도와주시는데, 제 열매이긴 하지만 제가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서로 마음이 통하고 함께 하면 정말 힘이 됩니다. 하점순 집사님이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교양

단 음식을 먹으면  1시간 내에 일어나는일

단 음식을 먹으면 1시간 내에 일어나는일

우리 몸은 당을 가지고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에너지원이 우리 몸에 조금 남게되면 당을 글리코겐이라고 하는 물질로 변환시켜 간이나 근육에 저장하게 됩니다. 그래도 에너지가 남는다면 지방으로 전환해 피하, 특히 뱃살 같은 곳에 저장을 하게 됩니다. 단 것을 먹으면 살이 찌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하루 당 섭취량을 성인 기준 2,000kcal 섭취 시 50g 이내로 권고하고 있는데, 이는 각설탕 15개 분량이라고 합니다. 당 성분을 조절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과다한 당분으로 인해 우리 몸의 기능이 악화와 회복을 수없이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당분을 과다 섭취했을 때 우리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자료를 토대로 시간의 흐름을 통해 그 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0~15분 가장 먼저 치아와 잇몸에 영향을 줍니다. 설탕은 침 속에 잠복해 있는 세균과 섞여 산성으로 변하면서 치아를 감싸고 있는 법랑질(에나멜)을 공격해 부식 시킵니다. 15~30분 장으로 유입된 설탕은 작은 창자(소장)에서 분해되어 포도당과 과당의 형태로 혈액에 흡수됩니다. 이 시간 동안 혈액내 당수치가 최고조에 이르게 됩니다. 신장(콩팥)의 부신시스템이 방해를 받아 몸은 상당한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들 호르몬은 교감 신경을 자극해 혈압을 상승시키고, 심장박동 수를 높이게 됩니다. 30~45분 30분이 지나면 혈압 수치가 높아져 있는 상태가 됩니다. 과다한 설탕 자극으로 인해 뇌의 보상중추에서 도파민 수치를 증가시켜 잠깐 기분이 고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곧 인슐린과 호르몬 수치가 치솟아 혈당을 현저히 떨어뜨립니다. 결국엔 피로와 짜증이 몰려오고, 두통이 생길 수 있습니다. 또한 소화기관에서 머물던 설탕이 빠르게 빠져나가는데, 이때 복부 통증을 일으키고 때에 따라 속이 부글거리는 복부팽만증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45분 이후 설탕이 유발한 호르몬 교란으로 인해 식세포 기능도 방해를 받게 됩니다. 식세포란 체내의 이물이나 세균들을 없애는 정화작용에 필요한 세포인데, 당분으로 인해 면역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설탕 섭취 이전 보다(약 1시간 전) 몸이 해로운 세균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설탕이 뇌, 장, 면역체계 등 몸을 혹사시키는 시간은 45~60분 이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체 기능과 면역시스템이 정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보통 5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당으로부터 혹사된 후 몸이 회복되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만큼 과다한 당 섭취를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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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불청객(1) 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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