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부교 제주신촌교회 개축예배

한국천부교 제주신촌교회 개축예배

개축 마치고 새로운 출발 앞둔 제주신촌교회의 무궁한 발전 기원 한국천부교 제주신촌교회 개축예배가 7월 10일에 있었다. 예배에서는 전국 남성회 교역자들의 축하 특순, 성직 임명 및 공로패 수여 등이 있었다. 축사를 맡은 강희봉 관장(중부총무, 서대문교회)은 “하나님께서는 전도보다 가치로운 일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해 구원의 방주역할을 하는 제주신촌교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라고 했다. 정주현 관장(남부총무, 부산교회)은 격려사에서 “교회를 아름답고 깨끗하게 가꾸는 것은 신앙 생활의 기본입니다. 수고하신 제주신촌교회 관장님과 교인분들이 전도에 더욱 박차를 가하시길 바랍니다”라고 했다. 남삼호 관장(제주신촌교회)은 “새로운 마음과 각오로 제주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지난 2018년 교역생활을 은퇴했던 남삼호 관장은 제주신촌교회 개축을 추진하며 이곳에 다시 교역자로 발령받아 부임하게 되었다. 장년회장 강종훈 권사(제주신촌교회)는 “정말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이제 학생들 전도에 힘쓰고, 쉬고 있던 교인들을 만나 하나님 앞에 함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천부교부흥협회 및 신도연합회 총회 이모저모

천부교부흥협회 및 신도연합회 총회 이모저모

2020년도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 총회와 한국천부교신도연합회 총회가 지난 6월 13일 신앙촌에서 개최되었다. 총회는 코로나19 예방과 교인들의 안전을 위해 발열 체크, 손 소독 및 마스크 착용, 1m 이상 간격 유지하기 등 사회적 거리 두기를 준수하며 진행되었다. 이날 오전 11시에 시작된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 총회는 최성례 임시의장(소사신앙촌 교회)의 개회 선언에 이어 4가지의 안건을 논의하였다. △대표자 선출 및 추인의 건 △협회 헌장 개정안 의결의 건 △협회 소 제기 추인의 건 △협회 소 제기 의결의 건으로 각 안건마다 상세한 설명과 교인들의 의견 개진이 이어진 후 투표 및 개표가 진행되었다. 오후 2시에 시작된 한국천부교신도연합회 총회는 의장인 김상문 관장(여수교회)의 주재로 진행되었다. 총회에서 논의된 안건은 △의장 선출 및 추인의 건 △연합회 규약 개정 의결의 건 △연합회 소 제기 추인의 건 등이었다. 교인들은 안건을 경청한 후 발언대에 나와 의견과 질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발언자 중 한 명이었던 교인 이명옥 씨(기장신앙촌)는 소 제기 추인 안건에 대해 “천부교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유포하는 출판물과 언론사에 대해 소송으로 대응하고 바로잡고자 하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는 1955년 창립된 이래로 고유의 신앙 가치를 지키고 전파하는 전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한국천부교신도연합회는 신도들의 전도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Q&A? 총회가 무엇인가요?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와 한국천부교신도연합회에 소속된 교인들이 신앙촌에 모여 총회를 열었습니다. ‘총회’란 무엇일까요? 주주총회라는 말은 모두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주주총회는 회사의 주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주식과 관련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집단의 구성원 전체가 모여서 어떤 일에 관해 의논하는 것 또는 그런 모임 자체를 ‘총회’라고 합니다. 교회도 사람이 모여서 만든 집단이기 때문에 주주총회와 마찬가지로 구성원들을 모두 소집해 교인총회를 개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으로 등록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총회에 참석하여 교단의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의사결정을 할 때는 교인 모두가 똑같이 1표의 의사결정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총회에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일정 양식의 위임장을 작성하고 대리인에게 위임하여 의결권을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보통 교인총회에서 어떤 사안에 대한 결정을 할 때는 교인의 절반 이상이 총회에 참석하고, 그 참석 인원의 절반 이상이 결의에 찬성해야 합니다. 교인총회는 최고 의사결정기관이기 때문에 교단 운영에 관한 모든 사항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매번 모든 교인이 모이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당한 정도의 권한을 이사회 또는 대표자에게 위임하여 운영하게 됩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말씀 정확히 알고 바로 전달해야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말씀 정확히 알고 바로 전달해야

세미나, 만찬회, 퀴즈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 준비돼 여성회 축복일 예배가 7월 7일 신앙촌에서 있었다. 이날 축복일 예배를 인도한 서귀향 관장(진해교회)은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허구를 지적하시며 예수는 구원을 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자유율법으로야만 구원 얻을 수 있다고 하신 생명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저희가 되어야겠습니다”라고 설교했다. 축복일 전날에는 소비조합 세미나, 신앙촌 레스토랑에서 열린 소비조합 만찬회, 경전퀴즈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특히 하나님 말씀을 정확히 알고 전하자는 취지로 올해 초부터 예고되었던 경전 퀴즈대회는 참가자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이날 맛길, 레스토랑, 베이커리, 숙소 등 신앙촌 휴게 공간에는 대회를 앞두고 경전을 읽고 퀴즈 책자를 풀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계순 권사(동래교회)는 “퀴즈대회 준비하며 경전을 여러 번 반복해 읽었는데 하나님 말씀이 더욱 깊이 와 닿았습니다. 다음 대회 때는 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이번 경전 퀴즈 범위는 1~3부였으며, 앞으로도 범위를 나눠 수준별, 연령별로 꾸준히 치러질 예정이다.

천부교회 학생회 교육, 온라인과 병행하며 효과 높여

천부교회 학생회 교육, 온라인과 병행하며 효과 높여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점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마무리하고 6일부터는 일상과 방역의 조화를 위해 생활 속 거리두기를 이행한다고 발표했다. 전국의 천부교 학생회는 이와 같은 생활 속 거리 두기 지침을 준수하는 한편, 어린이와 학생들을 위한 온라인 교육을 통해 교육 효과를 높이고 있다. 2월 초부터 천부교 측은 입구 체온측정, 손 소독제 비치, 2m 좌석 간격 유지, 참석자 동선 체크 등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며 예배를 드려왔다. 코로나 사태로 촉발된 사회적 거리두기는 천부교회의 교육 방식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지금까지 교육 방식이 교회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하는 대면 교육이 주를 이뤘다면 코로나 이후에는 온라인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교육 받는 학생들이 온라인 상의 활동에 익숙한 세대들인 만큼 온라인을 통한 대화와 피드백이 활발히 이루어져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온라인 교육은 카카오 라이브톡으로 진행되며 지역별로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1부 예배에 이어 2부는 하나님 말씀퀴즈, 3부는 다양한 비대면 놀이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된다. 온라인예배에 참여한 김민경 양(중1, 목동교회)은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새로웠어요. 또 요즘 유행하는 수란 도시락 만들기, ASMR을 친구들과 채팅하면서 같이 해볼 수 있는 것이 재미있어요”라고 했다.

제40회 이슬성신절 맞이해

제40회 이슬성신절 맞이해

1981년에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지는 천부교 절기행사 올해는 제40회 이슬성신절을 맞이하는 해이다. 이슬성신절은 천부교 주요 절기행사로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내려주시는 이슬성신 은혜에 감사 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1981년 1월 3일에 제1회 이슬성신절이 제정되었으며 이후 이슬성신이 가장 많이 내렸다는 때가 초창기 5월 하순이었다는 말씀에 따라 1983년 3회부터 5월로 변경되었다. 당시 제1회 이슬성신절 행사를 다룬 신앙신보 1981년 1월 5일자 신문에는 “기장 신앙촌, 이슬성신절 행사 화려”라는 기사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제1회 이슬성신절 축하 음악 대예배가 지난 1월 3일 기장신앙촌 대예배실에서 국내외 성도들이 운집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날 설교에서 이슬성신의 귀중함과 감람나무의 존재를 자세히 밝히셨다.” 또한 이 신문에는 제1회 이슬성신절을 한 주 앞두고 각 지역별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이슬성신절 축하 예배를 드렸다는 기사도 함께 실렸다. 초창기부터 하나님께서는 썩을 것을 썩지 않게 하는 ‘이슬성신’으로만 구원 얻을 수 있음을 깨우쳐 주시며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는 존재가 감람나무임을 증거하셨다. 1980년에는 예수의 정체를 벗기시며 성경의 오류를 지적하셨고, 이후 1981년 제1회 이슬성신절에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신 것이다. 1회 이슬성신절 예배에 참석했던 김순덕 권사(덕소교회)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 날 하나님께서는 ‘오늘 제일 기쁜날이야’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동안 저희들에게 은혜를 깨닫게 해주시며 한 단계 한 단계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했다. 1부 예배가 끝난 후에는 2부 음악 순서가 펼쳐졌다. 이날 음악 경연대회에는 부산합창단, 전국부인회 합창단, 덕소와 소사 소비조합 합창단, 청주 합창단, 서울교역자 합창단, 대학생연합회 합창단, 부천과 인천 합창단이 참가하여 청중들의 열띤 박수와 환호성을 자아냈다고 한다. 이슬성신절 음악 순서는 1981년 1회부터 1987년 7회까지는 음악 경연대회로 예선을 거쳐 출연팀을 선정하는 등 경쟁방식으로 진행되다가 1988년 8회부터는 축하 음악회로 변경되어 오케스트라 연주와 합창 등으로 매년 기장신앙촌에서 개최되고 있다. 이슬성신절 예배 때마다 음악 순서가 함께하는 의미에 대해 천부교 부흥협회 음악 관계자는 “합창은 하나님 은혜를 찬송하는 시간이자 귀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또한 천부교인들은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전도되기를 바라며 음악 순서를 정성껏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러한 신앙촌 음악의 전통은 오늘까지도 이어져 예배와 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신앙촌에서는 이슬성신절, 추수감사절 등 절기 예배뿐만 아니라 송년 음악회, 신년 음악회, 새교인 합창대회, 음악캠프 등 각종 음악 행사가 자주 열린다. 또한 신앙촌 사원들로 구성된 시온오케스트라의 활동도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제40회 이슬성신절  축하 음악 순서는 중· 고등학생부터 여청, 입사생, 소비조합원 중에서 선발된 교인들로 구성한 여성 합창단이 시온오케스트라와 함께 무대를 장식할 예정이다.

메르스 이후 5년 만에 찾아온 바이러스…우리는 얼마나 진화했나

메르스 이후 5년 만에 찾아온 바이러스…우리는 얼마나 진화했나

새해 벽두부터 시작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는 아직도 진정되지 않고 있다. 바이러스의 전파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5년 전 메르스 사태를 겪었음에도 정부와 관계 기관의 대응 수준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메르스가 종식된 직후인 2016년 1월 14일 감사원은 질병관리본부 등 18개 정부 기관을 대상으로 벌인 감사보고서를 발간했다. 메르스 예방 및 대응 실태를 감사한 결과는 메르스가 전형적인 인재(人災)라는 사실이었다. 초기에 메르스 대응 지침을 잘못 제정하는 등 사전 대비에 소홀했고, 최초 환자에 대한 역학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초동 대응이 부실했으며,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확산 방지에 실패했다는 것이 감사 결과의 요지였다. 이런 참사의 재연을 막기 위해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가 6개월 이상의 작업을 거쳐 방대한 ‘메르스 백서’를 내놨다. 백서에서 제시한 방안은 질병관리본부가 강력한 컨트롤타워가 돼야 하고, 역학조사관을 충원해야 하며 감염병 전문 병원을 지정·운영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새로운 침입자가 나타난 지금, 5년 전에 제시한 바이러스 대응 방안은 얼마나 현실화되었을까. 먼저 국가 방역의 사령탑인 질병관리본부 센터장은 감염병 전문가가 아닌 행정직 공무원으로 임명되었을 뿐 아니라 감염병이나 백신 전문가가 담당해야 할 예방접종 분야 직책도 마찬가지였다. 또 신종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국립보건 연구원 원장 자리는 9개월째 공석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감염병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는 신종 바이러스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미리 방역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이것을 책임진 연구원의 수장이 아직도 충원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방역망의 허점은 이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여실히 드러났다. 의심 환자를 격리하는 조치가 지체되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지역 사회를 돌아다니며 2차, 3차 감염을 일으킨 것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려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증상 감염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사전 방역망에서 의심 환자를 걸러 내는 것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다. 메르스라는 국가적인 재난을 겪고 난 후에도 관계 기관에서 제시한 방안들이 공허한 탁상공론에 그치고 만다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욱 강력한 감염병이 언제든지 우리 사회를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미지의 바이러스는 약 150만개로 추산되고 있다. 백신을 개발하는 데는 천문학적인 비용과 4~5년이라는 시간이 걸리지만 바이러스는 그보다 훨씬 더 빨리 진화하기 때문에 결국은 어떤 백신도 무력화시킬 수 있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국가와 기관이 예방 대책을 세우고 신종 바이러스를 연구하며 방역을 강화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이다.

죄를 씻어주시는 이슬성신

코로나 맞서는 ‘시민들의 힘’

소비조합에 격려의 메세지…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 되자”

신앙의 목표 세우고 결실 맺는 한해 되자

총회 소집 공고 –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

총회 소집 공고 – 한국천부교신도연합회

교인 등록 추가 공고 –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

신도 등록 추가 공고- 한국천부교신도연합회

신앙체험기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하실 때 기쁜 마음은 표현할 길이 없어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하실 때 기쁜 마음은 표현할 길이 없어

저는 태어났을 때 몹시 병약해서 소아과 의사이신 아버지께서도 살 가망이 없을 것 같다고 낙담할 정도였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가졌을 때 폐병을 앓으셨기 때문인지 저는 폐와 기관지가 약하고 해수병을 달고 살아서 천방지축 뛰어 놀 나이에도 언덕을 오를 때 숨이 차서 한참 쉬었다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때 살았던 서울 흑석동 2층 집은 연탄 보일러였는데 연탄가스를 조금만 맡아도 침대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니 여동생은 아침마다 “엄마! 언니가 또 죽었어!” 하고 소리쳤습니다. 중학교 진학할 때 아버지가 건강이 더 나빠지면 공부도 못하니 1년을 쉬라 하셨지만 저는 쓰러져도 다니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입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이던 1958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설교하시는 하나님 바라보고 있는데  강대상을 탕탕 치시자 불덩이가 나와 가슴팍에 떨어져 뜨거워 견딜 수 없어 뜨거움 가시자 목으로 단물이 넘어와  당시 저는 부모님을 따라 원효로제단을 거쳐 마포 이만제단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원효로제단과 이만제단은 박태선 장로님께서 세우신 교회였습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 말씀하시는 박태선 장로님을 바라보고 있는데, 강대상을 탕탕 치시는 순간 거기서 커다란 불덩어리가 나와 제 가슴에 푹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뜨거운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뜨거운 느낌이 가시고 나자 입 안에 달콤한 물이 생기더니 꿀꺽꿀꺽 목으로 넘어왔고, 이튿날 학교 가서도 목으로 자꾸 달콤한 물이 넘어와서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인 분들 말씀이, 예배 시간에 불이 떨어지고 뜨거움을 느낀 것은 불성신을 받은 것이고 달콤한 물이 넘어온 것은 생수가 통하는 체험이라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몸이 좋아지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학교 계단을 오를 때 웬일인지 숨이 차지 않아서 다른 아이들처럼 한달음에 올라가면서 ‘내가 이럴 수도 있구나!’ 하며 놀랐습니다. 키만 멀대같이 크고 볼품없이 말랐던 몸에 시간이 갈수록 포동포동 살이 올랐고, 어머니는 정말 예뻐졌다며 네가 은혜 받아서 사람이 됐다고 좋아하셨습니다. 저보다 먼저 아버지도 전도관에 다니면서 건강을 찾으셨습니다. 이북에서 철도병원에 근무했던 아버지는 왕진 가방 하나만 들고 월남해 서울에 병원을 열기까지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일에 파묻혀 사시느라 아버지 건강이 안 좋아지신다며 어머니가 크게 걱정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열 한살이던 1955년이었는데, 마침 박태선 장로님 집회에 가면 불치병이 낫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가 보신 것이 저희 식구가 전도관에 다니게 된 계기였습니다. 아버지는 원효로전도관에 다니며 박 장로님께 안찰을 자주 받으셨습니다. 학자 타입의 아버지는 늘 온화한 표정으로 말씀이 없으셨는데 안찰 받고 오신 날은 특히 기분이 좋아 보이셨습니다. 안찰 받은 후로 하루 종일 병원에서 일하고 와서 몇 시간씩 책을 읽어도 몸이 가볍고 좋다며 기뻐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일에 파묻혀 사느라 건강이 안 좋아지셨는데 하나님께 안찰 받고 하루 종일 병원에서 일하고 와서  오래 책을 읽어도 몸이 가볍다고 기뻐하셔 부모님이 매일 새벽예배 드리며 열심히 전도관에 나가시니 5남매 저희 형제들은 자연히 따라 다녔습니다. 새벽 어스름 한강 다리를 건널 때 이만제단에서 울리는 음악 종소리가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은지 천국에서 울리는 것 같았고, 예배 시간 어른들 틈에서 손뼉 치며 찬송 부를 때는 가사를 잘 모르면서도 마냥 신나고 재미있었습니다. 일요일에는 주일학교 예배에 박태선 장로님께서 직접 나오셔서 설교 말씀을 해 주셨는데, 무슨 말씀을 들은 기억보다는 그때 분위기가 생생히 떠오릅니다. 단상을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운 아이들과 사랑이 넘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시던 하나님의 모습은 사진으로 찍어둔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이만제단 2층 단상 옆 학생 성가대 석에서 아래층 예배실을 내려다보는데 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것이 보여서 손바닥을 펼쳐 보면 손은 전혀 젖지 않아 예배 시간에 폭포수 같은 물줄기가 사람들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을 보기도 해 그 후 고등학교 시절 이만제단에서 학생 성가대로 활동하면서 여러 가지 체험을 했습니다. 성가대 석은 2층 단상 옆에 있었기 때문에 아래층 예배실을 내려다볼 수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이슬비가 보슬보슬 내려서 손바닥을 펼쳐 받아 보면 손은 전혀 젖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이슬비가 내리는 것이 보였고, 폭포수 같은 물줄기가 사람들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 폭포수 같은 성신은 이만제단 개관식 때 사진에 찍혔던 이슬성신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만 명이 앉을 수 있어서 이만제단이라고 불렸던 예배실은 매 주일 꽉꽉 들어차서 발 하나 넣고 옮길 자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 사람씩 머리 위에 안수하시며 지나가실 때 보면 날아가시는 것처럼 순식간이었습니다. 옆 사람끼리 무릎이 닿도록 앉아 있는 사이를 지나가자면 사람들의 발이나 무릎을 밟으실 만한데 전혀 거치는 것 없이 훌훌 날아가시는 듯한 모습에 눈을 못 떼고 바라봤습니다. 하루는 안수하시는 하나님을 한참 바라보다 어느 순간 예배실에 뽀얀 안개 같은 것이 점점 짙어지는 것을 봤습니다. 나중에는 옆자리 성가대원도 보일락 말락 할 정도로 예배실이 안개에 폭 싸인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집회에서 안개처럼 뽀얗게 은혜가 내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제가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이슬비처럼 은혜가 내릴 때, 하나님께 안수를 받을 때, 뽀얀 안개 같은 성신에 싸여 있을 때 그 기쁘고 즐거운 마음은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안수하시는 하나님을 보는데 예배실에 점점 뽀얀 안개가 생기더니 옆자리 사람이 안보일 만큼 짙어져 마음은 기쁘고 즐거워 표현할 길이 없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약회사에서 근무할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셔서 삼촌이 계시는 적십자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병명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서 다시 검사하자 백혈병이라고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병명조차 생소해서 얼마나 심각한 병인지 몰랐는데, 건강하고 활동적이셨던 어머니가 얼마 못 사실 거라는 선고는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이북에서 맨손으로 피난 나온 후 어머니는 집안을 일으키느라 억척같이 일하셨고, 오로지 자식들 잘 먹이고 입히는 생각만 하셨습니다. 어머니 그늘 아래 부족함 없이 살던 저희 형제는 3개월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평생 병원 일만 하셨던 아버지도 어떻게 장례를 치르고 준비할지 막막하신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명물로 씻기니 얼마나 곱고 예쁜지 탄성이 절로 나와 선홍색 입술에는 엷은 미소가 감돌고 피부가 환히 피어 처녀 시절 모습같아 당시 저희 가족은 집과 가까운 흑석동전도관에 다니고 있었는데, 거기 교인 분들이 찾아와 한식구처럼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장례 때 저희 가족이 입을 상복을 손수 지어 주셨고 관 위에 덮는 꽃도 밤을 새워 정성껏 만드셨습니다. 입관예배 드릴 때 힘차게 찬송하는 동안 장례반 어른들이 어머니를 생명물로 씻기셨는데, 다 씻긴 후 봤을 때 어머니가 얼마나 곱고 예쁘신지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코가 오똑하고 얼굴이 갸름한 미인형이셨던 어머니는 피부가 너무 곱고 환하게 피어서 처녀 시절 어머니가 저런 모습이셨을까 싶었습니다. 루주를 바른 듯한 선홍색 입술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잃고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지만 미소 지으시는 어머니를 보며 마음이 차차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곱고 예쁘게 핀 모습과 밝고 편안한 집안 분위기를 느끼며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해 주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습니다. 아직 철부지 같았던 제가 처음으로 삶과 죽음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은혜 받은 교인끼리는 한 가족보다 더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권능을 직접 보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눈물짓던 슬픈 마음을 다 씻어 주셔서 기쁘고 감사하게 살아

눈물짓던 슬픈 마음을 다 씻어 주셔서 기쁘고 감사하게 살아

항상 눈물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농사에 지친 몸으로 시부모님 저녁상까지 치우고 나면 저는 사랑채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열여덟 살에 충북 보은으로 시집가서 하루하루를 고달프게 지냈습니다. 내 손으로 물 한 그릇 떠 본 일 없이 컸는데 시집에서 밀어닥치는 농사일과 집안일이 버거웠고 호랑이 시어머니가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습니다. 울다 지쳐서 잠들었다가 새벽밥을 지으러 나가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 후 시댁에서 분가하고 농사일에서 벗어나면서 살기가 수월해졌지만 어쩐 일인지 마음은 편안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74년, 제 나이 서른여덟 살 무렵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했을 때였습니다. “거기는 찬송이 들리는 집이에요.” 소사리 큰길 가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더니 동네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소사리전도관이라는 곳이 바로 위에 있어서 새벽마다 부르는 찬송 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린다고 했습니다. 과연 새벽부터 찬송이 들리는데 왠지 듣기 좋았습니다. 그 전도관에 가게 된 것은 매일 집에 들르시던 전도관 권사님 때문이었습니다. 함대덕 권사님은 신앙촌 메리야스와 속치마를 판매하셨는데 시중에 파는 물건보다 훨씬 좋아서 애용하게 됐습니다. 신앙촌 간장도 맛있어서 제가 이웃들한테 다니며 대신 팔아 드리니 자연히 권사님이 저희 집에 자주 오셨습니다. 권사님이 전도관에 같이 가 보자 하셔도 “저는 신앙촌 물건만 팔아 드릴게요. 전도는 하지 마세요.” 하며 가지 않았는데, 일요일 아침 일찍 찾아오셨을 때 거절을 못 하고 따라나선 것이 전도관에 나간 계기였습니다. 가 보니 동네 사람들이 예배실 가득히 모여 있었고, 다들 반갑게 맞아 주는 것이 좋아서 새벽예배와 수요일예배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다섯 살짜리 작은아들을 데리고 수요일예배에 갔을 때였습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아…” 하는 찬송을 부르는데 처음 듣는 찬송가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서 한참 울고 나니 입고 있던 치마 한 폭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십수 년이 지나고 다 큰 아들이 “그때 엄마 치맛자락이 흥건하도록 우셨어요.” 하고 기억하는 걸 보면 많이 울기는 울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울고 나니 그동안 슬프고 괴로웠던 일들이 눈물에 씻겨 간 것처럼 속이 후련하고 편안해졌습니다. 그때까지 교인들 권유로 예배실에 앉아 있다 오는 정도였지만 그 후로 누가 뭐라지 않아도 예배에 안 빠지게 됐습니다. 교인들은 그런 저를 보고 은혜 받았다고 했는데 저는 그게 정말 은혜일까 궁금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후 확실하게 은혜를 체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신앙촌 센타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강하게 진동해 화장품 냄새와는 완전히 다르고 계속 맡고 싶고 기분이 좋아지는 향기 서울 동대문에 있는 신앙촌 센타에 갖가지 신앙촌 제품이 진열돼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함대덕 권사님을 도와 신앙촌 제품을 조금씩 판매하던 저는 센타에 처음 가 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강하게 진동해서 물건 사려던 것도 잊어버리고 왔다 갔다 하며 향기를 맡았는데, 건물 어딜 가나 좋은 향기가 맡아졌습니다. 신앙촌 물건을 사러 온 분들이 예쁜 원피스에 화장을 곱게 하고 있기에 화장품 냄새인가 했지만, 그분들 곁을 지나가 보니 그 향기는 화장품 냄새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아무리 맡아도 더 맡고 싶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향기였습니다. 그런데 한참 만에 물건을 구매해서 밖으로 나왔는데도 그 향기가 따라오는 것처럼 계속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교인들이 이야기하던 ‘향취 은혜’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세상에 없는 좋은 향기를 맡게 되는데 그것이 향취 은혜라고 했습니다. 제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습니다. 그 후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전농동전도관 예배 때 멀리 계신 하나님 얼굴이 크게 보이고 눈 마주치는 느낌 들어 그 순간 커다란 불덩어리가 가슴에 꽂히는 것처럼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왈칵 나 온몸을 태우는 것처럼 뜨거운 불이 사라지더니 말할 수 없이 시원하고 가벼워져 갑자기 배가 아파서 아무것도 못 먹고 있다가 서울 오류동 병원에 갔더니 복막염이라고 했습니다. 그날로 입원하고 치료를 받는데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전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생명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다고 하던 이야기가 떠올라 저는 생명물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전도사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하필 그때 소사리전도관에 생명물이 없어 몹시 안타까웠는데 대신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신앙촌 간장이 있어서 딸아이가 받아 왔습니다. 깨끗한 그릇에 물을 가득 담고 거기에 축복받은 간장을 타서 먹었습니다. 한 그릇을 다 먹고 나니 옆구리가 터지는 것처럼 아프던 통증이 차츰차츰 물러가는 것이었습니다. 간호사들도 저를 보고 방금 전까지 허리를 못 펴고 아파 하더니 이제 괜찮으시냐며 놀라워했습니다. 치료를 마치고 퇴원할 때 간호사가 하는 말이, 처음 왔을 때는 상태가 심각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빨리 낫게 될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퇴원하고 그 주 일요일에 서울 전농동전도관으로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시는 날이었는데 늦게 도착하니 3층까지 사람들이 가득 차서 제일 뒷자리에 간신히 앉았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시작되어 단상을 올려다 봤을 때 하나님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예배실이 워낙 넓고 단상이 3층에 있어서 저 멀리 계신데도 그 순간 하나님 얼굴이 크게 보이며 눈이 딱 마주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커다란 불덩어리가 가슴에 꽂히는 것처럼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활활 타는 불이 온몸을 태우는 것처럼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고 한참 지나자 그 불이 사라지더니 이번에는 온몸이 말할 수 없이 시원해졌습니다. 예배 마친 후 집에 올 때는 몸이 땅에 닿는지 안 닿는지 모를 정도로 가벼웠습니다. 언제 복막염을 앓아서 그렇게 아팠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40대였던 저는 몹시 약해서 몸져눕는 일이 많았습니다. 밥을 잘 못 먹고 약도 잘 넘어가지 않아서 늘 골골하며 지냈습니다. 오죽하면 살림을 맡아 하던 큰딸이 엄마가 안 아픈 게 소원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복막염이 깨끗이 나은 뒤로 병원과 약을 모르고 살 정도로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주신 축복이라 생각하며 늘 감사드립니다. 저는 건강해진 몸으로 신앙촌 소비조합을 시작했습니다. 어딜 가나 믿어 주고 반겨 주는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즐거웠고, 은혜를 받고 보니 더욱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울로 이사 온 후에도 소비조합을 계속했는데 보름에 한 번씩 소비조합 축복일이 있어 기장신앙촌에 내려가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1985년 무렵이었습니다. 안찰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두 손을 눈 위에 얹으시자 그리 아플 수 없어 손 떼시자 눈부터 가슴까지 시원해져 마음은 기쁘고 즐거워 연신 웃음이 나 그날은 눈안찰을 해 주시는 날로 안찰 받기 전 예배실에서 찬송을 부를 때였습니다. 눈을 감고 찬송하다가 갑자기 향기롭고 좋은 냄새가 머리 위에서 쏟아붓는 것처럼 진하게 맡아져서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모두 찬송에 열중하는 사람들뿐이고 그렇게 향기가 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고 저는 ‘은혜 주시는구나!’ 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찬송이 끝나고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한 명씩 안찰을 받았는데 너무 떨려서 계속 순서를 양보하다가 제일 끝으로 가게 됐습니다. 안찰 받으면 내가 죄지은 만큼 아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긴장되고 두려웠습니다. 그래도 씻어 주시는 기회이니 꼭 안찰을 받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제 차례가 됐을 때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손을 눈 위에 살짝 얹으시자 깊이 후벼 파는 것처럼 그리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소리 치고 싶은 것을 겨우겨우 참고 났더니 하나님께서 손을 떼셨는데 그 순간 통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부터 머리, 가슴까지 시원해졌습니다. 마음은 또 왜 그리 기쁘고 즐거운지 서울 집에 돌아와서도 연신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죄가 씻어지면 이렇게 좋구나!’ 싶었습니다. 그 전에도 하나님께서 죄를 씻어 주신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직접 안찰을 받고 보니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소비조합을 계속하던 저는 1998년 기장신앙촌에 입주하게 됐습니다. 휴게실에서 일하며 신앙촌 사람들과 축복일에 찾아오는 교인들을 위해 맛있는 간식 거리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때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 듯 휴게실에 찾아오던 아이들이 20년이 지나 어엿한 신앙촌 사원이 된 것을 볼 때면 마음이 흐뭇합니다. 하나님을 뵙고 지금까지 따라온 시간을 돌아보니 그 고마움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까 싶습니다. 눈물짓던 슬픈 마음을 다 씻어 주셔서 기쁘고 감사하게 살아왔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고맙고 감사함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바르게 갈 수 있을까 하는 그 생각뿐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맑고 깨끗하게 살아서 그 영광된 날에 기쁨으로 뵈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신앙체험기 특집

천부교회를 찾아서

뉴스
일본에게 노예 무역과 잔인한 폭력을 교사(敎唆)하다 … 반인류 범죄의 뿌리를 찾아서

■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톨릭 금지령을 내리다 지금부터 400여 년 전인 1612년, 일본의 쇼군(しょうぐん, 将軍)으로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 금지령’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에 가톨릭이 광범위하게 퍼져 신도가 60만 명에 이르는 상황에서 전격적으로 가톨릭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톨릭을 금지한 첫 번째 이유는 가톨릭이 순교자를 찬미하는 행태에 대한 강한 반발 내지 혐오 때문이었다. ‘가톨릭 금지령’ 제1조는 ‘가톨릭은 죽음을 두려워 않는다. 몸을 베고 피를 내어 죽는 것을 구원으로 여긴다.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자료1,2> 그전까지 일본인은 가톨릭 신도를 뜻하는 ‘크리스천’을 吉利支丹(기리시탄)이라고 표기했는데, 이에야스가 발표한 가톨릭 금지령에는 한자를 바꾸어 切支丹(기리시탄)이라고 했다. 한자대로 보면, 몸을 베어(切) 붉은(丹) 피를 내는 것으로 유지(支)되는 사람이 가톨릭 신도라는 뜻이다. ■ 순교자들의 죽음은 가톨릭 신앙의 핵심 이런 표현은 그때까지 1500년 넘게 이어진 가톨릭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었다. 가톨릭의 기초를 세운 교부 테르툴리아누스(155년경~ 240년경)가 “순교자들의 피는 가톨릭 신도의 씨앗(sanguis martyrum semen christianorum)”이라고 천명할 정도로, 죽음으로 흘린 피를 숭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가톨릭 신앙의 중요한 토대이기 때문이다. <자료3> 가톨릭 금지령과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발표한 ‘가톨릭 선교사 추방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가톨릭 선교사는 의가 없고 선을 파괴한다. 순교자를 보면 기뻐하며 달려가 절을 한다. 이것을 종교의 본질이라 여기는데 사법(邪法 = 사교)이 아니고 무엇인가.’(伴天連追放之文 … 残義損善、見有刑人、載欣載奔、自拝自礼、以是爲宗之本懐、非邪法何哉) ■ 일본 민중이 바라본 ‘기리시탄(鬼利支丹)’ 일본 정부가 죽음을 지향하는 가톨릭의 본질을 사악한 종교라고 했다면, 일본 민중은 가톨릭의 행태를 보고 귀신의 종교라고 여겼다. 일례로 1614년 가톨릭 선교사와 신도들이 나가사키에서 행진을 벌였는데, 이 행진은 십자가 형틀에 묶인 예수상을 선두에 세우고 그 뒤를 따르면서 각자 자신의 가슴을 돌로 쳐서 피를 흘리거나 갈라진 대나무로 등을 때리는 등 각양각색의 자해를 보여 주었다. 이 섬뜩한 행진의 의미는 순교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일본 민중은 희한한 단체가 가톨릭 선교사의 명령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순교라는 이름으로 죽음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귀신의 행렬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위를 두고 ‘鬼利支丹(기리시탄) 행렬’이라고 했는데 한자대로 보면 ‘귀신(鬼)을 이용해(利) 붉은(丹) 피를 내는 것으로 유지(支)되는 사람들의 행렬’이라는 뜻이었다. 일본 민중은 가톨릭 신도들의 순교 행진을 백귀야행(百鬼夜行)처럼 보았고, 죽음을 지향하고 찬양하는 행위에 불쾌감을 느꼈다.(야먀모토 시치에이,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페이퍼로드, 2014) ■ 노예 무역에 대한 일본인의 반감 이 같은 순교에 대한 혐오감 못지않게 일본인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가톨릭의 행태가 또 있었는데 바로 노예 무역이었다. 당시 일본에도 노예는 있었지만 사람을 납치하거나 인신매매해서 대량으로 운송하는 소위 ‘노예 무역’은 없었다. 그러나 가톨릭 세계에서는 1455년 로마 가톨릭 교황 니콜라오 5세가 교서(로마누스 폰티펙스)를 통해 노예 매매를 공인해 주었기 때문에,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이 일본과 교역하며 일본인을 노예로 매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위였다.<자료4> 포르투갈 선박의 일본 입항과 거래는 반드시 가톨릭 예수회의 승인 아래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예수회가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도록 포르투갈 국왕의 허가를 받아 냈기 때문이었다. 가톨릭 예수회의 승인 아래 노예 매매가 이루어지자 노예 매매에 대한 일본인의 반감은 그대로 가톨릭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16세기 일본 정부의 문서 비서관 격이었던 오무라 유코(?~1596)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자료5> “포르투갈 상인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일본인 수백 명을 사들여 수족을 쇠사슬로 묶어 배 밑바닥에 처넣었고, 일본인은 지옥 같은 학대를 받았다. <자료6> 가톨릭 선교사들은 많은 보물을 산처럼 쌓고 종교 번창의 계략을 세웠다. 그것을 본 일본인들이 그대로 배워서 아이를 팔고 아내를 판다. 이 종교를 허용한다면 일본은 머지않아 타락하고 말 것이다.”(야먀모토 시치에이,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페이퍼로드, 2014) ■ 노예 무역에 앞장선 기리시탄 다이묘들 일본의 지식인이었던 오무라 유코는 노예의 참상에 충격을 받았지만, 포르투갈 상인과 가톨릭 선교사들은 노예를 학대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들에게 노예 무역은 비인간적인 행태가 아니라 천문학적인 이익을 보장하는 유망한 사업일 뿐이었다. 일본의 노예 무역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일본의 지배 계층이 총과 화약이라는 최첨단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노예 매매에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는 다이묘(だいみょう, 大名)들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가톨릭을 믿는 기리시탄 다이묘들이었다. 일본은 노예 무역 초기의 거부감과 지식인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기리시탄 다이묘를 필두로 하여 노예 무역 우등생으로 발돋움했다. 일본의 자료를 보면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전쟁에 필요한 화약을 수입하기 위해 자기 영지의 일본 여자들을 짐승처럼 묶어 팔아 치웠다. … 유럽은 가는 곳마다 일본 여성이 눈에 띄었고, 일본인 노예가 유럽 전역을 통틀어 50만 명이라고 한다. 또 포르투갈 가톨릭 선교사들이 일본의 젊은 처녀들을 인도와 아프리카로 팔아 치웠다.”(도쿠도미 소호, 『근세일본국민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다이묘들은 왜 노예를 팔면서까지 총과 화약을 수입했을까. 당시 일본은 총과 화약을 자체 생산할 수 있었으나 대규모 전쟁을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많은 무기가 필요했고, 노예 매매로 대량 무기를 확보했던 것이다. 무기를 손에 쥔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일본은 이미 노예 무역을 통해 일확천금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조선 사람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 조선 사람을 유린한 노예 사냥 조선인 노예의 규모는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조선인 노예 가격이 형편없는 헐값이었던 것을 보면 조선인 노예 숫자가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프리카 노예 가격이 170스쿠도(scudo·포르투갈 옛 화폐단위), 페루 노예가 400스쿠도인 것에 반해 조선인 노예는 2.4스쿠도에 불과했다.(카를레티, 『동방여행기』) 조선에서 노예 매매와 납치를 목격한 일본 종군 승려 게이넨(慶念)은 이렇게 적었다. “노예상들은 조선인을 새끼로 목을 묶은 후 여럿을 줄줄이 옭아매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 부모는 자식을 찾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울부짖는 그 광경은 ‘지옥도’에서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비참한 것이었다. 오늘도 조선 사람의 아이를 빼앗아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한 병사는 손을 모아 애원하는 조선인 부모를 그 자리에서 칼로 베어 버리고 아이는 끌고 갔다.” 1990년대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가미가토 겐이치 교수는 “일본 상인들은 포르투갈인이 아프리카에서 노예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행위를 배워 조선인 포로를 노예로 매매했다.”고 밝힌 바 있다. 노예 무역을 일본에 가르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서 노예 사냥으로 악명 높았고, 그 반인류적 범죄가 아프리카를 넘어 아시아로,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까지 전파된 셈이었다. 그로부터 140여 년 전, 노예 무역을 허가한 가톨릭 교황의 교서가 전지구적인 악영향을 미친 것은 역사적 사실로 특기할 만하다. ■ 조선에서 저지른 또 다른 만행, ‘코 베기’ 노예 사냥과 더불어 일본이 조선에서 저지른 만행이 있는데, 바로 ‘코 베기’였다. 일본에서 전쟁을 지휘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에게 “조선인의 목 대신 코를 베서 보내라. 병졸 한 명에 코 한 되씩 소금에 절여 보내라.” (강항, 『간양록(看羊錄)』, 1656)는 명령서를 내렸고, 히데요시가 잘린 코를 전공으로 기록하고 감사장을 보내 주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조선인의 코를 자르는 데 혈안이 되었다.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도 이와 똑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1502년, 그리스도 기사단의 일원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던 바스코 다 가마도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적군 800명의 코를 잘라 버렸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바스코 다 가마는 ‘코 베기’ 외에도 공통점이 많았다. 바스코 다 가마는 가톨릭 전파의 기치를 높이 올리고 인도를 정복하기 위해 항해에 나선 바다의 십자군이었고, 마찬가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중국(명나라)을 정복해 가톨릭 국가를 만들겠다고 천명하며 임진왜란을 일으킨 인물이었다.<자료7> 바스코 다 가마가 무자비한 폭력과 살육을 자행해 그의 함선이 정박하는 해안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던 것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코 베기 명령을 내린 후 조선의 들판은 코가 잘린 시체로 뒤덮였다. ■ 기리시탄 다이묘, 가장 잔혹한 전공을 올리다 1597년 전라도 남원성 전투에서 조선인 4,000명을 모조리 학살한 일본군은 앞다퉈 승전 보고서를 작성하고 조선인의 코를 소금에 절여 일본에 보냈다.<자료8,9,10,11> 당시 이 전투에 참전한 병사 오우가우지 히데모도의 기록(朝鮮物語)에 의하면 일본군 22개 부대가 총 3,726개의 코를 잘랐는데, 그중에서 기리시탄 다이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가 879개의 코를 잘라 가장 잔혹하고도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항상 몸에 십자가를 지니고 다녔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후에 그 시체를 가톨릭이 인계하고 전 세계 예수회 교회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미사가 열렸으며, 교황청은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 놓고 있다.(도리즈 료지, 『재검증 고니시 유키나가』, / 조중화, 『다시쓰는 임진왜란사』, 학민사, 1996.) ■ 일본군 정신에 새겨진 정복 야욕 일본군은 살아 있든 죽었든 상관없이 조선 사람만 보면 코를 베었으므로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난 후까지 조선 거리에 코 없는 사람이 많았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함께 끝이 났지만 그들 정신에 새겨진 정복 야욕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정복의 망령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300년 뒤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으로 대두되었다. 정한론자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추종하고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으로 달성하지 못했던 ‘조선 정복의 위업’을 완성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그들의 야욕대로 조선의 국권을 침탈당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코를 베는 행위처럼 야만적인 폭력을 배운 것보다 정복과 침탈의 정신을 학습한 것이 더욱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 인류에 대한 범죄, 그 뿌리는… 현재 로마 가톨릭 교황 프란치스코가 ‘인신매매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며 근절할 것을 전 세계에 호소하고 나섰다. 다른 국가들이 범죄를 뿌리 뽑는 선한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 것이다. 그러나 그 집단이 전파한 반인류 범죄는 이미 뿌리를 깊게 내린 지 오래다. 헐값에 인신매매 당한 조선인들은 십자가 깃발을 높이 세운 포르투갈 선박에 끌려가 짐승만도 못한 노예가 되었고, 독실한 기리시탄 다이묘의 칼에 코가 잘린 조선인들은 생지옥 같은 전쟁의 참상을 뼈에 새겼다. 그러나 반인류 범죄보다 더욱 섬뜩한 것은 자신의 죄와 악을 모르는 그 집단의 지적 장애일지도 모른다. 극악한 전범(戰犯)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악의 뿌리가 타인에게 선한 행동을 촉구한다면 그것은 자기분열적인 망상일까, 아니면 치밀하게 계산된 위선일까.

하나님 말씀 경전<br />
하나님 말씀 경전
신앙신보 속 천부교 역사
“전도관 신앙 운동의 깊이에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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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전쟁의 기술과 야욕은 어디서 오는가? 임진왜란을 촉발한 숨은 범죄 집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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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21대 국회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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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춘추

종교의 진화(進化)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수백만이 은혜입은 천막집회 한강집회편(7.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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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사람들

신앙촌에 오니 기분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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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민주 씨(제주 교회 대4, 맨 왼쪽)는 최윤정 양(초5)을 1년 전에 전도하였고 그 이후로 꾸준히 축복일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윤정이는 밝고 유쾌한 성격에 교회 동생들도 잘 챙기는 따듯한 아이예요”라고 소개해 주었다. 40회 이슬성신절을 맞아 윤정 양이 전도를 했다. 윤정 양은 “이번에 어머니와 동생, 고모까지 함께 신앙촌 와서 기뻐요”라고 말하며 “엄마도 신앙촌에 오셔서 정말 즐거우셨대요”라고 기쁜 목소리로 얘기했다.

신앙촌에서 성장해 가는 딸에게

신앙촌에서 성장해 가는 딸에게

식품 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한주연 양의 가족들이 이슬성신절을 맞아 3대 모녀를 주축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이번에 이슬성신절에 처음 참석한 아버지께서는 주연 양이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좋았습니다’라고 짧지만 내심 기특함이 묻어있는 말을 전했다.

은혜의 기쁨, 나도 알고파요

은혜의 기쁨, 나도 알고파요

최수빈, 다빈양 (울산 교회 고3, 고2 맨 오른쪽)은 할머니를 처음 모시고 참석했다. 최다빈 양은 합창자로 가족의 축하를 받았다. 언니 수빈 양은 무대에 서지 못했는데 “동생이 어른들과 합창 연습을 하니 예전과는 또 다른 기쁨이 있다고 했어요. 저는 그게 무엇인지 몰라서 아쉬운 마음이 있었는데, 합창 공연을 보고 왜인지 울컥하더라고요. 다음에는 꼭 해서 알아봐야겠어요”라고 했다.

“언니, 나 천부교회에 잘 온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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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희 씨(김천 교회 새 교인, 가운데)는 한창영 씨(오른쪽)에게 “믿기만 하면 구원 주는 곳은 교회가 아니다 네가 와서 어떤 곳인지 보고 듣고 판단해 봐라”라고 말했다. 한창영 씨는 “처음에는 ̒언니가 왜 이 교회에 오자고 했을까?̓ 생각했는데, 경전 말씀과 이슬성신을 체험한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니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언니에게 ̒나 잘 온 거 같아’라고 했어요” 하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또 이슬성신절 예배에 참석해 음악 순서 전에 방영된 영상을 보고 “은혜 내리는 모습이 정말 신기하게 느껴졌어요”라는 소감을 말했다.

주니어

이슬성신절을 준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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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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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의 ‘찬송학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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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뛰빵빵 미로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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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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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위협 ‘코로나 변종’ , 치료제와 백신 개발에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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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닥 염기서열로 된 ‘RNA 유전자’ 바이러스는 증식 과정에서 수많은 변종이 빠른 주기로 나타난다. 설계도가 엉클어져 불량이 나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바이러스가 생존을 위해 발 빠르게 변신하는 경우도 있다. 사스, 메르스,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 에볼라, 스페인독감, 인플루엔자 등이 모두 RNA 바이러스인데 이들보다 더 빠르고 변칙적으로 변종을 만들어내는 게 바로 코로나19다. ▷ 요즘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난해 말 중국 우한에서 처음 등장했던 코로나19와는 크게 다르다. 코로나19는 유전자 염기서열 차이에 따라 크게 S, V, L, G, GR, GH형으로 분류된다. L은 우한에서 처음 등장한 원형이고 S, V는 약간 변이된 수준이다. G계열 세 유형은 중국에서 미국·유럽·아프리카 등으로 건너간 뒤 크게 변이된 것인데 70%가량이 GH형이다. 한국도 4월 경북 예천의 성지순례단 집단 감염, 5월 초 이태원 클럽 이후 최근 광주와 대전의 집단감염까지 GH형이 주종을 이룬다. ▷ 중국 연구팀이 최근 완치자 41명의 혈액에서 항체를 추출해 변종 코로나19에 투여한 결과 3명의 항체는 바이러스 무력화에 실패하고 한 항체의 대응력은 거의 ‘0’으로 나타났다. 완치자 혈청이 약발이 듣지 않을 정도로 변이가 이뤄진 이 바이러스가 바로 GH형이다. GH형은 세포 침투력이 2배 이상 높고, 전파력은 10배 이상 늘었다. 한국도 GH형이 많은 지역은 확진자 한 사람이 전파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재생산지수(R0)’가 1.34로 전국 평균 1.06보다 월등히 높았다. ▷ 지금 나타나는 변이는 자가 복제 과정상의 오류에 의한 것이어서 변이 정도가 제한적이지만 코로나19가 다른 코로나와의 ‘재조합’까지 이뤄지면 완전히 다른 변종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이혁민 연세대 의대 교수). 현재도 변종 코로나19는 세포를 뚫고 들어가는 ‘스파이크 단백질’이 변이 전보다 4, 5배 많다. 공성전(攻城戰)에서 성에 걸치는 갈고리가 많고 끝이 뾰족해 침투가 쉬워진 격이다. 무증상 감염이라는 ‘스텔스 기능’에 이어 조준 사격할 ‘타깃’마저 수시로 변신해 치료제와 백신 개발에서 고전이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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