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같은 은혜로 황무지 같은 마음이 백합화같이 피어나는 성신의 역사

이슬 같은 은혜로 황무지 같은 마음이 백합화같이 피어나는 성신의 역사

이슬성신절을 맞아 신앙촌 사진관에는 초창기 천막집회 때 하나님 사진이 전시되었다. 하나님께서는 1955년 전국 순회 부흥 집회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서울 남산 집회를 필두로 전국 대도시에서 열린 집회에 1년 동안 연인원 5백만 명 이상이 참석했다. 집회는 한 번에 4~5만 명 이상의 인원이 모여 평균 5일 이상 연속으로 개최되었다. 집회 참석자들은 국회의원과 장관부터 기성교회 목사와 교인들, 불치병이 낫는다는 소문을 듣고 온 환자들까지 다양했다. 초대 상공부 장관을 지냈던 임영신 장관은 집회에 참석하고 이렇게 발표하기도 했다. “남산 집회 때 일입니다. 기도를 드리고 나자 가슴속으로 시원하고 향기로운 바람이 스며들었습니다. 그것은 세계 최고급 향수보다 훨씬 향기롭고 심령 속 깊이 스며드는 냄새였습니다. 제 마음은 모든 질심을 털어 버리고 한없이 기쁘기만 했습니다.”

이슬같은 성신이 내리는 날에 감사한 마음이 모여

이슬같은 성신이 내리는 날에 감사한 마음이 모여

제40회 이슬성신절을 맞아 맛길 전시실에서 ‘은혜의 기쁨’이라는 주제로 사진전이 열렸다. ‘하나님 주시는 은혜를 받으면 가슴 가득 하늘의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의 기쁨’입니다. 195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천부교의 역사는 ‘은혜의 기쁨’과 함께해왔습니다. 이슬은혜가 촬영된 사진과 그 순간을 함께한 사람들의 체험기를 읽으며 그 현장에 와 있는 듯 은혜의 기쁨이 생생히 전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글귀가 방문자들을 안내한다. 가난한 집을 심방하시는 하나님 모습을 보고 참된 사랑을 느꼈다는 체험기 앞에서 지영란 사장님을 만났다. “어머니는 일하러 가시고 아이들만 있는 집에 하나님께서 가셔서 기도하신 후 금일봉을 두고 나오셨다는 이야기가 우리 집입니다. 그때 그 아이가 저(3살)와 동생(2살)이고요. 자라면서 그 이야기를 어머니께 많이 들었어요. 하나님께서 큰 키를 숙이시며 누추한 방에 들어오셔서 축복해주시고 가셨다고 해요. 다시 생각해도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라고 하시며 마음을 전해주었다. 제2운동장 집회는 1955년 10월 25일부터 11월 1일까지 일주일간 개최되어 연인원 100만의 인파가 운집했다. 체험기에 집회에 참석해 철야하는 동안 돌아가며 은혜받은 이야기를 하면 백합꽃처럼 진한 향기가 났는데 그 향기가 밤새도록 진동해 기분이 좋아 잠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황지우 관장의 어머니도 그 현장에 참석했다. 사진 속에 짙은 한복을 입고 앉아 계시는 분이다. “제가 동생(황정분, 소비조합)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 어머니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 했어요. 어머니가 저를 교회에 데려가 주셨고. 그 후 제가 동생을 전도해서 함께 이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관장님과 학생들, 엄마와 딸 등 다양한 사람이 전시를 찾아 은혜의 기쁨을 함께하는 모습이었다.

천부교회 학생회 교육, 온라인과 병행하며 효과 높여

천부교회 학생회 교육, 온라인과 병행하며 효과 높여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점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마무리하고 6일부터는 일상과 방역의 조화를 위해 생활 속 거리두기를 이행한다고 발표했다. 전국의 천부교 학생회는 이와 같은 생활 속 거리 두기 지침을 준수하는 한편, 어린이와 학생들을 위한 온라인 교육을 통해 교육 효과를 높이고 있다. 2월 초부터 천부교 측은 입구 체온측정, 손 소독제 비치, 2m 좌석 간격 유지, 참석자 동선 체크 등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며 예배를 드려왔다. 코로나 사태로 촉발된 사회적 거리두기는 천부교회의 교육 방식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지금까지 교육 방식이 교회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하는 대면 교육이 주를 이뤘다면 코로나 이후에는 온라인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교육 받는 학생들이 온라인 상의 활동에 익숙한 세대들인 만큼 온라인을 통한 대화와 피드백이 활발히 이루어져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온라인 교육은 카카오 라이브톡으로 진행되며 지역별로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1부 예배에 이어 2부는 하나님 말씀퀴즈, 3부는 다양한 비대면 놀이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된다. 온라인예배에 참여한 김민경 양(중1, 목동교회)은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새로웠어요. 또 요즘 유행하는 수란 도시락 만들기, ASMR을 친구들과 채팅하면서 같이 해볼 수 있는 것이 재미있어요”라고 했다.

제40회 이슬성신절 맞이해

제40회 이슬성신절 맞이해

1981년에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지는 천부교 절기행사 올해는 제40회 이슬성신절을 맞이하는 해이다. 이슬성신절은 천부교 주요 절기행사로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내려주시는 이슬성신 은혜에 감사 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1981년 1월 3일에 제1회 이슬성신절이 제정되었으며 이후 이슬성신이 가장 많이 내렸다는 때가 초창기 5월 하순이었다는 말씀에 따라 1983년 3회부터 5월로 변경되었다. 당시 제1회 이슬성신절 행사를 다룬 신앙신보 1981년 1월 5일자 신문에는 “기장 신앙촌, 이슬성신절 행사 화려”라는 기사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제1회 이슬성신절 축하 음악 대예배가 지난 1월 3일 기장신앙촌 대예배실에서 국내외 성도들이 운집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날 설교에서 이슬성신의 귀중함과 감람나무의 존재를 자세히 밝히셨다.” 또한 이 신문에는 제1회 이슬성신절을 한 주 앞두고 각 지역별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이슬성신절 축하 예배를 드렸다는 기사도 함께 실렸다. 초창기부터 하나님께서는 썩을 것을 썩지 않게 하는 ‘이슬성신’으로만 구원 얻을 수 있음을 깨우쳐 주시며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는 존재가 감람나무임을 증거하셨다. 1980년에는 예수의 정체를 벗기시며 성경의 오류를 지적하셨고, 이후 1981년 제1회 이슬성신절에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신 것이다. 1회 이슬성신절 예배에 참석했던 김순덕 권사(덕소교회)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 날 하나님께서는 ‘오늘 제일 기쁜날이야’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동안 저희들에게 은혜를 깨닫게 해주시며 한 단계 한 단계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했다. 1부 예배가 끝난 후에는 2부 음악 순서가 펼쳐졌다. 이날 음악 경연대회에는 부산합창단, 전국부인회 합창단, 덕소와 소사 소비조합 합창단, 청주 합창단, 서울교역자 합창단, 대학생연합회 합창단, 부천과 인천 합창단이 참가하여 청중들의 열띤 박수와 환호성을 자아냈다고 한다. 이슬성신절 음악 순서는 1981년 1회부터 1987년 7회까지는 음악 경연대회로 예선을 거쳐 출연팀을 선정하는 등 경쟁방식으로 진행되다가 1988년 8회부터는 축하 음악회로 변경되어 오케스트라 연주와 합창 등으로 매년 기장신앙촌에서 개최되고 있다. 이슬성신절 예배 때마다 음악 순서가 함께하는 의미에 대해 천부교 부흥협회 음악 관계자는 “합창은 하나님 은혜를 찬송하는 시간이자 귀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또한 천부교인들은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전도되기를 바라며 음악 순서를 정성껏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러한 신앙촌 음악의 전통은 오늘까지도 이어져 예배와 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신앙촌에서는 이슬성신절, 추수감사절 등 절기 예배뿐만 아니라 송년 음악회, 신년 음악회, 새교인 합창대회, 음악캠프 등 각종 음악 행사가 자주 열린다. 또한 신앙촌 사원들로 구성된 시온오케스트라의 활동도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제40회 이슬성신절  축하 음악 순서는 중· 고등학생부터 여청, 입사생, 소비조합원 중에서 선발된 교인들로 구성한 여성 합창단이 시온오케스트라와 함께 무대를 장식할 예정이다.

메르스 이후 5년 만에 찾아온 바이러스…우리는 얼마나 진화했나

메르스 이후 5년 만에 찾아온 바이러스…우리는 얼마나 진화했나

새해 벽두부터 시작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는 아직도 진정되지 않고 있다. 바이러스의 전파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5년 전 메르스 사태를 겪었음에도 정부와 관계 기관의 대응 수준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메르스가 종식된 직후인 2016년 1월 14일 감사원은 질병관리본부 등 18개 정부 기관을 대상으로 벌인 감사보고서를 발간했다. 메르스 예방 및 대응 실태를 감사한 결과는 메르스가 전형적인 인재(人災)라는 사실이었다. 초기에 메르스 대응 지침을 잘못 제정하는 등 사전 대비에 소홀했고, 최초 환자에 대한 역학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초동 대응이 부실했으며,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확산 방지에 실패했다는 것이 감사 결과의 요지였다. 이런 참사의 재연을 막기 위해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가 6개월 이상의 작업을 거쳐 방대한 ‘메르스 백서’를 내놨다. 백서에서 제시한 방안은 질병관리본부가 강력한 컨트롤타워가 돼야 하고, 역학조사관을 충원해야 하며 감염병 전문 병원을 지정·운영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새로운 침입자가 나타난 지금, 5년 전에 제시한 바이러스 대응 방안은 얼마나 현실화되었을까. 먼저 국가 방역의 사령탑인 질병관리본부 센터장은 감염병 전문가가 아닌 행정직 공무원으로 임명되었을 뿐 아니라 감염병이나 백신 전문가가 담당해야 할 예방접종 분야 직책도 마찬가지였다. 또 신종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국립보건 연구원 원장 자리는 9개월째 공석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감염병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는 신종 바이러스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미리 방역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이것을 책임진 연구원의 수장이 아직도 충원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방역망의 허점은 이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여실히 드러났다. 의심 환자를 격리하는 조치가 지체되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지역 사회를 돌아다니며 2차, 3차 감염을 일으킨 것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려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증상 감염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사전 방역망에서 의심 환자를 걸러 내는 것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다. 메르스라는 국가적인 재난을 겪고 난 후에도 관계 기관에서 제시한 방안들이 공허한 탁상공론에 그치고 만다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욱 강력한 감염병이 언제든지 우리 사회를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미지의 바이러스는 약 150만개로 추산되고 있다. 백신을 개발하는 데는 천문학적인 비용과 4~5년이라는 시간이 걸리지만 바이러스는 그보다 훨씬 더 빨리 진화하기 때문에 결국은 어떤 백신도 무력화시킬 수 있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국가와 기관이 예방 대책을 세우고 신종 바이러스를 연구하며 방역을 강화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이다.

새롭게 출발하는 모두의 앞날을 응원합니다

새롭게 출발하는 모두의 앞날을 응원합니다

신앙촌에서 2월 20일 시온식품여자고등학교(이하 식품여고)와 대학부 졸업식이 개최되었다. 올해 졸업식은 코로나 19 확산 여파로 예년과는 달리 외부인사, 귀빈을 초대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치러졌다. 졸업식 참석자들에게는 손 세정제 사용과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었고, 안전상의 이유로 함께 하지 못한 학부모들에게는 촬영된 졸업식 영상을 보냈다. 행사에서는 졸업장과 상장 수여에 이어 졸업생 대표 김수연 양의 졸업이야기 낭송이 있었다. 김수연 양은 “지금까지 받았던 많은 사랑을 베풀 줄 아는 큰 그릇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배우고 익힘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끝으로 졸업생들이 만든 졸업 기념 UCC가 방영되었다. 졸업생들에게는 최신형 노트북이 선물로 증정되었다. 김선희 교장은 “신앙촌의 든든한 구성원으로서 희망찬 미래를 앞둔 졸업생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냅니다”라고 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번 졸업생의 대다수가 ‘천부교 어린이 리더스쿨 1기’ 출신이라는 것이다. 신앙촌은 전교인을 대상으로 다양한 교육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중 어린이 인성교육 프로그램으로 개설된 것이 리더스쿨 1기이다. 이를 이수하고 신앙촌 기업과 연계된 식품여고를 졸업한 졸업생들은 ‘정직과 신용, 최고의 품질’을 핵심가치로 하는 신앙촌 기업문화에 최적화된 맞춤형 인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앙촌 관계자 측은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인성과 실력을 고루 갖춘 전문 인재 양성에 목표를 두고 있다”며 “앞으로도 교인들과 신앙촌 구성원들을 위한 역량 강화교육을 꾸준히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식품여고 졸업생들은 대학 진학과 함께 2월 말부터 신앙촌 기업 내 다양한 부서에 지원하여 인턴제도와 수습 기간을 거쳐 정직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코로나 맞서는 ‘시민들의 힘’

소비조합에 격려의 메세지…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 되자”

신앙의 목표 세우고 결실 맺는 한해 되자

실천하고 노력하고 인내함으로써 알찬 열매 맺을 수 있음을 깊이 새겨야

총회 소집 공고 –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

총회 소집 공고 – 한국천부교신도연합회

교인 등록 추가 공고 –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

신도 등록 추가 공고- 한국천부교신도연합회

신앙체험기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하실 때 기쁜 마음은 표현할 길이 없어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하실 때 기쁜 마음은 표현할 길이 없어

저는 태어났을 때 몹시 병약해서 소아과 의사이신 아버지께서도 살 가망이 없을 것 같다고 낙담할 정도였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가졌을 때 폐병을 앓으셨기 때문인지 저는 폐와 기관지가 약하고 해수병을 달고 살아서 천방지축 뛰어 놀 나이에도 언덕을 오를 때 숨이 차서 한참 쉬었다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때 살았던 서울 흑석동 2층 집은 연탄 보일러였는데 연탄가스를 조금만 맡아도 침대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니 여동생은 아침마다 “엄마! 언니가 또 죽었어!” 하고 소리쳤습니다. 중학교 진학할 때 아버지가 건강이 더 나빠지면 공부도 못하니 1년을 쉬라 하셨지만 저는 쓰러져도 다니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입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이던 1958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설교하시는 하나님 바라보고 있는데  강대상을 탕탕 치시자 불덩이가 나와 가슴팍에 떨어져 뜨거워 견딜 수 없어 뜨거움 가시자 목으로 단물이 넘어와  당시 저는 부모님을 따라 원효로제단을 거쳐 마포 이만제단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원효로제단과 이만제단은 박태선 장로님께서 세우신 교회였습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 말씀하시는 박태선 장로님을 바라보고 있는데, 강대상을 탕탕 치시는 순간 거기서 커다란 불덩어리가 나와 제 가슴에 푹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뜨거운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뜨거운 느낌이 가시고 나자 입 안에 달콤한 물이 생기더니 꿀꺽꿀꺽 목으로 넘어왔고, 이튿날 학교 가서도 목으로 자꾸 달콤한 물이 넘어와서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인 분들 말씀이, 예배 시간에 불이 떨어지고 뜨거움을 느낀 것은 불성신을 받은 것이고 달콤한 물이 넘어온 것은 생수가 통하는 체험이라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몸이 좋아지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학교 계단을 오를 때 웬일인지 숨이 차지 않아서 다른 아이들처럼 한달음에 올라가면서 ‘내가 이럴 수도 있구나!’ 하며 놀랐습니다. 키만 멀대같이 크고 볼품없이 말랐던 몸에 시간이 갈수록 포동포동 살이 올랐고, 어머니는 정말 예뻐졌다며 네가 은혜 받아서 사람이 됐다고 좋아하셨습니다. 저보다 먼저 아버지도 전도관에 다니면서 건강을 찾으셨습니다. 이북에서 철도병원에 근무했던 아버지는 왕진 가방 하나만 들고 월남해 서울에 병원을 열기까지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일에 파묻혀 사시느라 아버지 건강이 안 좋아지신다며 어머니가 크게 걱정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열 한살이던 1955년이었는데, 마침 박태선 장로님 집회에 가면 불치병이 낫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가 보신 것이 저희 식구가 전도관에 다니게 된 계기였습니다. 아버지는 원효로전도관에 다니며 박 장로님께 안찰을 자주 받으셨습니다. 학자 타입의 아버지는 늘 온화한 표정으로 말씀이 없으셨는데 안찰 받고 오신 날은 특히 기분이 좋아 보이셨습니다. 안찰 받은 후로 하루 종일 병원에서 일하고 와서 몇 시간씩 책을 읽어도 몸이 가볍고 좋다며 기뻐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일에 파묻혀 사느라 건강이 안 좋아지셨는데 하나님께 안찰 받고 하루 종일 병원에서 일하고 와서  오래 책을 읽어도 몸이 가볍다고 기뻐하셔 부모님이 매일 새벽예배 드리며 열심히 전도관에 나가시니 5남매 저희 형제들은 자연히 따라 다녔습니다. 새벽 어스름 한강 다리를 건널 때 이만제단에서 울리는 음악 종소리가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은지 천국에서 울리는 것 같았고, 예배 시간 어른들 틈에서 손뼉 치며 찬송 부를 때는 가사를 잘 모르면서도 마냥 신나고 재미있었습니다. 일요일에는 주일학교 예배에 박태선 장로님께서 직접 나오셔서 설교 말씀을 해 주셨는데, 무슨 말씀을 들은 기억보다는 그때 분위기가 생생히 떠오릅니다. 단상을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운 아이들과 사랑이 넘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시던 하나님의 모습은 사진으로 찍어둔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이만제단 2층 단상 옆 학생 성가대 석에서 아래층 예배실을 내려다보는데 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것이 보여서 손바닥을 펼쳐 보면 손은 전혀 젖지 않아 예배 시간에 폭포수 같은 물줄기가 사람들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을 보기도 해 그 후 고등학교 시절 이만제단에서 학생 성가대로 활동하면서 여러 가지 체험을 했습니다. 성가대 석은 2층 단상 옆에 있었기 때문에 아래층 예배실을 내려다볼 수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이슬비가 보슬보슬 내려서 손바닥을 펼쳐 받아 보면 손은 전혀 젖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이슬비가 내리는 것이 보였고, 폭포수 같은 물줄기가 사람들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 폭포수 같은 성신은 이만제단 개관식 때 사진에 찍혔던 이슬성신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만 명이 앉을 수 있어서 이만제단이라고 불렸던 예배실은 매 주일 꽉꽉 들어차서 발 하나 넣고 옮길 자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 사람씩 머리 위에 안수하시며 지나가실 때 보면 날아가시는 것처럼 순식간이었습니다. 옆 사람끼리 무릎이 닿도록 앉아 있는 사이를 지나가자면 사람들의 발이나 무릎을 밟으실 만한데 전혀 거치는 것 없이 훌훌 날아가시는 듯한 모습에 눈을 못 떼고 바라봤습니다. 하루는 안수하시는 하나님을 한참 바라보다 어느 순간 예배실에 뽀얀 안개 같은 것이 점점 짙어지는 것을 봤습니다. 나중에는 옆자리 성가대원도 보일락 말락 할 정도로 예배실이 안개에 폭 싸인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집회에서 안개처럼 뽀얗게 은혜가 내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제가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이슬비처럼 은혜가 내릴 때, 하나님께 안수를 받을 때, 뽀얀 안개 같은 성신에 싸여 있을 때 그 기쁘고 즐거운 마음은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안수하시는 하나님을 보는데 예배실에 점점 뽀얀 안개가 생기더니 옆자리 사람이 안보일 만큼 짙어져 마음은 기쁘고 즐거워 표현할 길이 없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약회사에서 근무할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셔서 삼촌이 계시는 적십자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병명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서 다시 검사하자 백혈병이라고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병명조차 생소해서 얼마나 심각한 병인지 몰랐는데, 건강하고 활동적이셨던 어머니가 얼마 못 사실 거라는 선고는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이북에서 맨손으로 피난 나온 후 어머니는 집안을 일으키느라 억척같이 일하셨고, 오로지 자식들 잘 먹이고 입히는 생각만 하셨습니다. 어머니 그늘 아래 부족함 없이 살던 저희 형제는 3개월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평생 병원 일만 하셨던 아버지도 어떻게 장례를 치르고 준비할지 막막하신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명물로 씻기니 얼마나 곱고 예쁜지 탄성이 절로 나와 선홍색 입술에는 엷은 미소가 감돌고 피부가 환히 피어 처녀 시절 모습같아 당시 저희 가족은 집과 가까운 흑석동전도관에 다니고 있었는데, 거기 교인 분들이 찾아와 한식구처럼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장례 때 저희 가족이 입을 상복을 손수 지어 주셨고 관 위에 덮는 꽃도 밤을 새워 정성껏 만드셨습니다. 입관예배 드릴 때 힘차게 찬송하는 동안 장례반 어른들이 어머니를 생명물로 씻기셨는데, 다 씻긴 후 봤을 때 어머니가 얼마나 곱고 예쁘신지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코가 오똑하고 얼굴이 갸름한 미인형이셨던 어머니는 피부가 너무 곱고 환하게 피어서 처녀 시절 어머니가 저런 모습이셨을까 싶었습니다. 루주를 바른 듯한 선홍색 입술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잃고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지만 미소 지으시는 어머니를 보며 마음이 차차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곱고 예쁘게 핀 모습과 밝고 편안한 집안 분위기를 느끼며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해 주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습니다. 아직 철부지 같았던 제가 처음으로 삶과 죽음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은혜 받은 교인끼리는 한 가족보다 더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권능을 직접 보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눈물짓던 슬픈 마음을 다 씻어 주셔서 기쁘고 감사하게 살아

눈물짓던 슬픈 마음을 다 씻어 주셔서 기쁘고 감사하게 살아

항상 눈물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농사에 지친 몸으로 시부모님 저녁상까지 치우고 나면 저는 사랑채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열여덟 살에 충북 보은으로 시집가서 하루하루를 고달프게 지냈습니다. 내 손으로 물 한 그릇 떠 본 일 없이 컸는데 시집에서 밀어닥치는 농사일과 집안일이 버거웠고 호랑이 시어머니가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습니다. 울다 지쳐서 잠들었다가 새벽밥을 지으러 나가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 후 시댁에서 분가하고 농사일에서 벗어나면서 살기가 수월해졌지만 어쩐 일인지 마음은 편안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74년, 제 나이 서른여덟 살 무렵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했을 때였습니다. “거기는 찬송이 들리는 집이에요.” 소사리 큰길 가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더니 동네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소사리전도관이라는 곳이 바로 위에 있어서 새벽마다 부르는 찬송 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린다고 했습니다. 과연 새벽부터 찬송이 들리는데 왠지 듣기 좋았습니다. 그 전도관에 가게 된 것은 매일 집에 들르시던 전도관 권사님 때문이었습니다. 함대덕 권사님은 신앙촌 메리야스와 속치마를 판매하셨는데 시중에 파는 물건보다 훨씬 좋아서 애용하게 됐습니다. 신앙촌 간장도 맛있어서 제가 이웃들한테 다니며 대신 팔아 드리니 자연히 권사님이 저희 집에 자주 오셨습니다. 권사님이 전도관에 같이 가 보자 하셔도 “저는 신앙촌 물건만 팔아 드릴게요. 전도는 하지 마세요.” 하며 가지 않았는데, 일요일 아침 일찍 찾아오셨을 때 거절을 못 하고 따라나선 것이 전도관에 나간 계기였습니다. 가 보니 동네 사람들이 예배실 가득히 모여 있었고, 다들 반갑게 맞아 주는 것이 좋아서 새벽예배와 수요일예배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다섯 살짜리 작은아들을 데리고 수요일예배에 갔을 때였습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아…” 하는 찬송을 부르는데 처음 듣는 찬송가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서 한참 울고 나니 입고 있던 치마 한 폭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십수 년이 지나고 다 큰 아들이 “그때 엄마 치맛자락이 흥건하도록 우셨어요.” 하고 기억하는 걸 보면 많이 울기는 울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울고 나니 그동안 슬프고 괴로웠던 일들이 눈물에 씻겨 간 것처럼 속이 후련하고 편안해졌습니다. 그때까지 교인들 권유로 예배실에 앉아 있다 오는 정도였지만 그 후로 누가 뭐라지 않아도 예배에 안 빠지게 됐습니다. 교인들은 그런 저를 보고 은혜 받았다고 했는데 저는 그게 정말 은혜일까 궁금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후 확실하게 은혜를 체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신앙촌 센타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강하게 진동해 화장품 냄새와는 완전히 다르고 계속 맡고 싶고 기분이 좋아지는 향기 서울 동대문에 있는 신앙촌 센타에 갖가지 신앙촌 제품이 진열돼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함대덕 권사님을 도와 신앙촌 제품을 조금씩 판매하던 저는 센타에 처음 가 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강하게 진동해서 물건 사려던 것도 잊어버리고 왔다 갔다 하며 향기를 맡았는데, 건물 어딜 가나 좋은 향기가 맡아졌습니다. 신앙촌 물건을 사러 온 분들이 예쁜 원피스에 화장을 곱게 하고 있기에 화장품 냄새인가 했지만, 그분들 곁을 지나가 보니 그 향기는 화장품 냄새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아무리 맡아도 더 맡고 싶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향기였습니다. 그런데 한참 만에 물건을 구매해서 밖으로 나왔는데도 그 향기가 따라오는 것처럼 계속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교인들이 이야기하던 ‘향취 은혜’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세상에 없는 좋은 향기를 맡게 되는데 그것이 향취 은혜라고 했습니다. 제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습니다. 그 후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전농동전도관 예배 때 멀리 계신 하나님 얼굴이 크게 보이고 눈 마주치는 느낌 들어 그 순간 커다란 불덩어리가 가슴에 꽂히는 것처럼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왈칵 나 온몸을 태우는 것처럼 뜨거운 불이 사라지더니 말할 수 없이 시원하고 가벼워져 갑자기 배가 아파서 아무것도 못 먹고 있다가 서울 오류동 병원에 갔더니 복막염이라고 했습니다. 그날로 입원하고 치료를 받는데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전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생명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다고 하던 이야기가 떠올라 저는 생명물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전도사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하필 그때 소사리전도관에 생명물이 없어 몹시 안타까웠는데 대신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신앙촌 간장이 있어서 딸아이가 받아 왔습니다. 깨끗한 그릇에 물을 가득 담고 거기에 축복받은 간장을 타서 먹었습니다. 한 그릇을 다 먹고 나니 옆구리가 터지는 것처럼 아프던 통증이 차츰차츰 물러가는 것이었습니다. 간호사들도 저를 보고 방금 전까지 허리를 못 펴고 아파 하더니 이제 괜찮으시냐며 놀라워했습니다. 치료를 마치고 퇴원할 때 간호사가 하는 말이, 처음 왔을 때는 상태가 심각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빨리 낫게 될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퇴원하고 그 주 일요일에 서울 전농동전도관으로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시는 날이었는데 늦게 도착하니 3층까지 사람들이 가득 차서 제일 뒷자리에 간신히 앉았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시작되어 단상을 올려다 봤을 때 하나님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예배실이 워낙 넓고 단상이 3층에 있어서 저 멀리 계신데도 그 순간 하나님 얼굴이 크게 보이며 눈이 딱 마주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커다란 불덩어리가 가슴에 꽂히는 것처럼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활활 타는 불이 온몸을 태우는 것처럼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고 한참 지나자 그 불이 사라지더니 이번에는 온몸이 말할 수 없이 시원해졌습니다. 예배 마친 후 집에 올 때는 몸이 땅에 닿는지 안 닿는지 모를 정도로 가벼웠습니다. 언제 복막염을 앓아서 그렇게 아팠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40대였던 저는 몹시 약해서 몸져눕는 일이 많았습니다. 밥을 잘 못 먹고 약도 잘 넘어가지 않아서 늘 골골하며 지냈습니다. 오죽하면 살림을 맡아 하던 큰딸이 엄마가 안 아픈 게 소원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복막염이 깨끗이 나은 뒤로 병원과 약을 모르고 살 정도로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주신 축복이라 생각하며 늘 감사드립니다. 저는 건강해진 몸으로 신앙촌 소비조합을 시작했습니다. 어딜 가나 믿어 주고 반겨 주는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즐거웠고, 은혜를 받고 보니 더욱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울로 이사 온 후에도 소비조합을 계속했는데 보름에 한 번씩 소비조합 축복일이 있어 기장신앙촌에 내려가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1985년 무렵이었습니다. 안찰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두 손을 눈 위에 얹으시자 그리 아플 수 없어 손 떼시자 눈부터 가슴까지 시원해져 마음은 기쁘고 즐거워 연신 웃음이 나 그날은 눈안찰을 해 주시는 날로 안찰 받기 전 예배실에서 찬송을 부를 때였습니다. 눈을 감고 찬송하다가 갑자기 향기롭고 좋은 냄새가 머리 위에서 쏟아붓는 것처럼 진하게 맡아져서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모두 찬송에 열중하는 사람들뿐이고 그렇게 향기가 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고 저는 ‘은혜 주시는구나!’ 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찬송이 끝나고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한 명씩 안찰을 받았는데 너무 떨려서 계속 순서를 양보하다가 제일 끝으로 가게 됐습니다. 안찰 받으면 내가 죄지은 만큼 아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긴장되고 두려웠습니다. 그래도 씻어 주시는 기회이니 꼭 안찰을 받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제 차례가 됐을 때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손을 눈 위에 살짝 얹으시자 깊이 후벼 파는 것처럼 그리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소리 치고 싶은 것을 겨우겨우 참고 났더니 하나님께서 손을 떼셨는데 그 순간 통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부터 머리, 가슴까지 시원해졌습니다. 마음은 또 왜 그리 기쁘고 즐거운지 서울 집에 돌아와서도 연신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죄가 씻어지면 이렇게 좋구나!’ 싶었습니다. 그 전에도 하나님께서 죄를 씻어 주신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직접 안찰을 받고 보니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소비조합을 계속하던 저는 1998년 기장신앙촌에 입주하게 됐습니다. 휴게실에서 일하며 신앙촌 사람들과 축복일에 찾아오는 교인들을 위해 맛있는 간식 거리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때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 듯 휴게실에 찾아오던 아이들이 20년이 지나 어엿한 신앙촌 사원이 된 것을 볼 때면 마음이 흐뭇합니다. 하나님을 뵙고 지금까지 따라온 시간을 돌아보니 그 고마움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까 싶습니다. 눈물짓던 슬픈 마음을 다 씻어 주셔서 기쁘고 감사하게 살아왔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고맙고 감사함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바르게 갈 수 있을까 하는 그 생각뿐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맑고 깨끗하게 살아서 그 영광된 날에 기쁨으로 뵈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신앙체험기 특집

천부교회를 찾아서

뉴스
전쟁의 기술과 야욕은 어디서 오는가? 임진왜란을 촉발한 숨은 범죄 집단에 대하여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을 때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는 세계를 향해 무기 개발을 멈추고 그 돈으로 감염병 연구를 하라고 촉구했다.<자료1> 무기 만들 돈으로 사람 살리는 연구를 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지적이었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서 무기를 개발하고 구입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계속돼 온 일이다. 지금부터 480여 년 전 일본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 1543년, 일본과 총의 역사적인 접점 일본 사료인 철포기(鐵砲記)에 따르면, 1543년 규슈 남단의 다네가시마라는 섬이 총 한 자루 때문에 들썩였다. 포르투갈 상인이 총을 쏘는 시범을 보이자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목표물을 박살내 버렸다.<자료2> 당시의 최첨단 무기인 총을 처음 접하고 그 위력에 감탄한 일본인 도주(島主)는 2000냥을 주고 총 2정을 사들였다. 당시 일본에서 10냥이면 병사 한 명의 1년치 월급이었기 때문에 2000냥이면 200명의 군대를 1년간 유지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현재 가치 20억 원)이었다. 이 총이 일본에서는 뎃포(てっぽう, 鐵砲), 조선에서는 조총(鳥銃)이라 불리게 되었다.<자료3> 총은 일본 열도와 조선 한반도를 뒤흔들었다. 일본에서 총을 활용해 전투 체제를 새롭게 편성한 세력(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다른 세력을 제압하고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쥐었고, 이 세력이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일본이 포르투갈의 총을 도입한 사건이 전란을 촉발시킨 중요한 요인이라는 데에 역사가들의 이견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포르투갈은 왜 머나먼 바다를 건너 일본까지 와서 총을 전해 주었을까. 일본이 첨단 무기를 생산하고 중국 정벌을 주창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이번 호 <다시 쓰는 세계사>에서는 임진왜란을 촉발시킨 무기와 그 전쟁의 야욕에 대해 알아본다. ◇ 이슬람을 몰아낸 십자군의 나라, 포르투갈 1143년 건국된 포르투갈은 ‘십자군이 세운’ 나라였다. 포르투갈을 건국하고 초대 군주에 올랐던 아폰수 1세<자료4>는 십자가 깃발 아래 전쟁을 지휘한 십자군 전사였다. 포르투갈이 세워진 땅은 이베리아 반도 끝이었는데, 이베리아 반도는 8세기 이슬람 칼리파 국가인 우마이야 왕조가 정복한 이래 이슬람 세력이 400년 넘게 지배해 온 땅이었고, 아폰수 1세는 이 땅을 빼앗아 자신의 가톨릭 국가를 세우기 위해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다. 이슬람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몰아내는 전쟁을 계속하던 아폰수 1세는 1139년 오리크 전투에서 5명의 이슬람 왕을 죽이며 결정적으로 이슬람 세력을 제압해 나갔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세워진 가톨릭 국가가 포르투갈이었다. 15세기 초부터 포르투갈은 ‘바다의 십자군’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이 유럽에서 가장 먼저 대서양을 건너 항해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십자군 DNA 때문이었다. 항해를 주도했던 포르투갈 왕가는 “가톨릭 신앙을 전하고 이교도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 바다의 십자군, 최종 목적지는 중국 그들이 바다 건너 갈망했던 땅은 아시아였으며 그중에서도 중국 대륙이었다. 중세부터 근대까지 유럽의 최고 베스트셀러였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맨드빌 여행기』 등은 중국 대륙이 유럽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풍요롭고 부유한 세계라는 내용이었고, 이 책들이 촉발시킨 중국에 대한 병적인 관심은 거대한 이교도 국가인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십자군다운 열망으로 이어졌다. 십자가를 앞세우고 항해를 떠난 바다의 십자군은 이교도를 박멸할 뿐 아니라 압도적인 무력으로 그들의 재산을 탈취했다. 그리스도 기사단으로 용맹한 십자군 전사였던 바스코 다 가마는 항해 도중 만난 이슬람 상인 800명의 귀와 코, 손을 잘라 버리고 그들의 무역선을 빼앗아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성스러운 십자가와 살상 무기인 총포를 한 배에 싣고 다니는 그들의 정복 사업은 가톨릭을 전파하는 사명이자 야만스러운 노략질이었다. ◇ 1549년, 일본과 가톨릭의 역사적인 접점 포르투갈 상인이 일본에 도착한 것은 표면상으로는 태풍을 만나 우연히 표착한 것이었지만,<자료5>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포르투갈이 일본에 오기 100여 년 전인 15세기 초부터 벌이고 있는 정복 사업의 연장선에 있었다. 가톨릭 제국이 다른 대륙을 정복할 때 선교사들이 앞장섰던 것과 동일하게 일본에도 1549년부터 예수회 선교사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자료6> 그들은 십자가와 함께 로마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받은 포교보호권(포르투갈어 padroado)을 앞세웠는데, 이는 포르투갈이 발견한 나라에 가서 포교할 수 있다는 권리였다. 이는 바꿔 말하면 포르투갈이 일본을 ‘발견’했기 때문에 일본을 가톨릭 국가로 만들 ‘권리’가 있고 이 권리는 예수의 대리자인 교황이 ‘부여’했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한 예수회는 로마 교황에게 절대 복종하고 땅끝까지 선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투적 수도회였다. 예수회의 목적은 가톨릭을 제외한 모든 종교와 싸우고 세계 문화를 로마 가톨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 예수회, 화약으로 일본 다이묘를 사로잡다 예수회가 선교하는 방식은 대상에 따라 확연히 달라졌다. 아메리카 원주민같이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대상은 매우 강압적으로 그들의 종교와 생활 방식, 언어까지 파괴해 버렸지만, 일본처럼 정치 체제가 발달해 무력으로 제압이 어려운 대상에게는 존중의 제스처를 취하면서 상류 사회를 파고들었다. 일본의 상류 사회는 다이묘(だいみょう, 大名)라 불렸던 지방 영주 계층이었는데, 예수회는 다이묘를 이용하면 권력으로 집단 개종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그들을 포섭하는 데 열성을 기울였다. 실제로 오무라 스미타다(1533~1587)라는 다이묘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자신의 영지에서 개종을 거부하는 사람은 추방하겠다고 협박하자, 단번에 6만 명이 강제로 집단 개종하는 일도 있었다. 예수회가 다이묘를 포섭하는 데 가장 유용한 무기는 총과 화약이었다. 당시 일본은 다이묘 간의 전쟁이 계속되던 ‘전국시대(戰國時代)’였기 때문에 다이묘들에게 첨단 무기인 총을 확보하는 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에게 총을 받은 후로 총의 몸체를 만드는 기술은 익혔지만 화약을 제조하는 기술은 전무했다. 아무리 잘 만든 총이라도 화약이 없으면 고철 덩어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다이묘들은 화약을 구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화약은 초석, 유황, 숯을 혼합해 만들며 이중 핵심은 초석이다. 초석의 원료가 되는 염초토는 한정된 지역에서만 생산되고, 염초토를 이용해 복잡한 제조 과정을 거친 후에야 초석을 얻을 수 있었다. 초석은 중국 남부 해안 지역에서 생산됐지만 중국(명나라)이 일본과의 무역을 금지해 문을 닫아 버렸는데, 이때 뒷문을 열어 준 것이 가톨릭 예수회였다. 당시는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밀무역을 하던 시대였고, 포르투갈 상선들은 오직 예수회를 통해야만 일본에서 무역을 할 수 있는 독점 체제였다. 일례로 가톨릭 다이묘인 오토모 소린(1530~1587)이 1567년 9월 15일 가톨릭 주교인 벨키오르 카네이로(1516~1583)에게 초석을 보내 달라고 요청한 것을 보면 가톨릭과 다이묘가 총과 화약이라는 전략 무기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김시덕, 『일본인 이야기』, 메디치, 2019, 169p) 이처럼 안정적인 화약 공급 덕분에 일본은 총기를 폭발적으로 생산해 낼 수 있었고, 이는 일본이 사격 부대를 갖출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 가톨릭이 일본에 가르친 ‘구원의 길’ 일본의 상류 사회와 끊임없이 접촉했던 예수회는 최고 권력자로 떠오른 오다 노부나가(1534~1582)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도 성공했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1532~1597)는 열여덟 번에 걸쳐 오다 노부나가와 대면했는데, 1569년 4월 19일 프로이스 선교사가 노부나가에게 “우리는 구원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 일본에 왔습니다. 그 일에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기쁘게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노부나가는 ‘강인한 정신력’이라고 칭송했다.(박수철,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인물인가』, 위더스북, 2017, 41p~42p) 예수회가 일본에 가르친 구원의 길은 어떤 것이었을까. 땅끝까지 선교해야 한다는 전투적 목표를 가진 예수회는 일본 최고 권력자에게 어떤 목표를 제시했을까. 예수회를 창설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년~1552년)의 행적을 보면 그들의 목표가 뚜렷이 드러난다. 1549년부터 일본에서 열정적으로 선교했던 하비에르는 2년 후 중국(명나라)으로 향했다. ‘땅끝까지 선교’를 목표로 내세운 예수회가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중국이었다. ◇ 히데요시와 가톨릭의 공동 목표, 중국 이들의 야심은 1586년 5월 4일 일본의 권력을 거머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났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히데요시는 일본 가톨릭교회의 지도자인 가스파르 코엘료 신부(1530?~1590) 일행을 만난 자리에서 중국 침공 계획을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중국으로 출병할 때 중무장한 대형 포르투갈 함선 두 척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가톨릭 선교의 자유를 약속하는 발언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나카무라 사토시, 『일본 기독교 선교의 역사』, 홍성사, 2016, 75p) 히데요시는 “중국을 정복하는 날에는 도처에 가톨릭 교회를 세우게 하고, 중국인은 모두 가톨릭 신자가 되도록 명령할 것이다.”라고 했다. 거침없는 발언은 가톨릭 신부들의 야망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었고, 코엘류 일행은 크게 기뻐하며 포르투갈 함선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대화 내용은 자리를 함께했던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의 『일본사』에 상세히 남아 있는데, 이에 대해 180도로 다른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자료7> ◇ 중국 정복, 가톨릭이 먼저 꾼 꿈인가 프로이스 신부는 히데요시가 먼저 중국 정벌의 뜻을 밝히고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고 기록했지만, 일본사 연구가 마쓰다 기이치에 따르면 중국의 가톨릭화를 기대한 신부들이 먼저 히데요시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안했을 것이라 추측한다.(마쓰다 기이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남만인』) 이 추측은 당시 예수회의 활동을 보면 충분히 개연성 있는 가설이다. 히데요시와 직접 면담했던 가스파르 코엘료 신부는 그로부터 2년 전에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게 일본을 군사적으로 지원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있었다. 일본에게 무기를 지원해서 중국을 정복하자는 것이 그의 속내였다. 그 요청을 받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1527~1598) 또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답게 중국을 정복해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겠다는 야망에 부풀어 있었다. 히데요시와의 면담을 기록한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도 원래 중국 선교를 꿈꾸던 사람이었으므로, 히데요시가 중국 정복을 입에 올리기 전부터 이들은 중국을 향해 진격할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100년 전부터 십자가 깃발을 높이 세우고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차례차례 정복해 온 ‘바다의 십자군’들은 최종 목표인 중국 대륙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다. ◇ 가톨릭 다이묘, 조선으로 진격하다 그 선봉에 선 사람이 가톨릭 다이묘인 고니시 유키나가였다.<자료8>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부대는 가톨릭 장병들로 이루어졌고, 이들은 전투에 임할 때 마치 유럽의 십자군처럼 투구나 전투복에 십자가를 그려 넣었다.(김시덕, 『일본인 이야기』, 메디치, 2019, 235p) 1592년 5월 23일 임진왜란 개전 당시에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전함에는 십자가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며 그들의 정복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5월 24일 동래읍성에 도착한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에 맞서 동래부사 송상현과 백성들은 결사 항전으로 버텼다. 그러나 최첨단 무기인 총과 정복 의지로 무장한 그들을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본 사료에 따르면 일본군들은 “여자를 비롯해 아이들과 개, 고양이 할 것 없이 피를 흘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살해”했다고 한다. 동래읍성에서 단 한 번의 전투로 3,000명의 조선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 조선을 킬링필드로 만든 진짜 전범 그로부터 410여 년이 지난 2005년 6월, 부산에서 지하철 공사를 하던 중에 동래읍성 주변에 있었던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가 발굴되었다. 이 해자에서 임진왜란 당시에 사용했던 갑옷, 창, 활 등의 무기와 함께 처참하게 살해된 유골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래턱이 창으로 잘려나간 유골, 둔기에 맞아 두개골이 함몰된 유골, 총으로 머리를 관통 당한 5살 어린이의 유골이 발굴되자 언론은 ‘조선판 킬링필드’라며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을 고발하는 기사를 연이어 보도했다. <자료9> 그러나 사람과 동물까지 남김없이 도륙한 일본 병사들보다 더욱 섬뜩한 것은 그들의 전투복과 투구에 새겨진 십자가일지도 모른다.<자료10> 그 십자가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채 철저히 은폐되어 왔기 때문이다. 일본에 총을 전해 준 포르투갈이 ‘십자군이 세운 나라’라고 불릴 만큼 철저한 가톨릭 국가였다는 사실, 일본 군대가 사격 부대를 앞세우고 임진왜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가톨릭 세력의 무기 공급이 있었다는 사실, 일본은 십자군이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대륙, 중국으로 진격하기 위해 조선을 킬링필드로 만들었다는 사실, 이런 사실들이 주목받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 전쟁의 야욕을 부추겼던 범죄 집단이 이제 와서 ‘무기 개발 억제’ 운운하는 이중성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때는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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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속 천부교 역사
“전도관 신앙 운동의 깊이에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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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모두를 속인 사기범은 누구인가? … 코로나 바이러스가 남긴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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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춘추

종교의 진화(進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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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만이 은혜입은 천막집회 한강집회편(7.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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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사람들

신앙촌에 오니 기분이 좋네요

신앙촌에 오니 기분이 좋네요

차민주 씨(제주 교회 대4, 맨 왼쪽)는 최윤정 양(초5)을 1년 전에 전도하였고 그 이후로 꾸준히 축복일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윤정이는 밝고 유쾌한 성격에 교회 동생들도 잘 챙기는 따듯한 아이예요”라고 소개해 주었다. 40회 이슬성신절을 맞아 윤정 양이 전도를 했다. 윤정 양은 “이번에 어머니와 동생, 고모까지 함께 신앙촌 와서 기뻐요”라고 말하며 “엄마도 신앙촌에 오셔서 정말 즐거우셨대요”라고 기쁜 목소리로 얘기했다.

신앙촌에서 성장해 가는 딸에게

신앙촌에서 성장해 가는 딸에게

식품 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한주연 양의 가족들이 이슬성신절을 맞아 3대 모녀를 주축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이번에 이슬성신절에 처음 참석한 아버지께서는 주연 양이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좋았습니다’라고 짧지만 내심 기특함이 묻어있는 말을 전했다.

은혜의 기쁨, 나도 알고파요

은혜의 기쁨, 나도 알고파요

최수빈, 다빈양 (울산 교회 고3, 고2 맨 오른쪽)은 할머니를 처음 모시고 참석했다. 최다빈 양은 합창자로 가족의 축하를 받았다. 언니 수빈 양은 무대에 서지 못했는데 “동생이 어른들과 합창 연습을 하니 예전과는 또 다른 기쁨이 있다고 했어요. 저는 그게 무엇인지 몰라서 아쉬운 마음이 있었는데, 합창 공연을 보고 왜인지 울컥하더라고요. 다음에는 꼭 해서 알아봐야겠어요”라고 했다.

“언니, 나 천부교회에 잘 온거 같아~”

“언니, 나 천부교회에 잘 온거 같아~”

박동희 씨(김천 교회 새 교인, 가운데)는 한창영 씨(오른쪽)에게 “믿기만 하면 구원 주는 곳은 교회가 아니다 네가 와서 어떤 곳인지 보고 듣고 판단해 봐라”라고 말했다. 한창영 씨는 “처음에는 ̒언니가 왜 이 교회에 오자고 했을까?̓ 생각했는데, 경전 말씀과 이슬성신을 체험한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니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언니에게 ̒나 잘 온 거 같아’라고 했어요” 하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또 이슬성신절 예배에 참석해 음악 순서 전에 방영된 영상을 보고 “은혜 내리는 모습이 정말 신기하게 느껴졌어요”라는 소감을 말했다.

주니어

이슬성신절을 준비해요

이슬성신절을 준비해요

예수의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

예수의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

앵두의 ‘찬송학교'(상)

앵두의 ‘찬송학교'(상)

‘뛰뛰빵빵 미로찾기’

‘뛰뛰빵빵 미로찾기’

교양

‘돌밥돌밥’ 고민 타파 ‘두부’ 간편 레시피

‘돌밥돌밥’ 고민 타파 ‘두부’ 간편 레시피

‘돌밥 돌밥’은 최근 주부들 사이에 유행하는 신조어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늘면서 ‘돌아서면 밥 차리고 돌아서면 밥 차린다’는 의미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외식까지 자제하면서 주부들의 일상이 바뀐 탓이다. 이같은 주부의 고충을 덜어줄 ‘간편한 레시피’를 찾는 이용률이 증가하는 추세다. ‘신앙촌푸드’ 유튜브 채널에서도 간편하면서 영양까지 챙긴 레시피를 공개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hh1Ln3OcgS_wNGOwxuzQFw) 01 마파두부덮밥 재료 -두부 100g -다짐육 200g -굴소스 1큰술 -대파 1뿌리 -두반장, 고추기름 3큰술 -전분물(물4큰술+전분4큰술) ① 달군 팬에 고추기름을 넣고 대파를 넣어 볶는다. ② 다짐육을 넣어 같이 볶는다. ③ 두반장 3큰술 굴소스 1큰술을 넣어 볶는다. ④ 물 500ml를 붓고 두부를 넣어끓인다. ⑤ 전분물을 넣어 걸쭉하게 만든다. 02 두부스파게티 재료 -두부 100g -토마토소스 500g -양파 1/4개 -느타리버섯 -파슬리 가루 -파스타면 1인분 ① 두부 물기를 제거한 후 으깬다 ② 으깬 두부를 넣어 살짝 볶는다 ③ 토마토소스를 넣고 소스 완성 ④ 끓는물에 파스타면을 8분간 삶기 ⑤ 소스에 면을 넣어 함께 볶는다 03 두부유부초밥 재료 -두부 400g -시판 유부피 -초밥 속 소스 & 조미 볶음 ① 두부를 으깬다. ② 고슬하게 지은 밥에 유부초밥 세트에 들어있는 배합초, 후레이크와 으깬 두부 넣고 섞는다. ③ 조미액을 살짝 짜낸 유부에 ②의 밥을 넣는다.

지난 100년을 돌아보고 새로운 100년을 여는

사람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코로나, 어디서 왔나?

손목 통증 잡는 스트레칭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개발, 어디까지 왔나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개발, 어디까지 왔나

AI 예측 결과 치료제는 2년 뒤, 백신은 5년 뒤에나 가능 바이러스 치료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백신이다. 흔히들 예방주사라고 하는데 해당 바이러스의 사체나 독성을 제거하여 몸에 주입해서 면역체계가 항체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치료제이다. 이는 바이러스를 죽이거나 감염된 세포를 죽이는 화학물질을 투입해서 바이러스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다. ◇ 치료제 · 백신연구 어디까지 왔나 5월 3일 과학계 등에 따르면 치료제와 백신은 갈 길이 멀다. 통상 백신 개발에만 10년이 걸리는 상황 등을 감안하면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지난달 24일 ‘코로나19 치료제·백신개발 범정부 지원단’을 출범시킨 우리 정부를 포함해 전 세계 과학자, 바이오업계에서 개발에 뛰어든데다 각국 정부도 유효한 개발에 따른 빠른 시판 허가를 내주려고 하고있다. 실제로 치료제의 경우, 현재 미국 길리어드사이언스의 ‘렘데시비르’가 속히 효과를 낼 치료제로 주목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과학·의학계 인사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것은 ‘안전’이다. 지난달 17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대한민국의학한림원 등이 온라인으로 공동 개최한 ‘코로나19 치료제·백신 개발 어디까지 왔나’ 포럼에서 전문가들은 개발 속도도 중요하지만 이 때문에 치료제나 백신이 급하게 만들어져 부작용을 일으킨다면 더 큰 문제가 초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코로나 19 ‘중대 돌연변이’ 발견 백신 개발에 심각한 지장을 줄 돌연변이 발견에 관한 보고가 지난 4월 14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를 통해 보도됐다. SCMP에 따르면 대만 국립창화사범대와 호주 머독대 공동연구팀은 중국 우한에서 돌아온 뒤 코로나19에 걸린 인도 의대생에게서 검출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중대 변이를 일으킨 사실을 최근 확인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돌연변이는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 수용체결합영역(RBD)에서 확인됐다. 스파이크 단백질이란 바이러스 표면에 돌기처럼 오톨도톨 튀어나온 단백질을 말한다. 신종 코로나는 이 스파이크 단백질을 통해 숙주 세포의 수용체와 결합해 감염증을 일으킨다. 즉, 스파이크 단백질을 무력화시켜야 바이러스 감염을 막을 수 있다. 따라서 백신 개발도 스파이크 단백질 무력화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신종 코로나의 다양한 변이 능력 때문에 백신을 개발하더라도 돌연변이에는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고 알렸다. ◇ 화학 백신과 행동백신 국제 학술정보 분석업체인 크래리베이트는 13일 “AI를 통해 백신과 치료제 개발 시점 예측 결과 치료제는 2년 뒤에, 백신은 5년 뒤에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모든 조건이 차질 없이 진행됐을 때를 가정한 낙관적인 추정이다. 독감 백신은 1940년대에 처음 등장했지만 예방 효과를 현재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무려 70년이 걸렸다. 인수 공통 바이러스가 3~5년마다 한 번씩 창궐한다면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인간은 언제나 패배할 수밖에 없다. 화학 백신을 지금 당장 기대할 수 없다면 우리 생활 속에 실천할 수 있는 백신이 있다. 지금 정부에서 권장하는 “생활 거리 두기”이다. ① 아프면 3,4일 집에 머물기 ② 사람과 사람 사이, 두 팔 간격 건강 거리두기 ③ 30초 손 씻기, 기침은 옷소매로 가리고 하기 ④ 매일 2번 이상 환기, 주기적 소독 등을 지키는 것이다. 훌륭한 행동 백신을 통해 스스로의 안전을 지켜야 할 때이다.

아직도 손 씻을까 말까 망설이고 계신가요?

물이 건강을 지킨다! 호흡기 질환 바이러스 배출 도운다!

조용한 뼈도둑, 골다공증 예방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