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

2026년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

1월 1일, 신앙촌 곳곳에는 화사한 꽃꽂이와 함께 새해를 알리는 2026 ‘Happy New Year’ 신년 장식과 캐릭터, 이글루 등이 어우러져 눈길을 끌었다. 주민들은 새해를 맞아 서로 인사를 나누며 한 해의 각오를 다졌고, 양로원에서는 SANC식품여고 학생들이 어르신들과 함께 율동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날은 신앙촌 도서관이 개방되어 조용히 한 해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추운 날씨 속에 따뜻한 펜넬차가 제공되어 마음까지 녹여 주었다. 3일 여성회와 학생회가 함께하는 축복일에는 레스토랑에서 신년 음악회가 열려 음악 속에서 새해의 활기와 기쁨을 만끽했다. 환하게 불을 밝힌 신앙촌의 새해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와 설렘을 전하며 힘차게 시작됐다. 다양한 꽃꽂이를 보는 즐거움 곳곳에 놓인 꽃꽂이가 다양해서 보는 재미가 있었고, 특히 레스토랑과 종합식당에 있는 꽃들이 예쁘고 향기도 좋았습니다. 저녁에는 신년 데코 조명 아래에서 사진을 찍으니 한층 더 예뻐 보였습니다. / 원주교회 고2 안지연 양 신앙촌 도서관은 온전한 휴식처 신앙촌은 늘 자연과 벗하는 공간입니다. 도서관에 오면 자연 속에서 책을 읽는 느낌이 더해집니다. 특별히 무엇을 하지 않아도,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라 참 좋습니다. 새해에 좋은 차까지 곁들여져 온전히 휴식할 수 있었습니다. / 신앙촌 여청 박선영 씨 음악의 힘 아늑하고 온기 넘치는 레스토랑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즐거움을 전해준 신년 음악회였습니다. / 덕소교회 김나영 씨 전도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신앙촌에 오니 새해의 설렘이 가득했고, 푸짐한 식사며 여러 가지를 따뜻하고 세심하게 준비해 주신 마음이 느껴져 참 뭉클했습니다. 베풀어 주신 사랑이 새해를 여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 보은교회 박홍자 권사 하나 되어 앞으로 2026년 새해에는 더욱 기도에 힘쓰며, 주시는 은혜와 지혜로 열심히 뛰어 맡은 바 사명을 다하는 교역자와 시무 중앙이 되겠습니다. 또한 전국 중앙과 전 교인이 한마음으로 힘차게 전진하는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서동교회 박혜영 관장 잊지 않고 기도하기 올해 저의 계획은 기도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식사 전에도 기도를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천국에 꼭 가고 싶습니다. / 대전교회 초4 김민솔 양

신앙촌에서 자란 농산물, SANC팜 오픈

신앙촌에서 자란 농산물, SANC팜 오픈

쌀·무 등 주요 작물의 상품성을 확인하며 판매 확대 ‘신앙촌’ 브랜드 신뢰도에 맞춰 농산물 품질 관리 기준 강화 신앙촌 공식 온라인몰인 SANC몰 안에 SANC팜이 문을 열었다. 신앙촌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연결하는 공간이다. SANC팜의 출발점은 ‘맛’에 대한 자신감에 있다. 단감과 대봉, 무와 쌀에 이르기까지 신앙촌 농장에서 수확한 작물은 맛이 좋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농산물 대행업체를 통한 유통 과정에서 단기간에 물량이 소진되며 제품의 품질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뛰어난 맛은 물론 크기와 모양 등 상품성까지 고루 갖추게 되었고, 그 결과 자사몰 입점으로 이어졌다. SANC팜의 또 다른 강점은 재배 환경이다. 신앙촌 농장은 제초 작업을 제초제가 아닌 손으로 진행하고, 작물 보호를 위한 약제 의존도를 낮춘 재배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토양을 보호하고, 재배 환경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농장의 기준이다. 특히 물은 모든 작물의 품질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이다. 지하수와 농업용 저수지를 활용한 물 관리가 작물의 맛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신앙촌 농장은 SANC팜을 오픈하면서 품질의 기준을 수확 이후까지로 확장했다. 밭에서만 잘 키우는 것이 아니라 보관과 운송 과정까지 농산물의 품질로 관리한다. 고객이 받아보는 순간까지 상태가 유지되어야 비로소 최상의 상품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앙촌’이라는 브랜드의 신뢰도가 높은 만큼 그 기대에 맞는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요구르트 런과 간장, 두부 등 기존 신앙촌 식품이 쌓아온 제품력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신앙촌 농장의 의지다. 앞으로 SANC팜은 SANC몰을 중심으로 판매 구조를 정착시키고, 품질을 최우선으로 한 생산 확대를 계획하고 있다. 농산물의 상품성을 높이는 데 집중하며, 친환경 재배로의 전환도 단계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장 건강의 기본 ‘유산균’

장 건강의 기본 ‘유산균’

장, 면역 기능 담당하는 중요 기관 유산균을 고르는 기준, 프리&프로바이오틱스 Q. 장은 왜 중요할까? 장은 섭취한 영양소를 흡수하고 노폐물을 배출하는 소화기관이자 면역 기능의 중심 역할을 하는 장기다. 장에는 수조 개의 미생물이 서식하며, 이들은 면역계뿐 아니라 신경계와 호르몬 분비에도 관여한다. 이 때문에 장은 흔히 ‘제2의 뇌’로 불린다. 장내 미생물 균형이 무너지면 비만이나 당뇨 등 대사성 질환 위험이 커진다. 세로토닌 생성에 영향을 미쳐 우울감 등 정신적 컨디션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평소 장 건강 관리가 중요한 이유다. Q. 유산균과 프로바이오틱스란? 장 건강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것이 유산균과 프로바이오틱스다. 유산균은 당류를 발효해 에너지를 얻고 젖산(락트산)을 생성하는 균을 통칭한다. 반면 프로바이오틱스는 장내 미생물 가운데 우리 몸에 이로운 유익균을 뜻한다. Q. 프리바이오틱스가 필요한 이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프리바이오틱스이다. 프리바이오틱스는 프로바이오틱스의 먹이가 되는 성분으로, 장내 유익균이 선택적으로 이용하는 영양 공급원이다. 장에 도달한 프로바이오틱스가 정착하고 활동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가장 핵심은 ‘함께 챙기느냐’이다. 프로바이오틱스는 살아 있는 균이기 때문에 장에 도달한 뒤 자리를 잡는 게 관건인데, 이때 프리바이오틱스가 같이 있으면 먹이가 되어 정착률이 훨씬 높아진다. 장 환경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프로바이오틱스만 챙기면 그대로 배출될 가능성도 커진다. 흔히 프리바이오틱스를 프로바이오틱스와 혼동하는데, 어원을 알면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된다. 프로(pro)는 라틴어로 ‘도움이 되는’ ‘위하여’라는 뜻이고, 프리(pre)는 ‘이전에’ ‘앞서’라는 뜻이다. 그래서 ‘프로’바이오틱스는 ‘몸에 이로운’ 유익균을 뜻하고, ‘프리’바이오틱스는 이 유익균이 효과를 나타내기 ‘전에’ 먹이를 공급하는 준비 역할을 한다. Q. 장 건강을 지키는 생활 습관은? 장 건강은 특정 성분 섭취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일상 속 생활 습관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찬 음료보다는 미지근하거나 따뜻한 음료를 선택해 위장 자극을 줄이고, 스트레스를 관리해 위장 운동과 소화 효소 분비가 원활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규칙적인 운동도 도움이 된다. 일주일에 3회 이상, 30분에서 1시간 정도 가볍게 땀이 나는 수준의 운동은 장 건강 유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식습관 역시 중요하다. 붉은 육류와 가공식품, 인스턴트 식품 섭취를 줄이고, 삶거나 데치는 조리법을 활용하면 장에 부담을 덜 수 있다. 올바른 식습관과 규칙적인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 장 건강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Q. 어떤 걸 먹어야 할까? 마지막으로 성분이 좋은 제품을 선택하여 꾸준히 섭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구르트 런’은 프리&프로바이오틱스 시스템의 농후발효유로, 한 병에 프로바이오틱스 1,000억 이상이 함유되어 있다. 칼로리와 당 함량을 줄이고 비타민 B₂와 칼슘이 풍부한 균형 잡힌 영양으로 누구에게나 좋은 건강한 농후발효유이다.

사제 대마 재배

사제 대마 재배

인도 텔랑가나주 상가레디 지구의 한 힌두교 사원 사제 아부티 나가이야가 부지 내에서 대마 재배·유통 조직을 운영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외부의 의심을 피하려고 메리골드(금잔화) 꽃밭 사이에 대마를 숨겨 재배했고, 사제 활동과 동시에 자신을 영적 지도자로 내세워 왔다. 현장에서는 대마 685주와 건조 대마, 씨앗, 현금 등 총 700만 루피 규모의 물품이 압수됐고, 당국은 유통 경로를 수사 중이다.

수녀원의 성학대와 권력 남용 실태

수녀원의 성학대와 권력 남용 실태

프랑스·호주 수녀회, 고립과 통제 신체적, 정신적 학대 증언 이어져 전 세계 가톨릭 수도회와 수녀원에서 수십 년간 이어진 성학대와 권력 남용 실태가 잇따라 드러나고 있다. 어린 기숙생을 상대로 한 성폭행부터 수녀들에 대한 장기간의 통제와 학대까지 피해 사례가 다양하다. 프랑스 라발 수녀원, 성폭행 혐의로 집단 소송 프랑스 라발의 생트 도미틸 수녀원은 1940년에서 1971년 사이 어린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 혐의로 집단 소송에 휘말렸다. 피해자 FS(이니셜)는 자신이 수녀원 기숙생으로 지내던 시절 이베트 수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1967년 부모의 이혼 이후 여동생과 함께 위탁 생활을 하다 1970년 사회복지기관을 통해 수녀원에 맡겨졌다. 수녀원에 도착한 직후 FS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됐으며, 3개월 동안 가족이나 친지의 방문이 허용되지 않았다. FS에 따르면 성폭행은 1970년 크리스마스 직전 시작돼 이후 정기적으로 반복됐다. 이베트 수녀는 이 사실을 누설할 경우 방문 및 외출 특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했다. 기숙생들은 이베트 수녀를 비롯한 수녀들의 끊임없는 감시와 침묵의 규율에 시달려야 했고, 계단, 복도, 기숙사에서 말하는 것이 금지됐다. 심지어 화장실 이용조차 수녀의 감시 아래 무리를 지어 다녀야 했다. 성인이 된 뒤 침묵을 깨고 집단 소송에 나선 FS는 “죽기 전에 내가 겪었던 지옥에서 벗어나야 했다. 다른 피해자들도 용기 내어 목소리를 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법률 대리인 측은 FS가 비금전적 손해배상과 징벌적 손해배상금을 포함해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법원에 요청한 상태다. 파리 몽마르트르 베네딕트회, 40년 넘는 강압 통제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의 베네딕트회 수녀원에서도 장기간의 강압적 통제와 학대가 있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2024년 수도회 자체 의뢰로 작성돼 2026년 1월 15일 발표된 보고서는 2016년 사망한 전 원장 수녀 마리 아녜스 수녀의 학대 행위를 폭로했다. 보고서에는 1,489건의 폭력 사건이 기록됐다. 수녀들은 가족과 단절된 채 원장 수녀에 대한 개인 숭배를 강요받았다. 특히 음식과 체중 관리는 수녀원장의 통제 정책의 핵심이었다. 한 수녀는 “우리는 외모까지 그녀와 같아야 했다. 이는 모든 수녀들이 체중을 늘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의 체중은 정기적으로 측정됐다. 체중이 늘어나는 것이 수녀로서의 소명의 징표였다”고 회상했다. 수녀들은 불균형한 식사와 과도한 약물을 강요받았고, 의료 처방도 의사와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변경됐다. 기본적인 위생용품조차 제한됐으며, 사생활 침해가 일상화됐다. 어린 나이에 모집된 이들은 충분한 경험이나 판단 능력이 형성되기 전 심리적∙신체적∙재정적 피해를 동시에 겪었다. 또 다른 피해자는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고해성사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누군가 엿듣는 식이었다”고 회상했다. 보고서는 “수도회는 수녀들의 재산을 정식 수녀가 되기 전부터 장악했다. 일부 자산이 개인적 이익을 위해 유용되고, 소유자의 동의 없이 은닉된 사실이 드러났다. 은행 계좌와 예금 통장이 비워졌고, 상속 재산이 압류되었으며, 여러 차례 은밀하고 정기적으로 전달된 현금 봉투가 오간 정황도 확인됐다. 일부 사제들과 평신도들의 눈감아주기, 귀막기, 심지어 공모까지 있었다”고 밝혔다. 호주 멜버른 카르멜회, 60년 수도 생활 끝 억압 고백 호주 멜버른의 카르멜 수도원에서 60년을 보낸 메리 휴스(78)도 수도원 생활의 억압적 실태를 고발했다. 그는 17세 직후 수도원에 입회했으며, 뉴사우스웨일스주 카르멜 수도원의 원장직까지 올랐다. 그러나 휴스는 최근 조사에서 수도회가 자신의 순수함과 독실한 신앙을 이용했다고 밝혔다. 휴스는 수도원 환경을 “삶에서 인간성을 앗아가는, 짓누르고 통제적인 환경”이라고 표현했다. 입회 초기부터 가족과 단절됐고, 우편과 방문은 엄격히 검열됐다. 수녀원 내부에서 친밀한 관계 형성도 장려되지 않았다. 수녀원 생활은 철저한 규율과 복종, 은밀한 비밀 유지가 요구되는 구조였다. 젊은 수련 수녀들은 수녀장과 간부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공연을 해야 했으며, 작은 실수에도 수녀장의 발치에서 바닥에 엎드려 굴복해야 했다. 그녀는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감정적인 어떤 것도 쓸 수 없었고,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어떤 비판도 할 수 없었다”며 “1970년대 중반까지 수녀들과 수련자들은 사순절 기간 동안 자기 채찍질과 고행을 수행해야 했으며, 이를 위해 채찍과 철사를 지급받았다”고 밝혔다. 또 “고통과 불편함은 미덕으로 여겨졌고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로 간주되었으며, 진통제는 거의 제공되지 않았다. 생리대나 칫솔 같은 기본적인 물품조차 허락받아야 했던 것이 굴욕적이었다”고 덧붙였다. 휴스는 자신의 동의 없이 수녀원 공동체가 운영하는 회사의 이사로 등록됐다고도 밝혔다. 재무 담당자로 임명됐지만, 재무 자료를 볼 수 없었고, 실제 권한이나 교육 없이 재정 관리를 강요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기본적인 자유와 선택권이 박탈된 환경에서 수십 년을 보냈다고 말했다. 조사 과정에서 휴스는 수녀원에서의 학대를 가능하게 한 여러 고위 교회 인사들을 고발했다.

북극이 따뜻해질수록, 겨울은 더 추워진다

북극이 따뜻해질수록, 겨울은 더 추워진다

지구온난화가 불러온 ‘이상 한파’ 미국은 인구 절반이 폭풍 영향권 올겨울 북반구 전역이 기록적인 추위와 눈 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1월 하순까지 최저기온이 영하 15도 안팎으로 떨어지는 강추위가 이어졌고, 미국과 유럽,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도 대규모 한파와 폭설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북극만큼 춥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이례적인 겨울 날씨는 지구온난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올겨울 인구 절반이 넘는 1억 8천만~1억 9천만 명 이상이 한파와 눈 폭풍의 영향권에 들었다. 폭설과 결빙, 극심한 한파가 겹치며 최소 11명이 숨졌고, 22개 주와 수도 워싱턴 DC에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하루에만 항공편 1만 편 이상이 취소됐고, 주말 동안 1만 4천 편 넘는 항공편이 결항됐다. 정전 피해도 심각해 루이지애나·텍사스·테네시 등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100만 가구 이상이 전력을 공급받지 못했다. 북동부 지역에는 최대 60㎝의 폭설이 예보됐고, 폭풍이 지나간 뒤에도 강한 한파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됐다. 이 같은 극단적 겨울 날씨의 핵심 원인으로는 ‘극소용돌이’와 ‘제트기류’의 변화가 지목된다. 매년 겨울 북극 상공에는 매우 차갑고 강한 공기 흐름인 극소용돌이가 형성된다. 또 북위 약 60도, 상공 10㎞ 부근에는 시속 약 400㎞로 빠르게 흐르는 제트기류가 형성되는데, 이는 북극의 찬 공기가 중위도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는 일종의 ‘방어선’ 역할을 한다. 극소용돌이가 강하고 안정적일 때는 제트기류가 고위도에 머물며 북극의 찬 공기가 극지방에 갇힌다. 그러나 극소용돌이가 약해지면 제트기류의 경계가 물결처럼 출렁이며 구불구불해지고, 이 틈을 타 북극의 찬 공기가 중위도로 쏟아져 내려오거나, 반대로 중위도의 따뜻한 공기가 북극으로 올라가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갑작스러운 기온 급강하와 폭설, 눈 폭풍이 발생한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 북극 온난화가 있다고 설명한다. MIT 환경·지구·대기과학과 연구팀은 북극 기온 상승이 최근 10년간 미국에서 나타난 극단적인 겨울 날씨와 연관돼 있다는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연구에 따르면 노르웨이와 러시아 위에 있는 바렌츠해와 카라해의 해빙이 녹으면서, 바다가 대기로 더 많은 열을 방출했고, 이로 인해 북극이 빠르게 따뜻해졌다. 이 온난화가 극소용돌이를 약화시키고, 결국 북미와 중위도 지역의 강력한 한파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연구에 참여한 MIT 연구진은 극소용돌이가 강한 원형을 유지하는 기간은 줄어들고, 약화되거나 쪼개지는 빈도는 늘고 있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북극의 찬 공기가 예전보다 더 자주, 더 깊숙이 남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러시아 극동 캄차카반도에는 하루 만에 눈이 2m 가까이 쌓이며 비상사태가 선포됐고, 핀란드에서는 기온이 영하 37도까지 떨어졌다. 동아시아와 북미, 북유럽, 러시아 극동 지역은 지형적 특성상 제트기류가 자주 굴곡을 이루는 지역으로, 극소용돌이 약화의 영향을 특히 크게 받는 곳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매년 같은 형태의 겨울이 반복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지구온난화가 지속될수록 날씨의 변동성이 커지고, 갑작스럽게 매우 춥거나 매우 더운 현상이 더 자주 나타날 가능성은 높다고 경고한다. 북극이 따뜻해질수록, 중위도의 겨울은 오히려 더 불안정하고 혹독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겨울은 지구 기후 변화가 우리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스 가톨릭 교구 재정 비리

[진리를 묻다] 그들이 말하는 믿음과 영성은 기만인가, 사기인가?

진실로 의지하는 자

남자 축복일

법원, 천부교 비방 영상 올린 가톨릭 신부에게 삭제 권고

KBS <사사건건> 반론보도문 게재

SBS 프로그램 <당신이 혹하는 사이> 반론 보도문 게시

신앙체험기

“향취에 몸이 시원해지고 공중에 떠 있는 듯해”

“향취에 몸이 시원해지고 공중에 떠 있는 듯해”

꿈에서 뵌 분을 광주공원 집회에서 만나 안수 받는 순간 몸이 가벼워지는 은혜를 체험해 초산동 전도관에서 집회 30분 전 향취 맡고 앉아 있는지 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워 은혜 체험 거듭되며 마음속에 분명한 확신 자리 잡아 저는 1937년 전남 순천시 주암면 광천리에서 3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제 어린 시절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이 맞물린 격변의 시대라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혹시 모를 위급 상황에 대비해 고흥의 한 섬에 미리 거처와 식량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저희 가족은 그 섬으로 피란을 떠났고, 아버지의 준비 덕분에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큰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란살이가 길어지면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고, 어린 마음으로도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저는 배울 기회를 찾아 시내로 나가야겠다는 뜻을 아버지께 여러 차례 말씀드렸고, 고심 끝에 아버지는 제 뜻을 받아들여 다시 거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시내로 나왔지만 형편은 여전히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이대로는 학업을 이어 가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저는 열아홉 살 되던 해, 홀로 광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당시 양장 기술을 배우면 스스로 가게를 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촌 오빠 집에 머물며 양재 학원에 다니기 위해서였습니다. 낮에는 기술을 배우고 저녁에는 공부하며 제 힘으로 앞날을 열어 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느 날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어디선가 시내에 울려 퍼지는 소리가 제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이 오십니다”라는 외침과 함께 전단을 나눠주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 전단에는 며칠 뒤 광주공원에서 집회가 열린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교회를 다녀본 적은 없었지만, 평소 교회 옆을 지날 때마다 들리던 찬송가 소리에 마음이 끌려 이번 기회에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저는 광주 지리에 밝은 사촌 오빠에게 집회 장소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고, 며칠 뒤 집회 날이 되어 오빠와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집회 장소에 다다르자, 이미 아래쪽에서부터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지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언덕 위에 넓게 세워진 천막을 보며 대체 무엇이 있기에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까 싶어 설레는 마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가다 보니 어느새 강대상 근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앞자리에는 몸이 불편한 분들이 모여 있었는데, 제 옆에 앉아 있던 다리가 불편한 분은 박 장로님이 오시면 이쪽이 잘 보인다며 제게 자리를 조금 내주었습니다. 집회가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사람들은 ‘속죄함’ 가사가 담긴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찬송이 잦아들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니,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대체 어떤 분이 오시기에 저토록 마음을 다해 기도할까?’ 궁금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잠시 후 머리 위로 “마음 문 여세요” 하시는 쟁쟁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고개를 들어 단상을 바라본 순간,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단상 위에 서 계신 박 장로님의 모습이 무척 환해 보였고, 그 주변으로 밝은 빛이 감돌았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옳다, 찾았다!” 하는 소리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사실 1~2년 전 꿈속에서 똑같은 분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꿈에서 그분은 환한 빛에 둘러싸인 채 저희 집을 한참 바라보시고 떠나셨는데, 그 모습이 내내 기억에 남아 언젠가 꼭 한 번만이라도 뵙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을 이곳에서 드디어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저는 놀라움에 한동안 단상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예배에 집중했습니다. 박 장로님의 인도로 한참 동안 찬송이 이어졌고, 저도 어느새 찬송을 따라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 놀라운 일들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예배 중 박 장로님께서 쉭쉭 축복하시며 “병자들은 일어나라”고 말씀하시자, 곁에 있던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벙어리 아가씨가 앞으로 나가 찬송을 불렀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을 잃고 있는데, 예배를 마친 박 장로님께서 단상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일일이 안수를 하며 지나가시던 장로님께서는 제게 세 번이나 안수를 해주셨습니다. 그 손길이 닿자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기함과 경건함에 사로잡혀 그 순간 장로님의 얼굴은 감히 제대로 뵐 수 없었지만,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니 와이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조금 전 단상 위에서 뵙던 환한 모습과는 달리, 그 헌신적인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져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날, 집회가 끝났지만 돌아서기 아쉬운 마음이 들어 저는 하루 더 그곳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밤새 철야 기도에도 참여했습니다. 다음 날,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저는 지프차를 타고 떠나시는 박 장로님의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멀어져 가는 지프차를 바라보며 이분을 다시 뵈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곁에 계시던 다른 장로님께 여쭈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서울에 계신다는 대답을 듣자 마음속에는 당장이라도 따라가 뵙고 싶은 간절함이 일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에 아쉬운 마음만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온 저는 한동안 양재 학원에서 디자인 공부를 이어가면서도 머릿속에는 늘 그날의 기억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가을이었습니다. 큰오빠가 전단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집 근처 초산동에 전도관이 세워졌고 그곳에서 박 장로님의 집회가 열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뵙기를 간절히 바랐던 제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집회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하루하루가 더디게 느껴질 만큼 제 마음은 온통 집회를 향해 있었습니다. 저는 큰오빠에게 지난번 집회에서 뵌 분이 보통 분이 아니셨으며, 그분의 말씀은 땅의 말이 아니라 하늘의 말씀처럼 느껴졌다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직접 가서 확인하고, 오빠들에게도 이 놀라운 사실을 꼭 알려주겠노라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되어 저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초산동 집회로 향했습니다. 오후 6시부터 맨 앞자리 단상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예배를 기다리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지난번 집회에서 뵀던 그분을 다시 뵈러 왔으니, 결코 헛된 걸음이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간절한 마음 하나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박 장로님이 오시기 약 30분 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창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향기가 코끝을 스쳤습니다. 처음 맡아보는 신기한 향이었습니다. 혹시 누가 머리에 포마드를 발랐나 싶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맡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잠시 후 몸이 시원해지더니, 자리에 앉아 있는데도 마치 공중에 둥실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놀랍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그때 박 장로님께서 단에 오르시더니 지난번처럼 “마음 문을 여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은혜는 마음 문을 연 사람에게는 폭포수같이 임하지만, 마음 문을 닫은 사람은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시며 다시 한번 마음 문을 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이어 찬송을 인도하시는데,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 수많은 사람 가운데 부족한 저를 이 자리로 이끌어 주셨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라 한동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뒤 박 장로님께서는 “내가 여기 오기 30분 전에 은혜를 부어주었는데, 그때 향취를 맡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세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저요!” 하고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러자 박 장로님께서는 저를 바라보시며 일어나 말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30분 전쯤 몸이 아주 시원해지면서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신 박 장로님께서는 저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어 주셨습니다. 장로님께서는 다시 한번 30분 전에 향취를 맡은 사람이 또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차례로 단상으로 올라가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의 체험담을 들으며 저는 제가 받은 은혜가 결코 우연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로도 수요일마다 초산동에서의 집회는 계속되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오시는 날이면 안수를 해주시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시원함과 향취가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체험들이 쌓여가면서 제 마음에는 분명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렇기에 훗날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라고 하셨을 때도, 제가 겪은 일들을 떠올리며 그 말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기쁨으로 끝까지 구원의 길 가길 소망해”

“기쁨으로 끝까지 구원의 길 가길 소망해”

저는 1952년 부산 동대신동에서 2남 6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메리야스와 여성복, 군복 등을 만드는 의류 공장 세 곳을 운영하며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 직접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어머니(故 김용달 권사)로부터 여러 차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제가 3~4살 무렵, 어머니는 물도 제대로 삼키지 못할 만큼 몸이 쇠약해져 부산도립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가셨는데, 위와 갈비뼈 쪽에 암덩어리가 보인다며 석 달밖에 살 수 없다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 먹고,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다 가보라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둘째 언니와 함께 장로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께서는 잠결에 무척 아름다운 찬송가 음악종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평소 장로교회에서 듣던 종소리와는 전혀 달랐고, 스무 날이 넘도록 계속 반복해서 들리니 이상하게 생각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새벽, 장로교회로 가는 길에 꿈에서만 듣던 바로 그 음악종 소리가 실제로 들려왔고, 그 소리를 따라가 보니 그곳이 바로 동대신동 전도관이었다는 것입니다. 처음 전도관에서 새벽 기도를 드리던 날, 어머니는 무릎을 꿇자마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릴 때 남의 밭에서 오이를 따 먹었던 일부터 미처 죄라고 여기지 못했던 일들까지 하나하나 떠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장로교회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경험이었기에 어머니는 그날 이후 장로교회에는 발길을 끊고 전도관으로 예배를 드리러 다니게 되셨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서울에 출장을 간 친척에게서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께서 한강모래사장에서 집회를 여셨는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꼽추의 등이 펴지는 등 병자들의 병이 낫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곧 부산에서도 집회가 열리니 꼭 가보라는 말에 어머니는 부산 집회에 참석하셨고, 그곳에서 안찰도 받게 되셨습니다. 줄을 서서 안찰을 기다리다가 어머니 차례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다 나았습니까?” 하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아픈 곳을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 어찌 아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순간 몸이 가뿐해지며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들어 본인도 모르게 “네, 다 나았습니다”하고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방긋 웃으셨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 물 한 모금 넘기기 힘들었던 어머니는 밥 한 그릇을 드실 수 있을 만큼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지셨습니다. 무언가 이상하다 싶어 병원을 다시 찾아 검사를 받았더니, 의사는 암덩어리가 사라졌다며 깜짝 놀라더랍니다. 어머니는 이 일을 계기로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고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에 힘쓰셨고, 저희 가족 모두 부산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어머니가 하나님께 안찰 받은 뒤 병이 깨끗이 나아 얼마 후 하나님께서 부산에 내려오셨을 때, 어머니는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식사를 대접하셨고, 가족 모두 안찰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운영하던 공장 세 곳도 직접 둘러보시며 축복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후 저희 가족은 경북 김천으로 이사해 견사공업주식회사를 운영했습니다. 공장 한쪽에는 제단을 마련해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왔고, 종업원들은 아침마다 찬송을 부르며 하루 일을 시작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다 1958년 소사신앙촌 건설이 한창일 때, 저희 가족은 첫 입주자가 되었습니다. 아직 전쟁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던 시절이었지만, 신앙촌 안에는 양옥과 공장들이 반듯하게 줄지어 들어서 있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촌의 모습에 관심을 가진 장관이나 국회의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신앙촌을 찾았고, 저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분들을 안내하시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지나가실 때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니곤 했는데, 저 역시 그 중 하나였습니다. 학교가 세워지기 전 임시학교를 다닐 때는 등하굣길이나 오디나무 아래에서 오디를 따 먹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귀엽다 하시며 코를 살짝 잡아 주시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제 코를 잡아 주셨던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얼마 뒤 신앙촌 안에 학교를 짓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학교를 짓는다는 생각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 저도 어른들을 따라 조그만 돌을 옮겼습니다. 주먹만 한 돌을 들고 가 내려놓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안수해 주셨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기쁘고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습니다. 소사신앙촌에서 초등학교 3학년 초까지 지내다가, 저희 가족은 다시 김천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먼저 내려오고 외할머니께서 마지막으로 짐을 챙겨 오시게 되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할머니를 특별히 부르셔서 유리병 하나를 축복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병에 물을 담으면 생명물이 된다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외할머니는 그 병에 물을 담아 아침마다 저희에게 한 컵씩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열 번 정도 마신 뒤 문득 제 마음에 의심이 들었습니다. ‘물을 하나님께서 직접 축복해 주신 것도 아닌데, 이 물이 정말 생명물일까?’ 그래서 저는 집에 있던 두 개의 병에 각각 물을 담아 한 병에는 ‘생명물’, 다른 한 병에는 ‘물’이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약 1년쯤 지난 뒤 다시 확인해 보았습니다. 두 병의 상태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물’이라고 적은 병의 물 색은 누렇게 변하고 이끼가 낀 듯했으며, 뚜껑을 여는 순간 썩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반면 ‘생명물’이라고 적은 병의 물은 처음 그대로 맑은 상태였습니다. 그제야 저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병에 담긴 물이 정말 생명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병에 물을 담아 두었더니 생명물이 되었고 1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맑아 1년 후, 저희 가족은 다시 소사신앙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여러 차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만제단에서 예배를 드릴 때면, 제단 한쪽에 이슬처럼 동글동글한 물방울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이곤 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 만져 보려 하면, 눈을 뜨는 순간 사라지는 일이 여러 번 반복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제가 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어머니께 보여 드렸더니, 그것이 바로 이슬성신이라고 하셔서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또 한 번은 예배 중에 꽃향기 같은 향긋한 냄새가 계속 나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 여쭤보니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향취 은혜라고 하셨고, 그때 저는 ‘아,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하나님께서는 전국을 다니시며 전도 집회를 여셨습니다. 학교를 쉬는 날이면 저도 그 길을 함께 따라나섰습니다. 집회 장소에 먼저 도착한 특전대 관악부가 찬송가 96장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를 연주하며 “지금 불의 사자 감람나무께서 오시니 모두 가십시다”라고 외치면,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습니다. 저는 어른들의 등을 밀어 드리며 언덕 위 교회까지 안내했는데, 그렇게 오르내리다 보면 어느새 예배실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저희는 예배실 밖에 서서 창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그 시간은 제게 무엇보다 기쁘고 가슴 벅찬 시간이었습니다. 스무 살 무렵, 저는 소사신앙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기장신앙촌에 입사해 약 8년 동안 수출 봉제 부서에서 근무했습니다. 이후 신앙촌상회에서 잠시 일하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도 LA 제단에 다니기는 했지만, 여러 사업을 운영하며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신앙에 온전히 집중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문득 삶이 부질없게 느껴졌고, 그럴수록 신앙촌이 더욱 그리워졌습니다. 결국 저는 15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귀국한 뒤에는 다시 기장교회를 다니며 소비조합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와 함께 미국에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는데, 신기하게도 제 귓가에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라는 찬송가가 계속 들려왔습니다. 그 찬송은 미국에 머무는 동안은 물론, 집으로 돌아오는 길까지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 계시는 동안 어머니는 호흡기 장애로 숨 쉬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는데, 그때 어머니 귀에 “걱정하지 마. 기장까지 내가 데려다줄게”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 그대로 저희는 무사히 기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이어오시던 어머니께서는 1999년, 80세를 일기로 운명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는 기장신앙촌 장례반 권사님들께서 도와주셨습니다. 평소 간경화를 앓고 계셨지만, 입관할 때 생명물로 씻겨 드리고 입에도 넣어 드리자 얼굴이 환하게 피었고, 굳어 있던 몸도 부드럽게 움직여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신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어머니를 평안히 보내드릴 수 있어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30년 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생명물로 온몸을 씻겨 드리자 얼굴이 환하게 피며 평안해 보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생명물로 환하게 피어 가신 모습을 직접 보며, 저는 하나님과 생명물의 권능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신앙촌 여러 부서를 거쳐 다시 기장신앙촌 소비조합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신앙촌 간장 선물세트 영업으로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누군가 제 등을 살짝 밀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 더욱 힘을 내어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하나님께서 곁에 함께 계시는 듯 등을 살짝 밀어주셔 소비조합원으로 일하며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되새겨 보게 됩니다. 저희에게 기쁨을 주시고 일할 힘과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시면서도 더럽고 추한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해 그 모든 것을 희생하셨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게 됩니다. 건강을 허락해 주신 이 시간 동안, 기장신앙촌 소비조합원으로서 맡겨진 사명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다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오늘도 은혜를 전하며, 죄 씻음 받아 천국에 이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신앙체험기 특집

천부교회를 찾아서

뉴스
법의 판결로 증명된 진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기성교단의 조직적 음해와 언론 왜곡 이슬성신 사진, 코닥사 감정으로 진실 확인 1999년 MBC 왜곡 방송 법원, “허위사실, 명예훼손” 판결 2000년대 이후 온라인 허위 유포, 잇단 승소 신앙촌 방문자들의 정반대 평가 법의 심판으로 드러난 진실 왜곡은 결코 진실을 가릴 수 없어 끊이지 않은 왜곡과 핍박 1990년대는 천부교 역사에서 새로운 도약의 시기였다. 전국 곳곳에 성전이 새로 세워지고, 생명물두부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경제적 기반이 한층 강화됐다. 시온오케스트라 창단과 천부교 소비조합 체육대회 개최 등 문화 활동도 활발히 이어졌다. 그러나 성장의 발걸음 뒤에는 언제나 거센 왜곡과 핍박이 뒤따랐다. 사실 천부교를 향한 음해는 초창기부터 시작되었다. 1955년 이 땅에서 하나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기성교회는 끊임없는 허위 날조와 비방을 퍼뜨리며 많은 고통을 안겼다. 1950년대 하나님 집회에서 2,000여 명의 목사들은 은혜를 체험하고 이를 증거했다. 그러나 천부교의 급격한 확산을 경계한 기성교단은 곧 이단으로 규정하며 은혜받은 사람들을 돌아서게 만들었다. 이후 언론과 결탁한 조직적 모함이 이어졌고, 온갖 더러운 죄목이 조작되어 하나님께 덮어씌워졌다. 그들은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해 언론에 퍼뜨림으로써 사회 전반에 천부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심으려 했다. 일부 언론은 이러한 주장들을 사실 확인도 없이 그대로 보도해 언론 본연의 사명을 저버렸다. 대표적 사례가 1957년 이만제단에서 촬영된 이슬성신 사진에 대한 조작 의혹이었다. 동아일보는 이슬성신이 내리는 장면을 조작이라고 대서특필했으며, 하나님께서 정치적 탄압을 받으셨을 때도 같은 주장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집회를 허가해 직접 촬영해 보면 진위가 드러날 것”이라며 공개 검증을 제안하셨지만, 기성교회의 압력 속에 집회 허가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96년 추수감사절 전야, 신앙촌 하늘에 내린 이슬성신 사진은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이듬해 이슬성신 사진을 공식 감정한 미국 코닥사는 “이 현상은 사실이며, 사진에 조작 흔적이 없고,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하고 있다고 보입니다”라는 회신을 보내왔다. 이는 수십 년간 이어진 왜곡과 비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함께하신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이처럼 1950년대부터 이어진 왜곡과 음해는 1990년대에도 멈추지 않았다. 1999년 MBC 사건, 천부교 명예훼손 그러던 중 1999년, 천부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사건이 다시 발생했다. MBC가 새천년을 앞두고 제작한 다큐멘터리 ‘한국 100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에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한 종교들 사이에 아무 관련이 없는 천부교를 억지로 포함시킨 것이다. 백백교, 용화교, 동방교, 휴거론자 등 실제 종말론적 성향을 보인 종교 집단과 나란히 배열하면서, 천부교가 마치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집단인 것처럼 왜곡했다. 방송 제작 과정에서 당사자인 교단 측의 의견은 철저히 배제된 채, ‘신흥종교연구소’의 탁명환과 일부 배교자들의 거짓 진술만이 근거로 사용되었다. 천부교는 방송 전 사실 확인과 방영 보류를 요청했으나, MBC는 이를 묵살하고 1999년 6월 3일 ‘2000년은 없다-혹세무민 종말론’이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강행했다. 이에 천부교는 이번 사건이 교단 전체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만큼, 강력한 법적 대응에 나섰다. 역사적 승소 판결, 법정에서 확인된 허위 주장 2000년 10월 27일, 법원은 천부교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판결문은 방송 내용이 사실과 다르며, 천부교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했음을 명확히 인정했다. 이 판결은 천부교 역사상 주요 언론사를 상대로 한 첫 승소 사례이자, 오랜 왜곡이 허위였음을 사법부가 공식 확인한 역사적 기록으로 남았다. 법원은 방송 내용 중 다수가 허위임을 밝혔다. 신앙촌 근로자들이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다는 보도, 생명물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며 판매했다고 한 주장, 신앙촌 입주 신도들의 주택 구입을 재산 헌납으로 왜곡한 내용, 전도관 창시 이전에 생긴 동방교가 전도관을 모델로 삼았다는 주장 등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판명되었다.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했다거나, 격암유록을 하나님의 근거로 삼았다는 내용 역시 진실성이 없다고 했다. MBC는 방송에서 ‘천부교’라는 명칭을 직접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름이나 명칭이 직접 언급되지 않더라도 방송 전반의 맥락과 ‘신앙촌’, ‘전도관’ 등의 명칭을 종합하면, 시청자 대다수가 천부교를 지칭한다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는 천부교 및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로 특정된다고 판시했다. 특히 살인·간음 사건 등으로 물의를 빚은 다른 종교와 천부교를 동일 선상에 놓아 방영한 MBC의 보도는, 시청자들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방송 그대로 천부교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갖게 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MBC는 사회 혼란 속 종말론적 종교를 경고하는 공익 목적이었다고 항변했지만, 재판부는 “아무리 의도가 공익적이라 하더라도 허위사실이라면 위법성을 면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전국적 파급력이 큰 종교 보도의 경우,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방영 전 철저한 사실 확인이 필수라는 점도 강조했다. 결국 법원은 MBC가 허위사실에 근거한 보도로 천부교와 신도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인정하고, 정신적 손해배상 2,5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지속된 법적 대응과 연이은 승소 MBC 사건 이후에도 악의적인 허위 게시물과 유포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천부교는 적극적인 법적 대응을 통해 사실관계를 바로잡아 나갔다. 2013년에는 한 인터넷 블로거가 천부교를 비방하는 20여 건의 글을 게시하며 입에 담기 어려운 허위사실을 적시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재판 내내 범죄사실을 부인하며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1999년 MBC 보도 사건 판결을 인용하며 해당 글이 근거 없는 허위사실임을 명확히 했다. 결국 블로거는 명예훼손죄가 인정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신앙촌 재개발 과정에 불법 매각과 폭력배 동원, 강제 철거가 있었다는 거짓 글을 퍼뜨리거나, 천부교를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 종교와 연관 짓는 허위 내용을 유포한 이들 역시 벌금형을 받았다. 일부 작성자는 이러한 행동이 종교적 편향과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하고 교단에 사과문을 전달했다. 2020년에는 한 가톨릭 신부가 천부교를 비방하는 영상을 제작해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게시한 사건이 있었다. 코로나19 확산과 함께 신천지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시기, 황 신부는 ‘신천지 낱낱이 파헤치기’라는 영상에서 천부교를 근거 없이 비난하며, 신천지의 교리와 행태가 대부분 천부교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영상에는 노동력 착취, 성적 유린, 발 씻은 물 판매 등 상식 이하의 내용까지 포함됐다. 그러나 재판부는 영상 속 주장이 사실이라고 인정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고 판시하고, 판결일로부터 일주일 이내에 모든 영상을 삭제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향후 같은 주장을 담은 강연·설교·영상·서적 발간 시마다 각 1,000만 원을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에 지급하도록 조건을 부과했다. 이와 더불어, 2021년 1월 13일 부산지법 동부지원은 한국천부교신도연합회와 묘지 관리인, 유족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허 목사 등 피고 전원에게 배상을 명령했다. 이들은 2014년 천부교 추모공원에 암매장이 있다는 허위 주장을 퍼뜨리며 세 차례 무단 침입해 분묘를 파헤치고, MBC에 거짓 제보와 인터뷰를 제공해 방송까지 내보냈다. 그 과정에서 묘지 관리인에게 상해를 입히고, 유족들에게 깊은 정신적 피해를 주었으며, 천부교의 사회적 평가를 크게 훼손했다. 이에 법원은 피고들이 한국천부교신도연합회에 3,000만 원, 묘지 관리인 2명에게 각 150만 원과 250만 원, 유족 6명에게 각 3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 사건에는 허 목사 외에도 기독교국제뉴스 최 대표, 경찰일보 현 기자, 총신대 서 교수, 그리고 MBC <추적사건25시> 류 기자 등이 연루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 허위 주장은 2016년 11월 MBC <생방송 오늘 아침>에서도 방영되어, 2018년 1월 법원에서 명예훼손 판결을 받았다. MBC는 천부교와 신도연합회에게 각 1억 2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정정보도 조건의 조정이 성립되어 사실을 바로잡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편견을 깨뜨린 사람들의 평가 언론의 부정적 보도와 달리, 신앙촌을 직접 와 본 사람들의 평가는 전혀 달랐다. 1960년대 덕소신앙촌을 방문한 국내 최초 여성 기자인 최은희 씨는 “듣던 말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규모와 아름다운 신도들의 근로정신에 놀랐습니다.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에는 신앙촌이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렸으면 합니다. 신앙촌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나라의 보배입니다”라고 감탄했다. 또한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선생도 신앙촌을 방문한 뒤 “한국에서 처음으로 소망을 보았습니다. 우리 힘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신앙촌을 건설한 것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온 세계를 다 돌아보았지만, 신앙촌 같은 곳은 없었습니다. 국민 전체가 감사할 일입니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99년 6월, MBC 방송에 패널로 출연했던 서울대 종교학과 정진홍 교수는 “6·25 직후 구호물자 나눠 먹기 싸움에 바빴던 기성교회는 신앙촌을 비방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직언했다. 그는 이후 인터뷰에서 “나는 학자적 양심에 따랐을 뿐”이라며, 직접 신앙촌을 방문해 본 경험을 근거로 폐허 속에서 건설된 창조성과 순수성을 높이 평가했다. 최근의 증언도 다르지 않다. 신앙촌을 방문했던 한 참석자는 “신앙촌에 와보니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신앙촌 사람들에게서 평화로운 마음을 느끼게 되었고, ‘여기가 천국이구나. 하나님의 세계가 이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했다. 또 다른 참석자는 “신앙촌을 안 좋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직접 와 보니 전혀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편견을 깨뜨려야 하고,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왜곡을 넘어선 법의 심판 시대와 매체는 바뀌었더라도 허위와 왜곡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미 법정에서 결론 난 사실조차 되풀이되어 유포되고, 그것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며 확대 재생산하는 행태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법의 심판으로 사람들은 점차 그 뿌리가 어디에서 오는지, 그 속에 어떤 진실이 가려져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1999년 MBC 사건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법적 승소는 수십 년간 퍼져온 왜곡과 비방이 근거 없는 허위사실이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는 동시에 진실은 결코 왜곡으로 가려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숱한 왜곡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걸어온 천부교 역사가 바로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신앙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br />
신앙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신앙신보 속 천부교 역사
“세계적 모범임을 확신”

“세계적 모범임을 확신”

기획
세계 종교 탐구 <54>과학과 종교는 우주 너머의 진실에  얼마나 도달했는가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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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침반] 이탈리아 감독 루치아노, 가톨릭교회 루프니크 사제의 수녀 성학대를 주제로 다큐 제작…영성은 악으로 작동해 악을 낳은 것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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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춘추

[진리를 묻다] 그들이 말하는 믿음과 영성은 기만인가, 사기인가?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4. 권능의 집회마다 기성교회의 방해 공작 치열
천부교 바로가기

글과 사람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전도의 시작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전도의 시작

황수남 관장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SANC식품여고 졸업생과 재학생, 입학생을 배출했다. 전도에 대해 묻자 황 관장은 상대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답했다. “새로운 곳에 가게 되면 아이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려고 해요. 겉으로는 밝아 보이는 아이들도 저마다 말 못 할 고민을 안고 있거든요. 특히 학생들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아이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합니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아이들의 진심도 보였다. 약속을 지키려는 마음,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내려는 자세, 베풀 줄 아는 모습 속에서 황 관장은 이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 알찬 열매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여러 관장님들께서 정성으로 키워오신 귀한 아이들이잖아요. 잘 자라 구원의 길을 함께 가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기도를 많이 드렸습니다.” 전도의 준비와 실천 평소 계획과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는 황 관장은 학생들의 입학 과정에서도 무엇을 도와야 할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1~2주 단위로 아이들에 대한 계획표를 작성해 엑셀 파일에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하면서 아이들의 고민에 맞춰 어느 시점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바탕으로 들려 줄 말씀과 체험기를 선정했어요. 시각적인 자료가 필요할 때면 PPT를 만들어 활용했고, 식사와 간식도 무엇을 준비할지 미리 생각해 두었습니다.” 특히 방학 기간은 아이들과 유대관계를 쌓는 소중한 기회였다. 거의 매일 아이들을 만나 함께 요리하고, 말씀과 체험기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속마음을 나눴다. “친해져야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아이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놓치지 않으려고 했어요. 필요하면 주변에 물어보고 자료도 찾아보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친분이 없더라도 직접 섭외했습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적재적소에 연결해주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했습니다.” 황 관장은 입학설명회에 오지 못한 학부모들을 위해 따로 자리를 마련해 학교 생활과 진로를 상세히 안내하고, 아이들에게는 먼저 입학한 선배 언니들과 직접 대화하며 궁금증을 풀 수 있도록 했다. 간절한 기도 식품고 입학을 간절히 원하던 한 학생의 일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여러 현실적인 제약으로 입학 허락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매일 교회에 들러 기도했다. 황 관장도 아이의 간절한 마음을 안타까워하며 함께 기도했다. “아이가 정말 가고 싶어 했어요. 기도할 때마다 그 아이의 간절함이 떠올라 저도 노트에 아이 이름을 적으며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접수 마감이 다가오는데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솔직히 여기까지인가 싶은 마음이 살짝 스치기도 했지만, 아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감 하루 전날 밤, 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허락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밝았는지 몰라요. 그다음 날 신기하게도 모든 절차가 술술 풀리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길을 열어 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의 시간을 다 알고 이날을 준비해 두신 것 같았어요.” 황 관장은 그 일을 통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다시 한번 깊이 느꼈다고 했다. 은혜 속에 함께 성장하는 시간 입학이 결정된 후, 황 관장은 입학까지 남은 두 달 반 동안 아이와 거의 매일을 함께 보냈습니다. 낯선 기숙사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학업과 생활 습관을 함께 점검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를 만나는 일이 사실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모아 함께 준비하는 과정이 참 기쁘고 즐거웠어요.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그 시간을 기억해 주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황 관장은 그 시간을 통해 자신 또한 아이와 함께 성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렇게 입학한 아이들은 이제 후배를 살뜰히 챙기는 든든한 선배가 되었다. 처음에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새로운 신입생이 들어오면 마치 자기 일처럼 나서서 돕고 그 마음은 다시 다음 후배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학교에 입학해 밝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정말 대견합니다. 아직 어리고 신앙이 약하다고만 생각했던 아이들이 어느새 훌쩍 자라 있는 걸 보면서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키워 주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학생관장으로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도 바로 그런 때다. “입학한 아이들이 이제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바르게 잘 살고 싶다고 말해 줄 때, 그리고 축복일이 되면 저를 먼저 챙겨주며 마음을 써줄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제가 오히려 아이들에게 큰 힘을 얻습니다.” 졸업생 조미희 씨는 “관장님은 제게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 같은 분이세요. 중학생 때부터 제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고, 졸업한 지금도 변함없이 저를 챙겨 주고 계세요. 늘 곁에서 힘이 되어주시는 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전했다.

바쁘게 활동하는 소비조합이 되겠습니다

바쁘게 활동하는 소비조합이 되겠습니다

이미경 사장이 신앙촌 소비조합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13년이다. 한일합섬 양재부에서 근무하다 소비조합 활동을 시작하게 된 이 사장은 “처음에는 선배님들께 많이 물어보고 배우면서 조금씩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해마다 추석과 설 명절이 되면 몸과 마음이 분주해진다. “가만히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답답해요. 되든 안 되든 작은 곳이라도 계속 찾아다니게 돼요.” 새마을금고, 복지시설, 보험회사, 요양병원, 버스 여객 회사, 엘리베이터 회사 등 어디든 문을 두드린다. 부산은 신앙촌 본사와 가까운 지역이어서 신앙촌 제품에 대한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이 사장은 “부산에서는 신앙촌 간장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라며 이는 오랜 시간 동안 선배 소비조합원들이 쌓아온 홍보와 신뢰 덕분이라고 덧붙였다. “신앙촌 간장을 조금이라도 알고 계신 분들은 이 간장이 품질이 좋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요.” 이 사장은 그런 분들을 만나면 대화를 시작하기가 훨씬 수월하다고 말했다. 양조간장으로서의 신뢰도와 밥만 비벼도 맛있다는 점, 선물로 받았을 때의 만족감도 함께 설명한다. 이 사장은 영업은 시간을 두고 관계를 쌓는 일이 중요하다며 같은 지역을 꾸준히 찾다 보니 얼굴이 익고, 그 점이 자연스럽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성격이 외향적인지 내성적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도 했다. “영업은 누구에게나 어렵죠. 그래도 해보겠다는 생각, 해내야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조금은 덜 어려워요.” 이 사장에게 이번 설 시즌은 어느 때보다 바빴다. 농협과 새마을금고를 중심으로 간장 선물세트 주문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농협 총회는 이 사장이 마음에 두고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접근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하는 총회 영업이고, 규모가 커서 조심스러웠어요.” 혼자 힘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해 본사 영업팀의 도움을 받아 함께 움직이게 됐고, 좋은 성과로 이어졌다. 새마을금고 주문은 더 오랜 기다림 끝에 성사됐다. 두 곳의 금고가 통합되면서 한동안 간장 선물세트가 들어가지 못했던 곳이었다. 통합 전에는 두어 차례 주문이 있었던 곳이라 아쉬움이 더 컸다. 이 사장은 “통합이 되면서 간장 선물세트보다 다른 선물을 선호하는 임원분이 계셨어요”라며 “담당자가 해주고 싶어도 내부 의견을 모두 고려해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라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설을 20여 일 앞두고는 거의 포기하고 있었어요.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죠.” 그러던 중 담당자로부터 “사장님, 많이 기다리셨죠?”라며 연락이 왔고, 주문이 확정됐다. “전화받고 정말 기뻤어요. 이번을 계기로 다른 선물을 선호하셨던 분이 신앙촌간장 선물세트의 진가를 아시게 되면 좋겠어요. 그래야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이 사장이 시즌 기간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마음가짐이다. “마음에 불평이나 불만이 있으면 영업이 잘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어요.” 마지막으로 이미경 사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소비조합을 할수록 하나님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돼요. 소비조합으로 활동할 수 있음에 늘 감사드립니다.”

소중한 추억과 배움의 시간

소중한 추억과 배움의 시간

모든 것이 낯설고 설렘으로 가득했던 새 학기를 지나, 어느새 소중한 추억이 가득한 시간을 보내고, 설레는 마음만큼 아쉬움과 긴장 속에서 졸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떠나 새로운 시작을 앞둔 지금, 입학식 날 어색하고 긴장된 얼굴로 서 있던 우리와 달리 이제는 함께 웃고 친해진 모습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집니다. 함께 어버이날과 새해 공연을 준비했던 시간, 시험이 끝난 뒤 학교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영화를 보고 웃던 순간, 여름날 수영장에서 저녁을 먹고 시원하게 수영했던 기억, 길을 걷다 창틀 위에 앉은 새를 보고 귀여워하며 한참을 바라본 시간, 그리고 겨울 아침 운동 중 하늘에 가득한 별을 바라보며 신기해하던 순간까지 이 모든 시간이 너무나 소중한 추억으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때로는 의견 차이로 다투기도 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고,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체육대회를 통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때 비로소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끈기를 얻을 수 있었고, 다양한 수업을 통해 여러 경험과 지식을 쌓으며 생각의 폭을 넓히고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 빛나는 순간들이 후배들에게도 가득하길 바라며, 비록 학교를 떠나더라도 언제든 따뜻한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선배로 남고 싶습니다. 저희가 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아낌없는 조언과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들, 늘 따뜻한 관심으로 살펴주신 선배님들, 언제나 부족함 없이 건강하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돌봐주신 신앙촌의 어른분들, 그리고 언제나 저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은혜 안에서 진리를 깨닫고 옳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늘 감사함을 잊지 않고, 그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온유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키우며, 언제나 하나님 말씀 안에서 정직하고 맑게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바른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바른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배움과 깨달음이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시작했던 대학 생활은 기대와 설렘만큼이나 고민과 도전의 시간이었습니다. 어려운 순간도 있었지만 맡은 바를 성실히 수행하고 목표를 이뤄냈을 때, 그 과정 하나하나가 저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에서 AI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며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인공지능이 사람 대신 많은 역할을 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 기술을 어떤 방향으로 사용하고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는 결국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술 그 자체보다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가치관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바른 마음가짐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의 법과 규칙을 지키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양심을 지키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제가 가져야하는 바른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잊지 않고, 매 순간 스스로를 돌아보며 바른길로 나아가겠습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동안 주변에서 건네주신 배려와 격려의 한마디는 큰 힘이 되었고,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낼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졸업을 맞이하며 또 다른 시작 앞에 서 있습니다. 앞으로도 여러 분야를 배우고 경험해 가며, 제 전공이 다양한 영역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성장해 나가는 입사생이 되겠습니다.

주니어

‘우리들의 이순신’ 역사 속 발자취를 따라가 보다

‘우리들의 이순신’ 역사 속 발자취를 따라가 보다

■ 동아시아의 거대한 전쟁, 임진왜란 1592년에 시작된 임진왜란은 일본과 조선 두 나라 만의 싸움이 아니었어요. 대륙을 꿈꾸던 일본과 이를 막으려던 명나라, 그리고 나라의 운명을 걸고 싸운 조선까지, 동아시아 전체가 맞붙은 큰 전쟁이었답니다.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은 큰 어려움을 겪었어요.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단 20일 만에 한양(서울)이 점령당했고, 선조 임금님은 의주까지 피란을 떠나야 했어요. 하지만 위기의 조선을 버티게 한 힘은 바로 바다에 있었어요. 이순신 장군은 옥포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둔 뒤, 사천, 당포, 한산도로 이어지는 해전에서도 일본 수군을 제압했어요. 특히 한산도 대첩은 학익진 전술로 일본의 보급로를 막아 전쟁의 흐름을 바꾼 전략적 승리였답니다. ■ 명량해전: 철저한 계산의 승리 1597년,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파직되었다가 복귀했을 때 남은 배는 12척뿐이었어요. 이후 배를 정비한 뒤, 단 13척으로 수백 척의 적군과 맞서 싸운 전투가 바로 명량해전이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기적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철저한 계산이 숨어 있었답니다. 승리의 비밀은 바로 지형에 있었어요. 전라남도 해남군과 진도군 사이에 있는 ‘명량’은 바다가 울부짖는 것처럼 격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우리말로는 ‘울돌목’이라고 불러요.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의 좁은 지형과 빠른 물살을 활용해, 적들이 한꺼번에 공격하지 못하도록 길목을 막으면서 승리를 이끌었어요. ■ 마지막까지 다한 책임감 1598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셨어요. 전쟁은 막바지였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지휘를 멈추지 않았답니다. 『난중일기』에는 승리의 기쁨보다 병사와 백성에 대한 걱정, 전염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 그리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더 자주 나와요.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책임을 다한 이순신 장군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된답니다.

85. 요나와 니느웨성의 회개

85. 요나와 니느웨성의 회개

내 마음에도 깨진 유리창이 있을까?

내 마음에도 깨진 유리창이 있을까?

떼굴떼굴 ‘다른 그림찾기’

떼굴떼굴 ‘다른 그림찾기’

손정숙 권사님 편(2)

손정숙 권사님 편(2)

교양

얼음은 사라지는데 북극곰은 더 살쪘다

얼음은 사라지는데 북극곰은 더 살쪘다

먹이 바꿔 살아남은 북극곰 일시적 현상일 가능성 경고 기후 변화로 북극의 얼음이 빠르게 줄어들면서 북극곰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는 인식과 달리, 최근 일부 지역의 북극곰이 오히려 더 살이 찌고 건강해졌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노르웨이 극지연구소 연구진은 1992년부터 2019년까지 스발바르제도에서 성체 북극곰 770마리의 체중을 조사한 결과, 시간이 지날수록 평균 체중이 증가한 사실을 확인했다. 같은 기간 이 지역에서는 지구온난화로 얼음이 없는 날이 약 100일 늘어나, 북극곰의 사냥 환경은 크게 악화된 상태였다. 북극곰은 보통 해빙 위에서 물범을 사냥해 생존하지만, 얼음이 줄면서 사냥이 어려워졌다. 실제로 마른 북극곰의 모습이 자주 목격되며 위기론이 커졌다. 그러나 연구진은 북극곰이 환경 변화에 적응해 순록이나 바다코끼리 같은 육상 먹이를 더 많이 섭취하면서 체중을 회복한 것으로 분석했다. 특히 보호 정책으로 개체 수가 늘어난 바다코끼리가 새로운 주요 먹이가 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연구를 이끈 욘 아르스 박사는 해빙 감소로 건강이 나빠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결과는 달랐다고 설명했다. 해빙 면적이 줄면서 물범이 한곳에 몰려 북극곰의 사냥이 오히려 쉬워졌을 가능성도 언급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변화가 일시적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냥터까지 이동해야 하는 거리가 늘어나면 에너지 소모가 커지고, 결국 개체 수 감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폴라 베어스 인터내셔널의 존 화이트먼 박사는 해빙이 없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새끼와 어린 개체의 생존율이 낮아진다는 연구 결과를 들어, 장기적인 해빙 감소는 북극곰의 미래를 위협한다고 강조했다.

철저한 계획이 성취를 만든다

인류 역사를 앞당긴 발견들

폭염에 뒤덮인 호주, ‘재앙’ 수준 산불 확산

30분 간 매일 ‘스트레칭’…우리 몸에 일어나는 일

30분 간 매일 ‘스트레칭’…우리 몸에 일어나는 일

전문가들은 “우리 몸은 살아 있는 도구와 같다”며 “일상적인 스트레스, 반복 동작, 장시간 앉아 있는 생활은 근육과 결합조직에 긴장을 쌓이게 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조직이 점점 짧아지고 굳어지면서 자세, 관절 정렬, 혈액순환, 신경 신호 전달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장기간 스트레칭을 지속한 사람들을 분석한 연구들에서는 관절 가동 범위 증가와 근육 손상 위험 감소가 확인됐다. 나이와 관계없이 스트레칭이 ‘움직임의 기본 체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이유다. 매일 스트레칭을 하면 생기는 변화들 ➀ 몸과 마음을 동시에 이완시킨다. 스트레칭을 시작한 지 몇 분 만에 신체는 이완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호흡이 깊어지고, 신경계가 안정되면서 근육 긴장이 서서히 풀린다. 전문가들은 “많은 사람이 즉각적인 편안함, 호흡의 여유, 정신적 맑아짐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➁혈액순환이 좋아지고 심박수가 안정되면서 쌓였던 긴장이 자연스럽게 내려간다. 그 결과 기분 개선, 스트레스 감소, 집중력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➂ 관절 가동 범위와 회복력이 향상된다. 스트레칭을 꾸준히 하면 ‘사용 가능한 움직임의 범위’가 넓어진다. 전문가들은 “사람들은 덜 뻣뻣해지고, 운동 후 회복이 빨라지며, 일상적인 움직임에 더 탄력적으로 반응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근육통 감소, 조직 회복 속도 개선, 그리고 일상과 운동에서의 부하를 더 잘 견디는 몸으로 이어진다. ➃부상 위험도 감소한다. 정기적인 스트레칭은 관절을 전체 가동 범위로 움직이게 해 일상 동작을 더 안전하게 만든다. 특히 고령층에게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스트레칭은 안정화 근육을 강화하고 신체 인식을 높여 낙상 위험을 줄인다”고 설명한다. 걷기, 옷 입기, 물건 집기, 의자에서 일어나기, 보도블록을 내려오는 일 같은 일상 동작이 더 수월하고 안전해진다. ➄일상 통증이 완화된다. 허리 통증, 목·어깨 결림, 고관절 뻣뻣함, 반복적인 두통이 줄어드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근육과 결합조직의 과도한 긴장과 압박이 완화되기 때문이다. ➅자세와 호흡 개선 효과도 있다. 스트레칭은 척추 정렬을 돕고, 깊고 효율적인 호흡을 가능하게 한다. 코어, 등, 엉덩이, 깊은 안정화 근육들이 활성화되면서 몸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구조를 갖게 된다. 자세가 좋아지면 흉곽이 열리고, 횡격막 움직임이 자유로워져 호흡도 자연스럽게 깊어진다. 핵심은 ‘단순함과 지속성’ 전문가들은 스트레칭을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좋아하는 동작 위주로, 부담 없이, 그러나 매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 이 습관이 일상이 되고, 위에서 언급한 변화들이 차곡차곡 따라온다. 하루 30분의 스트레칭은 당장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기보다 몸이 덜 아프고 덜 굳는 방향으로 조용히 누적된다. 그 차이는 어느 날 문득, 움직임이 훨씬 편해졌다는 사실로 체감하게 된다.

이제는 4세대 유산균? 뭐가 다른가요?

겨울철 대표 과일 귤, 껍질마저 버릴 것이 없다

알록달록 파프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