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하계 MT

대학생 하계 MT

신앙심 높이고 친목 다지는 기회 천부교의 중추적 역할이 되자 다짐 경기도 부천시 범박교회에서 6월 28일부터 29일까지 대학생 하계 MT가 개최되었다. 이번 MT는 젊은 세대의 신앙심을 깊게 하고, 참가자들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마련된 뜻깊은 행사였다. 첫째 날, 대예배실에서 예배를 드린 학생들은 예배 후에 다양한 활동을 통해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었다. 저녁 시간에는 조별 야식 획득 게임을 진행하며 웃음과 즐거움이 넘치는 시간을 보냈고, 이어서 조별 토크 시간을 통해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서로의 생각을 공유했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하나로 모아 다함께 찬송을 부르는 시간은 참석자들에게 깊은 하나됨을 느끼게 했다. 둘째 날은 아침 예배를 시작으로 ‘신앙촌’에 관한 특강이 이어졌다. 김현진 관장(송탄교회)은 특강에서 신앙촌 건설 당시 하나님께서 현장에서 직접 함께하시며 축복해주신 모습을 전하며,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 신앙촌의 귀중함을 상기시켰다. 이어서 학생들은 천부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오만제단을 방문해, 소사교회 최성례 관장이 들려주는 생생한 교역 생활 경험담과 조언을 듣고 깊은 공감을 나누었다. 점심으로 제공된 로스구이를 즐긴 후에는 인근 야외 활동 장소로 이동해 조별로 레일 바이크를 타고 영종도 인스파이어로 향해 흥미로운 영상을 관람하며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번 MT에 참가한 학생들은 “귀한 말씀을 들으며 천부교 역사와 하나님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고, 대학생 파트가 천부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만제단을 직접 방문해 생생한 체험을 듣고, 팀별 활동을 통해 친해질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모임을 통해 스스로 성장한다는 것을 느꼈고, 앞으로도 이런 모임이 자주 있기를 바랍니다” 등의 소감을 전했다.

요구르트 런, 카카오톡 선물하기에서 만날 수 있어

요구르트 런, 카카오톡 선물하기에서 만날 수 있어

‘서울국제유아교육전&키즈페어’도 참가 신앙촌식품이 7월 11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유아교육전&키즈페어(이하 유교전)’에 참가해 프리미엄 농후발효유 ‘요구르트 런’을 선보였다. 런 판매 부스에서는 시음 및 사은품 증정, 무료배송 등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되어 고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요구르트 런은 당 함량이 낮고 비타민B₂, 칼슘, 식이섬유 등 풍부한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으며, 기능성 유산균인 ‘프로바이오틱스 라프티’ 등을 함유해 장 건강까지 챙길 수 있어 두터운 팬층을 자랑하는 신앙촌의 주력 제품이다. 한편, 요구르트 런, 생명물간장, 생명물두부 등 신앙촌의 인기 제품들은 ‘카카오톡 선물하기’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심폐소생술 교육

심폐소생술 교육

신앙촌 사원 대상 응급상황 실습 신앙촌 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심폐소생술 교육이 4월 22일과 6월 7일, 10일 3회에 걸쳐 학생강당에서 있었다. 이번 교육은 일상생활에서 예고 없이 발생하는 응급상황에 대한 중요성과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사원들의 신속한 위기 대처 능력을 기르기 위해 마련됐다. 교육은 2시간씩 진행되었으며, 골든타임의 중요성, 심정지, 기도 폐쇄 등 응급상황 대처법에 대한 전문 강사의 이론강의 후 인체모형을 이용한 가슴 압박, 자동 심장 충격기(AED) 사용법 등의 실습 과정으로 진행됐다.

6월 중순에 40~50도… 인류 최악의 여름 시작됐다

6월 중순에 40~50도… 인류 최악의 여름 시작됐다

전 세계 주요 도시들이 살인적인 폭염에 시달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북반구에서는 7~8월에 무더위가 가장 심하지만, 이상기후가 계속되면서 올해는 6월부터 폭염이 시작된 것이다. 폭염 피해 규모도 작년보다 더 커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 섭씨 52도에 육박하는 더위 이슬람 최고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와 메디나를 찾은 순례자 1300여 명이 폭염으로 목숨을 잃었다. 6월 25일(현지시각) SPA통신에 따르면 성지순례 기간(6월 14일~19일)에 사우디를 찾은 각국 무슬림 가운데 1301명이 숨진 것으로 파악됐다. 온열 질환을 앓는 환자도 3000여명에 달했다. 사우디 메카 그랜드 모스크는 섭씨 52도에 달하는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고, 이번 성지순례 기간이 폭염의 시작과 겹치면서 참변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도 기현상에 가까운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인도는 지난 5월 말부터 섭씨 52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에 시달리고 있고, 인도 전역엔 이미 폭염 사망자가 160명 넘게 나온 상태다. 열사병 증세로 입원한 사람은 4만명이 넘는다. 올해 인도의 기온은 평년보다 15도가 넘게 올랐고, 폭염 기간 또한 길고 강하게 지속되고 있다. ◇ 덥지 않은 지역까지 펄펄끓어 미국 중부와 동북부 지역에서도 열돔 현상으로 수십년 만에 가장 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6월 20일(현지시각)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날 미국 전역에서 기온이 32.2도를 웃돌며, 1억명의 주민들에게 기상주의보가 발령됐다. 열돔 현상으로 수십 년 만에 가장 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는 미국은 여러 지역에서 기온이 평년보다 10도가량 치솟으며 폭염 주의보 또는 경보가 발령됐다. 이로 인해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일부 지역의 발전소가 멈췄고 전력 공급량을 늘리기 위한 1단계 경보가 발령되기도 했다. 북위 43도에 위치해 날씨가 서늘하다고 알려진 캐나다 토론토 지역도 지난주 평균 온도가 섭씨 35도에 달하며 몸살을 앓고 있다. 여름철에 상대적으로 덥지 않은 이들 지역에서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건 드문 일이다. ◇ 지구촌 덮친 폭염 팬데믹 그리스에서는 한낮 평균온도가 43도에 이르면서 관광객들이 숨지거나 실종되기도 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6월 17일 그리스 남부 마트라키섬에서 미국인 관광객이 숨진 채로 발견됐다. 현지 언론은 그가 더위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 시키노스섬에서도 프랑스 여성 관광객 두 명이 실종됐는데, 당국은 이들이 40도가 넘는 더위에 하이킹을 하다 변을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집트에서도 최근 기온이 40도를 넘어가면서 사망자가 잇따라 발생했다. 이집트 난민 플랫폼(PRE)에 따르면 6월 7일에서 9일 사이 이집트 남부 아스완에선 수단에서 밀입국하려던 난민 40명이 열사병과 탈수증으로 사망했다. 이집트의 7~8월은 보통 35도 수준이지만, 올해는 6월부터 최고기온 50도를 넘긴 상황이다. 그 외 중국, 필리핀에서도 지난달부터 40도가 넘는 가마솥 더위에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가톨릭 기숙학교의 또다른 이야기, 끔찍한 아동 성학대

가톨릭 기숙학교의 또다른 이야기, 끔찍한 아동 성학대

100년 넘게 가톨릭 기숙학교 생활을 강요받으며 문화를 말살 당해 온 아메리카 원주민 어린이들이 성직자와 교사들에 의해 무자비한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미국 연방 정부는 1819년부터 1969년까지 미국 전역의 500개가 넘는 기숙학교에 수만 명의 어린이를 보냈다. 이 정책은 원주민 토지를 압수하고 아메리카 원주민 세대의 정체성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결국 성학대로까지 이어진 사실이 워싱턴 포스트의 조사 결과 밝혀졌다. 전국 아메리카 원주민 기숙 학교 치유 연합의 대표인 데보라 파커는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인디언 기숙학교가 전국적인 범죄 현장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라고 했다. 500개가 넘는 기숙학교의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아메리카 원주민 아이들의 문화를 제거하도록 설계되었다. 교사와 사제들은 아이들이 영어 대신 모국어를 사용하면 구타하고, 긴 머리를 강제로 자르며 굴욕감을 주는 등의 처벌을 가했다. 1900년에는 학령기 원주민 어린이 5명 중 1명이 기숙학교에 다닐 정도로 가학적이었던 이 정책은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는데, 최근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가톨릭교회와 그 분파가 운영하는 80개가 넘는 기숙학교에서 발생한 조직 내 소아성애는 끔찍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워싱턴 포스트 조사에 따르면 22개 기숙학교의 최소 122명의 사제와 목사들이 아메리카 원주민 어린이들을 성적으로 학대한 혐의로 기소됐다. 충격적이게도 이 중 18개 학교에서는 성학대 혐의를 받고 있는 사제나 목사를 고용한 것이 밝혀졌다. 특히 1950년대와 1960년대 연방 기숙 프로그램의 마지막 해에 있었던 학대는 가족에게서 쫓겨난 1,000명 이상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자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64세인 클라리타 바르가스는 자신이 8세였을 때 워싱턴주 오막의 성모 자선교회에 보내졌을 때 고립된 채로 두려움에 떨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사제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그녀를 자신의 사무실로 안내한 뒤 무릎에 앉은 그녀를 더듬고 성추행했다고 말했다. 바르가스는 그로부터 3년 동안 성적 학대가 계속되자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었다고 말했고, 지금도 그 일이 ‘평생 나를 괴롭혔다’고 말한다. 바르가스는 “교회는 내 영혼에 상처를 입혔고, 내 영혼을 앗아갔으며, 내 어린 시절을 빼앗아 갔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우스다코타 주 마티에 있는 기숙학교로 보내진 제랄딘 샤르보노 듀보르트는 “만약 누군가가 당신이 학대를 극복했다고 말한다면, 저를 믿으십시오. 당신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현재 75세인 그녀는 16세 때 가톨릭 사제에게 교회 지하실에서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으며 나중에 강제로 낙태를 당했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간 캐나다와 미국에서는 기숙학교가 있던 여러 곳에서 대규모 무덤이 발견되면서 원주민 어린이들의 처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전체적으로 학교에서 사망한 아메리카 원주민 어린이의 수는 약 40,000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는 아직 성학대의 모든 것이 드러나지 않았다며, 이번 조사에 나서지 않거나, 나설 기회가 없었던 피해자들이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기숙학교의 설계 방식 때문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아이들은 종종 가족으로부터 수백 마일 떨어진 곳으로 이사했고, 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소외되었다. 전직 가톨릭 신부 패트릭 J. 월은 기숙학교가 ‘가해자의 원더랜드’였다고 말하며, “피해자들이 도움을 청할 수는 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듣거나 믿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 가톨릭교회 내에서 만연한 학대와 체계적 은폐 사실이 전 세계에 폭로되면서 일부 생존자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공유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알래스카 랭겔 연구소의 전 학생이었던 짐 라벨은 “나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67년을 기다려왔다”고 더 포스트에 말했다. 현재 77세인 그는 집에서 700마일 떨어진 기숙학교로 보내졌고, 가족과 문화에서 쫓겨났을 때부터 그에게는 이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가톨릭교회의 범죄를 지적하는 이유는 수많은 폭로 이후 사람들이 교회와 같은 강력한 단체에 대항할 수 있고,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아메리카 원주민 피해자 변호사 비토 드 라 크루즈는 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가톨릭교회는 캐나다 등 일부 피해자들에게 ‘문화 파괴’에 대한 역할에 대해 특별히 사과하면서도 기숙학교에서 만연한 학대에 대해 논평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모아보는 뉴스] 아프리카 수녀들의 성적 학대 보고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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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보는 뉴스] 01. 아프리카 수녀들의 성적 학대 보고 [모아보는 뉴스] 02. 소아성애자 사제 치료센터에서도 학대 [모아보는 뉴스] 03. 교황청 장관, 성학대 논란 루프닉 작품 철거 반대 [모아보는 뉴스] 04. 교황, 판사 승인 없이 불법 도청 권한 부여해 [모아보는 뉴스] 05. 인천 교회에서 여고생 학대 살해 [모아보는 뉴스] 06. ‘인분섭취 방치·강요’ 목사·조교 구속 [모아보는 뉴스] 07. 태국 승려, 사원에서 마약 판매와 이중생활

“하나님 앞에 진실로 구할 때 귀 기울여 주셔”

남성회 축복일 및 특별전도집회 개최

7월 소비조합 축복일 예배 각 지역에서 열려

구원을 향해 힘껏 달리자

2023 전국 신앙촌상회 우수 매장 선정

법원, 천부교 비방 영상 올린 가톨릭 신부에게 삭제 권고

KBS <사사건건> 반론보도문 게재

SBS 프로그램 <당신이 혹하는 사이> 반론 보도문 게시

신앙체험기

여수집회에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을 따르게 돼

여수집회에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을 따르게 돼

저는 1940년생으로 전남 완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7살이 되었을 때 돌아가셨는데,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그 이후로 저는 자주 토하고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아직 어렸던 저희 4남매를 위해 재혼을 하셨습니다. 새어머니께서 마르고 병약한 저를 많이 걱정하셔서 약을 쓰고, 굿도 해보았지만 별 차도가 없었습니다. 제 상태가 도무지 나아지지 않자 어느 날은 새어머니께서 교회에 가보자고 하셨고, 저 역시 교회에 다녀보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겨 학교 가는 길목에 있던 장로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다니게 된 저는 하나님께서 항상 지켜보신다는 생각에 길을 걸을 때조차 조심스럽게 걷곤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가 다니던 장로교회 사람들은 신앙과는 거리가 먼 모습만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교회에 많은 구호물자가 오던 때였는데 구호물자가 오면 목사들이 가장 먼저 좋은 옷가지들을 쏙쏙 골라 갔고, 그다음에는 임원들이 욕심껏 옷을 챙겨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목사와 임원들은 네가 가져간 옷이 더 좋아 보인다는 둥 시기 질투까지 하니 어린 마음에도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에 다녀도 몸은 좋아질 기미가 안 보였고, 목사들의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게 된 저는 결국 얼마간 다니다가 장로교회에 발길을 끊게 되었습니다. 이후 여수로 이사를 갔는데 어느 날 친척이 찾아와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을 박 장로님이라 부를 때였는데, 친척이 말하길 박 장로님의 집회에서 은혜가 많이 내리고, 병자들이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궁금증이 생긴 저는 동생(장위교회 황송자 권사)을 데리고 여수집회(1956.4.2.~4.7.)에 참석했습니다. 커다란 천막을 친 집회장 내에는 수만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흰 와이셔츠를 입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참 예배를 드리다 보니 집회장 내에 안개가 끼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 하나님 모습이 보일 듯 말 듯 한 것이 무척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안개는 걷히고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좋은 향기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집회장이기에 불쾌한 냄새가 날 법도 한데 오히려 너무나 은은하고 좋은 향기가 진동하니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다음날에는 예배드리는데 시간이 갈수록 가슴이 뜨끈뜨끈해졌습니다. ‘왜 이렇게 가슴이 뜨겁지’ 이상하게 여길 무렵 전날 맡았던 기분 좋은 향기가 다시 맡아졌습니다. 그러더니 몸이 하늘로 둥둥 뜨는 느낌까지 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집회에서 신기한 체험을 많이 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병자들의 병이 낫는 광경이었습니다. 집회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시며 일일이 안수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병 나은 사람들은 일어나라고 외치시자 앉은뱅이가 스스로 걷는 등 집회장 곳곳에서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자신의 병이 나았음을 증거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벙어리로 살다가 말문이 트인 사람이었는데, 마이크를 받아 들고 더듬더듬 말하며 감격스러워하는 모습이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제 눈으로 직접 보고 나니 ‘이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는 이분을 따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저 역시 여수집회에 참석한 이후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저처럼 여수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예배드릴 공간을 마련하고자 여수전도관을 짓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질통을 지고, 벽돌을 나르면서도 제단이 생긴다는 것에 즐거워했습니다. 저는 집안일로 자주 가보지는 못했지만, 제 동생은 제단을 짓는데 작은 일손이라도 보탤 수 있게 됐다며 무척 신나 했습니다. 여수전도관이 완공되고 하나님께서 순회집회를 위해 여수에 오셨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해 주시다가 축농증 있는 사람 다섯 명만 나와 보라고 하셨습니다. 선착순으로 다섯 명이 앞에 나오자 하나님께서 한 명 한 명 코에 ‘쉭쉭’ 하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같이 밝아진 얼굴로 코가 뻥 뚫린 것 같다, 숨쉬기가 너무 편하다며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여수전도관에 다니던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전도사님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분은 천주교 신자여서 돌아가신 후에도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를 하고 계셨습니다. 생명물로 시신을 깨끗이 닦고, 밤새도록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나니 전도관에 다니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시신이 환하게 잘 피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십자가 펜던트가 있던 부분만 피지 않고 새카만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영문을 몰랐지만 훗날 하나님께서 예수의 정체를 밝히셨을 때 저는 십자가가 있던 부분만 피지 않았던 시신을 떠올리며 ‘그런 거였구나!’ 하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저는 미용기술도 배우고, 일자리도 얻을 겸 언니가 있는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때가 1960년대 초였습니다. 서울에서 생활하며 일요일마다 서울 시내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전차를 타고 이만제단으로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이만제단에서도 여수에서 체험했던 은혜를 그대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안개와도 같은 이슬은혜가 예배실 안에 뽀얗게 내려서 하나님 모습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고, 자욱하게 내렸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사라졌습니다. 또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때 예배실 안을 둘러보면 저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환하게 피어있어서 ‘저 사람도 기쁨의 은혜를 받았구나!’ 하고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만제단에 다니며 들었던 설교말씀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앞서 지나간 사람의 발자국을 밟으면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죄를 지었는지 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지은 모든 죄를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하니 너무나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앞으로는 절대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오만제단이 완공되어 개관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배실이 꽉 차서 오래 자리를 비우면 자리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저는 식사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런데도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고, 집회가 열리는 3일 내내 향취가 맡아져서 무척 신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몇 년 후 저는 결혼해서 시댁이 있는 충북 보은군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댁은 전도관이 없는 시골인 데다가, 시부모님이 교회에 가는 것을 매우 반대하셔서 전도관에 다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니 마음이 답답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서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은혜받는 일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아”

“은혜받는 일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아”

(지난 호에 이어) 소사신앙촌에서 저는 전도사님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을 맡아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일과를 끝낸 뒤 목욕을 하고 기분 좋게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시끄럽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떠보니 집안이 불이 난 것처럼 환한 것이었습니다. 전날 깡통 안에 초를 피우고 잤는데 심지는 다 타버리고 녹아버린 촛농에 불이 붙어 불길이 커진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야간 순찰을 돌던 경비원이 유달리 환한 저희 집을 이상하게 여겨 가까이 왔다가 초가 활활 타는 것을 발견하고 창문을 세게 두드린 것이었습니다. 자다가 깬 저는 너무 놀란 나머지 불이 붙은 초를 향해 ‘후!’하고 바람을 세게 불었는데, 오히려 촛농이 제 얼굴로 튀는 바람에 아파서 허우적거리다가 깡통을 넘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깡통 가득 녹아있던 뜨거운 촛농이 쏟아지며 치마에 엉겨 붙었고, 무릎 쪽에 심한 고통을 느껴 촛농이 들러붙은 치마를 들어 올리자 살이 치마와 함께 벗겨져 나갔습니다. 저는 안찰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염치 불고하고 하나님 댁으로 달려가 화상을 입었다고 말씀드리자, 잠시 후 하나님께서 나오셔서 화상 입은 곳을 손으로 톡톡톡 세 번 쳐주시고 “됐어. 이제 가봐”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일주일이 채 되기도 전에 그렇게 심했던 화상이 다 나았습니다. 주변에서도 어쩜 그리 빨리 나을 수 있냐고,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라며 다들 놀라워했습니다. 당시 소사신앙촌에서는 저처럼 하나님의 축복으로 병을 고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축복해 주신 캐러멜을 끓여서 먹으면 감기에 걸리거나 배탈이 났던 것이 금세 나았고, 다친 상처에 축복해 주신 솜을 붙이면 빠르게 아물어서 병원에 갈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또 한 번 이유 모를 복통으로 쓰러졌을 때도 사람들은 저를 둘러업고 하나님 댁으로 달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번처럼 손끝으로 배를 세 번 쳐주시더니 “이제 됐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배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감쪽같이 사라져서 집에 돌아올 때는 멀쩡하게 걸어서 올 수 있었습니다. 이유 모를 복통에 쓰러졌는데 하나님께서 안찰해 주시자 고통이 감쪽같이 사라져 집에 갈 때는 걸어서 돌아와 시커멓고 비쩍 말라 있던 시신이 입관 예배 후 뽀얗게 피어나는 모습 보고 생명물의 권능을 다시금 확인 병원 입원 후 악몽에 시달려 생명물을 마시고 나니 이만제단에서 경험했던 대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시원해지며 몸이 공중에 뜨는 것 같아 눈물 흘리며 감사의 기도드려 1960년대 초반부터는 인천 등지에서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며 본격적으로 소비조합 활동을 하다가 고향인 안면도로 내려가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이 전도관 가는 것을 반대하는 바람에 멀리 떨어진 전도관으로 몰래 예배를 드리러 가곤 했는데, 그렇게 남편의 눈을 피해 송탄전도관에 다니던 시절의 일입니다. 송탄전도관의 권사님 한 분이 돌아가셔서 교인들이 모두 모여 입관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시신을 보는 것이 무서워서 입관 예배에 가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용기 내어 입관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장례반 권사님들은 우선 고인의 입에 생명물을 넣어드린 후 생명물로 고인의 머리와 몸을 깨끗이 씻겨드렸습니다. 그리고 관장님과 교인들이 찬송까지 부르고 나니 고인의 모습이 놀랄 만큼 변해있었습니다. 시커멓고 비쩍 말라 있던 권사님이 뽀얗게 피어나 입술도 불그스름하니 정말 예뻐진 것이었습니다.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꼭 잠이 든 것 같았습니다. 시신을 아름답게 피게 하는 생명물의 권능을 본 저는 제가 가는 신앙의 길이 참 길이라고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1981년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을 때도 크게 놀라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토록 놀라운 은혜를 내려주실 수 있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밖에 없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1990년 5월에 저는 기장신앙촌에 입주하여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식당에서 요리했던 경험을 살려 휴게실, 낙원식당, 통나무집, 맛길, 국밥집에서 근무하며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선보이기 위해 정성을 다했습니다. 사람들은 특히 제가 만든 꽈배기를 좋아해 줬는데, 은퇴한 지 꽤 되었음에도 가끔씩 “그때 집사님이 만들어줬던 꽈배기가 정말 맛있었는데” 하며 칭찬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괜스레 기분이 좋기도 하고 쑥스러워질 때도 있곤 합니다. 저는 신앙촌에서 지내는 동안 밤하늘을 환히 밝혀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무수히 많은 하얀 빛줄기가 공중에 떠서 밝게 빛나는 광경은 아무리 여러 번 보아도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그 빛줄기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고 계시구나’하는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감사기도를 드렸던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2021년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저는 뜨거운 물에 다리를 데는 바람에 병원에 입원하여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입원 기간이 길어지면서 가지고 간 생명물과 런이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당시에는 코로나19가 심했던 시기여서 가족들조차 면회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누구에게 부탁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당분간 생명물 마시기는 어렵겠다는 아쉬움을 안고 잠이 들었는데 그날부터 시커먼 손 여러 개가 튀어나와 저를 잡아끄는 악몽을 꾸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악몽이 며칠간 계속되면서 제가 밤마다 심하게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니 주변 사람들도 몹시 걱정스러워했습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신앙촌 의무실 선생님께 생명물을 가져다 줄 것을 간곡히 부탁드렸더니 물통 한가득 생명물을 떠서 가져다 주셨습니다. 저는 정말 감사하다고 선생님께 인사드린 후 기쁜 마음으로 생명물을 컵에 따라 조심스럽게 마셨습니다. 그 순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시원해지면서 몸이 공중에 둥둥 뜨는 것처럼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이만제단 개관 집회에서 체험했던 은혜와 똑같았습니다. 몹시 감격한 저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은혜로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께 오랫동안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제가 신앙촌에 온 지도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아름다운 신앙촌에는 통유리창이 돋보이는 사진관이 있는데, 그곳에는 이만제단 3층 건물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서 예배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습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저는 이만제단에서 받은 은혜의 순간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한없는 은혜 가운데 걸어온 이 길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은혜받는 일보다 가치 있는 일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귀한 일속에서 허락해 주시는 기쁨의 은혜를 알기에 은퇴한 후에도 종합식당에서 바쁜 일손을 도우며 즐겁고 활기차게 지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제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부지런하고 가치 있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죄짓지 않고 맑게 살아서 하나님께 ‘너는 참으로 너의 길을 힘껏 달려왔구나!’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신앙체험기 특집

천부교회를 찾아서

뉴스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교실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문제로 논쟁-①

美 오클라호마주 교육감 라이언 월터스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교실에서 의무적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문제로 CNN 진행자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CNN 진행자 파멜라 브라운은 인터뷰를 시작하며 “성경에는 참수, 강간, 근친상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이러한 주제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지지하시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월터스는 브라운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고, 미국 건국부터 민권 운동에 이르기까지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과 역사적 문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브라운이 성경에 나오는 노골적인 요소들이 교실에서 허용되는지 대답하라고 계속 압박하자 두 사람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의 녹취본입니다. 파멜라 브라운, CNN 진행자: 지난주 오클라호마주 교육감 라이언 월터스는 5학년부터 12학년까지의 모든 교실에 성경을 비치하고 교사가 반드시 성경을 가르치도록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이번엔 이 논란의 중심에 있는 라이언 월터스 교육감을 모셨습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토론을 기대하겠습니다. 여기에 그 지시가 있습니다. 교실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필수이며 모든 교사가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그런데 성경에는 참수, 강간, 근친상간이 포함됩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이런 주제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지지합니까? 라이언 월터스, 오클라호마주 교육감: 저는 아이들에게 우리 역사를 정확하게 가르치는 것을 지지합니다. 성경을 몰아낸다면 토머스 제퍼슨(미국 독립선언문 작성자)이 언급했듯이 우리의 권리는 신으로부터 온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신 편에 서서 신이 하는 일과 그로부터 영감을 받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민권 운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버밍엄 감옥에서 보낸 편지 등 성경의 사례를 자주 언급하며 내가 지금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성경이 내게 가르쳐준 것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교육과정에 다시 넣을 것입니다. 브라운: 알겠습니다.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군요. 성경의 모든 가르침이 괜찮습니까? 강간, 근친상간, 참수, 이런 것들을 교실로 가져와도 괜찮나요? 월터스: 다시 한번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겠습니다. 당신은 이 대답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답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입니다. 성경은 미국 역사에서 여러 번 언급되었습니다. 미국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이기도 합니다. 교실에서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학문적 과실입니다. 아이들은 우리 역사를 이해해야 하며,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브라운: 좋습니다. 그러면 교사들이 성경의 모든 측면을 가르치도록 허용할 것인가요? 교사들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가르치고 어떤 부분을 가르치지 말아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죠? 성경에 포르노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간단한 질문입니다. 포르노 소재는 여러분이 반대하는 내용이며, 실제로 교사가 학생들에게 포르노에 대한 접근을 허용해 교사 자격증을 박탈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포르노는 성경에 있습니다. 월터스: 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젠더, 퀴어, 호모와 같은 차원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포르노가 맞지만 성경은 미국 역사 전반에 걸쳐 언급된 책입니다. 우리는 메이플라워 서약과 관련하여 성경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교사의 학업 표준이 있습니다.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한 의도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청교도들에 대해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생각해 보세요. 중요한 문제입니다. 브라운: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헌법에 신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독립 선언서에는 언급되지만, 기독교 신이 언급된 것은 아닙니다. 맞죠? 그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만 말합니다. 누군가는 그것이 기독교인이고 성경을 믿는다 해서 당신이 더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 계신 선생님들을 위해 이 얘기를 다시 꺼내고 싶습니다. 한 사례에서는 교사가 수업 시간에 가르친 내용 때문에 교사 자격증을 박탈당했습니다. 음란물이라서 용납할 수 없다고 하셨죠. 이 경우, 당신이 교사에게 성경을 가르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사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감시할 건가요? 만약 어떤 교사가 “저는 수학 선생이지 신학자가 아닙니다. 저는 무슬림입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은 저의 가장 굳게 믿는 신념에 반하는 것입니다.”라고 한다면, 그 모든 것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월터스: 명확성은 학업 표준에서 나옵니다. 역사에서 사람들이 성경을 언급한 사례가 있다면, 우리 아이들은 성경에 대해 듣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 연설에서 성경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인용한 역사적 사례가 있을 때, 우리 아이들은 그 맥락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계속해서 성경을 젠더, 퀴어, 호모, 포르노와 같은 도덕적 잣대에 올려놓으시는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입니다. 미국 역사상 성경보다 더 널리 읽힌 책은 없습니다. 교실에서, 역사 과목에서, 문학 과목에서 성경이 없다면 학생들에게 미국의 이야기를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불쾌해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역사를 다시 쓸 수는 없습니다. 브라운: 좋습니다. 그럼 여기서 역사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봅시다.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된다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헌법에는 정교분리 조항이 있고, 공직자의 종교 시험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으며, 신은 헌법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실제로 종교의 설립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세워졌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월터스: 그건 역사 수업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수업은 아이들에게 미국 역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죠. 우리 학교에서 성경을 검열하는 것은 우리 학교를 국가가 후원하는 무신론자 센터로 만드는 것입니다. 브라운: 저는 이 부분을 조금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국가가 후원하는 무신론자 센터라고 하셨는데요. 대법원 판례는 실제로 당신이 지금 추진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실제로 1980년에 십계명을 교실에 게시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대법원 판례가 있었습니다. 수정헌법 1조에는 의회는 종교의 설립을 존중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금지하거나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만들지 못한다는 설립 조항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조항은 계속 적용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건 정교분리이지 무신론자 센터가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당신이 오클라호마의 학생과 교사들에게 당신의 종교적 신념, 기독교적 신념을 강요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월터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선 이것은 미국의 역사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 종교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를 부정확한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미국 문화와 역사에 크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 모든 교실에서 발견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 오클라호마에서 성경을 다시 모든 교실로 가져올 것이며 모든 주에서도 따라야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법원에 원칙주의자들을 배치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이 문제가 소송을 당하고 대법원까지 간다면 우리는 그날 승리할 것이라고 매우 확신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법관으로 임명한 분들 덕분에 성경을 학교에 다시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브라운: 글쎄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원칙주의자라면 설립 조항을 살펴보고 공직자의 종교 시험 금지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주장도 있을 수 있죠. 하지만 당신 주장도 옳습니다. 제 일은 어느 한 편을 드는 것이 아닙니다. 제 일은 다양한 관점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오클라호마의 모든 학생과 교사 가족에게 영향을 미칠 이 문제에 대해 여러분의 관점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언 월터스, 감사합니다. 월터스: 감사합니다. <자료1> 오클라호마주 성경 교육 의무화 논란에 대한 다양한 입장 표명 아메리칸 유나이티드 (정교 분리를 위한 미국 연합) “라이언 월터스는 성경을 강제로 도입할 법적 권한이 없다.” 오클라호마주 교육감 라이언 월터스는 주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강제로 가르치려는 그의 계획에 대해 상당히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이를 따르지 않는 교사를 해고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월터스에게 그럴 권한조차 없다면 어떨까요? 이달 초 오클라호마 법무장관 젠트너 드러먼드가 월터스 교육감은 지역 학교의 교육과정을 결정할 법적 권한이 없다는 이메일을 보냈다고 KOTV-TV가 보도했습니다. 법무장관은 오클라호마 법에 따르면 커리큘럼 콘텐츠에 대한 결정은 지방 정부에 맡겨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교육자들과 학부모들은 월터스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강압하고 세뇌하는 방식으로 성경 을 가르치기 시작한다면, 아메리칸 유나이티드는 이에 개입하여 가족의 종교적 자유를 보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2024. 7. 16. AMERICANS UNITED 신문 > CNN Amanda Tyler의 칼럼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잘못된 서사에 의존해 ‘기독교 민족주의’를 공교육에 주입하려는 것” (주 교육감이 성경 교육을 강제하는) 이러한 최근의 상황은 기독교 민족주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공교육에 주입하려는 조직적인 전략의 가장 최근 사례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와 미국의 정체성을 합친 기독교 민족주의는 미국이 기독교인에 의해, 기독교인을 위해 세워진 ‘기독교 국가’라는 잘못된 서사에 의존합니다. 이러한 신화는 종교와 정부 기관을 분리하여 모든 종교가 국가의 통제 없이 번영할 수 있도록 한 미국의 역사와 헌법적 틀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헌법에는 신이나 기독교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종교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공직에 대한 종교적 시험을 금지하는 제6조의 조항뿐입니다. 우리 법은 세속적이며 십계명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 공부는 학생들이 헌법이나 시민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 2024. 7. 3. CNN 칼럼> 오클라호마 대법원 유사 사례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 “공립학교는 비종교적이어야 합니다.” 지난 6월 25일, 오클라호마 주 대법원은 오클라호마 주 헌법, 오클라호마 주법 그리고 수정헌법 제1조의 조항을 적용하여 최초의 종교 차터스쿨 설립 계획을 무산시켰습니다. (차터 스쿨 Charter School: 정부의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나 교육당국의 규제를 받지 않는 자율형 공립학교) 제임스 R. 윈체스터 판사는 “오클라호마 법에 따라 차터 스쿨은 공립학교입니다. 따라서 차터 스쿨은 비종교적이어야합니다. 그러나 성 이시도르 차터 스쿨은 주 정부의 후원을 받으면서 학교 커리큘럼으로 가톨릭 신앙을 전파할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납세자의 돈을 종교 자금으로 사용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종교 자유에 대한 기본 원칙을 훼손합니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오클라호마 주민들이 누려야 할 종교의 자유가 파괴되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미국 시민자유연합은 이 결정을 환영하며, “차터 스쿨은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공립 학교입니다. 학생, 가족, 교직원을 차별하고 학생을 하나의 종교로 세뇌하려는 학교는 공립 학교로 운영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2024. 6. 27. CNN 기사 >

신앙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br />
신앙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신앙신보 속 천부교 역사
1964년 12월 24일 – 지난날을 회고하는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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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세계 종교 탐구<42> 기적은 믿음인가 사실인가-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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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침반] 伊 피눈물 흘리는 성모상,  ‘돼지 피’로 밝혀져… 살코기 인간에게 먹히고 피 흘린 돼지 귀신도 곡할 노릇!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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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포럼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누가 풀어야 하나?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1964년 11월 30일 – “한국에 세워진 이상향”
천부교 바로가기

글과 사람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교역자 되고 싶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교역자 되고 싶어

교역자가 되리라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입니다. 정신없이 보낸 지난 한 달은 제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긴 시간 동안 신앙촌에서 입사생이라는 귀한 이름으로 보살핌을 받다가 2년 정도의 소비조합 활동을 거쳐 지금의 교역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10년 전 식품 영업차 방문했던 충무교회가 첫 발령지가 되었다는 소식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충무교회에 도착한 날, 청소와 식사까지 준비해 주시며 반갑게 맞아주신 권사님들의 모습이 따뜻하고 감사했습니다. 첫 일요일 예배를 준비하며 실수가 없도록 최선을 다했지만, 기도를 드리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절감했습니다. 그럼에도 저의 부족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있는 서울에는 가로수와 높은 건물들이 잘 정리 정돈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촌과 비교하면 무엇인가가 빠져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신앙촌의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심지어 공기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요즘입니다. 신앙촌에서 함께 했던 동료들은 저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고, 선배 관장님들께서는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하라고 당부해주셔서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요즘 저는 하나님 말씀 중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주셔야 살겠습니다. 힘을 주소서’ 라는 말씀이 많이 생각납니다. 시간이 갈수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나의 일 속에서 열심히 뛰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 제일 똑똑한 사람이다’ 하신 말씀처럼, 저의 힘은 미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께 항상 부복하면서 신앙촌에서 받은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따뜻한 교역자가 되고 싶습니다.

나의 생활을 예민하게 돌아보게 돼

나의 생활을 예민하게 돌아보게 돼

예전부터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었던 저는 신앙촌에서 생산된 제품을 판매하는 서울직매장에서 일할 기회가 생겨 감사한 마음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일도 좋지만, 전도에 더 힘쓰고 싶다는 마음이 점차 커졌습니다. 때마침 중앙 관장님께서 교역자로 나갈 것을 권유하셔서 기쁘고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귀한 직분을 잘 감당하며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걱정보다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옆에서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그동안 많이 느껴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사교회에 첫 발령을 받고 나서 떨리는 마음을 안고 아이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처음 보는 저에게도 ‘관장님’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맞아주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예쁘고 귀하게 보였습니다. 처음 일요일 예배 때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더 쉽게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기억에 남을까 고민하다 보니, 제가 교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 감사했습니다. 또한 나로 인해 아이들이 하나님과 가까워질 기회를 놓치게 되지는 않을지 제 생활을 더 예민하게 보게 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 여청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인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서툴고 부족하지만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쪽으로 이끌며 나의 신앙 또한 놓치지 않고 이 길을 끝까지 가는 교역자가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귀한 길 감사드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귀한 길 감사드려

교역자의 직분이란 한 제단을 책임지고, 모든 일을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처음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일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고민보다는 순종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믿고 교역자의 길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드렸습니다. 발령받기 전 있었던 예비 교역자 교육 시간에 교역자의 직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님 말씀을 통해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어떤 교역자가 되어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할 수 있는 따뜻한 관장님, 재미있고 친근한 관장님, 하나님 말씀을 전하며 아이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관장님 등 여러 가지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부산 서면교회 유년파트로 발령받은 날은 낯설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주일이 지난 지금은 반갑게 맞아준 아이들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고 차츰 적응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만나고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설교부터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까지,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하면서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보다 저 자신이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 주셔야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많이 찾아야 한다는 선배 관장님의 말씀이 깊이 와닿았습니다. 앞에서 이끄는 교역자의 책임이 크지만, 귀한 길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 살며 아이들에게 항상 밝고 따뜻한 교역자가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이 길을 기쁘게 걸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습니다.

전도를 위해 활발히 움직였던 시간

전도를 위해 활발히 움직였던 시간

하나님께서 매 주일 서울, 인천, 소사, 덕소 등 10여 제단을 순회하시며 예배를 인도하실 때였습니다. 영천에 시무하던 저는 대구 관장님과 함께 추풍령 휴게소를 지나가시는 하나님을 몇 차례 뵈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멀리서 깜빡깜빡 신호를 보내며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차를 향해 인사드리면 창문을 열어 축복해 주시던 하나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새벽 3시에 기장신앙촌을 출발하여 밤중에 신앙촌에 돌아가실 때까지 3,000리가 넘는 긴 거리를 오가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1976년 1월 16일에 경주로 발령받은 저는 6월 26일에 부산1중앙으로 이동 발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던 큰 제단을 맡게 되어 두렵고 떨렸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부임 후, 성가대를 조직하고 중고생을 위해 국어, 영어, 수학 교사진을 구성해 방과 후 과외 교실을 열었습니다. 매주 생화로 꽃꽂이를 하고, 청년회 주관 바자회를 열었으며, 부산 시내 체육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여 교회 내 단합과 청년 활성화를 도모했습니다. 또한, 특별전도집회(76.12.1~3), 청년 신앙대강좌(77.7.28~29), 부산지구 연합전도대회(78.11.5~8), 학생 신앙 연수회, 반사강습회, 매월 전국 연합부인회 집회(홍영표 권사 주관), 주교 여름 신앙학교 등을 개최했습니다.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교인들의 환한 얼굴과 전도를 위해 기쁘게 달려왔던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제2회 전국 교역자 및 교인 공로자 표창식(1977년)에서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직접 메달을 걸어 주셔서 더욱 기쁘게 일에 매진 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 1월, 부산시 서구에서 분리 될 사하구에 사하전도관을 개척하여 개관예배를 드렸습니다. 돌아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던 그 시절이 가장 그립고 보람됐던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1980년 5월 7일에는 대구2중앙에 부임하여 다음 해 9월 1일에 제단과 사택 보수공사를 마치고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이후 대구2중앙은 대구 여성회 제단이 되었고, 1982년 12월 15일 저는 달성 지관으로 이동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1983년 2월 25일에는 서울 7중앙 부관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는 2개 팀으로 나누어 매일 서울 시내 전 지역을 심방하며 하루에 토큰(동전모양의 시내버스 승차권) 20개가 부족할 정도로 바쁘게 활동했습니다. 또한 학생과 청년들의 말씀 공부를 위해 교재 및 교안을 작성하고 교육에 힘썼습니다. 매년 청년 연수회를 개최하고 매월 ‘청년의 터’를 발행했으며, 중부지역 체육대회를 위해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배부했습니다. 매주 토요일에는 학생 심방에 집중하였고, 저녁에는 강북지역 장년 심방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친절하고 따뜻하게 맞아 주신 분들은 아직도 제 마음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1985년 3월 7일, 저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휴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이후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 배운 근면, 자주, 자립정신이 밑거름이 되어 모든 난관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2000년 1월 24일, 아내(故 진정란 권사)가 54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병고에 시달려 몹시 고통스러워하다가 나중에는 먹지 못해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서울8중앙관장님께서 입관, 발인, 하관까지 모든 장례 절차를 주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낙원에 가신 이후였지만 기장신앙촌에서 가져온 생명물로 입관한 후, 고인의 온몸이 환하고 곱게 피어 살이 오르고 평온한 모습이었습니다. 입관 당시 보지 못한 누이동생이 가족들에게 “고인이 어떤 모습이었나요?”라고 묻자, 교회 장로인 형님은 “화장을 해서 얼굴이 아주 환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생명물의 권능을 모르는 형님의 눈에도 화장을 해서 피었다고 생각할 만큼 환하게 핀 모습이 확연하게 보였던 모양이었습니다. 또한 경인지역 학생관장님들은 고인의 사진이 미소 짓고 있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생명물의 권능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2002년부터 10여 년간 대학에서 서예 최고 지도자 과정을 수료하여 하나님 말씀(경전)이 발간되었을 때 먹으로 쓴 필사본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붓글씨로 한 자 한 자 정진하며 써 내려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었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무엇 하나 제 힘으로 된 것이 없었습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여생을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쓰이기를 바라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자유율법을 지켜 그날에 빛 앞에 설 수 있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교양

[책과 지식] 잡스의 진정한 가치, 예술가적 자질과 인문학적 소양

[책과 지식] 잡스의 진정한 가치, 예술가적 자질과 인문학적 소양

선각자, 예술가, 독재자, 천재. 이 단어들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를 묘사하는 언어들이다. 왜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부를까? 그의 찬란하고 눈부신 업적을 가능하게 한 근원적인 힘은 무엇일까? 스티브 잡스는 미국의 최장수 비즈니스 잡지인 “포춘”이 2009년에 선정한 ‘10년을 빛낸 CEO’인 만큼 여러 산업을 뒤흔든 애플컴퓨터의 창업자이자 명사이다. 그는 컴퓨터를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대한 비전을 가지고 이십 대 초반에 거의 혼자 힘으로 사람들이 책상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해 세상에 선보였다. 그리고 최초로 평면 스크린을 장착한 아이맥 컴퓨터와 아이팟이라는 깜찍하고 세련된 음악 플레이어 등 획기적인 제품으로 혁명의 바람을 일으켰다. 2010년, 애플을 세계에서 가장 큰 가치를 지닌 기술회사로 성장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잡스는 이윤만 추구하는 다른 기업가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는 어린 시절 입양되어 초등학생이었을 때에는 사고뭉치로 낙인찍혔고 대학교도 중퇴했다. 매력적이고 감성이 풍부하면서도 몹시 변덕스럽고 거칠었으며, 서른 살 때에는 유별난 성격 때문에 애플에 모든 권리를 빼앗겼다. 하지만 잡스에게는 보통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그만의 특별한 철학과 사고방식이 숨어있다. 먼저 잡스는 그가 하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즐기고 사랑했다. 자신이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애플의 직원들에게까지 그 믿음을 부여했다. 그리고 특별한 사물, 새로운 경험과 변화에 대한 욕망을 원동력으로 삼아 그의 꿈을 현실화시킬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소비자들의 욕구를 앞서가는 뛰어난 상상력으로 ‘어떻게 더 좋은 물건을 만들까’와는 차원이 다른, 소비자들에게 매우 색다른 경험을 맛보게 해줄 혁신적인 제품을 구상하는데 집중했다. 그의 상상력도 놀랍지만 유별나게 집요한 열정과 강력한 비전의 힘이 그를 더 위대하게 만들었다. 잡스는 “미치도록 아름답고 우주에 흔적을 남길 정도의 제품”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의 열정을 전염시켰다. 또한 지독한 꼼꼼함과 치밀함으로 완벽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항상 최상의 선택과 결정만을 고집했다. 그가 생각하는 완벽한 제품은 훌륭한 기능을 뛰어넘어 외형적으로도 아름답고 우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타사 제품들과는 달리 단순함과 예술성에 초점을 둔 잡스는 제품의 디자인부터 포장의 예술성과 기계 내부 부품의 보기 좋은 배열까지 신경 썼다. “단순함이 최고의 정교함”이라는 모토를 삼고 철저한 분석과 고도의 기술을 동원하여 어렵고 복잡한 것을 지극히 단순하게 만드는데 수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제품에는 “적은 것이 더 아름답다”는 핵심적인 철학이 담겨 있다. 더 나아가서, 잡스는 기계에 감동을 불어넣음으로써 예술성을 부여했다. 잡스는 디자인을 “제품이나 서비스의 근본적인 영혼”이라고 여길 만큼 중요시 했다. `만일 소크라테스와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을 그와 바꾸겠다` 잡스의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기술과 예술을 융합하여 사용자들이 기계에 대한 애착과 감성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예술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잡스도 “우리가 창의적인 제품을 만든 비결은 기술과 인문학을 결합시켰기 때문”이라고 정리했다. “만일 소크라테스와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을 그와 바꾸겠다”는 그의 명언 중 하나로 인문학에 대한 그의 원대한 사랑을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인문학적 통찰력으로 재미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를 이해하고 위대한 제품을 통해 그 욕구를 충족시켰다. 스티브 잡스의 진정한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돈에만 집착하는 대부분의 경영자들과는 달리 예술성과 낭만이 담겨있는 제품을 선사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잡스의 초상을 그려냈다. 그리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준 동력이기도 하다. 스티브 잡스를 더욱더 빛나게 하는 것은 그가 단지 기술자가 아닌 “예술가적 기질”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우리 시대의 진정한 장인이자 인문학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명물간장으로 만든 메추리알 조림, 연근 조림

음악의 중요성과 감상하는 방법

자신감을 높이기 위한 음악①

나에게 맞는 ‘자외선차단제’는 무엇일까?

나에게 맞는 ‘자외선차단제’는 무엇일까?

여름철 자외선차단제의 사용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하지만 종류도 다양하고 기능도 달라 고르기 어려운 자외선차단제. 본인에게 가장 잘 맞는 자외선차단제를 알아보자. ▣ 가장 중요한 것은 UVA와 UVB 자외선은 피부를 노화시키는 UVA와 피부를 검게 타게 하는 UVB로 나뉜다. PA지수는 UVA의 차단 정도를 나타내며 +의 개수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 SPF지수는 UVB를 차단하며 숫자가 높을수록 차단 효과가 크다. 하지만 차단 효과를 높이기 위해 화학 성분이 많이 첨가되어 트러블이 일어날 확률이 크므로 용도에 따라 적절한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 유기자차? 무기자차? 선크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물리적 자외선 차단제인 ‘무기자차’와 화학적 자외선 차단제인 ‘유기자차’로 나뉜다. 무기자차는 피부 자극이 적지만 무겁고 뻑뻑하며 백탁현상이 있을 수 있다. 반면 유기자차는 백탁현상이 적고 부드럽게 발리지만 피부트러블이 발생할 수 있어 자신의 피부에 맞는 유형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 올바른 선크림 바르는 법 선크림은 외출 30분 전에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큼 덜어 두껍게 바르는 것이 좋다. 또 두 시간에 한 번씩 덧바르는 것이 효과적이다. 요즘은 휴대하며 덧바르기 좋은 선스틱, 선쿠션, 선스프레이 등 다양한 제품이 출시되므로 용도에 맞게 선택하는 것이 좋다. 메이크업 베이스 등에 포함된 자외선 차단 기능의 효과는 매우 미미하다. 그러므로 꼭 기초화장 후 선크림을 발라야 한다. 끝으로 트러블이 나지 않도록 꼼꼼하게 클렌징 하는 것도 잊지 말자.

아침에 챙겨먹으면 좋을 줄 알았던 음식의 반전

여름철 갑작스런 고강도 운동, 주의할 점은?

장내 유익균이 노화 방지 등 건강 수명에도 도움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