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민 혁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박효종 /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발행일 발행호수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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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종 /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2010년말부터 시작된 민주화의 열기가 중동지역 전체를 감싸고 있다. ‘들불’처럼 중동지역 전체로 급속히 번져 나가고 있을 뿐 아니라 ‘쓰나미’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아시아에도 그 파장이 미칠 조짐이다.

국민적 저항에 불과 수 주일도 못 버티는 약체정권들이 어떻게 지난 수십 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군림해왔는지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중동에서 불기 시작한 민주혁명의 바람은 튀니지에서 가장 흔한 꽃으로 일반시민들이 늘 접하며 집을 장식하는 꽃의 이름을 따라 ‘재스민 혁명’이라 불린다. 재스민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을 상징하는 꽃이다. 튀니지 혁명은 대학을 나온 한 가난한 노점상의 분신자살로 야기되었다.

그러나 이번 재스민 혁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몇몇 나라에서 민주화의 불길이 솟아올랐느냐 하는 점보다 역사에 대한 큰 흐름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데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어떤 힘으로 움직이는 것인가. 역사를 살펴보면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이 있다. 아닌게아니라 국가와 국가, 혹은 한 지역내에서도 쉴새없이 힘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면, 역사는 끝없는 힘의 각축장인가.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역사에는 ‘방향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에 방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전통이다. 이런 주장을 세속화 시킨 사람이 헤겔이다. 그는 역사의 방향을 절대정신의 자기구현 과정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시스트들은 헤겔의 통찰을 원용하면서 역사의 방향성을 자본주의의 쇠퇴와 공산주의의 도래로 들었다. 공산주의가 도래하면서 역사는 완성된다는 것이 마르크스 역사관이다. 이런 그들의 예측은 볼세비키혁명으로 힘을 얻었으나, 1990년대 소련과 동구의 대변혁으로 말미암아 빗나가고 말았다.

그렇다면 왜 자유주의자들은 목적적 역사관을 말할 수 없을 것인가. 역사의 방향성과 관련, 공산주의의 도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의 도래를 꼽게 된 것은 최근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통찰 덕분이다. 역사진화의 종착역이 자유민주주의라는 그의 주장은 한동안 지성계를 강타했다.

그렇다면 이 재스민 바람을 타고 과연 북한에 ‘역사의 종언’이 도래할 것인가. 이 ‘역사의 종언’은 후쿠야마가 말했다시피 자유민주주의의 도래다. 지금 북한의 실정을 보면 ‘역사의 종언’은커녕 ‘역사의 시작’도 되지 못한 상태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은 재스민혁명의 무풍지대로 남을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그 전체주의적인 억압과 테러의 힘이 재스민의 향기는커녕 씨앗부터 질식시킬 기세다. 동토의 땅에서 재스민이 꽃피는 것은 열사의 땅에서 피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라고 하는 것이 끝없는 작용과 반작용의 힘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성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보면, 북한도 역사의 종언을 향해 아주 완만하지만 한 두 걸음씩 다가간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북한의 민주화를 말할 수 있다면 경험적 사실이나 과학적 분석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자유와 민주가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온 세계에 군림한다는 ‘역사의 종언’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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