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반역자’인가

박효종 / 서울대 초빙교수
발행일 발행호수 2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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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박효종 / 서울대 초빙교수

최근 내란예비음모의 혐의로 구속·수감된 통진당의 이석기의원이 쏟아내고 있는 거침없는 횡설수설가운데 예리한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섬뜩한 말이 딱하나 있었다. 북한의 삶을 ‘애국’이라고 하면서도, 대한민국의 삶을 ‘반역의 삶’이라고 지칭한 것이 그것이다. ‘인권’은 물론 ‘자유’나 ‘정의’를 언급하는 것조차 가당치않은 김씨왕조를 두고 그를 섬기는 행위를 ‘애국’이라고 칭송하다니, 도대체 애국의 의미는 무엇일까. 대한민국에서의 삶이 어떻게 ‘반역’이 될 수 있나.

다원적 민주 사회에서 각 시민은 나름대로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개성적 존재로 간주되고 그 ‘다름’은 존중받는다. 또 사회가 시끄러워지는 한이 있어도 의심과 의혹제기가 용납되는 사회가 바로 다원주의 사회다. 하지만 그 다원주의는 누구나 반인륜적 생각이나 야만성을 지니는 저급한 의견까지 무절제하게 중구난방으로 표명할 수 있고 또 비밀조직을 만들어 자유민주적 질서를 파괴하고자하는 활동을 할 수 있는, 반역의 자유까지 누릴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우리의 다원주의는 울타리가 없을 정도로 방만하기 그지없는 ‘무제한적인 다원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순리적인 다원주의’일터이다. 같은 배를 타고 있기는 하나 기회만 있으면 상대방을 해치려고 한다면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오월동주(吳越同舟)’의 형국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혹은 같은 침대에서 자도 다른 꿈을 꾸는 ‘동상이몽(同床異夢)’처럼 살아간다면, 운명을 같이하는 자유인들의 공동체는 아니다.

대한민국은 ‘다름’을 존중하는 다원주의 사회임이 틀림없지만, ‘같음’과 ‘같은 길’을 확인해야하는 성역(聖域)과 같은 가치가 있다.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있고 표현과 결사의 자유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자유민주적 질서와 동행하는 한에서 가능하다. 다원주의라고 해서 ‘원심력(遠心力)’만 작용하고 ‘구심력(求心力)’은 찾아볼 수 없는 오월동주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같은 배를 타고 가는 동고동락의 건강한 민주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영어로 ‘loyal opposition’이란 말이 있다. ‘충성스러운 반대’라는 뜻이다. 그것은 반대를 하더라도 국회 의사당안에서 최루탄을 터트리거나 태극기를 밟는 불충의 행위는 금지되며,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거나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하는 식의 반역적 반대는 안된다는 의미다. 여기서 ‘충성스러움’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이다. 그런 점에서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반대는 어디까지나 ‘충성스러운 반대’가 되어야지 같이 마시는 샘물에 독을 타는 행위와 같은 저질스러운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애국가도 부르지 않고 국기에 대한 맹세도 하지 않으며 우리가 같이 마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샘물에 독을 타는 행위를 한 이석기의원이야말로 대한민국에 불충한 ‘반역자’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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