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과 속에서도 은혜 안에서 일하고 있음을 실감해”

기장신앙촌 나염 공장의 추억 구리교회 신귀철 권사
발행일 발행호수 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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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기장신앙촌 나염 공장의 일명 로터리 프린팅 기계. 일하고 있는 신귀철 권사의 뒷모습이 보인다. ▲ 나염 공장에서 다양한 문양으로 찍어낸 원단. ▼ 나염 공장 이야기를 들려준 신귀철 권사.

오래된 신앙촌 카탈로그를 넘기며 과거를 회상하는 한 사람. 1970년대 신앙촌 나염 공장에서 일했던 구리교회 신귀철 권사다. 길이가 50미터는 족히 되는 염색 기계와 매일같이 씨름하면서도 매 순간 보람을 느끼며 일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신귀철 권사는 카탈로그를 넘기다가 한 장의 사진을 가리켰다. 원단에 다양한 색상의 문양을 찍어낼 수 있는 일명 로터리 기계였다. 사진에는 일하고 있는 신 권사의 뒷모습도 함께 찍혀있었다. 당시 나염 공장에는 일본제 로터리 프린팅 기계 두 대와 부셔로 불리는 독일제 프린트 기계 세 대가 도입돼 쉴 새 없이 가동됐다고 한다. 신 권사는 그 중 로터리 기계 한 대를 책임지는 기술자였다.

“그때는 정말 바빠서 기계를 24시간 풀가동해야 했어요. 70년대에 물방울무늬 패턴이 정말 유행이었거든요. 일명 땡땡이라고 하죠. 땡땡이 원피스가 최고 인기를 누려서 안 입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그 원단을 우리 신앙촌이 생산했거든요. 원단을 찍어내는 족족 판매되는 바람에 물건이 없어서 못 팔았죠. 동대문의 원단 사장들이 공장 앞에서 밤새워 기다려서 앞다투어 자기네 원단 먼저 인쇄해달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는 땡땡이 원피스 이외에도 기억에 남는 제품으로 신앙촌 썸머 담요를 꼽았다. 썸머 담요도 인기가 많아 소비조합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한다.

“썸머 담요도 집집마다 없는 집이 없을 정도였어요. 원단에 매화, 연꽃, 단풍 무늬를 찍어서 담요로 만들어 판매했는데 전국적으로 인기가 높았어요. 그 제품은 신앙촌에서 원단도 생산하고, 나염도 하고, 재봉까지 한 제품이었어요. 하도 바빠서 전도사님들이 와서 일손을 거들기도 했습니다.”

원단을 찍어내는 족족
판매되는 바람에
동대문 원단 사장들이
공장 앞에서 기다리기도

미주, 유럽, 동남아까지
원단을 수출하면서
정부에서 훈장도 받을 정도

그만큼 바빴지만
매 순간 보람 느끼며 일해

1970년대는 국가적으로 수출 장려 정책이 펼쳐지던 때였고, 신앙촌도 무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신앙촌에서 만들어진 원단은 미주, 유럽, 동남아에까지 수출되었어요. 수출을 많이 했다고 나중에 정부로부터 산업훈장도 받았습니다.”

당시 정부는 괄목할 만한 수출 신장을 이뤄낸 신앙촌에 1972년 ‘석탑 산업훈장’을, 이듬해인 1973년에는 ‘철탑 산업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굴지의 대기업에서 직원들과 함께 나염 공장을 견학하러 오기도 했다고 한다.

신 권사는 나염 공장에서 일하며 후배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사실 제 전임이 일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고 공장을 떠났거든요. 그때 고생하며 기계 다루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제 후배들에게는 그런 어려움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후배들을 세세히 교육시키고,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의견을 수용하니 점점 신 권사를 따르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일하는 것이 더욱 수월해졌다고 했다.

“잘 가르쳐 놓으니 급할 때 후배가 저 대신 기계를 봐줄 수도 있고, 일하다가 문제가 생겨도 함께 머리를 맞대면 빠르게 잡아내고 해결할 수 있더라고요. 함께 일하며 발전하는 것이 느껴지니까 일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나염 공장에서 경험하고 배운 것들이 나중에 사회생활 할 때도 큰 도움이 되었다며 무척 감사하다는 신귀철 권사였다.

늘 최선을 다해 일하는 나염 공장 직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안찰을 해주시기도 하고, 격려의 말씀도 해주셨다고 한다. 이처럼 신 권사는 나염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은혜 안에서 일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직원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면서 일하기도 했죠. 또 직조 공장이나 담요 공장 등 다른 공장들과 생산 시합을 하기도 했어요. 이긴 공장에는 하나님께서 메달을 주셨는데, 그때 받았던 금메달, 은메달을 아직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해주셨기에 더 즐겁게 일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인터뷰 내내 미소 띤 얼굴이었던 신귀철 권사. 그 미소 속에 눈부셨던 지난날의 추억과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비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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