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는 생활이 그렇게 기쁠 수 없어”

유경옥 권사 / 동두천 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541
글자 크기 조절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유경옥 권사

유경옥 권사 / 동두천 교회

저는 1935년 황해도 신천군에서 태어나 네 살 때 만주로 건너가 살았습니다. 독실한 감리교인이신 큰아버지가 집 마당에 교회를 세우셔서 어려서부터 거기 다녔습니다. 큰아버지는 만주에 사는 동안 교회를 여러 개 세우셨고 해방 후 서울 용산에 와서도 한성 감리교회를 세워 주동 장로로 일하셨습니다. 저희 집은 큰아버지 식구와 같이 살면서 그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러던 1955년, 수도여고 3학년일 때였습니다. 어머니와 언니가 도원동 장로교회 집회에 간다 하셔서 저도 따라갔습니다. 도원동교회는 예배당을 새로 짓는 중에 건축 자금을 모으려고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유명한 분을 모셔와 집회를 연다 했습니다. 저희 식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람이 가득 차 예배실 맨 뒤에 겨우 자리를 잡았습니다. 언니는 돌 지난 조카딸을 데려갔는데 어린애가 어른들처럼 손뼉 치며 찬송하는 것을 따라 해서 다들 웃었습니다. 저는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쉬지 않고 힘차게 찬송하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예배에 열중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도 따라서 손뼉 치며 찬송을 부르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남산 공원 집회에서 예배드릴 때마다 기쁘고 즐거워서 떠나고 싶지 않아
찬송을 부르면 어릴 적부터 늘 부르던 찬송인데도 처음 배우는 것처럼 새롭고
가사의 뜻이 하나하나 마음 속에 새겨지며 가슴에는 기쁨이 차고 넘쳐

도원동교회 집회가 끝나고 바로 다음 날부터 남산 공원에서 박태선 장로님 집회가 열렸습니다. 공원에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깔았는데 얼마나 넓은지 집회장 끝이 보이지 않았고 모여드는 인파는 놀라웠습니다. 사람들은 자리를 뺏기지 않으려고 집에서 밥을 날라다 먹으며 밤을 새울 정도로 집회 열기가 굉장했습니다. 저도 언니가 가져다주는 밥을 먹으며 집회장에 있다가 책가방을 베개 삼아 눈을 붙인 후 학교에 갔습니다. 누가 집회장에 있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예배드릴 때마다 기쁘고 즐거워서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박 장로님 인도하시는 대로 찬송을 부르면 같은 찬송을 수십 번 연거푸 불러도 지겹지 않았고 오히려 가사의 뜻이 하나하나 새겨졌습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찬송은 어릴 적부터 늘 부르던 찬송인데 처음 배우는 것처럼 새로웠습니다. 정말 기쁨이 가슴에 차고 넘치는 것처럼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예배 시간에 박 장로님께서 안수해 주실 때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를 다니시며 한 사람 한 사람 머리 위에 안수하셨는데, 저는 안수 받는 순간 불덩어리가 가슴에 들어온 것처럼 후끈후끈하며 몹시 뜨거웠습니다. 얼굴까지 발갛게 달아올라 저도 모르게 부채질을 하게 됐습니다. 학교에서도 부채질을 계속했더니 친구들이 아직 쌀쌀한 3월인데 왜 그러냐고 했습니다. 저는 온몸이 후끈후끈해서 밤중에 집회장에서도 추운 줄 몰랐습니다. 왜 이렇게 뜨거운지 영문을 몰라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박 장로님 말씀을 들으며 그 뜨거운 불이 불성신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이 집회에서 하나님의 성신이 불과 같이 내리는 것을 많은 사람이 느끼고 체험한다 하셨습니다.

집회장에는 신기한 일이 많았습니다. 벙어리가 말문이 트였다며 감격해 눈물을 흘렸고 들것에 실려 온 중환자가 일어나 뛰면서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 생기니 날이 갈수록 집회장에 오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우리 동네 어른들도 남산 집회에 많이 참석하시더니 그 후로 박 장로님의 영등포 집회와 한강 집회에 따라다니셨습니다. 저도 박 장로님 집회가 있다 하면 열 일 제치고 달려갔습니다.

그해 가을 무렵 원효로 박 장로님 댁 뒷마당에 예배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박 장로님 집회에서 은혜 받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렸는데 그곳을 원효로 전도관이라 불렀습니다. 어머니와 저, 언니는 원래 나가던 감리교회와 전도관을 같이 다니다가 나중에 온전히 전도관 교인이 되었습니다. 독실한 감리교 집안에서 전도관으로 가게 된 데는 그만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박 장로님께서 서울 시내 목사와 장로들에게 안찰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한성교회 장로인 큰아버지도 안찰을 받으셨는데, 그날 박 장로님을 처음 뵈었고 누가 말씀드린 사람도 없는데 박 장로님께서 “고집이 센 분이지요. 그래서 교회를 여러 개 세웠지요.” 하고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다 하셨습니다. 함께 있던 다른 장로님들도 저 양반 고집 센 것을 어떻게 아시냐며 놀랐다는 것이었습니다. 큰아버지는 안찰 받을 때 박 장로님의 손이 살짝 닿기만 해도 몹시 아팠는데, 성신으로 죄를 사해 주실 때 그런 통증을 느낀다 하시더라며 신기해하셨습니다. 그때 깨달은 바가 있으셨는지 큰아버지는 박 장로님께서 성신을 주시는 분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돌아가신 큰아버지를 축복솜으로 닦자
팔다리가 나긋나긋 부드럽게 움직이고

얼굴도 곱고 환하게 핀 것 분명히 보고
온가족이 함께 전도관을 다니게 돼

그 후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이웃에 사는 전도관 교인들이 한 식구처럼 장례를 도와주며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큰아버지가 다녔던 교회의 전도부인은 조문하러 와서는 전도관 교인을 보고 이단이라며 몹시 못마땅해했고, 큰아버지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수의를 입히려면 옷을 잘라야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전도부인이 돌아간 후 저희 식구는 전도관 교인들과 같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인 몇 분이 솜에 물을 적셔서 큰아버지를 깨끗이 닦아 드렸는데 박 장로님께서 축복하신 솜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 닦은 후 수의를 입힐 때 보니 팔다리가 나긋나긋 부드럽게 움직여서 살아 계신 분한테 옷을 입히는 것 같았습니다. 입관하려고 큰아버지를 들었을 때도 온몸이 부드러워 허리가 축 처지는 바람에 옆에 있던 분이 얼른 받혀 드렸습니다. 방금 전만 해도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었던 몸이 부드러워졌을 뿐 아니라 얼굴도 곱고 환하게 피어서 생전보다 훨씬 젊어 보였습니다. 그 주 일요일 전도관에서 예배드릴 때 박 장로님께서 “며칠 전 장로님 한 분이 피어서 갔습니다. 성신이 임하면 돌아가신 분도 생전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게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성신을 주셔서 큰아버지가 환하게 피셨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분명한 증거를 보고 저희 가족은 전도관으로 나가게 됐습니다.

저는 원효로전도관에서 주일학교 반사를 맡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사들이 은혜를 받아야 주일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 있다 하시며 안수와 안찰을 자주 해 주셨고, 소풍을 가서 즐거운 시간을 함께해 주셨습니다. 저는 반사들끼리 모여 은혜 받은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한번은 예배 시간에 안수를 받는 순간 배 속까지 시원한 물줄기가 쏵 내려오는 것처럼 시원해지더니 아주 좋은 향기가 진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달콤한 물이 목으로 넘어와 꿀꺽꿀꺽 삼킬 정도였는데 예배 마친 후에도 단물이 계속 마셔졌습니다. 반사들 모임 때 그 얘기를 했더니 저처럼 시원한 물이 흐르고 달콤한 물이 마셔진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전도사님은 그것이 생수가 통하는 체험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후로도 안수를 받고 나면 생수가 통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때마다 그렇게 기쁘고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1957년 이만제단이 지어진 후라고 기억되는데, 원효로전도관이 있던 곳에 양말 기계를 들여와 반사들이 기술을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기술을 배워 다른 반사들과 같이 재미있게 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작업을 둘러보시고 안수해 주실 때면 좋은 향취가 건물에 가득 찬 것처럼 진하게 맡아졌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공장은 소사신앙촌을 시작하시기 전에 시범적으로 운영한 곳이었습니다. 소사신앙촌이 건설되면서 양말공장이 옮겨 가게 되었고 다른 공장들도 세워졌습니다. 질 좋은 제품이 없던 시절에 신앙촌에서 좋은 원사로 만든 양말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후 저는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을 하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신앙촌 제품을 좋아하는지 실감하게 됐습니다.

제 나이 서른일곱 살 무렵 동두천에서 신앙촌 간장을 판매할 때였습니다. 그때는 빈 병에 간장을 따라주며 판매했는데 한번 신앙촌 간장 맛을 본 사람들은 다른 간장을 못 먹겠다며 제가 갈 때까지 병을 준비해 놓고 기다렸습니다. 저는 장사를 해 보지 않았고 큰 밑천도 없었지만 신앙촌 간장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 장사 규모가 커지게 됐습니다. 당시 어려웠던 생계를 신앙촌 소비조합을 하며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소비조합을 시작할 때부터 만난 단골들은 제가 신앙촌 간장 덕분에 부자 됐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소비조합을 하는 동안 영과 육이 아울러 복을 받는 길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부지런히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쁘게 사는 생활이 그렇게 기쁘고 보람될 수가 없었습니다.

소사신앙촌이 건설될 때 입주했던 어머니는 2008년경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관장님과 교인들이 오셔서 입관예배를 드렸는데 생명물로 깨끗이 씻긴 후에 보니 어머니 모습이 참 곱고 예뻤습니다. 원래 검은 편인 피부가 뽀얗게 피어 분을 발라 놓은 것 같았고 입술에는 어린아이 같은 혈색이 감돌았습니다. 얼굴 주름도 언제 펴졌는지 100세 가까운 연세가 무색할 정도로 젊어 보였습니다. 저는 일편단심 한길을 따라오신 어머니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은혜 주시는구나 하며 마음속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요즘 새벽예배를 드릴 때면 감사하는 기도를 많이 드리게 됩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 하나님의 은혜일세” 하는 찬송과 같이 이 길을 따라오는 동안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해 주셨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돌아보면 하나님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의 은혜를 받으며 열심히 살았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허락해 주시는 귀한 시간 동안 은혜를 간구하며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하루하루 맑고 성결하게 살아서 그날에 기쁨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관련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