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촌 건설의 신화(19) 시온탁구①-1

한국탁구사에 불멸의 금자탑 이룩
발행일 발행호수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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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965년 창단후 3연패만 3번 이뤄`

스포츠를 좋아하는 시온인들은 탁구, 농구, 배구 등 모든 운동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나 특히 ‘탁구 하면 시온’이라 할 정도로 시온탁구는 한국 탁구의 대명사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온이 탁구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시온탁구가 마침내 전국을 평정하여 한국 탁구를 대표하게 된 것은 “학생들을 사랑으로 지도하고, 운동을 할 때 상대방과 몸이 과격하게 부딪치는 운동종목은 신앙인들에게 합당치 않으니 서로 거리를 두고 마주보면서 운동하는 탁구가 좋겠다”는 설립자의 말씀에 따른 것이었다.

시온중·고등학교는 탁구를 교기(校技)로 정하고 1965년 3월에 탁구부를 창단하였다. 초대단장은 당시 시온고 체육교사였던 노형철씨(전 조선대 체육대학장), 코치는 이소광씨(李昭光, 현 대한탁구협회 경기위원장)가 맡았다. 소사신앙촌에서 이미 탁구인구가 저변에 확대되어 있는 데다가, 시온초등학교 출신선수인 박광명군 등을 중심으로 시온중학교 탁구팀이 창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특별히 탁구를 위한 시설이 없어 학교건물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는 곳에 탁구대를 놓고 탁구공을 첬다. 얼마 후 교실 하나를 비워 탁구대 2대를 놓고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교실바닥이 시멘트로 돼 있어 울퉁불퉁하여 운동화가 일주일이면 다 닳아 없어졌다고 한다. 선수들은 운동화를 감당할 수 없어 나중에는 맨발로 연습에 임하였고 라면을 끊여 먹으면서 실력을 연마하였다.

이소광코치는 첫 월급을 타자마자 남대문시장으로 달려가 1장에250원씩 주고 노란색 팬티를 사다가 선수들에게 나눠 주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시온탁구 노란색 유니폼의 시작이었다.

또 그는 늘 탁구경기 전후에 시온고 교가와 찬송가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을 선수들에게 부르게 하였는데 이것은 선수들로 하여금 시온인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주고 시온탁구를 통하여 전도의 길을 열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창단한 시온탁구는 창단 첫해에 대구에서 열린 제11회 전국종별 탁구대회에서 남자중등부 3등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리고 마침내 1967년 6월, 제2회 전국학도체육대회 중등부 우승을 차지하고 이어 7월에 개최된 13회 전국종별탁구대회에서도 중등부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승승장구의 길에 들어섰다.

한 지방학교의 탁구부가 단시일 내에 중앙의 강호들을 차례로 꺾고 전국을 휩쓸게 된데 대해 시온탁구 창단 첫해에 코치로 부임한 이소광씨는,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습니다.”라고 회고하였다.

그 이후에도 시온탁구는 전국대회의 단체전, 개인전, 복식전에서  우승사냥을 계속하면서 ‘황색 돌풍’을 이어갔다. ‘황색 돌풍’이란 당시의 시온탁구부의 유니폼이 노란색이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었다.

시온탁구가 1970년대 한국탁구를 풍미하게 된 데는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지도자들의 열성도 한몫을 하였다. 당시의 한국 탁구계에는 탁구기술과 이론을 누구에게 교습을 받을만한 사람이 없었고, 참고할만한 서적도 우리나라 말로 된 것은 없었다. 선진기술을 습득하여 선수들을 지도하고 탁구의 국제적 흐름과 탁구경기의 최신규정에 정통하려면 외국서적을 찾아보는 길밖에 없었다.

시온탁구팀의 코치들은 일본 서적을 읽기 위해 일본어를 배워야 했고, 영어 규정집을 보기 위해 영어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탁구이론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외국의 선진 탁구이론을 소개하며 연구를 거듭하여, 시온탁구와 함께 한국탁구의 대들보와 이론가로 성장하였다.

언론들은 ‘황색돌풍의 주역’이라는 타이틀로 시온탁구의 승전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는데, 당시 라이벌 탁구팀들 사이에서는 ‘노란색 기피현상’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석세조 교장은 “춘천에서 시합이 있었는데 다른 선수들이 노란색 택시를 타지 않고 머뭇거리는 것을 보았다. 시온탁구팀 = 최고강팀이라는 등식이 뇌리에 박혀있어 지레 겁을 먹고 노란색이면 무엇이든지 기피하던 모습들이 생생하다”라고 노란색 유니폼에 얽힌 일화를 털어놓았다.

시온탁구가 창단 40여년 동안 150여 회나 우승을 차지하면서 승승장구하자 처음에 냉담하던 언론과 탁구계의 태도도 점차 우호와 경탄의 감정으로 바뀌어 갔고, 당시 천부교와 신앙촌을 백안시하고 핍박하던 기성교회와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천부교인들은 큰 힘을 얻었으며 간접 전도에도 많은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신문 방송에 시온탁구가 승리하는 것은 더 이상 뉴스 거리가 되지 못하였으므로, 시온이 이겼을 때는 조그맣게 내고 시온이 지기라도 하면 ‘시온팀 격파’라고 대문짝 같이 보도하곤 했다.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나면 각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줄을 잇게 되는데 이때 마음껏 시온을 자랑하고 신나게 전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시온탁구가 명성을 떨치자 어깨를 펴고 전도했다는 시온탁구 관계자들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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