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촌 건설의 신화(22) 노구산 대집회①

이슬성신 찾아 연 70만 인파
발행일 발행호수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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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노구산 대집회에 참석한 대 군중. 소사신앙촌 노구산을 하얗게 덮은 인파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한없이 내리는 이슬성신의 은혜를 받기위해 노천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1958년 6월 노구산 대집회에 집회사상 초유의 대군중 모여`
1958년 6월 소사신앙촌 건설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소사신앙촌 노구산에서 대 부흥집회가 개최되었다. 노구산 정상 소사신앙촌의 5만제단이 건축될 예정부지를 중심으로한 광활한 산언덕에서 연인원 70 만명의 대 군중이 참석하는 부흥회가 열린 것이었다.

1958년 6월 30일자 신앙신보는 노구산 대집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이 땅에 나타나서 죽어가는 뭇 생명들을 중생시키고 이슬같은 은혜를 내리는 박태선 장로님이 6월 30일부터 7월 5일까지 대 부흥집회를 신앙촌에서 갖는다고 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의 역사가 나타날 이번 집회야말로 그 의의가 큰 바 있다. 앞으로 신앙촌에는 5만제단이 건축될 것이며 전국의 100만 전도관 성도들은 이 신앙촌을 동경하고 있는바 이번 집회에는 문자 그대로 이슬같은 은혜가 한없이 내릴 것으로 믿고 갈급한 심령들이 앞을 다투어 물밀 듯 모여올 것이라고 한다. 또 노구산 대집회 기간 중에 전국 전도관 대항 체육대회도 갖게 되리라고 하는바 경인지역뿐만 아니라 지방 선수들도 다수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감람나무를 통하여 내리는 이슬성신의 은혜를 맛본 사람들은 ‘박태선 장로님의 집회’가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수만 명씩 모여 오곤 하여 초창기에 남산이나 한강 모래사장 등에서 초대형 천막을 치고 ‘천막집회’를 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노구산 대집회 때는 천막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장마철 폭우를 맞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직 이슬성신의 은혜를 사모하여 노구산으로 모여왔다.
당시 신앙신보 장근수(張根洙) 기자는 노구산 집회의 장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노구산봉에 모여든 인원은 당시 한국 집회사상 최고기록을 자랑했다는 56년도 대통령 후보 유세 때 신익희씨의 한강 집회 규모를 훨씬 능가한 거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구산 집회는 양에 있지 않고 질에 있었다. 새벽, 낮, 밤의 하루 세 차례로 일주일을 계속한 노구산 심령대부흥회에서는 시작할 때보다 오히려 끝날 때가 될 수록 사람들의 얼굴이 더욱 생기발랄해지고 있었다. 집회가 끝나갈 무렵 노천이었던 노구산봉에는 초여름의 소낙비가 쏟아졌다. 노천이었던 만큼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말씀을 계속했고 성도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으며 빗물은 사람들의 몸의 열기로 말라갔다. 참석자들의 찬송은 드높았고, 얼굴엔 흐뭇한 은혜의 표정이 깊었다. 할렐루야 영광을 돌릴 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있었고 우렁찼다. 새벽예배가 10시, 11시까지 계속되어도 지루함보다는 즐거움이, 그리고 아쉬움이 남았던 것이다. 정말 체험해 본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이슬성신의 은혜이다. 나는 취재기자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은혜에 젖어갔다.’
당시 전국에는 비가 오랫동안 오지않아 가뭄으로 큰 흉년이 들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다가 노구산 대집회와 함께 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57년 12월 25일 소사에 입주했던 양윤신 권사(소사교회, 67세)의 증언. ‘그 해 가뭄이 몹시 들어 모를 심지 못하고 먹을 물도 없어서 고생하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집회 도중 날이 밝으며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비로 가뭄이 해소되고, 우리나라는 이제 살았다’고 하시면서 그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말씀을 계속하셨으며 집회 참석자들도 한 사람의 동요도 없이 비를 꼬박 맞으면서 집회를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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