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촌 건설의 신화(20)시온탁구②-1

국내 평정후 국제무대에도 두각
발행일 발행호수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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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노비사드에서 남북대결 승리의 주역으로`

1973년 시온합섬은 시온고 탁구팀을 흡수하여 시온합섬 탁구부를 창단하였는데 당시 실업팀으로는 동아건설 팀, 서울은행 팀, 공군 팀 등이 있었다. 시온합섬 팀은 이들을 모두 3 대 0 퍼펙트 게임으로 이기는 진기록을 수립하였다.

시온합섬 팀의 창단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했던 장기영 당시 부총리는 시온합섬 팀의 쾌승을 크게 기뻐하며 축전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우승을 차지한 선수들은 기장신앙촌으로 초대되어 며칠간씩 머물며 융숭한 대접을 받고 두둑한 보너스와 함께 메리야스에서 내복, 양말, 양복에 이르기까지 온갖 선물을 한 차 가득히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선수들의 사기는 나날이 높아갔던 것이다.

시온탁구가 이름을 떨치자 해외의 초청도 잇따랐는데 1977년에는 일본의 탁구용품회사 버터플라이 초청으로 일본에 가서 실업 팀, 일반 팀, 대표팀과 5번 대전 하여 5번 이기는 5전 전승의 기록을 세우고 개선하였다.

1977년 3월 14일자 신앙신보는 일본에서 개선하는 시온탁구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친선경기를 위해 일본을 방문했던 시온고 여자탁구팀이 지난 3월 4일 오후 6시 CPA기 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개선했다. 석세조 단장을 비롯한 임원 및 선수전원은 이날 공항에 마중나온 교직원과 학생대표 및 많은 탁구협회 임직원의 영접을 받았다.

약 1주일의 바쁜 일정속에 시달렸으면서도 피로의 기색도 없이 석세조 단장은 ‘초청자인 다마쓰 사장을 위시한 관계자들의 호의로 아무런 불편없이 예정된 스케줄대로 전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여 한일고교탁구의 교류와 우의를 증진하였으며 국위를 선양하고 무사히 귀국한데 대하여 탁구협회 관계자에게 감사한다’고 말하고 교직원들에게도 부재중의 노고를 치하했다.

귀국직후 시온고 여자탁구팀 일동은 서울 제 9중앙 전도관에서 주일예배가 시작되기전 하나님께 귀국 인사를 드렸다.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수들에게 ‘분발하여 더 좋은 성과를 거두기 바란다’고 격려하였다. 이어서 시온고 여자탁구부는 수원에 있는 경기도 교육위원회의 신능순 교육감에게 귀국인사를 했다. 신교육감은 선수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며 해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경기도 교육계만이 아니라 국위 선양에도 크게 기여한 공로를 치하하였다.

이어서 탁구팀은 인천에 있는 부천시 교육청의 오인균 교육장을 예방했는데 오교육장은 선수들에게 앞으로 부천시의 우수한 선수들을 선발하여 시온에서 육성하도록 하면 좋겠다며 향토의 명예를 빛내주었음을 격찬했다. 그리고 박제혁 부천시장은 ‘내고장의 명예에 그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음을 찬양한다’고 했다.”

1977년 6월 6일자 신앙신보는 다음과 같이 캐나다에서의 승전보를 전했다. “북미 카나다에서 지난 5월 26일부터 29일까지 시행된 제30회 카나다 오픈 탁구선수권대회에 한국팀 대표로 출전한 시온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김경자양은 단체전에서 영예의 우승을 차지하여 한국의 명예와 시온의 명예를 함께 빛내 주었다.

김양은 주니어부 개인단식에서는 준우승을, 그리고 시니어부 혼합복식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였다.한국을 비롯하여 미국, 영국, 독일, 이란, 스웨덴, 이집트, 유고, 카나다 등 10개국이 참가한 이번 대회에서 한국팀은 단체전과 개인전에서 한국선수들끼리 결승전을 벌이는 호성적을 보여 한국팀의 독무대를 이루었다. 여고부 1위로 선발되어 이 대회에 출전한 김양은 시온국민학교와 시온중학교를 거쳐 시온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981년 시온탁구의 이수자, 김경자조는 국가대표로 유고 노비사드에서 개최된 제36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맹활약을 벌였다. 이 때 시온의 박이희 등이 주축이 된 남자 국가대표는 최초로 북한팀을 격파하기도 했다. 당시의 남북대결은 박빙의 신경전이었으며 서로 이기려고 온갖 힘을 다쓸 때였다.

시온탁구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무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핑퐁외교’를 톡톡히 벌였다. 후일 김경자 선수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영주권이 나오지 않아 곤란을 받던중에 시온탁구에서 활약하면서 해외의 승전보를 다룬 신문기사를 제출하자 미국 이민국에서 즉시 영주권을 발급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시온탁구의 명성이 국내외적으로 얼마나 대단하였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온탁구가 한국탁구를 대표하는 명문이 되자 각국에서는 앞다투어 시온으로 전지훈련을 와서 시온탁구를 배워갔다. 국내 팀들은 물론이고 일본, 대만, 싱가포르, 홍콩, 베트남, 캄보디아,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팀들이 시온에 와서 시온팀과 합류하여 운동을 하고 신앙촌에 들러 견학을 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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