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1955년 개관된 원효로 구제단, 천부교의 시작을 체험기를 통해 따라가 본다
발행일 발행호수 2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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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로 구제단에서 설교하시는 하나님 모습. (촬영 연도: 1956년 초)

1955년 개관된 원효로 구제단, 천부교의 시작을 체험기를 통해 따라가 본다.

1955년 전국 순회 부흥집회가 열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은혜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하나님 자택 기도실(용산구 원효로 3가 52번지)로 모여들었다. 모여드는 교인들이 나날이 늘어나자 2,500명 수용의 건물을 준공하여
서울 임시중앙전도관이라는 이름으로 1955년 12월 24일 개관하고, 다음 날인 25일부터 56년 1월 초까지 일주일간 개관집회를 열었다.
이 교회는 흔히 ‘구제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전도관 명칭이 처음 사용된 천부교 최초의 교회였다.
이곳을 필두로 1956년 1월 12일 인천전도관, 5월 11일 부산전도관 등 전국 방방곡곡에 전도관 개관이 시작되었다.

◇생명을 알게 하시려고 이끌어 주신 시간과 정성

조남준 권사/기장신앙촌

제가 하나님께서 운영하시는 철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9·28 수복 후 다시 서울로 올라온 다음 해부터였습니다.
우리 공장에서는 공구류의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몇 군데 안 되는 생산 기술이기 때문에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습니다.
어떤 날은 흥에 겨워 유행가를 부르며 일을 하면 언제 오셨는지 “조 선생! 노래 참 잘한다. 그런데 그 노래를 찬송가로 바꿔 부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계신가요?” 하고 여쭈면 “조 선생! 아직 모르는구먼.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셔.” 하시며 “조 선생! 잘 만났어. 앞으로 좋은 때가 와.”라고 하셨습니다.
1952년도 2월 말경 어느 날 하나님께서 좋은 데서 점심을 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큰길 옆에 중국 요리집이 있었는데, 미리 주문을 하셨는지, 준비가 되어 있는 2층 방에 저는 하나님과 마주 앉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 선생! 오늘은 나하고 특별히 약속하는 날이다. 이제부턴 술을 안 마시고 하나님 믿는다고 똑똑히 ‘예!’ 하고 대답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술을 마시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 하시니 그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이 제 마음을 사로잡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날 이후로 술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다음 주일에는 하나님과 같이 교회에 처음 나가게 되었습니다.
처음 교회에 갔을 때 기억이 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인들에게 친절히 인사를 하며 안내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그토록 겸손하시고 사랑이 넘칠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우리는 설렁탕 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고, 남대문 과일 시장에 가서 사과 1상자를 사서 시장을 지나 언덕 위에 팔각정이 있는 넓은 잔디밭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둥그렇게 앉아 찬송가를 가르쳐 주셨는데, 한참 동안 가르쳐 주신 후 한 사람씩 돌아가며 독창을 시키셨습니다. 저에게는 찬송을 잘 부른다고 칭찬하시며 사과 2개를 주셨습니다. 저는 정말 어린아이가 소풍 온 것같이 기뻤습니다.
유행가를 부르며 작업을 했던 종업원들이 그날 이후로 찬송가를 부르며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듣기 좋다고 하시며 점심시간에 찬송가를 가르쳐 주시곤 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들은 한마음으로 합쳐지는 것을 느꼈으며 하는 일도 재미가 있어서 능률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 후에 안찰과 전국 순회 집회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은혜 받은 서울, 경기도 등 각지에 있는 교인들이 하나님 은혜에 갈급한 나머지 원효로에 있는 하나님 자택에 수없이 몰려들었습니다. 조그만 기도처에 사람들이 차고 넘쳐서 구제단을 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구제단도 현관 밖까지 차고 넘쳐 무릎 위에 사람이 앉을 정도였고, 예배가 시작되면 안개 같은 뽀얀 것이 파도치는 것처럼 앞에서부터 뒤로 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이슬성신인지 몰랐는데 계속 그런 현상을 체험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원효로 구제단에서 은혜받은 후 성령의 역사임을 확신

장일천 퇴임 교역자

제 나이 열아홉 살 때인 1955년이었습니다. 종교계에서는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의 집회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저는 귀가 번쩍 뜨이면서, 박 장로님을 직접 만나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서둘러 서울로 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수소문 끝에 충무로에서 공장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계시지 않고 원효로 3가에 가보면 장로님 자택이 있고 그 옆에 큰 집회 장소가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길로 원효로에 가서 헤매다가 장로님 댁을 찾았습니다. 일러준 대로 집 옆에는 바닥이 마루로 된 큼직한 제단이 있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원효로 구제단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 박 장로님을 처음 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안찰부터 받으라 하시며 박 장로님께서 눈과 배에 손을 얹으시니 순간 배 속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시원한 물이 배 속에서 계속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희한한 체험은 난생처음이었습니다. 게다가 마음은 한없이 편안해졌으며 기쁨은 물밀듯 넘쳤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성령의 역사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고, 이곳을 떠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전주로 내려가지 않고 계속 서울에 있으면서 구제단 예배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받은 사람들, 나날이 모여들어

맹경순 퇴임 교역자

1955년 박 장로님 댁에 기도실이 마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몰려왔습니다. 정릉, 미아리, 불광동, 청량리, 홍릉, 종로, 돈암동 등 각처에서 몰려온 것입니다. 그 먼 곳에서 모두들 새벽에도 다 걸어서 새벽예배를 다녔습니다.
구제단에서 새벽예배 시작하면 4~5시간씩 100일간 ‘불의 사자 동방의 1인’을 외치셨습니다. 우리는 참 목자를 만났으니 정신없이 따랐습니다. 썩은 죄를 도려내고 영적인 새 살이 나오도록 하시는 하늘의 의사를 만난 것입니다.

◇원효로 구제단 개관 / 김도삼 승사

김도삼 승사(왼쪽)/기장신앙촌. 원효로 구제단 앞 도로. (촬영일: 1956. 2. 28.)

1955년 어느 날 박 장로님께서 새벽제단 때 제단을 크게 짓자 하셨습니다. 그때 온 분이 다 해야 백 이삼십 명 될까 했습니다.
이튿날 그때 수를 세어 보니까 80명밖에 안 되었는데 그때 말씀이 4, 5백 평 제단을 짓겠다 하셔서 사람은 적은 데 무엇 하시려나 했습니다. 그 이튿날부터 짓기 시작해서 10일도 못 되어 기둥을 올리고 1955년 12월 25일 원효로 구제단 개관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박 장로님께서 찰떡을 해서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때 모인 수는 5백여 명, 그날 저녁 말씀하시는데 지금 여기 뒷자리가 비었지만 얼마 안 되어 차고 넘치리라 했습니다. 과연 그 후 얼마 안 되어 제단이 넘치고, 이층까지 넘치고, 철길을 덮고, 길까지 온통 덮어서 교통 차단이 일어났었습니다. 용산 경찰서에서 나오고 야단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내가 찾던 길임을 깨달아

선우혜국 승사/기장신앙촌

6․25 전쟁을 겪으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어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던 제가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끔 된 것은 마음에 기쁨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느 날 한강 모래사장에서 박태선 장로님의 부흥집회가 열린다고 하여 참석했는데 그때가 1955년 7월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는데, 집회가 열리는 동안 제 눈앞에서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벙어리가 말문이 트이고, 소경이 눈을 뜨며, 들것에 실려 왔었던 병자들이 벌떡벌떡 일어나는 등 그동안 여러 번 부흥집회를 다녔어도 이런 일은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병자가 낫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죄를 회개하여 죄가 빠져나가면 성신이 담긴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제 가슴속에 절실히 와닿았습니다.
평생 동안 기성교회에 다녔어도 죄에 대한 것도 모르고 눈물이 메말라 있었던 제가 박 장로님을 뵙고는 지극히 작은 자가 되어 죄 덩어리인 제 모습이 느껴지면서 눈물만 흐를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새사람이 될 수 있을까?’, ‘성신이 담길 수 있도록 깨끗하게 살아야겠다’ 하는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그 후 1956년 1월 1일부터 전도관 교인으로 정식 등록을 하고 원효로 구제단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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