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천부교회, 첫 번째 대규모 합창…천부교 역사 속의 특별한 12월

테마로 보는 신앙체험기
발행일 발행호수 2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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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부터 시작된 천부교 역사 속에서 12월은 특별한 달입니다. 첫 번째 천부교회 건립과 첫 번째 대규모 합창을 비롯해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12월, 천부교 역사 속의 12월을 체험하신 분들과 신앙신보 기사를 통해 당시의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원효로 전도관에서 설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경청하는 사람들(1956년경)

◈ 1955년 12월, 첫 번째 천부교회가 시작되다

1955년 12월은 첫 번째 천부교회인 “원효로 전도관”이 세워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천막집회에서 은혜 받은 사람들이 원효로 하나님 자택의 기도실로 모여들어 함께 예배드리기 시작했고, 그들을 위해 뒷마당에 세우신 교회가 바로 원효로 전도관이었습니다. 원효로 전도관의 창립 임원 80인 중의 한 분이셨던 김도삼 승사님(작고)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1955년 7월 한강 모래사장에서 열린 하나님 집회에 참석해 20만 명이 넘게 구름떼같이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집회 도중에 벙어리가 말을 하고, 소경이 보인다고 뛰고, 앉은뱅이가 다리에 힘이 온다며 기뻐 뛰고 야단들이었습니다.

‘아! 정말 놀라운 성신의 역사로구나.’ 감격으로 벅차서 돌아오려는데, 어떤 분이 “2, 3일 후 박태선 장로님의 집에 있는 기도실에서 예배드린다.”는 소릴 들었다고 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이 사실로 인해 그곳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몇십 명이 먼저 와서 기도하며 찬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철야기도를 하고 다음 날 아침 하나님께서 “모인 수가 몇 명인지 세 보라.” 하셔서 세어 보니 80명이었습니다. “오늘부터 하나님 역사를 시작하겠다. 앞으로 제단 짓고 전국적으로 전도를 시작하겠다.” 하시는 말씀을 들은 후 안수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기도실에서 새벽예배를 드렸고 얼마 후에는 주일학교 총무로 임명받아 일했는데 주일학교가 생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일학생이 2000명, 반사가 180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댁 뒷마당에 ‘원효로 전도관’을 짓기 시작할 때는 매일 2-300명이 철야 기도를 드렸는데, 그 추운 겨울 아침에 일어나면 천막에 서리가 하얗고, 땅바닥에는 단지 가마니 하나밖에 깔려 있지 않았었는데도 모두가 추운 줄을 모르고 철야를 계속했습니다. 1955년 12월 원효로 전도관을 지으신 후에는 80명으로 시작했던 인원이 5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 1956년 12월, 전국에 천부교회가 세워지다

1956년 12월 25일자 신앙신보에 실린 전도관 건축 화보와 기사

1956년 12월은 전국 각지에 천부교회가 세워져 수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이 천부교회로 몰려오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반영해 12월 25일자 신앙신보는 전국에서 속속 위용을 드러내는 천부교회의 모습을 많은 사진과 함께 보도했습니다. 2면에는 원효로 전도관을 비롯해 신축 공사 중인 이만제단의 다양한 모습, 그리고 신축 중인 인천, 부산, 여수, 영산포 전도관의 모습이 실렸습니다.

또 영덕전도관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인근 장로교회보다 4배 이상 많은 인원이 모여 기성교계에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안동전도관 또한 건물을 신축하고 교인들이 모여드는 사실을 전하며 1월 상순에 개관집회를 할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인천전도관도 새로 신축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6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의 위용을 사진으로 실었는데, 인천전도관의 신축과정을 직접 체험한 정인선 집사님(기장신앙촌 소속)은 이런 체험담을 들려주셨습니다.

숭의동 산언덕에 인천전도관을 짓기 시작할 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른부터 학생까지 건설 현장에서 자재를 나르며 일을 도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찬송하며 벽돌 하나하나 나를 때 저의 작은 힘을 보탤 수 있는 것이 참 즐거웠습니다.

인천전도관이 완공돼 하나님을 모시고 신축집회가 열렸습니다. 치과 의사였던 아버지는 제가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셨는데 전도사님이 집에 오셔서 심방예배를 드린 것을 계기로 반대가 누그러지셨고 신축집회도 참석하시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친구 분들에게 전도관을 비방하는 말만 들으시다가 인천전도관 신축집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신 후로 완전히 달라지셨습니다.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짓지 말라는 자유율법에 대한 말씀이 놀랍다 하시더니 말씀을 더 듣고 싶다며 새벽예배에 나가기 시작하셨고 저보다 열심히 전도관에 다니셨습니다. 인천전도관 신축집회 이후로 어머니도 함께 전도관에 다니시면서 온 가족이 한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저에게는 참 기쁘고 감사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시온합창단의 제18회 정기 연주회 모습. 1500명의 여성합창단이 <하이든의 사계>를 국내 초연했다.(1986.1.27)

◈ 1969년 12월 첫 번째 대규모 합창이 시작되다

1969년 12월은 시온합창단이 첫 번째 대규모 합창을 시작한 때였습니다. 그해 5월에 창단한 시온합창단은 12월 23일 제1회 연주회를 서울 시민회관에서 가졌는데 이때 700명의 대규모 인원이 국립교항악단과의 협연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지휘를 맡았던 작곡가 김동진 씨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큰 합창단은 150명에서 200명 정도였습니다. 전례 없는 대규모 합창단의 성공은 단원들이 열과 성을 다한 결과입니다. 시온합창단은 앞으로 계속 노력한다면 더욱 훌륭한 합창단이 될 것입니다.”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날 3부로 구성된 음악회는 1부와 2부 사이에 시온어린이 합창단이 찬조 출연해 박수갈채를 받았고, 음악회는 KBS-TV, MBC- TV에서 연주실황을 중계방송 하는 등 대 성황이었습니다.

이때 시작된 시온합창단의 대규모 공연은 1970년 2회 공연 때는 1500명으로 그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고 1986년 18회 공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창립 당시부터 시온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했던 강문형 권사님(인천교회)은 당시 경험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1969년에 시온합창단이 조직되면서 입단을 했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학생 때부터 사람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고 합창을 하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1970년에 열린 제2회 정기 연주회 때는 1500명의 대합창단이 김동진 교수님의 지휘로 연주를 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연습을 하면서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나의 진심으로 하나님께 찬송드리자.’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런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 제 목소리가 너무나 곱고 예쁘게 아주 높은 고음까지 매끄럽게 올라가서 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성껏 마음을 모아서 찬송할 때 그 노랫소리가 마치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처럼 느껴지며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맛을 안 뒤부터는 합창이 있을 때마다 더욱 열심히 참여하게 되었고, 1986년 세종문화회관에서 18회 정기 연주회를 할 때까지 계속 시온합창단으로 활동했습니다.

무지개가 뜬 신앙촌 식품단지

◈ 1996년 12월 생명물두부 신축 공장이 완공되다

1996년 12월은 생명물두부 생산 공장이 완공되고 첫 제품이 출시되었던 때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2005년 요구르트 런과 2011년 양조 생명물간장이 새롭게 지어진 공장에서 생산되며 신앙촌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식품 단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초창기 소사신앙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박금석 권사님(소사신앙촌)은 신앙촌 마크가 선명하게 찍힌 생명물두부를 보고 신앙을 되찾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1998년 무렵 저는 전도관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초창기 소사신앙촌에서 건설대로 일하고 덕소신앙촌에서도 신앙생활을 했던 저는 서울로 이사한 후로는 전도관과 점점 멀어졌습니다. ‘먹고사는 데 얽매여 세월을 다 보냈구나.’ 하면서 그동안의 시간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은혜 받은 시간이 내 생애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 번이라도 신앙촌에 가고 싶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포장 두부를 사다가 우연히 포장지를 보니 신앙촌 마크가 붙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눈에 익은 마크를 보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제가 두부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자 판매하는 분도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겨우 마음을 진정한 후 판매하는 분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자 그 두부는 부산에 있는 기장신앙촌에서 만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소사신앙촌의 오만제단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반갑고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 주 일요일 당장 오만제단에 찾아갔고 집과 가까운 구의동 천부교회를 소개받아 새벽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말씀을 배워 가며 하나하나 깨달을 때마다 참 기쁘고 좋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오랫동안 떠났다가 이제야 왔습니다. 앞으로 귀한 길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하고 다짐했습니다. 지금도 생명물두부를 볼 때면 마음의 고향을 다시 찾게 해 준 때가 떠올라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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