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는 이토록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구나’

<덕소교회 김기린 권사 신앙체험기>
발행일 발행호수 2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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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안찰을 받고 나니 뱃속이 시원해지면서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껴
예배 시간 내내 진동하는 향취 은혜와 단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뽀얗게 내리는 은혜를 체험하기도
생명물로 환하고 아름답게 피어난 가족의 시신을 보고 마음속 깊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 드려

<492회> 김기린 권사/덕소교회

제가 살던 충남 서산군 대산면 오지리에는 오지전도관이 있었습니다. 1962년쯤 당시 국민학생이던 두 아들이 일요일마다 전도관에 다닌다고 할 때도, 동네 교회에 다니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전도관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들은 후부터였습니다. 아주머니들이 말하길 전도관에 가면 병자들의 병이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폐병을 앓아 수시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하는 남편을 둔 저는 그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낮에 있었던 대화를 전했고, 오랫동안 객혈에 시달려온 남편은 반가운 기색을 보이더니 바로 다음 날부터 오지전도관으로 새벽예배를 가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열심히 새벽예배를 다니던 남편은 어느 날부터는 본인이 새벽종을 울리기로 했다며 더욱 부지런히 일어나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활기차 보이는 남편의 얼굴을 보니 전도관이 더욱 궁금해져서 저도 새벽예배를 따라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막상 남편을 따라나섰지만, 예배를 드리는 일 자체가 처음이었던 저는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고, 찬송가도 잘 몰라서 어설프게 따라 불렀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전도사님은 교인들에게 물을 한 컵씩 따라주셨는데, 그 물은 하나님께 축복받은 귀한 물이라기에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마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의 객혈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전도관을 다닌 지 두 달도 채 안 된 시점이었습니다. 남편은 축복받은 물을 매일 마신 덕분이라며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 뒤로 남편은 물론 저까지 전도관에 더욱 열심히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전도사님이 하나님께서 안찰을 해주신다며 신앙촌에 같이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소사신앙촌에 이어 덕소신앙촌도 완공된 시기였는데, 그날 하나님께 안찰을 받기 위해서는 덕소로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도착한 덕소신앙촌은 그야말로 신세계였습니다. 대규모 공장단지는 물론 새로 지어진 아름다운 주택이 마치 외국에 온 것 같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천천히 덕소신앙촌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안찰을 받기 위해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안찰을 받으러 간 장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머리를 가볍게 톡 쳐주셨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하나님께서 제 머리도 쳐주셨는데, 분명 손만 대시는 듯했음에도 세게 맞은 것처럼 아픔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아픈 것도 잠시 뱃속이 시원해지면서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제 몸의 무게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가벼워서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느낌이어서 전도사님께 말씀을 드리니 안찰을 통해 제 속의 죄가 씻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신기한 체험을 하고 나니 과연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권능을 가지신 분이고,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은혜의 울타리 신앙촌에서 살 수만 있다면 참으로 복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저는 가족들과 상의하여 1967년에 첫번째 신앙촌인 소사신앙촌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소사로 이사한 후 새벽예배를 가는 길이었습니다. 제단에 도착해 예배실 문을 열었는데 참기름 냄새 같기도 하고 깨소금 냄새 같기도 한 고소한 향이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향기는 예배를 드리는 내내 지속되었고, 나중에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것이 향취라고 했습니다. 향취는 꽃이나 박하사탕 냄새 같기도 하고, 참기름 냄새처럼 고소한 향으로 맡아지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귀한 하늘의 은혜를 허락해주셨음이 너무도 감사했고, 그 귀한 은혜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더욱 맑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소사신앙촌에는 부지런히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소비조합원들이 유독 제 눈에 띄었습니다. 활기차게 움직이며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소비조합들의 모습이 부럽게 느껴져서 저도 소비조합이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처음으로 생명물 간장을 들고 소비조합 버스에 오른 날이었습니다. 버스는 종로를 지나고 청계천을 지나 남대문 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시온 식당이라고 신앙촌에서 운영하는 식당이 있었는데 버스에서 내린 소비조합들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는 각자 고객을 만나러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다시 남대문 정류장으로 돌아와 버스를 타고 신앙촌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소비조합이 된 첫날 저도 시온 식당에서 식사를 마쳤지만 저는 만나러 갈 고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남대문과 가까운 회현동, 후암동 일대를 돌며 고객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서울 지리도 잘 몰랐던 저는 혹여나 길을 잃을까 봐 주변 지형물을 외워가면서 한 집 한 집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와중에도 호기롭게 대문이 큰 집들만 골라서 두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나오면 “안녕하세요? 신앙촌에서 나왔는데 혹시 신앙촌간장 써보셨나요?”하고 물었습니다. 제 인생의 첫 번째 고객을 그렇게 만났습니다. 그 분은 “신앙촌 간장이요? 맛있다는 소문 정말 많이 들었어요.” 하고 반색하기에, 저도 반가워서 신앙촌간장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듣던 고객은 간장을 구입했고, 처음으로 제품을 판매했다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나서 더욱 열심히 홍보한 결과, 저는 그날 가지고 간 간장을 모두 판매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찾아갈 수 있는 고객이 생긴 저는 다음날부터 간장은 물론 속옷, 엑슬란 치마, 이불까지 하나둘 품목을 늘려가면서 더 많은 단골 고객을 만들었습니다. 단추 하나까지도 꼼꼼히 박음질 된 신앙촌 제품은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저의 자부심이었습니다. 새로 가지고 간 신앙촌 제품을 사람들 앞에 선보이며 하나하나 설명할 때의 즐거움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몇 해 뒤 저는 덕소신앙촌으로 거처를 옮기고 더욱 활발하게 소비조합 활동을 했고, 1972년에는 기장신앙촌이 완공되어 그곳으로 축복일 예배를 드리러 가게 되었습니다. 축복일 예배가 시작되기 전,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기도를 드리다가 잠시 눈을 떴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예배실에 안개가 자욱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계신 단상 쪽은 뽀얀 안개로 뒤덮여서 하나님 얼굴도 겨우 보일 정도였습니다. 새벽도 아닌 대낮에, 그것도 실내에 안개가 껴있으니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면 이슬 같은 은혜가 내린다는 이야기가 떠올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향기로도 맡아지고, 눈으로도 볼 수 있는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구나!’ 하고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초, 저는 인천에서 사시던 어머니를 덕소신앙촌으로 모셔와서 함께 지냈습니다. 어머니는 신앙촌에서 10년 넘게 지내시다가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를 모시면서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어머니의 굳어버린 왼쪽 팔이었습니다. 어머니는 1934년에 저를 낳으신 후 동네 한의원에서 침을 맞다가 잘못되어 왼팔이 제대로 안 움직이는 바람에 평생을 한쪽 팔로만 살아오셨습니다. 특히 왼손의 손가락 세 개는 심하게 오그라들어서 두 손가락만 겨우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후 입관 예배를 드리며 생명물로 깨끗이 씻겨드리자 생전에 뻣뻣했던 어머니의 왼쪽 팔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오그라들었던 손가락 세 개도 모두 반듯하게 펴졌습니다. 저는 너무 신기해서 어머니 손을 붙잡고 오므렸다 폈다 움직여보며 귀한 은혜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이토록 놀라운 생명물의 권능은 2014년 남편이 숨을 거뒀을 때에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생명물로 객혈이 완치된 남편은 그 이후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살다가 85세의 일기로 숨을 거뒀습니다. 남편의 입관 예배는 덕소 남자교회에서 진행했는데, 입관 예배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너무나 잘 피었다고 신기해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얼굴은 뽀얗게 피어나 환해 보였고, 입술과 볼에는 혈색이 돌아 마치 깨끗이 씻고 잠이 든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생전보다 더욱 편안해 보이는 고인의 마지막 모습에 저는 마음 깊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덕소에서 즐겁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가끔 처음 소비조합을 시작하며 알게 된 단골 고객으로부터 안부 전화가 와서 예전 이야기를 하며 소소하게 웃기도 합니다. 전화를 끊고 문득 처음 전도관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깨닫고, 소비조합으로 지내왔던 시간들을 떠올려봅니다.
전도관을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제 삶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원래 잘 웃는 편이 아니었지만, 전도관을 다니고부터는 만나는 사람마다 “김 권사님은 뭐가 그리 기뻐서 노다지 웃고 다니세요?”하고 물을 정도로 웃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입가에는 찬송이 맴돌았고, 찬송가 가사가 마음에 와닿아 감동받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때는 제가 왜 그리 기쁘고 감동받았는지 잘 몰랐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해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은혜로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계셔서 제 삶이 늘 안전하고 평안했습니다. 세상의 풍파에서 벗어나 구원의 길을 걷게 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게 소망이 있다면 남은 시간 동안 허락해주신 귀한 하늘의 은혜를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간다는 찬송가 가사처럼, 다가오는 날들이 맑고 성결한 시간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1960년대 덕소 신앙촌 주택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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