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마음의 근심과 걱정이 사라져

<493회> 김애자 권사/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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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제주에서 태어난 저는 아홉 살 무렵에 고아 아닌 고아 신세가 되었습니다.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저를 유달리 예뻐하셨던 첫째 이모가 광주 계림동에 있는 이모네 집에 저를 데리고 간 날이었습니다. 이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저는 혼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익숙지 않은 이모네 동네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결국 길을 잃어버리고만 것입니다.

천만다행으로 추운 겨울에 혼자서 눈 쌓인 거리를 방황하던 저를 나주지역 오 병원의 사모님이 발견하셨습니다. 그분은 집을 찾아주기 위해 이모의 이름과 집 주소가 어떻게 되는지 이것저것 물어보셨습니다. 하지만 이모 이름과 집 주소를 모르기도 했고, 제가 쓰던 제주도 사투리가 워낙 심해서 사모님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답답할 따름이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던 저를 안타까이 여기신 사모님은 본인 집에서 지내게 해주셨습니다. 사모님 댁에서 사는 동안 가족을 찾으려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해 계속 나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이었지만 저를 친딸처럼 귀히 여겨주시는 사모님 덕분에 구김살 없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사모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즈음 터진 6.25전쟁으로 인해 큰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나주에서 지내는 동안 저는 가까운 장로교회에 다니며 또래 친구도 사귀었습니다. 한 번은 교회에 갔더니 목사님이 한 장의 사진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진에는 무척 귀해 보이는 분이 계셨는데,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처음으로 뵌 하나님 모습이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집회를 여시면 불성신이 내리기 때문에 불의 사자라고 불린다고 하였습니다.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뒤 제 친구의 어머니가 하나님 집회에 가셔서 은혜를 체험하셨다며 그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친구의 어머니는 1955년 11월에 있었던 광주공원 집회와 12월에 있었던 목포 집회에 다녀오셨습니다. 어머니 말로는 집회에서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좋은 향기가 코끝에 맴돌고, 집회장 안에는 이슬비 같은 은혜가 계속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진짜 은혜를 주시는 분을 만났다며 기뻐하시던 친구 어머니는 얼마 후 집 가까운 곳에 전도관을 세우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원래 장로교회를 지으려고 마련하신 땅이 있었는데, 거기에 전도관을 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장로교인들이 친구네 집에 찾아와 계속해서 어머니를 회유했지만 확고한 그 뜻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전도관은 빠르게 지어지기 시작했고, 저는 작은 일손이라도 보태고 싶어서 흙이나 돌을 나르며 공사를 도왔습니다. 전도관이 완공되자 먼 동네로 전도관을 다니던 사람들은 물론 새교인들도 많이 전도되어 주일마다 힘찬 찬송 소리가 예배실 가득 울려 퍼졌습니다.

고달팠던 유년기를 보내고 어두운 마음으로 지내던 사춘기 시절 영산포 전도관에서 하나님을 처음 뵙게 돼
예배를 마치고 안수해 주시는데 하나님의 손이 머리에 닿는 순간 마음이 환해지면서 기쁨이 솟아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천부교식으로 입관 예배를 드리니 굳었던 몸이 부드럽게 움직이고 피부도 환히 피어나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셨음에 감사한 마음을 감출 길 없어 눈물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드려

그 즈음 가까운 영산포 전도관에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영산포 전도관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이 앉아 있었고,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그날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는데 이상하게 예배실 앞자리에 안개가 자욱하게 껴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그것이 이슬 같은 은혜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왜 저렇게 뽀얗게 안개가 껴서 앞이 잘 안 보일까’ 하고 이상하게만 여겼습니다.

그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설교였습니다. 설교 도중 하나님께서 “여기에 죽을 만큼 괴로운 사람 있나요?” 하고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춘기에 접어든 저는 부모도 집도 잃고, 남에게 얹혀사는 처지를 내심 비관해왔던 터라 조용히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살아봅시다.” 라고 하셨습니다. 잠시 후 예배를 마치신 하나님께서는 예배실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모두 안수해주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를 가볍게 다니시며 한 명씩 머리에 손을 짚어 주셨고, 제 머리에도 손을 얹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를 안수해주고 가시다 다시 뒤로 오셔서 제 머리에 한 번 더 안수를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손이 머리에 닿는 그 순간 어두웠던 마음이 환해지면서 기쁨이 솟아났습니다. 저는 기분이 좋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찬송을 흥얼거렸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래도 살아보자.’ 하신 하나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아 앞으로 용기를 갖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집을 떠난 이후로 처음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시절 어두웠던 제 마음을 보시고 위로해 주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뒤로 열심히 전도관을 다니던 저는 1961년 성인이 되자마자 소사신앙촌에 입주하여 제과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앙촌 캐러멜과 카스텔라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서 제과공장은 무척 활발히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난로 옆에 알콜이 담긴 병을 올려뒀는데, 그 병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옆에 있던 제가 얼굴과 목, 팔에 큰 화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얼굴과 목이 너무나 아팠고, 제 양 팔은 심하게 익어서 피부가 벗겨져 피가 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저를 들쳐 업고 하나님 댁으로 달려갔고, 하나님께서는 축복솜에 생명물을 적셔 제 얼굴과 팔에 덮어주셨습니다. 축복솜이 피부에 닿자 고통이 쉬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일주일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있었고, 동료 직원들이 하루에 한 번 하나님 앞으로 저를 부축해서 데려가 축복을 받게 해주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몸이 점점 회복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빨리 회복하라며 손수건을 축복해 주셔서 그것을 가슴에 꼭 안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3개월 후 저는 완전히 나아서 평소처럼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얼굴과 팔에 심한 화상을 입었던 것을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를 정도로 깨끗하게 나아서 무척 신기하고 감사했습니다.

1962년 10월 15일에 저는 덕소 신앙촌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도 제과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건설 현장 앞을 지나가는데 2층에서 쇳조각 하나가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쇳조각은 제 머리로 떨어져 이마에 살이 패이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현장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소식을 듣고 달려오시더니 “내가 강하게 축복해줄게.” 하시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바로 피가 멎으며 고통이 사라졌고, 며칠 뒤에는 흉터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게 아물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또 한 번 체험한 날이었습니다.

한 번은 덕소에서 지내다가 문득 부모님을 찾고 싶다고 생각한 날이 있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기에 가족을 찾기 위해 신앙촌을 떠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날은 하나님께서 제과부 직원들을 안찰해주시기로 한 날이었는데도 안찰은 받으러 가지 않고 집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방에 가만히 혼자 앉아있는데 머릿속에 ‘내 너를 위하여 이슬성신 내려, 네 죄를 씻어 주건만 너 무엇 하느냐’ 하는 찬송이 계속 맴도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가슴이 아파 한참을 울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하나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드리다 문득 하나님께 안수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온 힘을 다해 안찰 받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다행히 안찰이 끝나지 않은 시간이어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배 안찰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손이 닿는 순간 말할 수 없이 기쁘고 포근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품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 포근함에 다시는 은혜 주시는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기장신앙촌이 건설되면서 1971년부터는 기장신앙촌 와이셔츠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수출을 많이 하던 때라 공장들이 모두 바쁘게 돌아가던 때였습니다. 그 즈음 태어난 저의 아들 셋은 신앙촌에서 큰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아이들이 넘어진 곳에는 축복솜을 붙이고, 감기 기운이라도 있을라 치면 축복 캐러멜을 끓여 먹였습니다. 그러면 상처가 빠르게 아물고, 감기 기운이 싹 사라져서 아이들은 금세 씩씩한 모습으로 뛰어 나가 놀았습니다.

1980년대 후반 즈음, TV 가족 상봉 프로그램에 저를 찾는다는 자막을 보게 되어, 극적으로 친어머니를 찾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를 잃어버린 직후 첫째 이모는 충격으로 병상에 몸져누웠고, 부모님은 이곳저곳 수소문하며 저를 찾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제주 4.3사건이 터지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뒤이어 6.25전쟁까지 발발하며 저를 찾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뒤늦게라도 어머니를 만난 저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 후로 어머니와 자주 왕래하며 지냈는데 한 번은 어머니께서 제가 사는 신앙촌에 와보고 싶다 하셔서 모시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신앙촌을 둘러보신 어머니는 “얘, 나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구나.” 하시며 무척 감탄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서 신앙촌과 가까운 죽성리에 거처를 마련해 드리고 오며 가며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1997년에 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죽성교회 교인들과 함께 어머니의 입관예배를 드렸는데 무척 뽀얗고 예쁘게 피어나셨습니다. 굳었던 몸이 부드럽게 움직이고, 피부도 환해지신 것이 생전보다 얼굴이 더욱 좋아 보이셨습니다. 오죽하면 주변에서 지켜보던 이웃들이 “저 할머니는 돌아가셨는데도 예쁘다.” 라고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교인이 아니셨던 어머니께도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셨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저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드릴 뿐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기장신앙촌 한일슈퍼에서 근무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건강히 지내고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오며 분명히 깨달은 것은 은혜를 받으면 마음의 근심이 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를 받아 마음이 솜털처럼 포근해지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어떤 일이 생겨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신앙촌에서 하나님 일을 할 수 있음이 기쁘고 보람되었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두려움 없이 부딪혀서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제가 말씀대로 살지 못해 귀한 은혜를 쏟아버릴까 그것이 걱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늘 하나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고달팠던 어린 시절, 하나님을 만나 영원한 구원을 꿈꾸게 되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삶의 기쁨과 마음의 평안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을 떠올리며 오늘도 그 뜻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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