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회 김재순 권사

초창기때 받던 그 은혜를 다시 받고 싶어요
발행일 발행호수 2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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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내가 서산 시장에서 신앙촌 간장을 보고 다시 교회에 나온겨.”
김재순(72세. 수원교회) 권사가 40여 년 만에 다시 교회에 나올 수 있었던 매개체는 시장에서 만난 신앙촌 간장이었다.

15,6세 되던 해였다. 동생이 새벽마다 어디를 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게으르게 잠만 자는가 싶어 따라 나서 가봤다. 천막이 쳐있고 힘찬 북소리가 들리고 단상에서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하며 힘차게 찬송을 인도하는 이는 반에서 급장을 하던 이였다.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던 그이는 벌써 집사라고 했다. 똑똑하던 급장이 저렇게 이 소식을 전하자고 한다면 뭔가 있겠다 싶어서 더 알아봐야겠다란 마음이 들면서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파견 나온 전도사님이 거처할 데가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고 빈 방을 하나 내주자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전도사님 식사를 챙겨드리기 시작했다. 천막 전도관이었지만 새벽예배는 우리 집에 머물고 계셨던 전도사님보다 빨리 가서 불을 밝히고 사람들이 앉을 자리를 정리하고 새벽종을 쳤다. 그러면 향취가 진동을 했다.
“집에서는 언제나 향취가 진동을 했고, 불성신을 받고 속에서는 생수가 계속 연결이 됐어요. 걸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둥둥 떠나니는 것 같았고, 누가 뭐라 해도 하나도 기분도 안 상하고, 그게 바로 천국이더라구요.”

`어려서 받은 은혜를 못잊어
그때 그 은혜 받고 싶은데
지금은 그때만큼 안돼요
그래서 열심히 전도합니다`

그렇게 은혜가 연결되며 즐거운 나날이었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당숙네 집에서 초를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시키셨다. 그때는 술을 부뚜막 솥 위에 두어서 발효시켜 식초를 만들었었다. 그것을 들고 오면서 ‘얼마나 신가?’ 맛을 보았다. 지금은 식초지만 그것은 술이었다. 그런데 그 시로 단물이 올라오면서 생수가 연결되던 것이 뚝 끊기고 신물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기쁨이 떠나고 마음은 답답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은혜가 끊기니 아팠다. 그러고 자리에 누워 거의 한 달을 앓고 일어났더니 전도사님은 떠나시고 천막 전도관은 없어지고 10리를 걸어서 가야 하는 한진에 있던 전도관까지 다녀야 했다. 그전에는 집안에 언제나 향취였는데 이제는 제단 가까이 가야 향취가 났다.

가기 싫다는 시집을 기예 보냈는데 호된 시어머니를 만나 시집살이를 되게 하고 아이들이 크고 한참이 지나서야 시장도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나간 서산 시장에서 신앙촌 간장을 만난 것이다. 거의 40년만이었다. 그때가 2002년. 사는 곳에서 서산 교회까지는 80리. 차를 타고 2시간은 가야했다. 새벽예배를 쌓을 수 없는 것이 괴로웠다. 새벽예배를 드리며 받았던 그 은혜의 맛이 그리웠다. 수원으로 이사를 왔다.

“여기도 10리는 돼요. 새벽마다 약 한 시간 걸어서 옵니다. 지금도 제일 먼저 와서 방석 깔고 기도를 드려요. 이렇게 다시 하나님 앞에 불러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 드리죠. 어려서 받은 은혜는 죽어도 못 잊죠. 그때 그 은혜를 받고 싶은데 그때만큼은 안돼요. 그리고 서산에서는 멀어서 전도 못한 게 한이 돼요. 그래서 전도도 열심히 하려는 거예요. 그 어렸을 때 열심을 내서 동네 사람들 많이 전도하고, 늘 우리 집에 사람이 바글거리던 생각이 나서요.”

지금은 접었지만 이태 전까지 신앙촌상회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었고, 그들이 또 열매를 맺어나가고 있다는 김 권사. “심부름 하다가 초를 맛본 이후 계속 올라오던 신물이 요즘엔 좀 없어졌어요. 답답한 것도 좀 없어졌고요. 나도 신앙촌 간장으로 연결이 되기도 했지만 신앙촌상회가 있어서 전도하기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신앙촌상회가 꼭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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