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이 은혜 입은 천막집회 인천집회편(3)

인천집회에 나타난 더 큰 권능에 아연실색
발행일 발행호수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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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련의 성명으로 천막집회 기세 꺽인 줄 알았던 기성교회,
인천집회에 나타난 더 큰 권능에 아연실색

초창기 천부교의 천막집회에 대하여 한국기독교연합회가 1955년 7월 하순경 사이비 신앙 운동으로 매도하였다 함은 이미 본지에 보도 한 바 있다. 당시 기성교회의 교권 주의자들은 욱일승천하는 기세의 천부교 천막집회를 보고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수단과 방법을 다 하여 그 세력을 꺾으려 하였던 것이다.
때마침 천막 집회가 폭염기를 피하여 8월 한달을 쉬게되자 기성교회에서는 자기들의 반격이 효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하고 이제 천막집회는 위축되어 재기 불능일 것이라고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설교집에서 찾아보자.
`이때 저들의 예상을 뒤엎고 개최된 인천 동산중학교 집회에 저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때마침 폭우가 나려 천막집회장은 질척거렸지만 은혜를 사모하는 신도들은 몰려들어 더욱 큰 기사와 이적을 체험하였던 것이다.
춘기 집회에서 볼 수 없었던 더 큰 이적이 나타났으니, 혹이 떨어지고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폐병 위장병 기타 무수한 병자가 일어나고, 참 생명의 길을 찾은 수만 신도는 기쁨이 가득하였다. 이에 확실한 증거를 얻은 자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그릇된 비판에 맞서 기성 교회를 이탈하여 별도로 모여 예배보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천막집회에 참석했던 신도들의 기성교회 대량 이탈 현상이 나타났으며 바야흐로 천부교회의 태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김주옥 승사(79세, 전직 관장, 기장신앙촌)는 인천집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이 진리를 전하는 교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간증하는 교역의 체험과 생명물의 권능을 들어보자.

`저에게는 어릴 적 잊지 못할 기억이 있습니다. 왜정 때 제 나이 13세, 그러니까 하나님 출현하시기 19년 전(1936년) 일입니다. 집에 가려고 책가방을 들고 평양 성교리 역전에 서 있는데, 신선 같은 느낌이 드는 어느 할머니 한 분이 저한테 오더니 다짜고짜 예수 믿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거리니, 할머니는 `너는 서울을 가야 하나님을 볼 것이다. 그분은 세상 사람들이 못된 놈이라 욕하고 멸시하여 감옥에도 가는데, 그렇게 핍박을 받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다. 그분을 믿으라. 그분을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산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 등은 다 왕래해도 평양과 서울은 오고 가지 못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여든이 넘었다고 하는데 어린 제가 보기에도 예사 분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께 할머니 얘기를 하며 서울로 이사 가야 한다고 졸랐지만 제 말을 귀담아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그 할머니가 해 준 이야기를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그 후 6·25 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 와, 하나님을 만나려고 열심히 인천 제일 장로교회에 다니며 무척 애를 썼지만 어디서 하나님을 찾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박 장로님이 인천 동산중학교에서 집회를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전쟁 중에 다쳤던 다리가 아파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때였습니다. 왼쪽 무릎뼈가 불거졌는데, 난리 중이라 어디 가서 치료받기도 힘들어 그냥 내버려 두어, 4, 5년을 그 통증으로 고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집회 중에 박 장로님께서 `병든 자는 다 일어나라.` 하셨을 때, 저도 벌떡 일어나 보니 다리가 전혀 아프지 않고 어느 순간인가 다 나아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기쁘고 고마워서 그분이 집회를 하신다면 어디라도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예전 할머니가 한 말은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고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집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다른 곳으로 집회를 옮기실 때면 대형 트럭 70대가 같이 움직였던 정말 엄청나게 큰 규모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처음에는 박 장로님 집회에 가라고 권유하고, 앞에서 간증도 했던 목사들이 언제부터인가 이단이라며 집회에 못 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는 데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제단 나올 때는 생각을 못 했는데, 받은 바 은혜가 확실하고, 또 주위에서 너도나도 그분을 핍박하여 나중에는 억울하게 옥에까지 가시게 되자, 그 할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나면서 ‘이분이 하나님이시구나.’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지만, 하나님께서 고생하시는 것을 생각하니 가슴 아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확실히 깨닫게 되어 열심히 따르면서 1966년 교역자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 발령이 난 곳은 강원도 삼척군 원동면 임원리에 있는 자그마한 제단이었습니다. 제가 갔던 해에 그 마을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이질에 걸려 하나 둘 죽어 가고 있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마을 분위기가 여간 어두운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먼저, 이장님 댁의 5대 독자 아이를 보러 갔습니다.

그 아이는 항문이 열려서 다 죽어 가고 있었는데 상태가 아주 위험했습니다. 다급하게 생명물을 먹이니, 딱 곤두섰던 눈이 스르르 풀리면서 그때부터 편안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은 시온에서 만든 캐러멜을 생명물에 끓여서 먹였는데, 그때부터는 더 이상 항문에서 피가 나오지 않고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아픈 아이들을 업고 찾아왔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생명물을 보이며 `여러분, 이건 약이 아닙니다. 잘 들으세요. 맹물입니다. 하지만 이 물에는 이긴자 감람나무께서 부어 주신 은혜가 가득합니다. 모두 그분께 감사 드리세요.”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두 숟가락씩 돌리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 나은 아이들이 주일예배에 왔는데 보니 40~50명이나 되었습니다. 신앙이 있어서라기보다도 단지 병을 고치는데 마음이 쏠려 찾아온 이들이었지만 위급한 때에 저를 보내셔서 아이들을 구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 드렸습니다.

20여 년을 교역자로 활동하면서 크게 느낀 것은, 우리 종교는 체험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죽은 시체를 뽀얗게 피어나게 하는 놀라운 권능, 이슬은혜, 향취 등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저희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은혜를 받아 기쁘고 즐거운 것은, 하나님의 기쁨의 신이 우리 마음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꾸준히 끝까지 가는 자만이 구원에 이른다는 평범한 진리 속에 신념을 두고 모든 일에 인내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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