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이 은혜입은 천막집회(2)서울 제2운동장집회②.끝

서울 제2운동장 집회 참석기 "예배를 드릴수록 마음에서 기쁨이 샘솟아"
발행일 발행호수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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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운동장집회

1955년 10월 25일부터 11월 1일까지 개최된 서울제2운동장 집회 광경

서울 제2 운동장 집회에서 은혜를 받아 일생 동안 괴로움을 받던 위장병에서 벗어나고 기쁨의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된 김정환 권사(78세, 소사동교회)의 체험을 들어 본다.

저는 1924년 충청남도 서산군 지곡면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자랐습니다. 열다섯 살 정도 되었을 때 저는 심하게 체한 이후로 위장병이 생겼습니다. 음식을 먹고 나면 속이 쓰리고 소화도 잘 되지 않았는데,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 먹기도 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여 무척 고생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1943년 스무 살 되는 해에 결혼하여 인천 용현동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결혼하고 3년 정도 되었을 때, 이웃집 아주머니는 저희 집에 자꾸 찾아와서 교회에 다니자고 하였습니다. 결혼 전 교회에 전혀 다녀 본 적이 없던 저였지만, 아주머니가 그렇게 와서 얘기를 하니 거절할 수가 없어 그때부터 아주머니를 따라 숭의 감리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951년 봄 저희 가족은 금곡동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그곳에서는 창영 감리교회에 다녔습니다.

위장병으로 물도 못 마셔

저는 결혼하고 나서도 위장병으로 계속 고생을 하였습니다. 집 근처 병원 몇 군데에 다녀 봤지만 증상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그곳에 가면 병이 낫는다고 해서 가 보기도 하고, 교회 사람들이 와서 예배를 봐 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중 둘째 아들을 낳고는 위 아픈 증상이 더욱 심해져서 나중에는 물도 제대로 못 마실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먹지를 못하니 뼈와 가죽만 남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삐쩍 말랐습니다.

박장로님 집회를 학수고대

그러던 중 1955년 7월경 어느 날, 같은 구역의 연세 많은 집사님 한 분이 저희 집에 찾아오셨습니다. 그 집사님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영자 엄마,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인도하시는 한강집회에 가 봤는데, 가서 생각하니까 영자 엄마 좀 데리고 갈 걸 그랬어. 거기 가 보니까 육신의 병 낫기도 문제가 아니고 은혜 받기도 문제가 아니더라. 나는 평생을 믿었어도 그런 것은 처음 구경했어.”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집사님께 제가 위 아파서 고생하는 걸 아시면서 왜 혼자 가셨냐고 물으니까, 집사님 얘기가, “또 집회를 하신다고 했으니 그때 같이 가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다음에 집회 소식이 있으면 저를 꼭 데리고 가시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집사님이 다녀가신 후부터 저는 박 장로님 집회가 열리기를 몹시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천막집회에서는
육신의 병 낫는 것도
성신의 은혜를 받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

그렇게 집회 소식을 기다리며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친정에 볼일이 있어 서산에 내려갔는데, 저는 혹시 집사님이 집회에 가자고 저를 데리러 왔다가 제가 없어서 혼자 가 버렸으면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이틀 만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막 들어오니, 바로 그 집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집사님은, 서울 제2 운동장(당시에는, 현재 동대문 운동장을 서울 제1 운동장으로 불렀고, 그 건너편에 있는 작은 운동장을 서울 제2 운동장으로 불렀음.)에서 집회가 열리는데 지금 가야 되니 빨리 서두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친정에서 올 때 저를 따라온 여동생에게 아이를 맡기며, 서울 제2 운동장에서 열리는 박 장로님 집회에 다녀오겠다고 일러둔 후 그 집사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엄청난 인파에 놀라

버스를 타고 서울 어느 지점에 내려 걸어서 집회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아주 넓은 장소에 천막이 끝도 없이 쳐 있는데, 그 규모는 정말 어마어마하였고, 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천막 안을 가득 메우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땅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먼지 속에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고, ‘아이고, 이런 데서 무슨 은혜를 받는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들여다보고만 있었습니다. 같이 간 집사님은 저에게 “당신은 저쪽으로 해서 앞으로 들어가. 앞에 앉아야 장로님 얼굴도 뵐 수 있지 뒤에 앉으면 안 보여.” 하셔서 “제가 거기를 어떻게 뚫고 들어가요?” 하니, 자신이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하시며 저를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집사님은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아픈 사람이 있으니 자리를 조금 내 주세요.” 하고 양해를 구해 앞쪽에 저를 끼어 앉혀 주셨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아 한참 동안 있는데 어떤 분이 나오셔서 준비찬송을 하였습니다. 준비찬송이 끝나자 박 장로님께서 나오신다고 하며 주위가 술렁술렁하였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나오셔서 양복 상의를 벗어 놓으시고 와이셔츠 차림으로 단상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찬송가 놓는 책받침을 들어 단상을 한 번 치시더니 찬송 인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찬송을 얼마나 우렁차게 하시는지, 그동안 교회에 다니면서나 다른 부흥집회에 가 봤을 때는 그렇게 하는 분을 보지 못했는데, 박 장로님께서는 찬송을 참 잘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두어 시간 구슬땀을 흘리시며 전력을 기울여 예배 인도를 하시고는 나가셨습니다.

안수를 받자 향기로운 냄새가

예배를 마친 후 사람들은 모두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저는 그냥 멀뚱멀뚱하니 앉아만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위에 앉아 있던 분이 저를 보며 “당신도 어디가 아파서 온 것 같은데 가만히 있지 말고 나 좀 고쳐 주세요 하는 기도를 열심히 드리세요.” 하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듣고 ‘제 병을 좀 고쳐 주세요.’ 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다음 날 새벽에도 박 장로님께서 나오셔서 예배 인도를 해 주셨습니다. 찬송과 설교 말씀을 하신 후 안수를 해 준다고 하시자, 사람들은 줄을 맞춰 앉았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사이를 지나시며 양쪽에 앉은 사람들의 머리를 한 번씩 살짝 짚어 주시고 가셨습니다.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저도 고개를 숙였는데, 박 장로님께서 제 머리에 안수를 하시는 순간, 커다란 돌덩이로 머리를 치는 것같이 너무 아팠습니다. 정신이 퍼뜩 났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부터 무엇인가가 콧속으로 내려오더니, 그 어디에서도 맡아 보지 못한 향기로운 냄새가 맡아지면서 그것이 가슴속까지 내려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물도 못 먹던 내가 밥을 먹고

예배를 마친 후,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밥을 먹으러 간다고 일어나더니 저에게도 가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난 밥 못 먹어요. 물도 제대로 못 마시는데 밥을 어떻게 먹어요?” 하고 안 가려고 하니, 그래도 가서 먹으면 먹어질 거라며 가자고 해서 그냥 따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근처 시장에는 쭉 늘어선 노점에 음식을 잔뜩 해 놓고 팔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니 저도 식욕이 돌아 일행들과 같이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음식이 들어갔는데도 위가 전혀 아프지 않았고, 그래서 계속 먹다 보니 어느새 밥 한 그릇을 다 비웠습니다.

다니던 교회를 가면 왠지 마음이 클클하고 답답해져
자꾸만 은혜 받던 박장로님 집회 생각만 떠올라
목사는 한사코 못 가게 하지만, “은혜받는 곳으로 가야지”

그때 문득 어릴 적에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곡기를 끊었던 사람도 죽을 때가 되면 밥을 먹는다는데 저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스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천막 안으로 돌아왔는데, 피곤함이 느껴져 제 자리에서 엎드려 잠을 잤습니다. 한잠 자고 일어나 보니, 몸이 가뿐하고 또 소화가 다 되었는지 속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예배를 마치면 나가서 식사를 할 수 있었고, 집회에 계속 참석하면서 예배를 드릴수록 마음에 기쁨이 생겼습니다.

남편도 그날 저녁예배 때부터 다음 날 집회를 마칠 때까지 참석하였는데, 박 장로님은 보통 분이 아니신 것 같다는 얘기를 하였습니다. 제가 집회에 다녀와 살이 찌고 건강해진 모습을 보고 가족은 물론 동네 사람들까지 모두 놀라워하였습니다.

저는 너무 기뻐 동네 사람들이나 교회에 가서 교인들을 만나면 은혜를 받고 병이 나았다고 얘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니던 교회에 가면 마음이 클클하고 자꾸 박 장로님 집회 생각만 났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소문에 듣기로 다른 지방으로 집회를 하러 다니신다니 그곳에 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인천전도관 개관 알고 기뻐

박 장로님께 은혜 받은 사람들이 전동에 위치한 짠지 공장 2층을 빌려 예배를 드리는데, 일요일 오후 두 시면 박 장로님께서 그곳으로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남편은 창영교회 예배 후 곧바로 짠지 공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제가 다니던 창영교회에서도 많은 수의 교인들이 그곳으로 예배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그렇게 편하고 좋았지만, 창영교회 목사님이 심하게 반대하며 못 가게 하니, 저는 딱 하루만 더 가고 이제는 가지 않을 생각으로 창영교회 예배를 마친 후 짠지 공장으로 또 갔습니다.

처음 느낀 편하고 기쁜 마음

그날 박 장로님께서 예배 인도를 하시는 중에, 어디선가 솜 타는 냄새 같기도 하고, 그 냄새보다 더 고약한 냄새가 나더니 그것이 사라지고는 입 안이 너무나도 달고 시원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예배를 마치고 나서 저는 ‘아무리 가지 말라고 해도 이제는 은혜 받는 곳으로 다녀야겠다. 본교회는 지켜서 뭘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는 다니던 교회를 그만두고 짠지 공장으로만 예배를 드리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짠지 공장에서는 박 장로님을 모시고 전도관 개관집회(1956. 1. 12.)를 하였습니다.

1958년경이었습니다. 소사신앙촌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이고 입주자들도 뽑을 때였는데, 그때 저희 가족도 소사신앙촌에 입주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저희 친정 부모님이 비록 믿지는 않으셨지만 저희와 함께 신앙촌에 입주를 하시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남편이 친정아버지를 모시고 신앙촌 구경을 가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아버지는 신앙촌에 갔다가 그날 저녁 늦게 돌아왔습니다.

저는 국을 빨리 데워 저녁밥을 차려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바삐 움직이며 준비를 하였습니다. 저는 부엌문 앞에 풍로를 놓고 국을 끓이고 있었는데, 부엌으로 들어가다가 잘못하여 국이 팔팔 끓고 있는 냄비 위를 발로 밟은 것이었습니다.

뚜껑이 벗겨지고 제 오른쪽 발은 슬리퍼를 신은 채로 냄비 속에 빠져 버렸습니다. 자그마한 냄비라 발이 잘 빼지지 않자 저는 너무 뜨거운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빼내려고 이리저리 휘저었습니다. 간신히 발을 빼고 보니, 이미 살점이 익어 떨어져 나갔으며 화기가 확 올라와 발이 화끈거리고 너무나 아팠습니다.

딱 하루만 더가고 안 가야지 했다가
은혜의 체험을 하고 하나님 품으로

아버지는 무척 걱정을 하시며 밤새 견디지 못할 테니 빨리 병원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너무 걱정 마시라고 말씀드린 후, 생각하다 보니 마침 그날 새벽예배 때 남편이 타 온 생명물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얼른 대접을 갖다가 생명물을 따라 놓고 축복받은 솜에 적셔서 발에 덮었습니다. 솜은 얼마 안 돼 금방 말라 버렸습니다. 마르면 또 적셔서 덮고 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그렇게 심하게 화상 입었던 발이 진물이 어느새 다 말라 꾸덕꾸덕해져 있고, 전혀 화끈거리거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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