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촌 건설의 신화(17) 산업박람회

100만 관람객들로부터 호평받아
발행일 발행호수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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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 1962년 경복궁에서 열렸던 산업박람회.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로 「시온관」이 보인다.

`1962년 산업박람회에 ‘시온관’ 짓고 생산품 전시 `

신앙촌의 건설과 함께 시동한 시온경제는 입주 신도의 생업과 교육시설 그리고 전국적인 교회건축을 위한 전도자금 등 ‘선한 사업’을 위해 활발하게 가동되었다.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면서 당시 시온제품은 우리나라의 생필품 보급과 품질향상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특히, 캐러멜이나 카스텔라, 성냥, 수예부의 수이불, 메리야스 등은 지금도 그 명성이 전해질 정도로 선풍적인 히트 상품이 되었다. 사람들이 몸이 아플 때 시온카라멜을 아픈 곳에 녹여서 붙이면 흉터도 없이 완치가 되었으며 끓여서 마시면 속병까지도 다 나아 캐러멜을 포장한 종이까지도 상처를 치료하는 데 사용할 정도였다.

시온카스테라는‘생명의 빵’이라 불릴 정도로 하나님께서 축복을 많이 해 주신 것으로, 빵 한 개에 계란 한 개씩을 꼭 넣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맛이 아주 좋았고 부드러웠으며 10여일이 지나도 딱딱해지지 않았다. 하루에 10만개씩을 생산하여도 수요를 충분히 대주지 못했을 정도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시온에서 처음으로 재봉침으로 수놓은 수이불을 개발하여 인기를 끌었다. 수예사의 교육을 위해 신앙촌 내에 학원까지 개강해서 30~40명씩의 인재를 양성하여 활발한 제품 생산을 하였다.

또 당시 시중에 나온 성냥은 불을 붙이려고 하면 부서지거나  쉽게 불이 붙지 않아서 애를 먹었는데 신앙촌에서 나온 성냥은 한번에 불이 쉽게 잘 붙어 전국에서 ‘신앙촌 성냥’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
이밖에 다른 많은 제품들에 대해서도 신앙촌 것이 아니면 사지 않았기 때문에 물건을 미처 제대로 공급해 주지 못할 정도였다.  당시 생산공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제품 하나하나를 만들 때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해 주시고 축복 해 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내가 입는 것보다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부모님이나 대통령이 입는 제품이라는 심정으로 만들어라’하셨고 또, 일을 시작할 때면 ‘내가 너희에게 힘을 준다’는 말씀을 늘 하시면서 ‘하나님의 권능을 여기 이 제품에 부어달라고 계속 기도하면서 만들어라’고 하셨다”고 회고하였다.

신앙촌 경제가 힘차게 가동하자 국내외 언론에서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신앙촌은 외부로부터의 원조는 전혀 없이 신자들에 의해 회사를 설립하고 그 상품을 시중에 판매해서 생활하고 있다. 현재 이 마을에서는 각종 제과, 메리야스, 전기 모터 및 피아노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한편 영등포의 카바이드 공장의 생산량은 국내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한다.”  (일본 동양경제일보 1963. 6. 27.)

“메리야스, 제과 등 40여 공장이 가동되고 있으며, 대부분이 생계의 부업으로 자급자족한다는 생활신조로써 수공업에 활발성을 띠고 있다.”  (서울신문 1964. 9. 5.)

“서울과 인천 중간쯤에 신앙촌이라 불리는 뉴 타운이 있다. 마을의 예산은 모두 신자들이 일해서 얻은 ‘정재(淨財)’로 꾸려 나가고 있으며 이 무렵 방문한 미국인 도시 학자도 ‘완전히 별천지’(완전한 이상향)라며 놀라워했다. 그런데 약 1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이 ‘사교 집단’이라며 정부나 언론, 종교계로부터 백안시 되어 왔다고 하니 우습다.

지금은 정식으로 2,700세대가 거주하며, 각자 각자가 자기의 능력대로 공동의 농원이나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각종의 공동 공장은 메리야스, 전기 기구, 과자, 가구, 피아노 등 50여 가지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지금 농원에서는 포도가 대 풍작이다. 원래 군인 출신이었던 한 신자는 말하기를 ‘여기에서는 실업난과 주택난이 없답니다.’라며 미소를 짓는다. 어쨌든 나라의 재정은 아주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이쪽에서는 건전한 자립 경제가 실현되고 있었다. 정권 불안 시대와 생활고 속에서 태어난 신앙촌, 지금 한국에서는 가장 안락한 곳일지도 모른다.” (아사히신문 1964. 9. 20.)

이와같이 단기간에 전국민의 사랑을 받던 시온제품이 공식적인 전시 기회를 갖게 되었으니 그것이 곧 1962년 4월 20일부터 6월 6일까지 경복궁에서 개최된 산업박람회였다. 당시에 개최된 산업박람회는 우리나라 최초 최대의 규모로서 전시동만 1백 50여 동에 16만 5천여 점의 각종 국산 전시품이 전시되었다. 이 산업박람회에 신앙촌에서는 ‘시온관’을 별도로 설치하고 100여 종의 생산품을 전시하여 찾아온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시온관에는 ‘시온’ 상표가 붙은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좌측에는 상품을 직접 판매하는 직매소와 카스테라 시식장이 있었으며, 부녀자 간소복 전시의 하나로 ‘시온복’도 진열되었다. 또 시온복을 입은 여청들이 맑은 얼굴과 화사한 미소로 관람객을 친절히 안내하여 호감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사설 시온관 이외에 각 도별관과 업종관에도 시온상품을 진열해 두었는데, 도별관에는 시온 상품 일체, 업종관에는 식품류, 섬유류, 치약, 전기 기구류 등이 진열되었다.

1962년 6월 18일자 신앙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산업박람회 폐막식과 함께 지난 6월 6일 시온관도 막을 내렸다. 4월 20일부터 6월 6일까지 48일간에 걸쳐 총 4백여 만환의 경비가 들었으며 피아노, 바이올린을 비롯한 백여 종의 생산품을 전시하였다. 매일 수만의 인파가 시온관에 들렀으며 총 관람객 수는 약 1백여 만 명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매장에서는 최고 하루 60여 만환의 매상을 올리기도 하였으며 양심과 신용을 모토로 하는 신앙촌 생산품을 누구나 한번 시용(試用)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 신앙촌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난 5월 23일에는 산업박람회장으로부터 출품에 대한 감사장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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