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들이 갖은 비방을 해도 내가 받은 은혜는 잊을 수 없어요

강봉임 권사(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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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강봉임 권사 / 기장신앙촌

당시 종갓집 맏며느리로 대식구의 살림을 맡아 하던 저는 3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깨와 무릎의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식구들과 일꾼들의 식사 준비, 빨래, 바느질, 베 짜기 등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쉼 없이 일하다 보면 종종 칼로 베는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으로 꼼짝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깨가 너무 아파서 팔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무릎이 아플 때는 가만히 누워 있어야 그나마 고통이 덜했지만 잠시라도 집안일을 미뤄 둘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 즈음 서울에서 열리는 박 장로님 집회에 참석하면서, 혹시 박 장로님께 은혜를 받으면 나도 병이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57년으로 기억됩니다.

종가 맏며느리로 큰살림 맡아 30대에 지독한 신경통을 얻어
하나님께 안찰을 받고 예배를 드리던 중 불성신을 받은 후
칼로 베는 듯 하던 통증이 말끔히 사라지고 지금까지 건강해

열두 명의 친척들과 함께 서울 돈암동전도관에 도착해 보니,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제단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등단하신 박 장로님께서는 “오늘 축농증을 고쳐 줄 테니 축농증 환자들은 앞으로 나오세요. 이제까지 전도관을 핍박했던 사람이라도 축농증을 고치고 싶으면 앞으로 나오세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상 위로 올라간 10명의 사람들에게 박 장로님께서 ‘쉭! 쉭!’ 하며 축복을 해 주시자, 사람들은 “이제 냄새가 맡아집니다!” “코가 뻥 뚫렸습니다!” 하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에는 참석자들에게 안찰을 해 주셔서 저도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차례를 기다려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박 장로님의 손이 제 눈에 닿자마자 눈알이 빠지는 듯 고통스럽더니 배를 안찰하실 때는 배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등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픈 것이었습니다. 그때 ‘박 장로님께서는 손을 살짝 대시기만 할 뿐인데 왜 이렇게 아플까? 참 이상하다.’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한 교인의 가정에서 심방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힘차게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부르는데, 순간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제 몸속으로 확 하고 들어온 것처럼 후끈하며 뜨거워지더니 온몸이 말할 수 없이 가뿐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어깨와 무릎을 베어 내는 것처럼 아팠던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져서, 팔을 머리 위로 쭉쭉 뻗어 올리고 무릎을 움직여 봐도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고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날아오를 것같이 온몸이 가벼웠습니다. 또 어디선가 시원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맡아지면서 마음이 왜 그렇게 기쁜지, 좋은 논밭을 샀을 때나 첫아들을 낳았을 때도 느껴 보지 못했던 기쁨이 제 마음에서 새록새록 솟아났습니다. 이후로 전도관에 계속 다니면서 그 뜨거운 것이 바로 불성신을 받은 것이며 좋은 냄새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향취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신경통이 말끔히 나은 저는 90세를 바라보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재발된 적 없이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1959년 3월에는 신태인제단에 다니던 저희 가족과 친척들 45명이 다 함께 경기도 부천의 소사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희보다 먼저 입주한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신앙촌이 건설된 곳은 원래 ‘뱀골’이라고 불릴 정도로 뱀이 많고 인적도 드문 황무지였는데, 하나님께서 신앙촌을 건설하시며 땅에 축복을 하시자 무수한 뱀들이 서로 뒤엉켜 죽어서 죽은 뱀을 계속해서 가마니에 담아 버릴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저는 반듯하게 서 있는 현대식 주택과 색색의 꽃들이 어우러진 소사신앙촌을 보면서 이곳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황폐한 뱀골이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화창한 햇빛에 꽃잎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신앙촌의 풍경은 찬송가 가사처럼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어난 것이었습니다.

소사신앙촌에 입주한 뒤로 남편은 범박리 사무소에서 근무했으며 저는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장사를 다니면서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국의 제단을 순회하며 집회하실 때, 어떤 장로교인이 “박 장로가 병석에 앓아누워 있다.”라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고 “지금 박 장로님이 어디 계시는지 아십니까? 저와 같이 가셔서 직접 확인합시다.” 하고 말했더니 그 사람이 아무 말도 못한 채 슬금슬금 피해 버렸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제가 신앙촌 제품을 판매한다고 하면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선뜻 선금을 주며 꼭 신앙촌 물건을 갖다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풍족하지 못했던 1950년대에 선금을 주고라도 신앙촌 제품을 사겠다는 고객이 많을 만큼 신앙촌 제품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불 하나만 봐도 시중의 이불은 한 번 빨면 줄어드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좋은 솜을 써서 정직하게 만든 신앙촌 제품은 빨고 나면 오히려 솜이 살아난다면서 고객들이 꼭 신앙촌 이불을 찾곤 했습니다.

소사신앙촌 근처 소사리의 이씨 집안은 지역 유지로 알려진 집이었는데, 그 집의 며느리가 저와 동년배로 신앙촌 물건을 무척이나 좋아하며 애용했습니다. 어느 날 그분에게 제가 신경통이 나은 일과 은혜 받은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이 예전에 박 장로님의 부흥집회에 참석해 철야까지 했었다면서 그때 참 기쁘고 좋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장로교회에 다니는 그분은 교회 목사가 전도관에 대해 갖은소리를 다 하지만 자신이 박 장로님 집회에서 은혜를 받았던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후로도 제가 은혜 받은 이야기나 하나님 말씀을 전해 줄 때면 진심으로 귀 기울이며 때로는 눈물까지 글썽이곤 했습니다. 제가 갈 때마다 반갑게 맞이하는 그분과 20년 넘게 왕래하면서 오랜 친구와 같은 신뢰를 쌓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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