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분이야말로 진짜 은혜를 주시는 분이다. 이 분을 따르리라.

강봉임 권사(1)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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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봉임 권사 / 기장신앙촌

저는 1918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에서 네 자매의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전형적인 양반집 자제인 아버지는 문중의 제사와 재산 등을 돌보는 유사(有司)를 맡아 하셨으며 저희 형제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치시면서 항상 조신한 태도와 말씨를 강조하셨습니다. 열일곱 살에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간 저는 스무 명이 넘는 대식구 살림을 하면서 시댁 식구들을 따라 장로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956년, 전라북도 정읍군 신태인에서 살 때였습니다. 시할아버님의 형제 중에 현직 목사(故 나길영)가 있었는데 그분이 매일같이 오셔서 장로교인인 남편(故 나석주 승사)과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라는 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요즘 그분이 전국 대도시에서 큰 규모의 부흥집회를 열어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하고 불치병이 낫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또한 박 장로님 집회에 참석하기를 계속 권유하여 남편은 그해 6월 전주에서 열린 박 장로님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운명하신 시할머님을 축복 물로 씻기고 나니 뽀얗게 피었는데
장로교인이 문상 와서 조문을 하자 시신이 험악하게 변해
전도관 식구들과 예배를 드리니 다시 피어나며 미소를 지어

집회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전주 시내의 모든 기독교 교파가 뭉쳐 박 장로님 집회에서 난동을 부린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집회장에서 목사의 지시에 따라 청년들이 달려들더니 단상에 계신 박 장로님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고 참석자들을 발길로 걷어차면서 집회가 열리지 못하도록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난동자들이 해산되어 집회가 끝날 때까지 일주일가량 참석했는데, 남편은 박 장로님이야말로 진짜 은혜를 주시는 분이라며 그분을 따라야겠다고 확신에 차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박 장로님께서 세우셨다는 전도관을 우리 동네에도 마련하려고 동분서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도관을 개척하기 위해 오신 양 전도사님을 저희 집에 모시고 매일같이 전도하며 심방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시 저희 가족과 친척들은 집 옆에 있는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교회 목사가 미국으로 떠나게 되어 후임 목사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임원들은 심방을 다니는 양 전도사님을 눈여겨보았는지, 어느 날 저희 집으로 양 전도사님을 찾아와서 자기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해 달라며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 청을 받아들인 양 전도사님은 장로교회에서 3개월 정도 예배를 인도하면서 전도관의 교리 체계에 따라 성신과 구원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 “믿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성신을 받아 죄를 씻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는 전도사님의 설교는 너무도 새롭고 확실한 말씀이었고, 그 말씀에 눈을 뜬 장로교인들은 “저런 설교를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라고 좋아하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전도사님을 칭찬하더니, 3개월 후에는 전임 목사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그 교회의 목사 직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양 전도사님이 “저는 장로교회의 전도사가 아니라 전도관의 전도사입니다. 조만간 이 동네에 전도관이 세워질 것입니다.”라고 하자 교회가 벌집을 쑤신 것처럼 들끓더니 두 편으로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설교를 듣고 그렇게 좋아하던 교인들이 이제는 전도관으로 옮기자는 사람들과 장로교회에 남아 있자는 사람들로 나눠진 것이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장로교회를 떠나 저희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얼마 후에는 장로교회가 거의 텅 빌 정도가 되었고, 신태인전도관이 세워진 후에는 저희 집안 식구와 친척들을 비롯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한편 장로교회에 남은 사람들 중에는 저희 집 유리창이 성한 때가 없을 정도로 돌멩이를 던지며 욕을 하는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82세의 시할머님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셔서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5년 전부터 누워 지내셨던 시할머님은 생전에도 무릎을 구부린 채로 잘 펴지 못하셔서, 돌아가시고 나면 무릎을 펴기가 더 힘들 텐데 어떻게 입관을 하느냐며 걱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전도관 식구들이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축복 캐러멜을 넣어서 끓인 물로 시신을 깨끗이 닦은 후에 봤더니, 온몸이 노글노글하게 피어서 구부러졌던 다리가 반듯하게 펴지고 편안히 누워 계신 것이었습니다. 뽀얗게 핀 얼굴에 어린아이처럼 발그스름한 홍조를 띠고 미소를 머금은 할머님이 너무나 예뻐서 그 모습을 자꾸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시할머님이 생전에 장로교회를 오랫동안 다니셨기 때문에 친분이 있는 장로를 비롯해 장로교인들 몇 명이 문상을 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시신을 모신 방에서 장로교인들이 조문을 마치고 돌아가자, 시신이 돌덩이처럼 뻣뻣하게 굳은 데다가 얼굴이 시커멓게 되어 방금 전까지 그토록 곱고 예뻤던 시신이 아주 험악하게 변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놀라고 당황하여 전도관 식구들과 함께 다시 예배를 드렸더니 뻣뻣하게 굳었던 몸이 부드러워지고 얼굴 또한 뽀얗게 피어서 처음처럼 방긋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저는 언제 굳었던가 싶게 노긋노긋한 할머님의 손을 몇 번이고 잡아 보면서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구나!’ 하며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인의 셋째 아드님이신 시작은아버지는 그때까지 제단에 다니지 않고 있었는데, 이 모습을 본 뒤로 가족들을 모두 이끌고 신태인제단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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