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만 먹어도 죄가 된다

박정순 권사(1)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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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저는 1930년 황해도 연백의 농가에서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이 일꾼을 부려 농사를 지으시는 한편으로 수산회사의 책임자로 일하셔서 저희 가족은 부족함 없이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열여덟 살에 결혼한 저는 육이오전쟁 때 이남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인천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미군 부대 근처의 주택가에서 살았는데, 1956년 어느 날 이웃집에 사시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고인의 딸과 여동생이 인천전도관에 다니고 있어서 전도관 교인들이 그 집에 찾아와 조문을 했습니다. 제가 그 집 앞을 지날 때 찬송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데, 그 소리가 마음에 와 닿아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집 앞에서 계속 찬송을 들었더니 제 모습을 고인의 여동생이 봤는지, 다음 날 저에게 “입관예배를 드릴 때 와 보세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찬송을 또 듣고 싶은 마음에 예배에 가겠다고 했는데, 혼자 가는 것이 어색하여 옆집 아주머니와 함께 갔습니다.

전도관 교인의 입관예배에 참석했는데 커다란 바람덩어리가 확 하고 불어오고
백합꽃 같은 향기가 강하게 진동하여 `어디서 이런 향기가 나지?`하고 물어

저희가 그 집에 갔을 때는 한창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문을 여는 순간 커다란 바람 덩어리가 제 가슴에 확 하고 안기는 것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백합꽃 같은 향기가 얼마나 강하게 진동하는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어머! 어디서 이렇게 백합꽃 향기가 나지?”라고 하자 옆집 아주머니는 “여기 무슨 백합꽃이 있다고 그래요? 아무 향기도 안 나는데.”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혹시 이 집에서 향이 좋은 미제 비누를 쓰는 건가?’ 하며 이곳저곳을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그런 비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맡은 백합꽃같이 진한 향기는 그런 비누 냄새와 비교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에서는 한창 예배를 드리고 있었지만 저희는 고인과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전도관 교인들을 알지 못해서 막상 예배에 참석하려니 어색하고 쑥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방에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집에 돌아왔는데 그때 맡았던 진한 향기가 그 후로도 가끔씩 떠올랐습니다.

하나님 말씀 중에도 ‘양심의 법’에 관한 말씀이 마음 깊이 와 닿아
누가 보든 안 보든 양심을 지키면서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 안 짓겠다 결심
실천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으나 꼭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다짐해

그해 12월에는 숭의동에 인천전도관이 새롭게 지어져서 개관집회가 열렸습니다. 예전에 입관예배에 오라고 했던 그분이 집회 소식을 알려주면서 참석해 보라고 권유하여 저는 처음으로 전도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던 어느 순간 시원한 바람이 제 가슴으로 불어오더니 백합꽃 같은 향기가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개월 전에 제가 입관예배에서 맡았던 바로 그 향기였습니다. ‘여기서 그 향기가 나는구나! 어떻게 이런 일이…….’ 하며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인천전도관에 계속 다니면서 그 향기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은 아들을 남편의 반대로 생명물로 씻기지도 못하고 장례를 치러 상심했는데
하관할 때 마지막 보니 예쁘게 피었다고 해 `하나님의 은혜구나` 큰 위로받아

그 후 일곱 살이던 아들 영남이가 언제부터인지 밖에서 놀지도 않고 기운이 없어 보이더니,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영남이는 예배 가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혼자 놀 때도 곧잘 찬송을 부르던 아이였습니다. 그때 인천제단 장로님들이 오셔서 시신을 씻기며 입관예배를 드리려고 했으나, 남편이 극구 반대하여 할 수 없이 시신을 씻기지 못하고 그대로 수의를 입혔습니다. 제가 상심하고 있으니 수의를 입혔던 장로님이 이야기하기를 “그래도 영남이가 잘 피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장지에 다녀와서 하는 이야기가, 아이를 땅에 묻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 뽀얗고 예쁘게 핀 얼굴에 이슬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놀라워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구나.’ 생각하며 아들을 잃은 슬픈 마음에 큰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전도관을 몹시 반대하던 남편도 그 일로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그 후로는 전도관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주 일요일마다 인천전도관에 오셔서 설교를 하셨는데, 특히 저는 ‘양심의 법’에 관해 깨우쳐 주시는 말씀이 마음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 가르침대로 누가 보든 안 보든 양심을 지키면서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으나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며 꼭 말씀대로 살겠다고 다짐하곤 했습니다.

당시 저희 남편은 미군 부대에서 목수로 근무하는 한편 꿀꿀이죽을 만들어 파는 일을 했습니다. 육이오전쟁을 겪은 후 우리나라는 몹시 가난하고 어려워서, 미군 부대에서 버리는 잔반으로 꿀꿀이죽을 만들어 파는 일이 흔하게 있었습니다. 저희 집은 이북에서 맨손으로 내려와 생활이 어려웠기에 남편이 꿀꿀이죽을 파는 것이 생계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도관에 다니면서 “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만 먹어도 죄가 된다.” 하시는 말씀을 듣고 보니 생각이 점점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버리는 음식이라도 그것은 분명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을 가지고 꿀꿀이죽을 만들어 파는 일은 죄가 되겠구나.’ 하며 남편이 그 일을 그만두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꿀꿀이죽을 만들어 파는 상황에서 남편만 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양심을 속이고 번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계속 이야기하자 얼마 후에는 남편도 납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남편은 미군 부대를 그만두고 철도국으로 직장을 옮겼으며, 저는 생계에 보태기 위해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해 보는 장사가 쉽지는 않았지만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으니 마음이 참 편안했습니다.

기진맥진하여 몸져 누워있던 교인에게 생명물을 가져다 주며 마시게 하고
두어 시간 후 가보니 완전히 기력을 회복하여 생명물의 귀함에 놀라며 하나님께 감사해

그 후 저는 인천제단의 임원으로 임명받아 틈틈이 교인들 집을 찾아다니며 심방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인 집에 갔더니 그분이 몹시 기진맥진하여 몸져누워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장사를 하면서 시어머니와 시누이,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날은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루라도 장사를 하지 않으면 당장 식구들이 굶어야 한다며 걱정하는 것을 보니 제 마음도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그때 마침 생명물이 집에 있는 것이 떠올라서 저는 생명물을 가져와 대접에 따라 주며 “이 생수를 마시고 푹 쉬어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다가 두어 시간 후에 다시 가 봤더니, 놀랍게도 그분이 완전히 기운을 차린 것이었습니다. 생기 있는 그 모습을 보니 불과 몇 시간 전에 몸져누워 기진맥진했던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생명물이 이렇게 귀한 줄 몰랐다며 몇 번이나 하나님께 고맙고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후로 그분은 딸과 같이 더욱 열심히 제단에 다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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