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신앙촌(11) 음악②
`보기 드문 음악의 세기적 대 향연`1984년 시온합창단은 14회 공연으로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노래한다. 그리고 1985년 2월 2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16회 정기연주회로 신춘음악회를 열어 새봄을 맞이했다.
16회 공연은 700여 명의 단원이 서울 시립교항악단 협연, 정재동 씨의 지휘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4천 여 석을 입추의 여지없이 메운 많은 청중 앞에서 이루어졌다. 우리 가곡 남촌을 비롯하여 가고파, 목련화,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등 가곡들을 노래했다. 솔리스트로는 테너 신영조, 바리톤 김성길, 메조 소프라노 정영자 씨가 출연하였고, 특히 마지막 곡으로 김동진 작곡 ‘평화의 기도’로 웅장하게 대미를 장식했다.
합창사상 유래없는 공연
그 해 여름에 가진 제 17회 정기연주회에는 1,500여 명의 단원이 무대에 함께 올라 합창을 하는 합창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공연을 했다. 1985년 8월 21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가진 시온합창단 17회 정기연주회는 ‘청소년 하계 음악회’란 타이틀로 고향의 노래(이수인 곡), 청산에 살리라(김연준 곡), 그리운 금강산(최영섭 곡) 등 우리 가곡과 하이든의 천지창조 가운데 합창곡을 연주했다. 소프라노 김희정 씨와 테너 신영조 씨의 독창이 있었고, 천지창조 합창을 할 때는 바리톤 이요훈 씨가 함께 출연하였다.
1,500여 명의 합창이 시도되었다는 점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공연에 즈음하여 ‘비목’의 작곡자인 장일남 씨는 “(시온합창단의 대 합창은) 서정적인 가곡에서부터 웅장한 대 합창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소화하여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금세기 보기 드문 음악의 대 향연이기 때문입니다. 웅장한 스케일이 창출해 내는 음의 세계는 여러분을 매혹시킴과 동시에 꿈과 낭만의 세계로 인도하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1,500명의 합창단과 100명의 코리안 심포니의 협연은 꿈과 현실의 재현으로 자연의 신비이며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예술의 선언일 것입니다.”며 시온의 대합창단이 만드는 아름다운 음의 세계에 젖어 볼 것을 권했다.
꿈과 낭만의 세계로
특히 17회 연주회에는 학생 단원들이 많이 출연하여 청소년들에 의해 이루어진 연주회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방학 기간 동안 신앙촌에서 합숙을 하며 집중적으로 연습에 임했는데 당시 합창에 참여했던 학생이던 류영희 학생관장(의정부교회)은 “방학 동안 합숙하며 합창 연습 하는데 하루에 6시간 이상은 연습을 했어요. 워낙 노래를 좋아해서 재미있게 배우고 즐거웠던 기억이 더 많은데 특히 하나님께서 많은 축복을 해주셔서 더 기쁘고 신나는 연습을 한 것 같아요. 한번은 축복을 받고 연습시간에 들어갔는데 합창연습 할 때 제가 평소에는 높아서 잘 부르지 못하는 부분도 힘 안 들이고 쉽게 예쁜 목소리로 올라가서 스스로 놀라고 주위에서도 쳐다볼 정도로 잘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축복하심으로 음이 열려
하나님께서는 음악의 세계인 하늘 세계에 대한 말씀과 인체의 구조를 속속들이 말씀을 하시며 어디가 열려야 되고 어떻게 하면 고음이 나오게 된다는 말씀을 해주시기도 하셨고, 평소엔 잘 안 올라가던 고음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 쉽게 올라가던 경험들을 합창을 했던 단원들은 누구나 이야기 한다.
문제는 1,500명이 무대에 서는 일이었다. 처음에 세종문화회관 관계자들은 불가능 하다고 난색을 표했다. 무대의 크기도 그렇고 그 많은 사람이 모였다가 만에 하나 불상사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며 공연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반대 했었다.
세종문화회관의 반대
“서울시에서도 공연 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했어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당시 우리 사회는 데모가 끊이지 않았는데 젊은 사람 1,500명이 모인다는데 긴장을 하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공연하는 사람이 1,500명이고 세종문화회관 4,000석의 공연장에 찾아올 관객까지 하면 약 6,000명이 모이게 되는 거 아니에요?” 당시 세종문화회관 공연 허가를 위해 뛰어다녔던 한일물산의 이길원 전무는 “세종문화회관에 무대 만드는 목재를 우리가 사다 주고 인부들 기분 맞춰 가면서 그 무대를 만들었어요.”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1,500명이 서는 무대를 위해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방음벽까지 뜯어내는 공사를 하고서야 무대가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