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신앙촌(8) 체육①

`한국 농구계에 큰 활력소가 될 것
발행일 발행호수 2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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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대한체육회관에서 창단된 의 선수들(왼쪽)과 제일은행팀과 경기하는 모습.

기장신앙촌 건설 이후에도 시온의 체육활동은 매우 활발했다. 그 중에서도 농구와 탁구에 대한 시온가족의 사랑은 대단했다. 농구에 대한 열기는 덕소신앙촌의 ‘어린이 농구단’에 이어 기장신앙촌에서는 ‘시온합섬여자농구단’이라는 실업팀이 출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일보사발행 일간스포츠는 1973년 2월 25일 3면 머리기사에 “1백만 시온가족의 마음은 농구에 불붙었다. 경남 동래군 기장면 죽성리 770번지 1백 50여만 평 대지에 자리 잡고 있는 시온합섬섬유공업주식회사는 어린이도 어른도 남자도 여자도 농구를 하면서 즐기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장신앙촌에 농구팀 15개

1973년 당시 기장신앙촌에는 모두 15개팀의 농구팀이 있었으며 이들 팀은 한양고, 배재고, 박문여고, 혜화여고, 용산고, 신광여고, 전주고, 수도공고, 마산여고 등 농구계에 이름이 알려진 우수고교 팀들을 한 달에 1번씩 초청해 친선경기를 가졌고 신앙촌 내 각 동(건물)별 친선 농구대회, 교역자 친선 경기, 외부 팀 초청 경기 등 다양한 경기가 개최되어 신앙촌 내 농구 코트에는 온종일 경기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농구연맹 자체의 선수선발규정(드레프트 시스템제도)에 탈락한 여고 졸업선수와 실업팀이나 대학에 가지 못한 남자 농구선수들을 모두 시온합섬농구부에 입단시켜 실업팀에 못지않은 대우를 해주기도 했다.

이러한 시온의 농구 열기는 1973년 1월 22일 우리나라에서 일곱 번째로 ‘시온합섬여자농구팀’을 창설함으로써 절정에 올랐다.

당시 국내 스포츠계는 국제 스포츠 무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많은 기업체들에게 여러 종목에 걸쳐 스포츠팀을 발족시킬 것을 적극 권장했었는데 팀 운영에 소요되는 유지비의 과다를 이유로 신규 발족은 고사하고 기존 팀도 해체되는 사례가 허다한 상황이었다.

MBC해설위원 이희주 씨는 신앙신보 1973년 2월 5일자 인터뷰에서 “어려운 시점에서 시온합섬여자농구팀이 탄생하였다는 것은 한국농구계에 상당한 활력소가 되었다고 보며 시온의 여러분들이 한결같이 뜻을 모아 협조하여 주고 지원하여 주신다면 머지않아 여자 실업농구계에서 시온합섬팀의 존재가 두각을 나타낼 것이다.”라고 시온합섬여자농구팀의 창설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여자농구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당시 시온이 처음 창단하는 스포츠팀으로 여자농구를 택한 것은 매우 현명한 조치라는 평을 받았다.

초대 단장에 오성민 관장

시온합섬여자농구팀은 한국 스포츠의 발전과 새 주역 발굴을 위해 한국일보사가 1963년 제정하여 해마다 장래가 촉망되는 신인선수에게 시상하는 신인상 부문 제10회 장려상을 수상한 강현숙을 주장으로 하여 국내 여자실업농구계를 제패하기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평균신장 1m66cm이라는 단신팀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정확한 기본기와 빠른 속공으로 장신의 벽을 교란하는 훈련에 역점을 두었다.

새벽 6시30분부터 시작되는 하루 일과는 체력훈련에 이어 패스, 드리블, 슛 연습, 여고 팀과의 연습게임 등으로 매일 오전 2시간, 오후 3시간 하루 5시간 이상의 강훈련을 하였고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합숙소로 돌아오면 저녁 7~8시가 되었다. 이문동에 있는 시온여자농구단 합숙소는 2층 양옥으로 스팀시설과 욕실이 완비되어 있었고 선수숙소 이외에 코치실, 미팅실, 사감실 ,식당, 응접실 등이 규모 있게 배치돼 있었다.

농구계는 물론 한국 체육계의 큰 관심 속에 초대단장 오성민 관장, 코치에 임계삼 씨, 주장 강현숙 선수를 주축으로 선발된 11명의 시온합섬여자농구팀은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0회 박정희장군배 쟁탈 동남아 여자농구대회 국내대표팀 선발 1차 리그전’에 첫 출전을 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 시온합섬여자농구팀은 선수 전원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실업농구 뉴페이스들인데다 팀조직 후 불과 2개월밖에 안된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좋은 기량을 발휘하여 기성팀을 위협하는 다크호스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농구협회 관계자들에게 기대 이상이라는 평가를 자아내게 했다.

`1백 만 시온가족 남녀노소 모두가 농구를 즐겨
농구 경기 날에는 스탠드를 가득 메운
시온인들의 응원 함성이 장충체육관을 진동

특히 시온 스포츠의 화려한 데뷔전을 지켜보려는 서울시내 2천여 천부교인들이 본부석 건너편 스탠드를 가득 메운 가운데 뜨거운 성원의 박수와 함성을 보내 오랜만에 장충체육관을 열기로 들뜨게 했다. 시온합섬 농구관계자들과 교역자들은 시온합섬여자농구팀 후원회를 조직키로 합의하고 회장에 윤재춘 관장을 추대하여 좀더 질서 있고 기품 있는 응원을 하기로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첫 출전부터 좋은 성과

1973년 4월 30일자 신앙신보는 경복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춘계 전국 여자실업농구 리그전에서 신생 시온팀이 강호 제일은행팀을 격파한 사실을 보도하였다.

“시온합섬은 제일은행과의 대전에서 75대 71로 승리하여 농구계를 아연케 했고 전국의 농구팬들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제일은행은 주무기인 속공과 세트 플레이마저 여의치 않은데다 골게터 조영순, 김재순의 슛마저 난조를 이루어 허덕였다. 반면에 시온의 강현숙, 정영숙과 김인숙의 사이드 슛은 던지는데로 들어가다시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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