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람나무가 곧 하나님’ 말씀에 구원의 참 길을 깨달아

왕정숙 승사(3)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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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957년 가을부터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되면서 건설대원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겨울방학 때 신앙촌에 가 봤더니, 한창 건설 중이라 주택이나 모든 시설이 갖추어지기 전이어서 ‘아직까지 들어오기에는 이른 것 같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광주에 돌아와서 신앙촌 건설대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듣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지며 건설대가 되는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학교에서 성적 일람표와 생활기록부 등을 정리하느라 굉장히 바쁜 중에도 빨리 신앙촌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교사 생활을 정리하고 1958년 3월에 건설대로 자원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장로교회 목사로 모태 적부터 예수를 믿은 나는
‘지금 감람나무가 나타나서 은혜 부어 죄를 씻어 주시는데
2000년 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생각

간편한 작업복인 시온복을 입고 지게를 걸머지니 세상에서 어떤 감투를 쓴 것보다 더 기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뿌듯함이었습니다. 공사 현장에서 물을 긷거나, 벽돌, 시멘트, 흙 등을 나르며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서툰 솜씨로 일을 하느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여 아무것도 부러운 것이 없었던 그때. 지금 와서 돌아보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걸림돌이 되었고 하나님께 짐만 된 것 같아서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 끝이 없지만, 제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경험을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1958년 12월에는 하나님께서 억울하게 영어의 몸이 되시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집회에 전무후무한 인파가 몰려오고 전도관과 신앙촌까지 건설되자, 위기감을 느낀 종교계와 일부 정치인들이 합세해 옥고를 치르시게 했던 것입니다. 옥중에서도 가지들을 염려하신 하나님께서는 각자 머리맡에 물을 떠 놓으라 하시며 영적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1960년 3월 26일에 하나님께서 출감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신앙촌 길에 도열하여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저는 하나님 차가 오는 것을 보고 활짝 미소를 지었는데, 하나님께서도 차창 밖으로 저희를 보시며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그길로 오만제단의 단에 서셔서 예배를 인도하시며 저희들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겠다고 하셨고, 다음 날부터 곧바로 수많은 교인들을 안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하신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신 채, 오직 가지들을 위해 은혜를 부어 주셨던 그때를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소사신앙촌에서 지내면서 저는 ‘예수가 구세주로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장로교회 목사이셔서 모태 적부터 예수를 믿어 왔지만, ‘지금 감람나무가 나타나서 은혜를 부어 죄를 씻어 주시는데,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당시 예수를 지칭함.)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었습니다. 또한 소사의 중·고등학교 교감 선생님이었던 조태환 장로님은 은혜를 받아 기쁘고 즐거우며, 소사신앙촌의 좋은 환경에서 마음 편하게 살다 보니 “주님이 오셔도 좋고~ 안 오셔도 좋고~”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종종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1980년에 하나님께서 예수의 정체를 벗기시고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을 때, 그동안 무지몽매한 저희들을 한 단계 한 단계 구원으로 인도해 주셨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1959년 4월부터 소사의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63년에 덕소신앙촌의 시온 제2 중·고등학교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덕소신앙촌은 아름다운 강변에 양옥집이 한 채씩 들어서서 마치 외국의 그림엽서 같은 이국적인 풍경을 이루었습니다. 당시 신앙촌의 여러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이 큰 인기를 끌어서, 공장 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간혹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있을 때면, 공장 직원들이 그때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서 1967년 4월부터 메리야스 공장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메리야스 공장 2층 사무실에서 창밖을 내다봤더니, 하나님께서 사택 아래 솔밭에 앉아 계신 모습이 보였습니다. 회전 의자도 아닌 작은 의자에 앉으셨는데, 마음껏 편한 자세로 앉으실 수 있을 텐데도 예배 시간에 단상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단정하신 몸가짐과 겸손하신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토록 깨끗하시고 정확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생활의 작은 부분까지 정갈하고 아름답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973년 기장신앙촌의 모직 공장에 입사했던 저는 이듬해 서울 상도동으로 이사하여 서울 4중앙에 다니다가, 1983년부터 기장신앙촌에 들어와 생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뵙고 지금까지 저는 소사와 덕소, 기장신앙촌에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피땀과 희생으로 세워 주신 신앙촌- 제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대충대충 ‘이것 정도야 괜찮지 않겠나.’ 하며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신앙촌에서 맑고 깨끗하게, 자유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할 수 있게 해 주신 그 감사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 항상 정결한 마음가짐과 맑은 정신으로, 하나님 가르쳐 주신 구원의 말씀, 고도의 교훈의 말씀을 따르기를 원하는 기도뿐입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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