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고 진실한 마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신앙체험기 특집
발행일 발행호수 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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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촌 군락지의 가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마음이 백합화같이 피어나 따뜻하고 온유해지며, 말과 표정에도 그 아름다움이 나타납니다. 또한 자유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선한 행실을 갖추게 됩니다. 이번 신앙체험기 특집은 은혜를 받은 사람의 마음과 행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희 가족은 6·25 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다니면서 재산을 많이 잃게 되었고, 인천 경동에 정착했을 때는 빈손이나 다름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생계가 막막했던 그때, 다행히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작은 구멍가게를 차리게 되었습니다.

1956년 1월 경, 저희 가게와 거래하는 분의 심부름으로 명원해 집사님(현재 기장신앙촌 권사)이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용건을 말하기 전에 먼저 방에서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를 드렸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곱고 참하게 보여서 저도 모르게 계속 그분을 바라봤습니다. 서로 초면이었지만 그분과 저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명 집사님이 “저는 가난하지만 매일 매일 기쁘게 살아요.”라고 이야기하는데,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정말로 기쁘게 보였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기쁘냐고 물었더니, 명 집사님은 박태선 장로님의 부흥집회에서 은혜를 받았다면서, 은혜를 받으면 그렇게 기쁘고 즐겁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말에 저는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았습니다.

당시 저는 곤궁한 형편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찬 바람이 들이치는 허름한 방에 누우면 이북에 두고 온 좋은 집과 전쟁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계속 떠올라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명 집사님은 가난하게 살아도 마음이 기쁘다고 하니, 저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고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명 집사님은 박 장로님께서 세우신 인천전도관에 다닌다면서, 저도 생각이 있으면 같이 가 보자고 했습니다. 저는 전도관에서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기뻐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예배에 참석하겠다고 선뜻 대답하고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최재복 권사/소사신앙촌

1962년이었습니다. 저는 함백에서 감리교회에 다니는 김원오 권사라는 분과 알고 지냈는데 어느 날 그분이 저희 가게에 찾아와서 친언니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김원일 권사라는 그분은 소사신앙촌에 살면서 강원도로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러 다닌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분을 통해 신앙촌의 제품을 구입하여 저희 가게에서 판매하게 되었고, 그러는 동안 김원일 권사 자매 두 분이 저희 가게에 자주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신앙촌은 전도관 교인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이며, 전도관과 신앙촌은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세우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생인 김원오 권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우리 언니가 원래 아주 차갑고 냉정한 성품이었거든요. 그런데 전도관에 다니고부터 그렇게 부드럽고 따뜻해질 수가 없는 거예요. 사람이 그렇게 변화되는 거 보면 뭔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면서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으려면 전도관에 다녀야 한다며 자신도 전도관에 다니고 싶어서 여러 사람들과 힘을 모아 함백에 전도관을 세울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신앙촌이 어떤 곳인지 점점 궁금해져서 한번 가 봐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김필녀 승사/기장신앙촌

저는 1960년 초 40대 중반쯤 되었을 때 막내딸을 통해 전도관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화성군 팔탄면 구장리에 살고 있을 때인데, 초등학생이었던 막내딸은 집에서 10리나 떨어진 발안 마을에 있는 전도관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거리가 멀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일요일이면 친구들과 전도관에 예배 보러 간다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습니다. 전도관에서 예배를 보고 오면 저에게 찬송을 불러 주기도 하고 예배시간에 들었던 설교를 이야기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장난 심하고 말괄량이인 딸이 전도관에 다니면서부터 말도 잘 듣고 심부름도 잘하고 점점 성격이 부드럽게 변화되는데, 너무나 대견하고 신기하기만 하였습니다. 딸이 착한 아이가 되는 것을 보고 막연히 전도관은 좋은 곳인가 보다 생각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집에서 두부를 만들어 가게에 도매로 파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두부를 가지고 어느 가게에 들어가니, 청년들 몇 명이 둘러앉아서, 박태선 장로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알지도 못하는 말 하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비록 전도관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딸아이에게 듣던 바로는, 전도관에서는 마음으로도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특히 강조하는 것 같았는데, 그렇게 가르치는 박태선 장로님을 비방하니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모여 있던 청년들은 제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니 깜짝 놀라 저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를 보며 그냥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딸의 이야기가 저도 모르는 사이 가슴 깊은 곳에 씨앗이 되어 전도관에 대한 좋은 마음이 싹트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정순 권사/기장신앙촌

1960년대의 일입니다. 이웃집 부인의 남편은 성격이 매우 난폭하였습니다. 어느 날 관장님을 모시고 교인들과 함께 그 집으로 가서 방 안에 빙 둘러앉아 찬송을 한참 동안 불렀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그 집의 아저씨가 하는 얘기가, 몸속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고 하며 발끝까지 시원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앉더니 그동안 살아오면서 잘못했던 일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내어 기도를 하였는데, 진심으로 회개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아저씨는 자신도 전도관에 나오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아저씨는 전도관에 다니며 하나님께서 생명물을 직접 축복하시는 모습을 본 이후로 열심을 내기 시작하더니, 새벽예배를 제일 먼저 드리러 나오고, 관장님을 대하는 것 또한 정성이 지극하였으며, 전도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분이 전도관에 나오게 되면서, 그분의 장모까지도 전도되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20년 동안 성결교회에 다녔고, 성결교회 한 곳을 지은 분이기도 했습니다. 난폭했던 사위를 성결교회로 전도하여 새사람을 만들어 보려고 그동안 그렇게 노력을 해도 안 됐는데, 그 사위가 전도관에 다니며 달라진 모습을 보니 전도관에 뭐가 있긴 있나 보다고 하면서 자신도 나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문명숙 권사/천호교회

1960년 3월 26일, 저는 아이들과 함께 며칠 동안 소사신앙촌에 머무르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제단에 다니지 않던 저희 남편은 저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소사신앙촌에 찾아왔는데, 신앙촌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속에 크게 느낀 바가 있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들끼리 놀다 보면 다투기도 할 텐데 “싸우면 죄야.” “죄지으면 안 돼.” 하며 싸우지 않는 것을 보면서 ‘신앙촌이 다르긴 다르구나. 애들을 키우려면 여기서 키워야 되겠다.’ 하고 생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평소에 제가 간절히 원했던 대로 소사신앙촌에 입주하자고 하여 저희 식구 모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백경숙 권사/성동교회

1958년 이화여자대학 김은우 박사라는 분이 ‘신태양’ 잡지에 이런 글을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박태선 장로님을 알지도 못하고,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이지만,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을 몇 자 쓰려고 한다.

신앙촌에는 무인 판매점이 있고, 어떤 버스 회사에서 하도 삥땅을 당해 직원을 다 내보내고 신앙촌 처녀들을 썼더니 정직하게 일해 줘 이익을 보았다는 사실이 있다.

또한 신앙촌 길가에다 서비스 공장을 내고 ‘지나가는 손님 차가 고장 나면 거저 고쳐 보내 드려라.’ 하여, 하루는 인천서 밤에 트럭이 오다가 그곳에서 고장이 나서 오도 가도 못 하는데, 어디선지 청년들이 달려와 옷에 기름투성이 되는 것을 개의치 않고 고쳐 주고 돌아가려 하매, 너무 고마워 인사를 하려니 ‘우리 장로님은 절대로 돈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고 뛰어가더라는 사실, 취직을 시켜 준다고 돈을 받고는 안 시켜 주고도 돈을 떼어먹는 지금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는가?

성경이 맨 신화이다. 자기들이 못 하면 가만히나 있지, 왜 남이 하면 시기, 질투를 하는지 그것은 참으로 안된 것이다. 열매가 아름다우면 그 나무도 아름답다. 교권주위자들, 깊이 회개하고 생각할 문제이다.”

저는 당시에 소신 있는 글을 쓰신 이분께 멀리서나마 감사를 드렸습니다.

맹경순 퇴임 교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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