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안 후 불안은 물러가고 참 기쁨과 평안을 맛보다

김남순 권사(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58
글자 크기 조절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신앙신보 사진

그 후로 저는 영산포제단에 다니면서 매일 새벽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했습니다. 몹시 허약했던 몸이 제단에 다니면서 건강을 되찾게 되었고 제 마음이 참으로 평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전에 저는 전쟁을 겪으면서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근심과 불안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사람은 항상 불안을 안고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전도관에 다니면서 근심과 불안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던 커다란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매일 새벽 제단에서 예배를 드릴 때면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그토록 즐겁고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본 남편(故 최동섭 집사)은 “당신이 이렇게 변하는 것을 보니 전도관이 좋은 곳인가 보다.”라고 하면서 그때부터 영산포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57년 4월에 서울 이만제단에서 개관집회가 열렸을 때 저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집회 기간 중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가 열려 각 지역별로 팀을 이루어 배구와 농구 등의 열띤 경기를 벌였습니다. 그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참가하는 달리기 경기가 있어서 저도 참여했는데, 3등을 하여 상품으로 수건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수만 명의 전도관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마냥 기쁘고 즐거웠던 그때. 운동장 가득히 진동하는 향취 속에서 힘차게 응원가를 불렀던 일이 어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그렇게 영산포제단에 계속 다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교인의 서너 살 된 아이가 숨을 거두어 입관예배를 드렸는데, 예쁘게 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집에 가 보았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제단에 다니면서 시신이 은혜를 받아 아름답게 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며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렸을 적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은 시신을 베로 여러 번 묶는 것을 보고 ‘할머니, 이렇게 묶으니 얼마나 갑갑하세요?’ 하며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서, 시신이 어떻게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도착해 시신을 보는 순간 저는 놀라움으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뽀얗고 맑은 피부와 발그스름하게 물든 뺨이 죽은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곱고 예뻤습니다. 또한 시신의 두 손을 잡고 짝짜꿍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온몸이 산 아이와 같이 부드럽고 노긋노긋하여 자유자재로 움직여졌습니다. 저는 몇 번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시신이 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며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 후 1958년,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한창 건설될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소사신앙촌에 다녀와서 하는 이야기가, 신앙촌에서 만든 두부를 먹은 후로는 담배를 전혀 못 피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남편은 하루에 두 갑씩 담배를 피우던 골초였는데 정말 그때부터 담배를 딱 끊어 버리고 두 번 다시 피우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끊으려고 노력해도 번번이 실패했던 남편이 담배에 손끝 하나도 대지 않으며 담배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난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당시 남편은 소사신앙촌에 입주하는 것에 대해 계속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 일을 계기로 느낀 바가 있었는지 신앙촌에 들어가자며 입주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촌에 입주하기 위해 준비하던 어느 날, 시부모님을 비롯해 시댁 식구 예닐곱 분이 저희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시아버님은 노기를 띤 음성으로 “왜 신앙촌에 간다고 하는 거냐? 전도관이라는 데가 이단이라면서?”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남편은 “아버지, 저도 깊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동안 제가 전도관에 다니면서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은혜가 너무나 많습니다. 신앙촌은 은혜 받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양심을 지키면서 근면하게 생활하는 곳입니다. 세상에 이런 곳이 또 어디 있습니까.” 하며 시작한 이야기가 몇 시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강경하게 반대하시던 시부모님은 며칠 동안 계속되는 설득에 마지못해 승낙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저희 가족은 1958년 4월 소사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소사신앙촌에서 생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아침에 분주하게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여덟 살이던 딸아이 정숙이가 부엌에 들어왔다가 연탄아궁이에서 끓고 있는 밥솥의 뚜껑을 발로 건드려 그만 솥에 발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이는 자지러질 듯 울음을 터뜨리며 펄쩍펄쩍 뛰었고, 발이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순식간에 물집이 부풀었습니다. 저는 정신없이 아이를 둘러업고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내달렸습니다. 당시는 한창 소사신앙촌을 건설하는 중이라 하나님께서 이른 아침부터 건설 현장에 나와 계셨습니다. 저는 급한 마음에 아이를 업은 채로 하나님께 보여 드리며 “발이 데었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아이를 향해 “쉭! 쉭!” 하시며 축복을 해 주셨는데, 그때까지 아픔을 참지 못해 온몸을 흔들며 울던 아이가 축복을 하시는 순간 거짓말처럼 조용해졌습니다.

집에 돌아와 아이의 발을 보니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피부가 제 색으로 돌아오고 물집 또한 깨끗이 아물어 있었습니다. 흉터가 전혀 남지 않아서 그렇게 심하게 데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금방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를 보면서 하나님께 너무도 고맙고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관련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