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시신을 아름답게 피게 하는 생명물의 권능

김남순 권사(3)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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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958년 여름에는 남편이 영산포에 볼일을 보러 내려갔다가 닭고기를 먹은 것이 잘못되어 그만 심하게 체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몇 달간 몸져누워 있던 남편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때 시아버님이 남편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기겠다고 하셨지만, 제가 신앙촌에서 입관예배를 드리겠다고 간곡히 말씀드려서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아버님은 가족과 친척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장례를 치르느냐며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입관예배를 드리는 날 영산포제단 출신 교역자들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집 안 가득히 찾아온 것을 보고 비로소 안심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교역자 분들이 생명물로 시신을 씻기면 아름답게 핀다는 사실을 아버님께 말씀드리자, 아버님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느냐며 믿지 않으셨습니다. 입관예배가 시작되어 힘차게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장례반 권사님이 생명물로 시신을 깨끗이 씻겼습니다. 입관을 마친 후 고인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는데, 놀랍게도 시신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온몸이 살아 있는 사람처럼 노긋노긋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뽀얗게 피어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너무나 편안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시아버님은 “내 아들이 웃는 걸 보니 금방 살아나려나 보다.” 하시며 관 뚜껑을 덮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교역자 분들이 아버님에게 “분명히 보셨지요? 이제 확실히 아시겠지요?” 하고 말씀드리자 아버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소사신앙촌 묘지에 안장을 마친 후 시아버님은 광주 집으로 돌아가셨는데, 저는 그 후에 있었던 일을 시어머님께 듣게 되었습니다.

시아버님이 광주에 도착하시는 날 친척들은 시댁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시신이 시댁으로 오는 줄 알았기 때문에 장례 치를 준비를 하며 모두들 침울하고 슬픈 분위기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아버님이 활짝 웃는 얼굴로 집에 들어오시며 “헤이! 나는 셋째 아들 따라갈란다.” 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친척들은 ‘저 어른이 아들을 먼저 보내고 어떻게 되신 게 아닌가?’ 하며 가슴이 철렁하여 아버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평소에 그토록 점잖고 근엄하신 아버님이 노래까지 부르며 기뻐하시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친척들에게 남편이 좋은 모습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우리 동섭이가 좋은 데 가나 보더라. 그러니 너희들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야 친척들은 아버님이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일부러 그러셨나 보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편이 아름답게 핀 모습을 보고 아버님이 큰 위로를 받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귀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후 저는 신앙촌 소비조합으로 활동하며 소사신앙촌에서 생산하는 여러 가지 제품을 판매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만 생활하여 지리를 잘 몰랐던 저는 가까운 부평 방면으로 처음 장사를 나갔습니다. 맛있기로 유명한 신앙촌 간장을 가지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신앙촌에서 왔습니다.” 하고 이야기하면 그중에는 제품보다 종교 토론을 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거기 생수가 손 씻은 물, 발 씻은 물이라던데?” 하고 터무니없는 험담을 할 때면 저는 “생수가 어떻게 축복되는지 한 번이라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물을 먹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하면서 생명물로 시신을 씻기면 산 사람처럼 노긋노긋해지며 뽀얗게 피어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처음에 험담을 늘어놓던 분들도 계속 대화를 나누다 보면 조금씩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중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촌 제품을 애용하는 단골 고객이 된 분들도 많았습니다.

1962년 덕소신앙촌에 입주한 후에도 저는 계속 소비조합으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신앙촌에서 생산하는 엑슬란 내복과 속치마, 이불 등이 큰 인기를 끌어서 매일 커다란 보따리에 가지고 나간 물건이 하나도 남지 않고 다 팔릴 정도였습니다. 신앙촌의 섬유 제품은 시중에서 찾아보기 힘든 꼼꼼한 바느질과 정직한 품질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빨간색의 엑슬란 내복은 가난했던 시절에 추운 겨울을 포근하게 감싸 준 제품이었습니다. 신앙촌 제품을 애용하는 고객들은 제가 일주일만 찾아가지 않으면 문 앞에 나와서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앙촌 물건을 들고 가면 어디서나 반갑게 맞이해 주니, 서울 시내부터 시골까지 두루두루 다니면서 참 재미있고 즐겁게 판매를 했습니다. 그렇게 소비조합을 하면서 딸아이를 교육시키고 뒷바라지 할 수 있었고, 조카딸들이 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을 때는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 후 1982년에는 제가 모시고 살던 친정어머님(故 배금례)이 84세를 일기로 운명하셨습니다. 저를 따라 전도관에 나오기 시작하신 어머님은 손녀딸들을 전도해 전라남도 남평제단에 다니셨고, 그 후 소사와 덕소 신앙촌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님이 숨을 거두신 후 숟가락으로 생명물을 떠서 입 안에 넣어 드렸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오빠는 생명물이 한 방울도 흘러나오는 것 없이 다 넘어가는 것을 보고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입관예배를 마친 후 뽀얗게 핀 어머니의 얼굴은 잠시 단잠을 주무시는 듯 평온해 보였습니다. 또한 어디서 바람이 들어올 곳이 없는데도 관 밑에 시원한 바람이 계속 감돌아서 ‘아! 은혜로 함께해 주시는구나!’ 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30년 넘게 소비조합으로 활동해 온 저는 지난 1994년에 기장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유수와 같아 어느새 여든이라는 나이가 되었지만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은 젊은이 못지않습니다. 요즘처럼 푸르른 신록 위에 단비가 내리는 것을 볼 때면 저는 “성신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하며 기쁨과 감격으로 찬송을 불렀던 그날이 떠오릅니다. 성신의 단비를 아낌없이 부어 주시는 하나님. 구원의 소망을 주신 그 은혜와 사랑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귓가에 쟁쟁한 하나님 말씀대로 죄짓지 않고 성결하게 생활하며 하루하루 힘차게 달려갈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해 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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