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촌 건설의 신화(12) 언론의 신앙촌 보도③
고급 공무원, 대학생들은 서울로 출퇴근 "신앙촌 네거리에는 없는 것이 없어"고급 공무원, 대학생들은 서울로 출퇴근 “신앙촌 네거리에는 없는 것이 없어”
오소백의 신앙촌 르포는 계속된다. “걸음을 옮겨 큰 네거리로 갔다. 국민학교 어린이와 남녀 중·고교 학생들이 지나간다. 명랑한 표정이고 구김살이 없다. 신앙촌에는 가시철망도 안보이고 집집마다 울타리도 없었다.
‘문화부’라는 곳을 거쳐 직원에게 주택을 구경할 수 있도록 안내를 받았다. 처음에는 가장 좋은 주택을 구경했다. 두 세대가 사는 집도 있고 세 세대가 사는 집도 있다. 방이 셋에다 마루가 있고 거기다 부엌이 있다.
채광 장치며 환기 장치가 잘 돼있는데다 들에는 꽃이 만발하게 피었다. 어떤 집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고 자가용 자동차를 갖고 있는 집도 있었다.
전화가 있는 집도 있었는데 이는 간부의 집에만 있는 것 같다. 스피커를 통해 직장으로 나오라는 연락이 전해진다. 신앙촌에는 방송실을 통해 스피커로 모든 것이 연락되고 있었다. ‘어린애를 잃은 사람은 어느 곳까지 오십시오’하고 연락하는 소리도 들린다.
집집마다 양지바른 마루에 좋은 새장이 있었다. 어떤 집에서는 새를 여러 쌍 기르고 있는데 수십 쌍을 기르는 집도 있다.
고급주택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풍족한 편이다. 부인들의 옷은 호화롭고 하는 일은 꽃밭을 가꾸거나 집안일을 돌보는 정도였다.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남녀학생들과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집은 신앙촌에 있고 학교는 서울에 있는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잠은 신앙촌에서 자고 직장은 서울에 두고 있는 사람도 상당히 눈에 띄었다.
각 부 공무원 국장, 과장급도 있고 지식층도 상당히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뿐인가 박사, 전직 장관, 전 국회의원 등의 사람들도 많이 드나들고 있다.
안내하는 대로 따라서 박장로가 사는 집 앞으로 갔다. 시골에서 온 손님들이 십여명 밖에서 차례차례 면회를 기다리고 있다. 적산 일본집(20평 정도의 건평)이 박장로의 집이었는데 상당히 낡은 집이었다.
밖에는 국기게양대가 있었는데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겉으로 보아 박장로의 집은 수수한 편이지 결코 좋은 집은 아니었다.”
내심 호화로운 고대광실을 상상하고 하나님 댁을 찾아갔던 오소백은 본지 2094호에 게재되었던 적산 가옥을 보고 ‘수수한 편이고 결코 좋은 집이 아니다’고 실망감을 표시 하였다.
“대충 주택이 있는 곳만 구경하고 일단 문화부라는 곳으로 와서 잠깐 쉬었다. 문화부에는 며칠 전에 박장로가 전도관에 갖고 와서 보여 주던 야자수 만한 큰 고구마가 세 개 놓여 있었다.
1만 4000 명이 사는 신앙촌에는 신문이 들어오고 있다. ‘00신문 신앙촌 지국’이라는 간판이 네 개나 붙어 있다. 경인일보 00부, 동아일보 000부, 서울신문 00부, 신앙신보 000부를 구독한다고 한다.
신앙촌 네거리에 나가면 없는 것이 없다. 일용잡화는 무엇이든지 있다. 어쨌던 50여종의 상품이 생산되니까… 담배와 술만 빼고는 없는 것이 없다. 물론 신앙촌에서 생산하지 못하는 것은 외부에서 사다가 판다.
백화점, 시계포, 양화점, 문방구점, 목공소, 과일가게, 포목상, 냉면집, 식당, 이발소, 목욕탕…이쯤 해두자. 백화점에는 축복 사진이 무려 십여 종류나 있었다. 이 사진은 진열장 속에 진열도 했고 매달아 놓기도 했다. 특히 신앙촌 간부들이 입버릇처럼 자랑하는 것은 ‘주인 없는 상점’이다. 이 주인 없는 가게는 네거리 백화점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일종의 무인판매점이다.
공장지대로 발을 옮겼다. 나이롱 양말공장, 참기름 공장, 비누 공장, 메리야스 공장이 어마어마하다. 정말 무슨 공업지대에 온 느낌이다. 종업원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일을 하고 있었다.
신앙촌의 간부들은 자신만만하게 금년 안에 노구산에 5만명을 수용하는 제단이 완성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가능한 일로 보인다.
지금 노구산 꼭대기에 임시로 마련된 오만제단은 가장 위치가 좋은 곳으로, 서울 삼각산 연봉이 보이고 한쪽으로는 멀리 인천 앞바다의 푸른 물결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과연 명당임에 틀림없다.”
오소백의 르포 이외에 『신태양』지에는 이대 모 교수 친구의 이야기라며 신앙촌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나는 박장로를 만난 일도 없고 또 그의 이적을 믿는 사람도 아닌데, 요즈음 신문이 떠드는 것을 보고 우스웠다. 왜냐하면 나는 누가 뭐라해도 신앙촌의 혜택을 톡톡히 입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연인즉 내가 인천에서 차를 타고 서울로 오는 도중 소사 근처에서 엔진이 고장나 꼼짝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있었다. 중간에 수리할 곳은 없고 저녁은 다 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때 마침 어떤 사람들이 오더니 왜 그러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사유를 들은 그들은 염려 말라고 하면서 신앙촌 안의 자동차 기술자를 불렀다.
곧이어 서너 사람이 연장을 가지고 달려와 무난하게 내 자동차를 고쳐주었다. 그래서 값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우리는 돈 안 받는다고 하면서 그냥 무료로 어려운 환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 주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선행을 체험한 나는, 신앙촌 사람들이 누구를 도와주는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종교의 교리는 잘 모르지만 그들은 좋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