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촌의 얼굴 ‘주인 없는 상점’은 자유율법의 표상

진하옥 집사(3)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08
글자 크기 조절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신앙신보 사진

동네 한가운데 있는 저희 집에서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부르니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임실 장로교회의 주동 장로는 저에게 자기네 교인을 일절 건드리지 말라고 하였고, 또 교인들에게는 저를 보지도 말고 만나지도 말라고 주입시켰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 감람나무이심을 발표하신 것을 두고 동네 코흘리개들까지 돌감나무니 땡감나무니 하며 못되게 구는 속에서도, 임실 장로교회 교인들 20명이 스스로 찾아와서 한꺼번에 전도되었습니다. 전도사님을 모시고 ‘임실전도관 개관집회’를 열었을 때는 어린이로부터 어른까지 제단이 가득하였고, 집회 첫날부터 향취와 이슬은혜가 한없이 쏟아졌습니다.

떠나신 하나님을 뵈러 임실 식구들이 역으로 달려 갔더니
서울행 기차는 서서히 떠나는데, 하나님께서 미소를 지으시며
열차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하얀 손수건을 흔들어 주셔

그 즈음 교인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전도사님과 교인 몇 명이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80대 할아버지인 고인은 장작개비같이 뻣뻣하게 굳은 데다 시커멓고 푸릇푸릇한 색을 띠어 너무나 무섭고 소름이 일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사님이 생명물을 적신 수건으로 얼굴에서부터 닦아 내려가자 생명물이 지나가는 곳마다 굳어진 것이 풀리면서 환하게 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잠이 든 것 같은 편안한 모습을 보니 초면이 아니라 한식구 같은 친밀감이 들었습니다. 마당 한가득 모여 있던 이웃 사람들은 곱게 핀 할아버지를 보고는 편안한 모습으로 가셔서 참 좋으시겠다고 하였고, 어떤 분들은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두렵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1957년 11월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임실제단에서 제 동생을 비롯해 8명이 입촌하였습니다. 얼마 후 협회에서 연락이 오기를 어머니는 권사 저는 집사라고 임명하면서, 하나님께서 구례 산판에 가셨다가 오시는 길에 혹시 시간이 되시면 임실전도관에 들르실지 모른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날아오를 듯 기쁜 마음에 한 명이라도 더 데려와서 하나님을 뵙게 하려고 동분서주하다가 돌아왔더니, 어머니 말씀이 하나님께서 시간이 없으셔서 생수 축복만 하시고 곧바로 기차역으로 떠나셨다고 했습니다. 같이 있던 사람들과 있는 힘을 다해서 역으로 달려갔더니 서울행 기차가 서서히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열차 맨 뒤 칸에 서신 하나님께서 먼저 저희를 보시고는 미소를 지으시며 하얀 손수건을 흔들어 주고 계셨습니다. 열차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내내 손수건을 흔들어 주셨고, 저희들은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바라보다가 못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임실전도관에 교인이 50명, 주일학생이 70명 정도 되었을 때, 저는 그리던 소사신앙촌에 입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58년 5월 24일이었습니다. 입주하자마자 수예부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한 땀 한 땀 수를 놓으면서 ‘이 상품 속에 은혜로 함께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쉼 없이 흘러나왔습니다. 그해 9월에는 제단 건설대의 운반부에 들어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흙벽돌, 모래 등 건축 자재를 나르며 신나게 일했습니다. 건설대원들 모두 ‘힘든 일은 내가 먼저’라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배려하였고 ‘언니’라는 호칭으로 서로를 존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수시로 현장을 돌아보시며 안수 안찰을 해 주셨기에, 일하는 중에도 향취가 진동하고 생명물이 시원하게 마셔지며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에도 더운 줄을 몰랐습니다. 때론 안찰하실 때 매 사람의 죄를 지적하시며 심령의 정도를 드러내시니 참으로 떨리고 두려웠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못 한 개라도 자기 것이 아니면 집어 가지 말라.” 하시는 등 그때그때 주시는 말씀이 곧 법이었습니다. 자유율법을 지키며 맑게 살고자 노력하는 곳이었기에 1구에 자리 잡은 ‘주인 없는 상점’은 신앙촌의 얼굴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과 공장에서 생산되는 캐러멜과 카스텔라는 최고 인기 품목이라 새벽부터 사려는 사람들로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캐러멜은 하나님께서 친히 배합 기준을 맞춰 주셔서 일본 모리나가 캐러멜보다 더 맛있다는 평을 들었고, 카스텔라도 일일이 체크하셔서 입에 살살 녹는 부드러운 맛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심령을 새롭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공장과 주택의 건축 설계에서부터 제품 생산과 판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아갈 터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미 부흥집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하였고 품질 좋은 신앙촌 제품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자, 자동적으로 신앙촌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특히 1958년 여름에 열렸던 소사신앙촌 노구산 집회 때는 연 70만 명이라는 수가 온 산을 뒤덮는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폭발적인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낀 종교계와 일부 정치인들이 결탁하여 1958년 12월 27일 하나님을 투옥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서울 이만제단에 모여 철야 금식 기도를 드렸지만 가슴만 미어질 뿐 어떤 도움도 될 수가 없었습니다.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관련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