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규 판사에 대한 회고 (조봉환/서대문교회)

조봉환 / 서대문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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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제게는 이남규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3년 전, 그가 보낸 회고록과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회고록에는 이남규가 8·15해방을 전후로 저와 함께 만주에서 피난 나왔던 일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8·15해방 이틀 전인 8월 13일 소련군 폭격기의 집중 소이탄 폭격으로 인해 장춘시내 일대가 불바다가 되었다.(중략) 마침 중앙은행에 근무하는 조봉환 친구를 만나 함께 마차 한 대를 대절하여 정든 장춘시를 빠져 나왔다.(중략)”

당시 만주 중앙은행에 취직이 된 저는 신경법정대학 야간부에서 공부를 했었고, 이남규는 학업을 위해 만주에 와서 고등고시에 합격, 농림부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남한으로 피난을 온 저는 사업을, 이남규는 법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던 중 1957년, 저는 마산에서 서울 원효로 4가로 이사를 했는데, 마산에서부터 전도관에 다니던 가족의 권유로 처음 이만제단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안찰도 받고 수많은 기사이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1958년 12월 기성교단과 정치권의 음모로 하나님께서 1차 옥고를 치르시게 되었을 때 1심 판사가 바로 이남규였습니다. 그때 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정종 한 병을 가지고 이남규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재판 좀 잘하라”고 했더니 이남규는 “네가 전도관 대표로 온 것이냐. 그 얘기 꺼내지도 말라, 이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며 눈길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이 사람이 자기 신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외부세력의 큰 압력에 눌려 있구나’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크게 실망한 저는 그 이후 다시는 이남규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한 때 가장 가까웠던 친구가 어쩌다가 그 분을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에 제대로 된 ‘법관의 양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박마리아의 하수인이 되고 말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쉬울 뿐입니다.

그 뒤 소사신앙촌 시절 제가 다니는 회사의 부평 공장에 하나님께서 방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환하게 웃으시며 “이 기계는 어떻게 빨리 회전할 수 있느냐”며 물으셨던 하나님 모습을 뵈며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음에도 어떻게 저리도 환하게 웃으실 수 있을까…’하고 속으로 참 많이 놀랐습니다.
빛바랜 친구의 회고록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과 친구의 굳어진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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