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지리산 골짜기에 뜨거운 신앙의 전초기지가 있었네 (1959~62년 탄광과 산판에서의 순수했던 젊은이들의 이야기)

1959~62년 탄광과 산판에서의 순수했던 젊은이들의 이야기
발행일 발행호수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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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그날의 용사들이 다시 모여 남원 산판에서의 뜨거웠던 신앙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상) 1962년 여름, 산에서 나무 베기 작업을 하다가 개울가에서 점심 먹는 모습(사진제공: 기장신앙촌 최춘길 권사)

때는 1959년 4월. 지리산 뱀사골의 험준한 골짜기에 오직 신앙으로 뭉친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짐을 들고 입산하기 시작했다. 소사신앙촌과 덕소신앙촌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목재를 공급하기 위해 오지를 마다하지 않고 산판 활동을 자원한 청년들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혹한과 싸우며 힘든 벌목의 일을 하면서도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죄를 짓지 않는 고도의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었다. 반세기가 지나 초로에 접어든 당시의 ‘용사들’을 신앙신보가 만나 보았다.

*장소: 기장신앙촌 본사 회의실 *일시: 2009년 10월 18일 오전 10시 *참석자 남삼호 관장(71. 춘천교회), 이경수 승사(74. 덕소교회), 백남선 권사 (70. 춘천교회), 정상욱 권사(68. 기장신앙촌), 최춘길 권사(70. 기장신앙촌), 김상홍 권사(69. 부산교회), 우일용 권사(70. 광양교회), 권기식 권사(76. 서마산교회), 전병남 권사(77. 소사교회), 김춘옥 권사(70. 기장신앙촌), 박태호 권사(78. 소사교회)

남삼호: 기성교회를 다니다가 전도관으로 입교한 지 1년 반쯤 되었을 때입니다. 관장님께 ‘전라남도 남원 산판장에서 일할 신앙이 좋고 신체 건장하며 부지런한 청년들을 모집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기성교회와는 차원이 다른 구원의 말씀을 설파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그간 들었기에 ‘이제는 무조건 하나님을 따르겠다’라는 결심을 하고 군 입대 전에 자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일용: 삼천포 전도관에 다니다가 자원을 하여 3일간을 걸어서 현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산을 넘어 개울을 건너며 찬송가 64장을 수없이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러 간다는 자부심으로 태산도 껑충 넘을 수 있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김상홍: 저는 진주 전도관에 다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총 책임자였던 우진영 장로를 따라 부산에 가서 미군용 GMC 2대를 사서 석 달간 개조하는 일을 담당 하였습니다. 본래 이 트럭은 4톤짜리이나 적재를 12~16톤을 싣기도 하였습니다.

지리산 꼭대기에서 트럼펫으로 찬송가 부르고
나무를 베며 ‘천국’하고 외치면 ‘들어가자’호응해
밤에 화장실 가다 종종 곰과 맞닥뜨리기도

정상욱: 저는 마포 이만제단에 다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주저없이 자원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장세호 집사님이 나이가 어리다(당시 19세)고 안 된다고 하셨지만, 자신이 있다고 말씀드려 선발되었습니다. 처음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처녀림이었습니다. 도로가 없어 도로만 닦는 데에 1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눈비가 자주 오는 지역이라 도로 보수에 많은 시간을 보낸 기억이 납니다.

전병남: 신앙촌이 아닌 곳 중에서는 가장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하늘을 향해 새까맣게 뻗어있는 나무를 톱으로 자르면서 ‘내가 자르는 이 나무가 하나님 성전 그것도 오만제단의 재목으로 쓰인다’는 생각을 하며 이런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눈물을 흘린 때가 많았습니다.

이경수: 저도 최춘길 권사님처럼 소사 건설대에서 일을 하다가 자원하였습니다. 벌목한 나무들을 싣고 지리산 뱀사골의 꼬불꼬불한 길을 내려오려면 보통의 운전솜씨로는 힘이 듭니다. 운수반 교인들은 찬송을 부르며 조심조심 2시간 이상의 거리를 내려왔습니다. 남원역에서 이를 하차하여 다시 기차 화물칸에 상차를 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백남선: 저는 취사반에 속해 있었습니다만, 도로 수리반, 상차반, 하목반, 톱반, 제재반, 목도반 등 10여개 반이 있어 서로 유기적으로 협조를 잘 하여 정말 일사불란하였습니다. 숙소는 8개동을 지었습니다. 모든 숙소 앞에는 예쁜 전나무를 두 그루씩 좌우로 심었습니다. 그곳에 제단도 지었고 담당 전도사님도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시면 거하실 숙소도 지었습니다.

박태호: 이만제단 봉사대에서 있다가 화순탄광을 거쳐 구례 산판에서 근무 하다가 남원 산판장으로 갔습니다. 저는 나팔수로서 매일 아침 예배 시간이 되면 트럼펫을 불었고 그리고 취침시간이나 점심시간을 알리는 나팔을 불었습니다. 지리산 높은 지대에서 찬송가 ‘이 산과 저 산이 마주쳐 울려 하나님 은혜를 찬송하네’를 트럼펫으로 연주하면 천국 그 자체였습니다.

김춘옥: 저는 소사신앙촌 건설대에 있다가 남원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어의 몸이시라 가지된 우리들은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로 모든 봉사자들이 구호도 ‘천국’ 또는 ‘천국 들어가자’라고 외치며 일사불란하게 일하던 때가 그립습니다. 당시의 우리들의 신앙심은 대단하였습니다. 은혜 가운데 생활을 하니 무엇이 두려웠겠습니까?

남삼호: 모두 열혈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어 북을 치고 박수를 치며 찬송을 불렀고 예배를 드리면 지리산 뱀사골이 떠나갈 정도였습니다. 당시 지리산에는 눈이 많이 왔습니다.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밥 먹을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눈을 걷어내고 돌처럼 단단한 주먹밥을 불을 피워 데워 눈 속에서 먹기도 했는데 그 맛이란 꿀맛 같았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에는 우리들의 코끝을 스치는 향취가 진동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사방에 뒹구는 6.25전쟁 유골을 보시고
`불쌍하니 생명물에 잘 씻어 묻어주라` 당부 하셔
나이와 상관없이 대원들 서로를 ‘형님’이라 부르며 존경해

권기식: 제단에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는 분들도 계셨고 새벽 2시부터 부복하여 기도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옥중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죄송해서 이불을 덮고 잘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고생을 고생으로 생각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세상에서도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고생을 영광이라고 서로가 더 힘든 일을 맡아하려고 경쟁하였습니다.

우일용: 매일 아침 통나무로 지은 제단에서 예배를 드리고 아침밥을 먹고 벌목 장소로 올라갔습니다. 숙소의 지붕은 미군천막을 덮어 만들고 벽은 통나무로 쌓고 바닥에는 온돌을 놓았습니다. 겨울에 그곳은 무척 추웠습니다. 그러나 그곳 생활은 은혜의 창파였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말만 하고 서로에게 나이와 상관없이 ‘형님’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먼저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때의 연단이 오늘날의 저를 지탱해주는 큰 자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김상홍: 한국동란 이후에 지리산은 무장공비 토벌로 한 동안 인적이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야생동물이 많았습니다. 밤에 화장실을 가려면 관솔로 횃불을 붙여 다녀야 했는데 가끔은 눈 앞에 호랑이 같은 동물이 눈에 불을 이글거리며 어슬렁거리기도 했습니다. 곰은 종종 맞닥뜨렸습니다.

이경수: 한때는 빨치산이 활동하던 곳이라 해골도 종종 발견되기도 했는데 어느 때인가 하나님께서는 ‘불쌍하니 생명물로 잘 씻어주라’고 당부하시기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춘길: 산판작업이 상당히 힘을 요하는 중노동이지만 아무리 피곤하여도 저녁에 들어와 목욕을 하고 생수 마찰을 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 듯이 피로는 간 곳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4그룹으로 나누어 생활 하도록 하셨는데 지나고 보니 성격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도록 하여 신앙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도록 배려하셨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또 책임자인 우진영 장로가 하나님께서 아무 물이나 쓰지 말고 어느 구역 일부를 지정해 주시며 축복해 주신다는 말씀을 전해주어서 우리는 그곳의 물을 먹고 치료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상욱: 나무를 베는 작업을 하다 참나무가 제 곁으로 넘어졌는데 미처 피할 겨를이 없어 허벅지 쪽에 뼈가 박살이 났습니다. 저는 개구리가 뻗듯이 팔자로 누었습니다. 동발이 허벅지에 박히는 순간 ‘죽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생명물을 먹고 바르길 3일 만에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나아서 벌떡 일어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는 겁니다. 그곳이 벌목 현장이다 보니 안전사고가 수시로 일어났으나 모두 생명물 덕분으로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전병남: 저는 그때의 생활이 아주 귀중한 신앙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도 그 때 신앙의 열정을 생각하면 만사가 술술 잘 풀립니다. 한창 20대인 우리가 그곳에서 세상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오로지 신앙생활만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았다고 봅니다. 거기에서는 정말 죄라면 치를 떠는 심정으로 멀리하였습니다.

백남선: 저는 주방에 있으면서 ‘내가 준비하는 이 식사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소서’라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끼 한끼를 준비했습니다.

박태호: 겨울에는 동발을 베어 골짜기로 집어던지면서 눈 위로 마치 썰매 타듯이 내려갔습니다.

김춘옥: 우리는 합법적으로 벌목 허가를 받아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일부 주민들이 우리를 무허가 벌목으로 몰아 방해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방해공작을 하려고 어느날 덩치가 건장한 불량배들을 동원해 몽둥이들을 들고 우리 벌목장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봉사대원들 중에는 태권도, 유도, 당수 등의 유단자가 여럿 있었습니다. 몰려온 깡패들이 보니 자기들이 수련하던 도장의 대선배들이 있는지라 그들은 허리를 90도로 숙이면서 “형님들 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하였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물러갔던 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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