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불법방영사건(6)박마리아, 김경래 그리고 탁명환①

무형의 내사종결 결과는 보도 안해
발행일 발행호수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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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MBC, 1957년세계일보 기사를 인용하면서 무혐의 내사종결 결과는 보도 안해

MBC는 1999년 6월 3일 천부교에 대한 방송을 하면서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인 1957년 기성교회 백영기 목사 부부가 천부교를 음해하기 위해 조작한 ‘혼음 고발사건’이라는 것을 거론하였다. MBC는 다음과 같이 방영하였던 것이다.
`1957년 4월 혼음 고발사건이 기사화되면서 천부교는 세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된다…`
본지는 천부교의 명예를 중대하게 훼손한 ‘혼음 고발사건’에 대하여 수회에 걸쳐 그 실체와 배경을 샅샅이 조사하여 싣기로 하였다.
MBC는 이 사건 보도에 관하여 `그러한 고발 사건이 기사화되었다는 점만을 1957년 3월 18일자 세계일보 기사를 인용하여 간단히 언급하였을 뿐 ‘혼음 사건’의 내막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아니하였다`고 변명하면서 당시의 세계일보 기사를 증거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목사 신분이었던 백영기가 그러한 터무니없는 고소를 하게 된 배경과 그 고소 사건이 무혐의 내사 종결 처리되었다는 결과는 보도하지 아니하고 MBC가 그 사건만을 거론했다는 것은 천부교에 대한 중대한 명예 훼손이라는 것을 천부교는 지적하였다.

재판부도 `이 방영 내용은 일반 시청자로 하여금 천부교와 혼음을 연관시키는 인상을 가지게 하는 것이므로 그 사건에 대한 진실성 여부를 가려야 할 것인바 MBC가 제시한 세계일보의 기사만 가지고서는 그 사건이 신문에 기사화되었다는 사실만이 인정될 뿐이고 천부교와 혼음이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즉 MBC의 보도는 명예훼손에 해당된다.`라고 판결하였다.

MBC가 인용 보도한 1957년 3월 18일자 세계일보 3면에는 어떠한 기사가 났던 것인가? 거기에는  `백영기 목사와 그의 처 장애삼이 천부교를 상대로 ‘혼음 사건’을 고발하였으며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는 김경래 기자의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세계일보에 그러한 기사가 게재되게 되었는가 하는 배경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박 마리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박 마리아가 자유당 시절의 제 2인자였던 이기붕의 처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면 박 마리아가 어떠한 사유로 천부교를 핍박하는데 앞장서게 되었고 마침내 비참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하는데 대하여 알아본다.

일찍이 빈한한 가정에 태어나 온갖 고생을 하며 유년기를 보낸 박 마리아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이 남달라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거쳐 이기붕과 결혼한 후에는 유약한 이기붕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접근시켜 그들의 아들 이강석을 이 대통령의 양자로 입양시키는 등 이기붕으로 하여금 제 2인자의 자리를 굳히도록 하는 권력 지향적 삶을 살고 있었다.절대 권력자의 부인으로서 무소불위의 자리에 있던 박 마리아였지만 박 마리아에게는 고칠 수 없는 질환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아무리 유명한 병원에 다녀도 고쳐지지 않는 만성 위궤양이었다. 기독교인이었던 박 마리아는 당시 천막집회에서 수많은 병자가 일어나는 기사와 이적의 소문을 듣고 자기도 박 장로님께 안찰을 받고 병을 고치기를 원하였다. 박 마리아는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유각경 씨(YWCA 창설자)에게 청을 넣어 마침 석교교회에서 집회를 마친 박 장로님께 안찰을 받게 되었다. 장소는 석교교회의 사감실이었다.

이때의 정황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 보자.

`석교교회에 가서 설교를 그치고 내려오니까 박 마리아와 같이 다니는 사람 중에 유각경 씨라고 나이 많이 든 분이 (내게 묻기를)
‘장로님, 박 마리아 잘 아세요?’
‘잘 알고 말고요. 이기붕 씨 부인이지요?’
‘그런데 그분이 위궤양 때문에 전 세계 각 병원에 다 다녀도 고칠 수가 없으니 장로님 안찰 좀 해주세요.’
‘아, 그렇게 합시다. 안찰 할 방이 있어요?’
‘사감 방으로 가시지요.’
그때 내가 38살 적인데 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대로 죄를 짚어 당장 안찰하는 자리에서 지적했어요. 무슨 죄라도 지적을 하고 목사들의 죄도 막 지적을 했어요. 물 불을 헤아리지 않았어요. 어떤 핍박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 자리에서 심판해 버렸어요.
박 마리아가 안찰을 받다가 ‘으악!’하고 (비명을 지르는 고로) ‘이거 죄 지었어’ 하고 그 더러운 죄 지은 것을 지적 했어요. 아니라고 대들면 누구하고 어느 때 어떤 시간에 어떻게 했다는 것을 내가 말할 수 있어요. 내가 전체 죄상을 체크하는 존재인 고로 얼마든지 말할 수 있어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그 사람 앞에 누가 설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나는 그 어떤 인간의 존재가 아니에요. (핍박을) 겁내지 않아요. 그렇게 될 것을 미리 다 알고 하지요.
(지적을 받은 박 마리아는) 팩하고 (안찰을) 안 받겠다고 뿌리치고 (나갔지요.) 거기에서 ‘어디 두고 보자’ 하게 된 것이지요.감리교회에 여자 장로법이 없던 것을 (여자 장로제도를 새로 만들어) 박 마리아를 장로로 세우고 나를 치게 했지요. 자유당 때 나를 최고로 괴롭힌 사람이 박 마리아예요. 안찰 해주고 내가 괴롭힘을 당했지요.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힐대로 괴롭히다가) 온 가족이 (비참하게) 갔지요.` (1986년 3월 3일 축복일 말씀, 1986년 7월 28일 고객 초청 말씀, 1986년 8월 6일 고객 초청 말씀 중에서)

박 마리아의 복수는 그의 소유였던 신문의 기사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 마리아 일가의 소유였던 세계일보(李北의 소유였던 구 중앙일보를 이기붕이 인수하여 세계일보라고 개명했다. 지금의 세계일보와는 다른 신문으로 이기붕이 죽은 후 폐간되었다.)는 1957년 3월 18일자 3면 톱 기사로 ‘괴(怪)! 전도관의 정체, 남녀 12 명이 혼음?’ 이라는 기사를 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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