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촌 건설의 신화(7) 만나가 내리는 땅①

근면과 자조 새마을 운동의 효시
발행일 발행호수 2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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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서로 존중하고 양보하며 은혜의 세계 이뤄 전국에서 모여 신앙으로 하나돼`

신앙촌 주민들의 자녀들을 교육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시온학원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며 그 뜻을 받드는 참 신앙인의 육성을 교육이념으로 하고 있었다. 신앙촌 건설 수개월만인 1958년 4월 15일에는 시온국민학교가 설립되고 1958년 4월 29일에는 시온 중·고등학교가 설립 되었다.
1958년 5월 5일자 신앙신보는‘소사신앙촌 중·고교, 지난 29일 개교식 성황’이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 하였다.

“내외가 주시하는 가운데 경이적인 발전과 건설이 이루어지고 있는 신앙촌에서는 입주한 신도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지난 4월 15일에 국민학교를 개교하고, 4월 29일에는 중 · 고등학교도 설립을 보아 개교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다.

동 중 · 고등학교 개교식은 지난 4월 29일 상오 10시부터 신앙촌내 옹진 중 · 고등학교(시온 중 · 고등학교의 전신) 강당에서 학생 301명과 도지사 대리로 경기도 문정과장을 위시한 내빈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국민의례에 이어 찬송가 549장의 합창과 서울중앙전도관 이정길관장의 기도가 있은 다음 김승규 전도사로부터 개교하기까지의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어 동교 이사장 홍경섭씨의 인사와 도지사 축사(문정과장 김대균 씨 대독), 교육감 김만희씨와 소사읍장 이기성씨 등의 축사 등으로 성왕한 가운데 식을 마치었다.”

이렇게 해서 소사 신앙촌에는 중·고등학교까지의 교육시설이 마련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 모든 기업이나 학교, 종교단체가 외국 원조 없이 세워진 것이 전무하다시피 했을 때, UNKRA(유엔한국재건단) 단장 콜터 장군 등이 신앙촌에 원조를 자청했으나 하나님께서는“우리는 원조를 받는 단체가 아니라 원조를 해주는 단체다”라고 말씀하시며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촌을 건설하신 것이다. 건설을 시작한지 1년 만에 모든 주택과 공공시설 그리고 생산 공장이 거의 완공된 소사신앙촌은 전국 각지에서 12,000여명의 신도들이 입주하여 문자 그대로 신앙인의 마을을 이루어 신앙생활에 매진하게 되었다.

입주자들의 생업분포를 보면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32%로 가장 많고 그 다음에는 제조업 22%, 근로자 7%, 공업 7%, 공무원 6%, 군인 5%, 건설업 4%, 농업 2% 등이었다. 신앙촌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신앙촌 버스가 운행되었는데 계란 색으로 곱게 단장한 자가용 버스는 신앙촌과 서울역전에 있는 대한생명 건물 앞까지 새벽 6시 30분부터 저녁 9시까지 왕복하였다.

이렇듯 각지에서 모여온 사람들은 갖가지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신앙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양보하고 서로 존중하며 은혜의 세계를 이루어 나갔다. 신앙촌 사람들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도시를 이루고 아름다운 생활을 했던 것이다.

최정암 승사(86, 기장신앙촌)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전국에서 모여든 식구들은 신분도 다르고 직업도 달랐으나 은혜로 하나 되다보니 한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서로 양보하고 아꼈으며 힘든 일은 서로 먼저 하려고 하였습니다. 마음으로도 죄 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주인 없는 상점’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신앙촌은 정말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외국의 원조가 아니면 살 수 없었던 때인데, 외부의 원조 한 푼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세운 새로운 마을이 생겨난 것입니다. 나라 안은 물론 외국에까지 소문이 퍼졌습니다. 말 그대로 폐허 속에서 피어난 나라의 희망이며 모범이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외국기관에서는 급기야 원조를 해 주겠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 사양하셨습니다. 꼭 우리 힘으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건설 공사가 거의 마무리 될 무렵부터는 견학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소사 신앙촌은 수려한 자연 환경과 더불어 주택, 도로, 전기, 급수 그 밖의 편의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작은 도시였다. 신앙촌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도록 파출소, 우체국, 소방서, 이발소, 미장원, 세탁소, 양복점, 양장점, 식당, 다과점, 목욕탕, 사진관, 책방, 양화점 등과 함께 발전실, 자가 수도시설, 미술실, 병원, 산업관, 방송실, 영사실 등이 만들어졌다. 영사반에서는 매주 1회 USIS(미국공보원)에서 기록영화 필름을 빌려와 주민들에게 상영해 주기도 하였다.

또한 일명‘주인 없는 상점’이라는 무인상점이 있었는데 아침에 물건을 잔뜩 갖다가 진열해 놓고 저녁에 가서 계산을 맞추어 보면 1원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맞았다. 그만큼 신앙촌에 사는 사람들이 신앙인답게 양심적으로 맑게 살았음을 알 수가 있었다.

신앙촌에 입주한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관하여 한일물산주식회사 조응화 사장(71, 기장신앙촌)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신앙촌 주민들의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은 새마을 운동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식구들이 구름같이 몰려왔습니다. 신앙촌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고 입주한 식구들은 생기와 활기로 가득 찼습니다. 팔도에서 모인 사람들이지만 한 식구 같았으며 범박리 골짜기에는 찬송 소리가 넘쳤습니다. 어디를 가나 은혜의 창파가 이루어 져, 그곳은 세상과 다른 별천지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려고 하루에도 수십 대의 관광버스가 올 정도의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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