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소신앙촌(1) – 신화의 재창조

불가능한 조건에서 더 아름답고 더 큰 규모로 덕소 땅에 두번째 신앙촌을 건설
발행일 발행호수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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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7월 20일, 서울에서 약 20km가량 떨어진 북한강 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와 도곡리 일대의 10만 평 부지에 두 번째 신앙촌인 덕소신앙촌 건설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신앙촌인 소사신앙촌에 이어 두 번째로 신앙촌을 건설한다는 것은 역사상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수천 세대의 사람들이 한 목적을 바라고 한 곳에 모여 사는 신앙의 도시를 건설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인간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인데 그것도 두 번째로 신앙촌이 건설되고 있었다.   
 
더구나 2차에 걸친 하나님의 옥고로 기성교단의 견제와 음해(陰害)는 극에 달해 있었으며 소사신앙촌의 생산 활동은 침체해 있었고 소비조합 활동은 위축돼 있어 교단이 겪는 경제적 난관은 말로 할 수 없었다. 당시 교단에는 ‘시멘트 한 포’를 살 경제적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2차 영어에서 나오시자마자 곧바로 제2신앙촌을 착공하셨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다시 한 번 기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째 신앙촌은 더욱 큰 규모로, 더욱 아름답게 사람들 눈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착공 3개월 만에 건평 4천 평의 공장을 준공하여 10월부터는 메리야스, 제과, 피복, 양말, 장유 등 각종 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하였고, 11월 16일에는 55세대 200여 명이 덕소신앙촌 주택지대에 1차로 입주하였다.
 
‘자유율법’의 지고한 이상을 향해
신앙의 울타리 또하나 이뤄지다
 
덕소신앙촌은 지형에 따라 주택 지대, 경공업 지대, 중공업 지대로 나누어 졌는데, 착공한 지 7개월이 지나자 주택, 아파트, 공장, 초·중·고등학교, 교회 등이 건설되어 6,000여 명의 교인이 입주하였다. 건설 당시 “자가발전 시설에 형광등까지 가설한 공사장은 불야성을 이루어 당시에 전기가 없던 덕소 마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덕소신앙촌의 주택은 다양한 색상으로 조화를 이룬 2층 양옥의 구조였으며 한강을 조망(眺望)하도록 되어있어 강물과 어우러진 그 빼어난 경관은 보는 사람의 탄성을 절로 자아 내게 하였다.
 
주택의 구조는 타일을 입힌 A, B, C, CD형의 양옥과 2층 아파트, 아파트식 CD형으로 나누어져 있어 누구나 각자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하였고 모두 온돌과 목욕탕, 수세식 변기, 수도가 완비되어 있는 등 당시 우리나라 주택문화 수준에서는 최고를 자랑할 만하였다.
 
경공업 위주로 사업을 했던 소사신앙촌에서와는 달리 덕소신앙촌에서는 경공업뿐만 아니라 제강·제철 공업과 같은 중공업에도 참여하는 등 사업을 더욱 확대하고 다각화하였다. 덕소신앙촌에서는 30여 공장에서 80여 품목의 제품이 생산되었는데 생산품으로는 메리야스, 양말, 수예, 양재, 편물, 담요, 날염, 타월, 소모방적, 스트레치, 조미료, 제과, 두부, 콜라, 국수, 스테인리스 식기류, 기계, 전기, 염산칼리, 망간, 비누류, 화장품, 비닐, 피아노, 형광등, 블록, 제강, 내화연와 등이었다.
 
입주한 교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덕소신앙촌의 교육기관으로서는 시온 제2초등학교와 시온 제2중·상업고등학교가 개교되었다. 교육의 중점으로는 학생들의 정서 함양과 신체 단련을 위해 음악과 체육 활동이 장려되었고 합창단, 합주단, 농구부 등의 활동이 활발했다. 특히 시온어린이합창단은 TV 출연, 각종 대회 수상, 레코드 제작 등으로 돋보이는 활동을 보였고, 시온 제2초등학교 농구부는 전국 대회에서 2년 연속 우승을 하는 등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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