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이 모르는 것을 알았고 세상에 없는 것을 받았구나

황은실 승사(1)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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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저는 1930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조부모님을 비롯한 일가친척들이 모두 장로교인인 집안에서 저도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니며 성장했습니다.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던 저는 교회의 성가대로 활동하며 부흥회와 성경 학교가 열릴 때마다 열심히 참석하곤 했습니다.

1945년 일제에서 벗어나 8·15 해방을 맞았지만 이북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강요하며 사람들을 억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를 반대했던 저는 공산당원들이 지주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하고 한가족끼리도 사상을 감시하게 만드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고민을 거듭하다가 자유가 있는 이남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수차례의 시도 끝에 간신히 삼팔선을 넘어 월남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내려온 저는 교회에 나가면서 주일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당시 원한경(Horace Horton Underwood) 박사의 부인이 ‘절제 소녀 회관’ 설립을 준비하고 있어서 그 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20대에 접어들면서 어렸을 때 무조건 성경을 믿었던 것과는 달리 여러 가지 의문으로 고민하게 되었는데, 제 또래의 젊은이들과 함께 인간과 종교에 관해 열띠게 토론을 하곤 했습니다. 특히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유명한 목사나 신학 박사의 강연회에서 질문해 보았지만 좀처럼 속 시원한 해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스물두 살에 결혼한 저는 육군 장교였던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청주로 이사를 갔습니다. 우암동에 살면서 집과 100m 거리에 있는 외덕 장로교회(現 우암 장로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1955년 당시 교회를 신축하던 외덕교회는 금전적으로 큰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은혜가 많기로 유명하신 부흥강사를 모셔 와서 부흥집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 부흥강사는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집회가 열리는 날, 박 장로님과 함께 온 서울 창신 장로교회의 권연호 목사가 먼저 등단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곧이어 박태선 장로님이 단상으로 올라오셔서 손뼉을 치며 찬송을 인도하시는데, 저는 부흥집회에 많이 다녀 보았지만 그처럼 집회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찬송하시는 분은 난생처음 뵈었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사이 교회당을 가득 채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었고, 너 나 할 것 없이 오직 찬송에만 열중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한창 예배를 드리던 중에 박 장로님께서는 “목 위로 병이 있는 사람은 단상 앞으로 나오세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한 달에 두세 번씩 고질적으로 편도선염을 앓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듣고 단상 앞으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단상 앞에 줄을 서자 박 장로님께서 차례대로 머리를 가볍게 쳐 주셨는데, 저보다 세 사람 앞에 있던 여자 분은 박 장로님의 손이 닿기도 전에 자신의 코를 가리키더니 “저는 어려서부터 냄새를 못 맡았는데 지금 코가 뚫려서 냄새를 맡습니다.” 하며 이야기했습니다. 그분은 외덕교회 장로인 윤영수 교수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러자 박 장로님께서는 “손도 안 댔는데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하시면서 그 뒤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도 은혜를 받았으니 제자리로 들어가라 하셨습니다. 저는 결혼 전에 서울대학 병원에서 편도선 수술을 받은 뒤로 두 달 정도 괜찮았다가 또다시 계속 재발했었는데, 그때 집회에 참석한 후로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편도선염이 재발되지 않았습니다.

외덕교회 집회가 열리는 며칠 동안 저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교회에서 계속 철야를 했습니다. 어린애 둘을 데려갔었기에 빈 분유 통을 오줌통으로 쓰려고 가져갔는데, 어찌 된 일인지 집회 기간 내내 아이들이 대소변을 보지 않고 칭얼대는 일도 없이 아주 얌전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올 데가 전혀 없는데도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자꾸만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며 무어라 표현 못 할 만큼 향기로운 냄새가 계속 맡아졌습니다. 아무리 좋은 꽃향기나 최고급 향수라 해도 그 냄새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고, 진동하는 향기 속에서 머릿속이 아주 시원하고 맑아지며 마음이 한없이 즐겁기만 했습니다. 불을 토하시는 듯 힘찬 박 장로님의 설교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몇 시간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고,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부르다 보면 어느새 아침 해가 밝아 오고 있었습니다.

박 장로님 집회가 끝난 후부터 저는 외덕교회에서 철야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교회에서 철야하는 사람들이 드물었으나, 박 장로님 집회에 참석했던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모여 철야 기도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박 장로님께서 집회 중에 부르셨던 찬송가를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목청껏 즐겁게 부르곤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1년이 지난 1956년 4월, 박태선 장로님께서 다시 외덕교회에 오셔서 6일 동안 집회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교회 앞의 넓은 마당에 천막을 친 집회장에는 외덕교회 교인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그 많은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안수를 해 주셨는데, 어느 날인가 사람들의 머리에 안수를 하시는 순간 밀가루 포대에서 밀가루가 확 하고 쏟아지는 것처럼 사람들 머리 위에 뽀얀 것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뽀얀 것이 사람들 위로 점점 쌓이고 쌓이더니 나중에는 천막 안이 온통 뽀얗게 보였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창 예배를 드릴 때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제 온몸을 통과하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몸의 무게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너무나 가벼웠습니다. 왜 그리도 기쁘고 즐거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고 그 한없는 기쁨을 표현하려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집회 중에 박태선 장로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사이에 종이 한 장을 주고받아도 증거가 있거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증거가 없겠습니까!” 그리고 성신에 대하여 조목조목 설명해 주시는데, 그때 저는 ‘아, 그렇구나!’ 하며 무릎을 쳤습니다. 하나님의 성신이 때로는 뽀얀 이슬과 같이, 때로는 바람과 같이 임하신다는 말씀을 들으며 제가 그동안 집회장에서 체험한 것이 바로 성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경 호세아서의 ‘이슬과 같이 내리는 성신’에 대한 구절도 박 장로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제까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새로운 음식을 먹어 본 후 “이 음식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는 설명을 들은 것처럼, 성신에 대해 하나하나 풀어 주시는 말씀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놀라운 은혜를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명확하게 깨우쳐 주시는 말씀을 들을 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이 모르는 것을 나는 알았고, 세상에 없는 것을 내가 받았구나!’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한없이 감사드리면서 앞으로 이 한 길을 따르겠노라고 마음 깊이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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