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북중 외교에서 우리의 역할

이지수 / 명지대 사회과학대학 교수
발행일 발행호수 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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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경험을 강조하면서 북한 정권이 시장 경제로 진입하도록 전력을 다하는게 남북, 북중 외교의 나아갈 방향’

명지대 사회과학대학 이지수 교수

명지대 사회과학대학 이지수 교수

우리 말의 ‘사이’란 단어는 친구 사이 처럼 ‘관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이를 좀 더 좁히세요”라는 말에서처럼 상호 떨어진 거리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좋은 관계(사이)란 적절한 거리(사이)를 유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각의 나래를 친구 사이에서 나라와 나라의 사이로 펼쳐 보자. 나라와 나라 사이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적절한 거리는 유동적이기도 할 것이다. 시대에 따라 언제나 고정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남북관계를 생각할 때, 적절한 남북한간의 거리는 무엇일까? 북한과 중국은 또 어떤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까? 또 그들 사이는 변하지 않을 것인가? 상대에 따라서 그 상대의 현재 위치에 따라서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북한은 과연 지금 어떤 위치에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역사적 경험에서 찾아보면 의외로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소련과 동구, 그리고 중국은 초유의 변화를 겪었다. 인민들의 항거였다. 그 이유나 계기는 참 다양했다. 하지만 공통적인 사실은 인민들이 당시 공산당 정책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한 가지 더 공통점이 있다. 이들 모든 나라에서는 1970년대 말부터 시장을 허용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전에는 시장이 허용되지 않았다.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었던 탓이다. 시장을 허용한 지 10여 년이 흐른 후, 이들 모든 나라에서 예외 없이 인민들의 저항이 일어났는데, 소련 동구의 공산당 정권은 허무하게 무너져버렸다. 중국공산당만 위기를 넘겼다. 천안문 사건이다. 10여 년 전에 도입한 시장이 이미 전 사회 내부 구석구석 퍼져나갔었다는 점이 공통점이었고 중국공산당만 시장을 역사 진보의 활력소로 여겼다는 점이 달랐다.

무너진 곳의 공산당들은 시장을 암세포로 인식했었다. 북한은 1970년대 말 사회주의 전반의 경제위기에도 시장을 허용하지 않고 버텼다. 조총련이 비결이었다. 하지만 조총련의 약효가 떨어질 때쯤 1990년대 중후반 300여만 명을 굶겨 죽였었다. 대규모 탈북자가 줄을 이었다. 결국, 2002년 가서야 제한적인 시장을 도입했다. 그리고 지금은 전 사회에 시장이 넘쳐흐르고 있다. 개성공단이나 금강산관광사업이 시장 확산의 발목을 잡았었지만, 대세를 뒤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바야흐로 소련 동구, 중국이 겪은 바로 그 상황이 온 것이다.

이제 북한 정권에게는 시장에 대해 두 가지 선택이 남아 있다. 하나는 시장을 부정하고 최대한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다. 소련 동구 공산당 정권의 선택이었다. 다른 하나는 시장을 적극적으로 허용하는 개혁 개방을 단행하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걸은 길이다.

우리에게는 물론 북한에게도 후자의 선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서 북한과의 관계 설정, 북중 관계에 대한 우리 정부의 역할에 대한 답이 나온다. 중국의 경험을 강조하면서 북한 정권이 시장을 공식화하고 본격적으로 시장경제로 진입하도록 개혁과 개방의 노선을 택하도록 하면 된다. 물론 개혁개방이 김정은 정권을 위태롭게 할 여지가 많다. 하지만 그것만이 북한 전 인민이 사는 길이고, 동북아가 안정되는 길이고, 중국도 안심하는 길이다. 이를 북한의 엘리트들과 중국에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게 결국 우리 외교 원칙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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