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역의 길을 선택하고 받은 축복에 한없는 감사의 눈물 흘려

김경숙 퇴임관장(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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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지난호에 이어서>

일주일간의 집회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몇몇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진을 찍으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군종감과 군종차감 등 육군 본부 인사들과 함께 저도 하나님을 모시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지금 그 사진을 꺼내 보면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 “성령의 불을 받으면서”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서, 그 집회에서 불성신을 받아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순간을 회상하게 합니다.
저는 한강 모래사장 집회, 서울 운동장 집회 등 하나님께서 하시는 집회라면 철야를 해 가며 계속 참석했습니다. 그때 제 남동생 경식이도 한강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제가 집회에서 며칠씩 철야하는 것을 보고 ‘그 집회에 무엇이 있기에 누나가 저러는가?’ 싶어서 집회장을 찾아오게 되었고, 이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에게도 증거를 보여 달라며 간절히 기도드렸다고 했습니다. 그 후로 동생은 집회에 계속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집회장에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천막 안에 웬 비가?` 의아해
집에 와서 방 안에도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서야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슬성신의 은혜임을 깨달아

당시 저와 함께 흑석동 장로교회에 다니셨던 어머니(故 손순봉 승사)는 목사의 권유로 여의도에서 열린 하나님 집회에 참석했으며 그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 집회를 찾아다니셨습니다. 어머니는 집회장에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천막 안에 웬 비가 내리지?’ 하며 의아해했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방 안에 있을 때도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슬 같은 은혜’임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듬해인 1956년 1월, 용산구 원효로 하나님 댁에 전도관이 마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부터 저희 가족들은 원효로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매일 차디찬 겨울 바람을 헤치고 새벽예배에 참석하면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두 뺨을 적시며 간절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3월, 장로회 신학교(現 총신대)에 다니던 동생 경식이가 용건이 있어 경기노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서울 승동 장로교회에서 열린 경기노회에서 노회장인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많은 목사들이 하나님 집회에 대해 비방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목사들 자신이 하나님 집회에 참석한 것은 물론이고 교인들에게까지 참석을 적극 권유했었는데, 그렇게 완전히 돌변했다며 자신이 목격한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당시 전국 대도시에서 열린 하나님 집회에 연인원 수백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파가 모이고, 특히 기성교회가 텅 빌 정도로 교인들이 몰려가자 목사들의 태도는 180도로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원효로 전도관에 모여들었습니다. 그해 여름부터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청암동 언덕에 웅장한 이만제단을 짓기 시작하면서 교인들은 저마다 건설을 도왔으며, 저도 틈나는 대로 가서 질통을 지고 일을 했습니다. 어디서 그렇게 힘이 나는지 높은 종각까지 가볍게 오르내리며 싱글벙글 즐거울 뿐이었습니다. 사무실에 출근해서 근무하면서도 얼른 공사 현장에 가서 일을 돕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당시 지방 순회를 다니셨던 하나님께서는 바쁜 시간을 쪼개 현장에 들르셔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안수해 주시며 따뜻하게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 모든 시간이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쁘고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만제단에 다니던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 교인 한 분이 숨을 거두셔서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입관을 마치고 관 뚜껑까지 덮은 상태였는데, 그때가 여름인 데다 음식을 하느라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시신을 모신 방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웠습니다. 저는 이렇게 뜨거운 방에서 시신이 어떻게 되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관 밑에 손을 넣어 보라고 하기에 손을 넣어 봤더니, 어찌 된 일인지 관 밑이 서늘한 것이었습니다. 더운 여름날 푹푹 찌는 방 안에서 오직 시신을 모신 관만이 시원한 기운에 싸여 있었습니다. 순간 저는 ‘아! 성신으로 지켜 주시는구나.’ 생각하며 하나님의 권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훈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한 저는 소령이 되어 여군 훈련소 관리과장을 맡았습니다. 군에서 근무하며 몇 년을 두고 교역자의 길에 대해 고민하다가 1965년 6월 드디어 단안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교역자 지원서를 들고 협회로 향하던 날은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었고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돌아올 때는 감사의 눈물만 흘렀습니다. 곧이어 이만제단에서 남자 수강생 30여 명과 여자 수강생 저 1명이 2개월 동안 교역자 수업을 받았습니다. 이론 수업과 더불어 찬송 인도와 설교 시취(試取), 교역자로서 갖춰야 할 품성과 예의까지 현직 교역자로부터 자세히 배워 나갔습니다. 제가 교역의 길을 가게 된 것을 무척 기뻐하셨던 어머니는 베 한 필을 떠서 단을 닦을 수건을 만들어 주셨고 사철 단에 설 때 입을 한복도 지어 주셨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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