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의 역사를 한눈에, 국립기상박물관

발행일 발행호수 2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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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를 살피던 옛사람들

예로부터 하늘과 날씨를 읽으려는 노력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 흔적은 고려사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특히 ‘천문지’에는 8천여 건에 이르는 천문과 기상 현상이 담겨 있고, ‘오행지’에는 1,500여 건의 자연 현상이 정리돼 있다.

이처럼 하늘의 변화를 세심하게 기록한 이유는 백성의 생존과 나라의 안정을 좌우하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태종 2년 7월의 기록에는 좀처럼 비가 내리지 않는 상황을 두고 임금이 깊은 고심에 잠긴 모습이 담겨 있다.

“서경에 이르기를, 임금이 분수에 지나치면 가뭄이 생긴다 하였다”, “어째서 비가 이토록 내리지 않는가. 내 마음이 아프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 길어질수록, 그것은 곧 나라의 근심으로 이어졌다.

세계 최고의 우량계, ‘측우기와 측우대’

당시에는 농사가 나라 살림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비가 얼마나 왔는지를 정확히 아는 일은 농사를 짓는 데 꼭 필요했다.

측우기 이전에는 ‘우택(雨澤)’, 곧 ‘비의 은혜’라는 개념을 통해 강우의 정도를 살폈다. 비가 온 뒤 호미나 쟁기의 날이 땅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는지를 재어 비의 많고 적음을 짐작했고, 기록해 보고했다. 이러한 ‘우택 보고’는 농사의 흐름을 세밀하게 전하는 중요한 자료가 됐다.

그러나 이 방법은 진흙이 많은 땅과 모래가 많은 땅이 빗물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한계를 지녔다. 이러한 차이는 보다 정확한 기준의 필요성을 드러냈고, 측우 제도가 마련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량을 숫자로 기록하려 했다는 점에서 측우기는 매우 과학적인 발명이었다. 측우기는 둥근 통 모양의 기구에 빗물을 받은 뒤, 그 높이를 재는 방식으로 사용됐다. 또 전국에서 같은 기준으로 비를 측정했다. 이는 조선이 체계적으로 날씨를 관측했다는 뜻이다.

측우기 아래에 놓인 측우대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측우기를 일정한 높이와 수평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비의 양을 정확히 재기 위해서는 기구가 기울어지지 않고, 지면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 또한 지면에서 튀어 오르는 물이나 흙이 측우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기능도 했다.

서울 벚꽃 개화일의 기준이 되는 ‘계절관측목’

서울시 종로구 송원길에 있는 국립기상박물관 야외에는 특별한 나무가 있다. 서울의 벚꽃 개화 시기와 단풍 절정 시기의 기준이 되는 ‘계절관측목’이 바로 박물관의 뜰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뉴스에서 서울 벚꽃 개화와 단풍 시기를 선언할 때 기준이 되는 나무이다.

식물로는 처음 국가등록문화재에 등록된 계절관측목은, 생장 변화를 통해 계절과 날씨를 관측하는 대상이다. 이러한 방식은 오래전부터 세계적으로 이어져 온 기상 관측법이다. 이 나무들은 기상청이 정한 관측 기준에 따라 동일한 개체를 지속적으로 관찰해 자료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왕벚나무 한 가지에 세 송이 이상이 피면 개화로 보는 기준이 된다. 벚나무 옆의 단풍나무 역시 잎의 색이 일정 비율 이상 변했을 때를 기준으로 서울의 단풍 시기를 정하는 표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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