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은혜 간직하며 살고 싶습니다’

이범옥 권사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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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957년 수원제단에서 예배를 마치신 후(위), 1957년 4월 30일 이만제단 개관집회 때 내린 이슬성신

제가 이 길을 알게 된 것은 1955년 스물두 살 때였습니다. 당시 저는 서울에 있는 가족과 떨어져 충남 예산에서 미용실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다니러 갔더니 이웃 사는 팔촌 올케가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이야기를 했습니다. 박 장로님 인도하시는 집회에 가서 고질적인 위장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박 장로님께서 세우신 ‘전도관’에 다닌다면서 전도관에 다녀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장로교회를 다닌 저는 그 말이 의아스러웠습니다. 세상에 교회가 얼마나 많은데 왜 전도관만 구원이 있냐 물었더니 은혜가 내리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올케는 박 장로님께서 하늘의 은혜를 내려 주신다며 은혜를 받지 못하면 수십 년 교회에 다닌 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 했습니다. 전도관에 다니면 은혜를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다 했지만 저는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이런저런 토를 달며 물어봤습니다. 올케는 예배드릴 때 좋은 향기가 나거나 고약한 탄내가 나는 것을 맡아 봤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증거라며 하나님 주시는 향기와 죄 타는 냄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은혜는 처음 듣는다 했더니 올케도 오랫동안 예수교회를 다녔지만 전도관에 가서 처음으로 은혜를 받았다 했습니다. 저는 은혜가 내린다는 것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전도관에 무엇이 있기는 있는 것 같아 설교 말씀을 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요일 올케를 따라 원효로전도관에 가 봤습니다.

힘차게 손뼉 치며 찬송을 부르는데
어느 순간 고약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더니 이내 사라지고 아주 좋은
향기가 바람처럼 스치면서 맡아져

예배실에 들어서니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등단하셔서 찬송을 인도하시자 사람들이 힘차게 손뼉 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저도 따라 부르는데 어느 순간 썩는 냄새같이 지독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잠시 있다가 또 고약한 냄새가 나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이런 냄새가 나는가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순간, 썩은 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주 좋은 향기가 바람처럼 스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향기가 났다 사라졌다 하며 반복적으로 맡아졌습니다. ‘올케가 말한 은혜가 이거였구나!’ 반신반의하던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난생 처음 은혜를 받고 보니 전도관이 어떤 곳인지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 다음 날부터 새벽예배에 나갔습니다.

전차도 다니지 않는 새벽에 흑석동 집에서 나와 한강다리를 건너고 모래사장을 지나 전도관에 갔습니다. 캄캄한 새벽에 시작한 예배는 날이 밝아올 때까지 계속됐는데, 예배실에 빼곡히 앉은 사람들은 찬송 부르고 설교 말씀을 들으며 자리를 뜰 줄 몰랐습니다. 한번은 예배 시간에 박 장로님께서 은혜가 강하게 쏟아진다 하시며 뽀얀 안개같이 성신이 내리는 것을 본 자는 손을 들라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손을 들었고 저 또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뽀얗게 내리는 것을 보고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보고 체험하면서 한 가지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전도관에 분명히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참길을 알았으니 열심히 다녀야겠다 마음먹고 어머니와 남동생을 전도해서 전도관에 다녔습니다.

이만제단을 지으며 교인 여럿이 힘을 모아 큰 돌을 나르는데
좋은 향기가 진동하더니 목으로 시원하고 달콤한 물이 꿀꺽꿀꺽 넘어와
그때 돌이 무게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온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

원효로 전도관에 사람이 늘어나면서 이만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이만제단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산중턱에 터를 닦고 공사할 때 교인들이 많이 도왔습니다. 한번은 여럿이 힘을 모아 큰 돌을 나를 때 과일 향기같이 상큼하고 좋은 향기가 진동하더니 목으로 시원하고 달콤한 물이 꿀꺽꿀꺽 넘어왔습니다. 그때 돌의 무게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고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습니다. “향취가 나요!”하고 소리치자 다들 “아주 진하게 나요!” “생수도 마셔져요!” 하고 기뻐했습니다. 일할 때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습니다.

이만제단 개관집회 때 하나님께서
안수해 주시는데 머리 위에 물을 쏟아
붓는 것처럼 온몸이 시원하게 느껴져
사진에 은혜가 쏟아지는 모습이 찍혀

1957년 4월 이만제단이 완공돼 개관집회가 열렸을 때였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3층까지 꽉 차 있는 사람들 사이를 다니시며 한 명 한 명에게 안수해 주셨습니다. 저는 머리 위에 박 장로님 손이 닿는 순간 “쏴아~” 하고 물을 쏟아 붓는 것처럼 온몸이 시원하게 느껴졌습니다. 성신이 소나기처럼 내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직접 체험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나중에 개관집회 사진을 보니 폭포수같이 은혜가 쏟아지는 모습이 찍혀 있어서 ‘그때 받은 은혜가 사진에 찍혔구나!’ 하며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그해 여름에는 박 장로님께서 서울의 각 구역을 심방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수행하는 교역자와 교인들이 무더기로 따라다녔기 때문에 무더기 심방이라 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교인 집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가가호호 방문하셨는데, 흑석동 꼭대기 저희 집에 오셨을 때는 들어서실 때부터 형언할 수 없이 좋은 향취가 진동했습니다. 어머니와 저, 남동생에게 안수해 주시고 가신 후에도 계속 향취가 나서 식구들 모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만제단에 다니며 주일학교 반사로 활동했고 특전대원과 함께 말씀 공부를 했습니다. 특전대원들은 20대 젊은이들로 기성교회 목사나 교인들과 성경 토론하며 전도를 했습니다. 저는 특전대는 아니었지만 성경 구절 하나하나를 쪼개 가르쳐 주는 것이 좋아서 공부 모임에 갔습니다. 특전대원들이 하는 말이“이사야 41장에 나오는 동방의 의인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면 기성교회는 속 시원한 대답을 못한다 했습니다. 공부 모임에서 이사야 41장을 보면 동방의 의인이‘동방, 땅 끝, 땅 모퉁이, 해 돋는 곳’에 나타난다고 기록돼 있으며 그분이 박태선 장로님이심을 조목조목 설명해 주었습니다. 동방의 의인은 하나님의 성신을 내리는 존재이신데 박 장로님께서 성신을 내리는 것은 제가 직접 체험한 사실이었습니다. 이렇게 공부하며 앞뒤가 꼭꼭 맞으니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 후 1957년 11월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되면서 저는 건설대로 들어갔습니다. 건설대에서 힘껏 일하다 보면 향긋한 향취가 진동하며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그 맛을 아는 건설대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열심을 다해 일했고 힘든 일을 서로 먼저 하려고 했습니다. 어느새 주택과 공장, 학교가 들어섰고 오만 명이 들어가는 제단도 지어졌습니다. 처음 건설을 시작할 때는 야산과 황무지였는데, 1년 만에 만 명이 넘는 교인들이 살아가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일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던 어느 날,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동아일보가 이슬성신이 찍힌 사진이 조작됐다고 보도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신문에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건설대원들끼리“거짓말도 분수가 있지!” “우리가 다 보고 체험한 건데!”하고 이야기하다가 동아일보사에 항의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길로 따라나섰습니다.

동아일보에 이슬성신이 찍힌 사진이
조작됐다는 보도 보고 항의하러 갔는데
경찰이 교인들에게 폭력을 휘둘러
성신을 체험한 교인들은 억울함 호소

동아일보사 앞에 도착해서 “동아일보는 허위보도 사과하고 정정하라!” 하고 구호를 외쳤습니다. 어느 순간 뒤에서 미는 힘에 밀려 얼떨결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 3층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뒤쫓아 온 경찰이 곤봉을 내리치는 순간 왼쪽 이마를 정통으로 맞아 피가 튀며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그때부터 피가 계속 흘러서 입고 있던 파란색 코트는 자주색이 돼 버렸습니다. 경찰들이 구급차에 태워 경찰병원에 데려갔고 저는 한 달 동안 입원 치료를 받은 후에야 조금 기력을 찾았습니다.

그때 경찰이 폭력을 휘두른 것도 기막힌 일이지만 더 기막힌 것은 분명한 사실을 조작됐다고 거짓 보도한 언론이었습니다. 이슬성신이 내릴 때 그대로 촬영한 사진이었고, 이슬성신을 보고 체험한 사람이 수백만이 넘는데도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억울하고 분한 심정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참길을 꿋꿋이 따라가겠다고 다짐하게 됐습니다.
그 후 1962년 덕소신앙촌이 건설될 때도 건설대로 일했습니다. 덕소에서는 팀을 나눠 경쟁하면서 더 신나게 일했습니다. 소사보다 빠르게 건설되어 신앙촌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신앙촌은 자고 나면 집이 한 채씩 생긴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건설이 마무리된 후 저는 제강공장, 수예부 등에서 일하다가 1972년 가족이 있는 미국에 갔습니다. 시력이 많이 안 좋아져서 치료차 갔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아 빨리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에서 생활했습니다. 저는 이만제단에 같이 다녔던 어머니를 모시고 L.A.제단에 나갔습니다. 이역만리 먼 땅에서 우리 교인을 만나니 그렇게 반갑고 좋을 수가 없었고, 매주 한국에서 보내 주는 신앙신보는 마음에 큰 힘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1981년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을 때도 신앙신보에 실린 말씀을 보면서 ‘그렇지! 하나님의 성신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지!’ 하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1년에 두 번 이슬성신절과 추수감사절에 기장신앙촌을 다녀가면서 항상 신앙촌 갈 날을 손꼽으며 지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 입에 생명물을 넣고
수건에 생명물을 적셔 얼굴을닦으니
얼굴 뽀얗게 피고 입술도 발그스름해져
살아 계실 때보다 더 예쁜 모습 돼

그러던 2005년 어머니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숨을 거두신 후 생명물을 어머니 입에 넣어드렸더니 한 방울도 흘러나오는 것 없이 그대로 넘어갔습니다. 생명물을 수건에 적셔서 얼굴을 닦고 나자 뽀얗게 피어나며 참 고우셨습니다. 교인들과 관장님이 오셔서 입관예배를 드린 후에는 입술까지 발그스름하게 되어 살아 계실 때보다 예쁜 모습이셨습니다. 늘 신앙촌을 그리워하다 돌아가셨는데 귀한 은혜를 주시니 편안하게 가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2011년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기장신앙촌에 들어왔습니다. 60년 한길을 따라온 사람들과 같이 지내니 한식구보다 가깝게 느껴집니다. 제가 이만제단에서 반사를 할 때 우리 반 학생이었던 아이가 이제는 70대가 되어 같이 말동무하며 지냅니다. 신앙촌 식구들과 대화하면 각자 기억하는 하나님 모습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저는 흑석동 꼭대기 저희 집까지 오셔서 무더기 심방하시던 모습이 많이 떠오릅니다. 한 명이라도 더 은혜 입혀서 구원을 주시려고 애쓰셨던 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뵙고 참길을 따라왔으니 세상 누구보다 복된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주시는 귀한 은혜 간직하며 남은 여생 아름답게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이범옥 권사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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