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율법 지키며 맑게 살고 싶은 마음 늘 변함 없어’

김정희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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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957년, 제 나이 열여섯 살 때로 기억됩니다. 충청남도 서산군 이북면에 살던 저는 오빠와 같이 동네 교회에 다녔는데, 매일 새벽예배에 나갈 정도로 열심이던 오빠가 갑자기 교회를 가지 않고 이북면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전도관이 이단이라고 하던 목사는 오빠뿐 아니라 교회 기둥이던 청년과 어른들이 전도관으로 옮기자 예배 때마다 전도관에 가지 말라고 주의를 줬습니다. 교회 사람들이 집까지 찾아와 나쁜 소리를 하니 어머니는 오빠가 집안 망신시킨다고 크게 화를 내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찍 가장이 된 오빠는 믿음직하다고 동네에서 칭찬이 자자했는데, 전도관에 다닌다고 험한 말을 듣게 되니 저는 속이 상했습니다. 괜히 오빠한테 짜증 부리고 왜 전도관에 가냐고 따졌더니 오빠는 화도 안 내고 웃으면서 너도 다녀 보면 알 거라고 했습니다.

오빠가 이북면전도관에 나가자
전도관은 이단이라고 목사가 비방
속상해서 오빠한테 왜 전도관
나가냐고 하자 다녀 보면 알거라 해

한번은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 오빠 혼자 집에서 기도드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온 줄도 모르고 눈물 흘리며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에 왠지 모르게 숙연해져서 조용히 방을 나왔습니다. 나중에 무슨 기도를 했냐고 물어보니 지난 죄를 회개했다는데 저는 오빠가 무슨 죄를 지은 건지 의아했습니다. 오빠는 하나님 주시는 말씀의 거울에 비춰 보면 죄를 알게 된다며 자유율법에 비춰 보면 큰 것만이 죄가 아니라 나쁜 생각과 마음도 죄가 된다 했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 얼른 이해하진 못했지만 전도관은 뭔가 다른 걸 가르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듬해 여름에는 서울 전도관에서 특별전도대가 찾아와 떠들썩했습니다. 시골에서 보기 힘든 트럼펫과 큰북을 울리며 돌아다니자 꼬마들이 따라다니고 어른들도 나와 구경했습니다. 저녁에는 전도관에서 흑백영화를 보여 줘서 온 동네 사람이 모였는데, 영사기 불빛이 환하게 비치자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습니다. 영화에는 서울 시내 큰 전도관에 사람들이 가득 차서 예배드리는 장면, 허허벌판이던 곳에 신앙촌이 건설되어 멋진 주택과 공장, 교회가 세워지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저는 전도관이 시골에 조그맣게 있는 줄만 알았다가 영화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 후로 전도관이 궁금하던 참에 마침 전도관 반사 선생님들이 찾아와 예배에 같이 가자 하여 그길로 따라갔습니다.

그날 예배 시간에 오빠가 앞에 나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찬송 부를 때 온몸이 불덩이 속에 들어간 것처럼 뜨거워졌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 붓는 것처럼 시원해졌는데, 옷을 만져 봐도 보송보송하고 젖지 않아 무척 신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주시는 성신이라며 때로는 불과 같이 때로는 빗줄기같이 성신이 내린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성경 호세아서에 하나님 은혜가 이슬같이 내린다고 기록된 구절을 가르쳐 주는데 전혀 못 들어 본 이야기라 더 알고 싶었고, 오빠뿐 아니라 전도관 교인들이 성신 받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서 저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후 반사 선생님들이 소사신앙촌에 예배드리러 간다기에 따라갔습니다. 영화에서 봤던 신앙촌에는 만 명이 넘는 교인들이 모여서 신앙생활을 한다 했습니다.

소사신앙촌 집회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 단상을 치실 때마다 뽀얀 안개
같은 것이 뭉게뭉게 퍼지고, 과일 향기처럼 상큼하고 좋은 향취가 진동해
은혜를 직접 받고보니 오빠가 반대를 무릎쓰고 전도관 다니는 이유 알게 돼

소사신앙촌 노구산에 있는 오만제단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예배가 시작되자 다들 열심히 손뼉 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예배를 인도하시는 박태선 장로님께서 성신을 내리신다고 들었기 때문에 저는 오빠처럼 뜨거운 불성신을 받게 될까 아니면 소나기 같은 성신을 받게 될까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끝날 때까지 아무 느낌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자리에서 예배드렸던 반사들은 안개처럼 뽀얗게 은혜가 내리더라, 좋은 향취가 나더라 하며 신나게 이야기하는데 저만 아무 느낌이 없으니 답답했습니다. 오빠에게 이야기했더니 좀 더 다녀 보라며 조만간 박 장로님께 안찰 받을 기회가 있을 거라 했습니다.

오빠는 박 장로님께 안찰 받았던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배에다 살짝 손을 대시자 너무 아파서 자신도 모르게 발버둥을 치고 고함을 질렀다고 했습니다. 그 통증이 점점 물러가더니 마치 물을 쏟아 붓는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상쾌하고 시원해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안찰을 받으면 속에 있는 죄가 성신에 대항해서 아프다고 하기에 저는 많이 아플까 봐 걱정됐지만 그래도 성신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제가 안찰받을 때 배에다 손을 대시자마자 얼마나 아픈지 안찰하시는 손을 뿌리치고 싶은 것을 겨우겨우 참았습니다. 그런데 손을 떼시자마자 배에서 시원함이 솟구쳐 온몸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몸이 가벼워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안찰 받을 때 너무 아파서 겨우 참아
하나님께서 손을 떼시자마다 배에서
시원함이 솟구쳐 온몸으로 퍼져 나가고
몸이 가벼워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아

그다음 번 소사신앙촌 집회에 갔을 때는 박 장로님께서 단상을 치실 때마다 뽀얀 안개 같은 것이 뭉게뭉게 퍼지는 것을 보게 되었고, 과일 향기처럼 상큼하고 좋은 향취가 진동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은혜를 직접 받고 보니 이렇게 확실하구나 싶었고 그래서 오빠가 반대를 무릅쓰고 전도관에 다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이북면전도관에 다니며 오빠와 같이 주일학교 반사를 했습니다. 기성교회 다닐 때는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정도였지만 전도관으로 옮기고부터 은혜 받고 싶은 마음에 매일 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기성교회에서는 전도관에 빠지면 못 헤어 나온다며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했는데, 저처럼 교회에 건성으로 다니던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달라져서 전도관에 열심히 다니는 것을 보고 그러는 것 같았습니다.

이북전도관에 교인이 늘어나면서 소사신앙촌에 입주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저는 스무 살 되던 1961년 소사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고, 이듬해 덕소신앙촌이 건설되면서 건설대로 들어갔습니다. 덕소는 신앙촌이 생기기 전까지 전깃불도 없는 시골이었는데, 한강 줄기를 따라 예쁜 2층 양옥이 지어지니 덕소 주민들 사이에 큰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건설을 시작한 지 몇 개월 만에 공장이 들어서 왕왕 기계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큰 제단도 지어져 한 달에 한 번 있는 축복일이면 전국 교인들이 모여 예배드렸습니다. 건설 모습을 구경하던 주민들 중에는 덕소전도관에 나오게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신앙촌이 건설되면서 전깃불도 없는
시골이었던 덕소에 2층 양옥이 지어져
건설 시작 몇 달 만에 공장이 들어서고
큰 제단도 지어져 전국 교인들 왕래해

그 후 1970년 기장신앙촌이 건설될 때도 건설대로 일했습니다. 축구장 3개가 들어갈 정도로 큰 규모인 3동 건물을 비롯해 공장과 식당, 기숙사가 지어졌습니다. 건설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매일 함께하시며 격려해 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녁 8시쯤 돌아가시면 다음 날 덕소에서 새벽예배를 인도하시고 기장에 내려와 아침 8시도 되기 전에 건설 현장에 나오셨습니다. 자갈을 씻을 때는 장정 여럿이 붙들어도 힘든 물 호스를 손수 잡아 주셨고 항상 건설대원들에게 축복하시며 힘을 주셨습니다. 같이 건설대를 하셨던 분들은 신앙촌의 건물 하나, 길바닥 한곳만 봐도 작업복을 입으시고 함께하시던 하나님 모습이 떠오른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신앙의 울타리를 세워 주시기 위해 얼마나 애쓰셨는지 돌아보면 한없는 희생과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생명물로 씻겨서 입관한 권사님 얼굴에
주름이 다 펴지고 까무잡잡하던 피부가
뽀얗고 환하게 피어서 목사 아들과
기성교인 딸이 고맙고 감사하다고 해

저는 신앙촌에 살면서 입관예배 때 하나님 은혜로 시신이 아름답게 피는 모습을 많이 봐 왔습니다. 병으로 숨을 거둔 아이가 생명물로 씻긴 후에 천사처럼 예쁘게 피어서 많은 사람이 감탄한 일도 있었고, 시신에서 풍기던 고약한 냄새가 입관예배를 드린 후 감쪽같이 사라지고 오히려 좋은 향취가 진동한 일도 있었습니다. 2006년에는 앞집에 사시던 이옥례 권사님이 돌아가셨는데, 여든이 넘으신 권사님은 거동이 불편하셨기 때문에 제가 자주 찾아뵙고 보살펴 드렸습니다. 그런데 생명물로 씻겨서 입관한 모습을 보니 매일 뵙던 얼굴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조글조글하던 주름살이 다 펴지고 까무잡잡하던 피부가 뽀얗고 환하게 피어서 그렇게 곱고 예쁠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인 아들과 기성교회에 다니는 딸도 그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고, 어머니가 마지막에 편안히 가시는 것을 보니 고맙고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요즘 새벽예배 드릴 때면 마음과 생각으로 죄짓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자유율법을 지키며 맑게 살고 싶은 것은 이 길을 처음 알았던 소녀 시절이나 일흔이 넘은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은혜 받을 때의 넘치는 기쁨과 즐거움을 알기에 항상 그 은혜 간직하며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 베풀어 주신 귀한 신앙촌에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서 아름다운 본향 천국에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김정희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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