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내리는 곳에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염부권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531
글자 크기 조절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신앙신보 사진

1958년 봄 제 나이 열일곱 살 때였습니다. 제가 사는 김포군 통진읍 시골 마을에 자그마한 전도관이 세워졌습니다. 전도관의 전도사님이 집집마다 인사를 다니고 학생들을 전도하면서 제 또래 수십 명이 전도관으로 나가게 됐습니다. 장로교회 열성 교인이었던 셋째 오빠는 전도관이 나쁜 교회라고 못마땅하게 여기더니 전도관 교인이 늘어나자 동네에서 쫓아내야 한다며 매일같이 전도관에 가서 따지고 항의했습니다. 그런데 오빠가 전도사님과 성경 토론을 하고 와서“무슨 질문을 해도 막힘없이 대답하더라.” 하며 놀라는 기색이었고, 전도사님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전도사님 권유로 소사신앙촌이라는 곳에 다녀왔는데, 신앙촌은 전도관 교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했습니다. 오빠는 전도관과 신앙촌을 세우신 박태선 장로님을 만나 뵙고 안찰을 받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전도관을 쫓아내야 된다고 하던 오빠가 장로교회에 발길을 끊고 전도관에 열심히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빠의 달라진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전도관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마침 오빠가 전도관에 같이 다니자고 해서 그때부터 통진제단에 나갔습니다.

친구들과 찬송하며 집에 가는데
백합꽃같이 좋은 향기가 온몸을
휘감는 것처럼 진하게 맡아져
‘이게 말로만 듣던 향취 은혜구나’

통진전도관에는 제 또래 친구들이 모두 새벽예배를 드려서 저도 자연스레 새벽예배에 나가게 됐습니다. 친구들은 예배 마치고 나면 저마다 은혜 받은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뽀얀 안개처럼 은혜가 내리는 것을 봤다 했고, 좋은 향취가 예배실에 가득 찬 것처럼 진동하더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같이 예배를 드렸어도 보고 느낀 바가 없어서 그 이야기가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한번은 친구들이 백합꽃 같은 향취가 들이붓는 것처럼 진하게 났다고 이야기하는데 활짝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이 배꽃같이 환해 보였습니다. 저는 은혜 받으면 저렇게 좋은가 보다 하며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그 후 어느 날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찬송하며 집에 가는데 갑자기 친구들이 찬송을 멈추고 지금 향취가 난다 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맡았던 향취가 여기서도 난다며 “너도 맡았지?” “나도 맡았어!” 하며 좋아했지만 저는 아무 향기가 안 나서 “나는 못 맡았어.”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순간 백합꽃같이 좋은 향기가 온몸을 휘감는 것처럼 진하게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에게 진한 꽃향기가 난다고 하자 그게 향취 은혜라고 했습니다. 저는‘이게 정말 은혜일까? 혹시 꽃이 있나?’ 하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논밭만 있을 뿐 향기가 날 만한 것은 없었고, 집에 올 때까지 향기가 따라오는 것처럼 끊이지 않고 계속 맡아졌습니다. 그때 비로소 ‘말로만 듣던 향취가 이런 거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슬 같은 은혜와 향기를 내리는 자가 감람나무와 같다는 말씀하시며
“내가 그 은혜를 내린다는 것은 100만 명이 체험한 사실”이라고 하셔
향취 체험한 일을 떠올리며 박 장로님께서 감람나무 하나님이신 것 깨달아

전도관에 같이 다니는 셋째 오빠도 기회 될 때마다 은혜 받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특히 처음 안찰 받았을 때 무척 신기했다고 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안찰하실 때 배에 손을 가만히 대시기만 하는데 얼마나 아픈지 견딜 수가 없었고, 자신도 모르게 발버둥을 쳐서 주변 사람들이 붙잡아 줬다 했습니다. 잠시 후 통증이 물러가며 배 속이 말할 수 없이 시원해졌고, 안찰 받고 나올 때는 발이 땅에 닿는지 안 닿는지 모를 만큼 몸이 가벼웠다고 했습니다. 오빠는 박 장로님께서 안찰하시며 성신을 부어 주시기 때문에 내 죄가 성신에 대항할 때 통증을 느끼고, 죄가 차차 씻어짐에 따라 시원함을 느끼는 거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후 저도 소사신앙촌에 가서 안찰을 받았는데, 줄 서서 기다릴 때 보니 오빠 말대로 박 장로님께서 손을 대시기만 하는데 사람들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아프다고 했습니다. 제 차례가 됐을 때 배에 손을 대시자 얼마나 아픈지 발버둥치고 싶은 것을 겨우겨우 참았습니다. 그런데 박 장로님께서 “이제 됐다!” 하고 손을 떼시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원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밖으로 나왔더니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 훌훌 날아가는 것 같았고 왜 그리 기쁜지 싱글벙글 웃음이 나왔습니다. 죄를 씻어 주시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소사신앙촌에서
처음 안찰 받을 때 아픈 것 겨우 참아
하나님께서 “이제 됐다!” 손을 떼시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원해져 신기해

그 후 1958년 여름이었습니다. 소사신앙촌에서 큰 집회가 열려 통진제단 교인들과 같이 참석했습니다. 노구산을 뒤덮을 정도로 많은 교인이 모였는데 나중에 들어 보니 그 수가 연 70만 명을 넘었다고 했습니다. 콩나물시루같이 빽빽하게 앉아 있어도 불편한 줄 몰랐고 예배에 열중하다 보면 몇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그때 저는 감람나무에 대한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힘찬 음성으로 성경을 풀어 주시는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와 참 재미있었습니다. 호세아서에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고 향기를 내리는 자는 감람나무와 같다.’고 기록돼 있다 하시며 “내가 그 은혜를 내린다는 것은 100만 명이 체험한 사실”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체험한 은혜를 하나하나 떠올리며‘박 장로님이 바로 은혜를 주시는 감람나무이시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에도 친구들과 같이 소사신앙촌에 자주 다니러 갔습니다. 신앙촌에서 예배드리거나 안찰 받은 후 주택가를 둘러보곤 했습니다. 그림같이 들어선 예쁜 양옥집과 꽃밭에서 지저귀는 새를 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한번은 주택가를 걸을 때 아주 진한 향기가 진동해 처음에는 집 옆 화단에서 나는 향기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주택가에서 멀어져 꽃이 없는 곳을 걷는데도 계속 향기가 진동해 비로소 향취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촌에 갈 때마다‘은혜가 내리는 이곳에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간절해져서 가족들에게 이야기했는데, 제단에 다니지 않던 큰오빠의 반대로 당장은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신앙촌에서 살 수 있겠지 하고 속으로 고대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소사신앙촌에 갔다가 우연히 입관예배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우리 동네 살던 일곱 살 남자아이가 시름시름 아팠는데, 그 아이가 소사신앙촌에 있는 작은아버지 집에서 지내다 숨을 거둔 것이었습니다. 생전에 아이는 일곱 살 천진난만한 모습이 아니라 병색이 짙고 비실비실해서 볼 때마다 안쓰러웠습니다. 그런데 생명물로 시신을 깨끗이 씻긴 후에 봤을 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굴이 맑고 뽀얗게 피어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고, 입술은 화장한 것처럼 발그스름한 빛을 띠어 남자 아이지만 “참 예쁘다!”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살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곱게 핀 모습을 보고 저는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크신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은혜 주시는 이 길을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다짐하며 반대를 무릅쓰고 더 열심히 제단에 다니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 후로 반대가 차차 누그러지게 되었고 저는 1962년 드디어 소사신앙촌에 들어갔습니다.

병을 앓다 숨을 거둔 아이를 생명물로
씻기자 얼굴은 맑고 뽀얗게 피어나고
입술은 발그스름해서 탄성이 절로 나와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크신지 느껴

신앙촌에 들어오고 보니 은혜 받는 시간이 가장 즐겁고 기다려졌습니다. 매일 눈을 뜨면 새벽예배 앞자리에 앉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오만제단으로 달려갔고, 제과공장에서 일할 때도 동료들과 같이 찬송을 부르며 즐겁게 일했습니다. 그해 가을 덕소신앙촌에 입주해서도 제과공장에서 근무했는데, 하나님께서 오셔서 직원들에게 안수해 주실 때면 공장에 향취가 가득 찬 것처럼 진하게 맡아졌습니다. 그때 기쁘고 즐거운 마음은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1970년 기장신앙촌에 입주해 봉제공장에서 일하다가 1974년부터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신앙촌 소비조합이라고 소개하면 오랜 친구처럼 반가워하며 단골이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저는 말수가 적고 수줍음이 많았지만 신앙촌 물건을 들고 나가면 다들 알아주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당시 인기였던 신앙촌 담요를 주문하는 사람이 많아 하루 종일 배달만 다녀도 무척 바빴습니다. 그때부터 10년 동안 소비조합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목욕탕 숙소와 맛길에서 근무하며 신앙촌에 찾아오는 어린이들을 많이 만나게 됐습니다. 목욕탕 숙소는 축복일에 예배드리러 오는 어린이들이 이용하는 곳이고, 맛길 놀이터는 신앙촌에 견학 오는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입니다.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볼 때면 은혜 내리는 곳에 와서 저리도 기쁜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촌에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6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세상 어디에서 이런 기쁨을 얻을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의 은혜를 항상 간직할 수 있다면 그 마음이 바로 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은혜 간구하며 죄짓지 않고 맑게 살아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오늘도 하나님 말씀대로 열심히 살아서 영원히 즐거운 세계에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염부권님 신앙체험기)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관련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