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세워 주신 신앙촌에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이 되기를

인중애 권사(4)/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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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애 권사(4)/기장신앙촌

소사, 덕소에 이어진 기장신앙촌 건설
덕소신앙촌 제강공장에서 일하던 저는 직조공장으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 나이 35세가 되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제3신앙촌을 건설하신다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세 곳의 신앙촌을 건설하신다는 계획은 처음 소사신앙촌을 건설하실 때부터 말씀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1970년 2월 28일. 현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일원의 드넓은 대지에 정지(整地) 작업을 필두로 기장신앙촌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3월 20일. 장세호 집사님과 주택 건설대 30명, 토목 및 도면 담당자가 기장신앙촌에 도착했고 이후 각 공장에서 자원한 백여 명의 사람들이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소사, 덕소신앙촌을 건설할 때 함께했던 건설대원들은 4월 5일 기장신앙촌으로 출발했는데, 저도 그때 다른 대원들과 함께 기장으로 가게 됐습니다. 기장신앙촌에 도착한 저희를 하나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시며 건설 현장에 대한 설명도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또 한 번 건설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건설 현장을 진두지휘하신 하나님
먼저 도착한 건설대원들이 땅을 파서 기둥을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으며 저희들도 6명씩 조를 이루어 기초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건설 현장은 하천이 흐르고 논과 산으로 에워싸여 있으며 땅이 갯벌로 이루어져 건설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남자 키 6배 정도의 깊이를 파 내려가야 반석이 나올 정도로 땅이 질어 목수들이 사각 틀을 짜서 지지대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철근 8개를 넣고 시멘트, 모래와 자갈을 3자루씩 부어 이틀 정도 굳히면 기둥 하나가 완성되었습니다. 건설 현장이 갯벌로 이루어진 데다 건설 기간 동안 비까지 자주 내려서 하루에 기초를 2개 파기도 힘들 때가 많았습니다. 땅을 팔수록 물이 솟아올라 기초 하나에 보통 4~5시간씩 물을 퍼내는데, 하나님께서도 저희와 함께 작업을 하셨습니다.

한번은 콘크리트 작업에 필요한 자갈을 사들여 왔을 때였습니다. 자갈이 모래와 진흙투성이여서 도저히 그냥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직경 15cm 정도 되는 호스를 직접 잡으시고 물을 뿌려 자갈을 씻는 작업을 직접 진두지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달 동안 하루도 빼 놓지 않고 호스를 잡으셨는데, 하루는 작업을 마친 후 제가 그 호스를 잡아 보니 수압이 워낙 센 데다 호스는 물렁물렁해서 잡자마자 호스를 놓치고 뒤로 넘어갈 정도였습니다. 저는 힘이 세서 동료들이 황소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는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된 작업을 종일토록 하셨는지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로 이루어진 신앙촌
1동 공사가 마무리될 때쯤 2동, 3동의 대형 공장 건물과 기숙사, 주택, 아파트 등 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3동 공사를 할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리어카에 시멘트를 부어주시면 두 명이 운반했는데, 하루는 저와 같이 리어카를 옮기던 팀원이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저 혼자 옮기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서 아까운 시멘트를 바닥에 쏟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제 별명을 불러 주시며 “황소가 넘어졌네.” 하고 웃으시며 말씀하셔서 같이 있던 동료들과 함께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3동을 완공할 때쯤 지금의 수예공장 입구에서부터 오리엔스 공장까지 긴 도로에 콘크리트 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철근 여러 개를 철사로 묶어가며 철근 구조물을 만든 후 그 구조물 위에 모래와 자갈을 부어 단단하고 튼튼한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중에 이 길로 차가 수백 대가 다니게 되니 튼튼하게 하자.”라고 하셨는데 그 후 각 공장으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차량을 비롯해서 신앙촌을 찾아온 많은 사람이 그 길을 이용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말씀이 딱 맞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1970년 건설이 시작되고 1972년 6월경까지 1동, 2동, 3동의 대형 공장건물 및 각 공장 건물, 기숙사, 주택 등의 건설이 완공되었으니 총 공사 기간은 약 2년 4개월이 걸린 셈이었습니다. 소사, 덕소신앙촌 건설에 비해 공사 기간이 길었으나 기장신앙촌 규모로 볼 때 이 또한 짧은 시간에 또 하나의 신앙촌이 건설된 것이었습니다. 그 귀한 시간을 함께하며 건설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제 일생에 가장 감사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기장신앙촌 곳곳을 둘러볼 때마다 작업복을 입으시고 저희와 함께 일하시던 하나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늦은 밤까지 일하시며 구슬 같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셨던 하나님, 쏟아지는 비를 다 맞으며 작업을 진두지휘하시던 하나님. 축복의 손길을 허락하시며 힘과 용기를 주시던 하나님… 신앙촌의 기둥 하나, 담 하나, 벽돌 하나, 어디를 둘러봐도 하나님의 모습이 그리워집니다.

생명물로 아름답게 피어난 어머니
기장신앙촌이 완공된 후 저는 만나 식당을 거쳐 한일슈퍼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1977년 어느 날 고향에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3년이 넘게 병상에 계셨던 어머니가 유명을 달리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축복받은 생명물을 가지고 인천 덕적도 고향집으로 향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은혜로 함께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인천에서 덕적도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 전에 집에 전화를 드려서 어머니를 전도관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에 대해 가족들의 의견을 물었더니, 큰오빠가 전도관식으로 장례를 치르자고 하며 빨리 와서 주관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손인 큰오빠가 힘을 실어주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장례예배를 드리기 위해 인천전도관 전도사님을 모시고 교인 30명과 덕적도 집으로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장신앙촌에서 출발해서 덕적도에 갈 때까지 억수같이 비가 쏟아져서 마음속으로 걱정이 되었는데, 덕적도 항구에 도착하자 언제 비가 왔냐는 듯 쾌청하게 맑아지는 것을 보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집에 도착해 어머니를 뵈니 오랫동안 병환에 시달리신 어머니는 장작개비처럼 마른 몸에 입마저 비뚤어져 보기에 안타깝고 안쓰러운 모습이셨습니다.

권사님 한 분과 함께 생명물로 어머니의 몸을 닦아 드렸는데 30분쯤 지났을까 어머니를 보니 비뚤어졌던 입이 어느새 반듯하게 되어 빙그레 미소를 짓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다 씻겨 드리고 나니 푹 꺼져 있던 양볼에 예쁘게 살이 오르고 장작개비같이 뻣뻣하던 몸이 노긋노긋 부드럽게 되어 무척 놀라고 감사했습니다. 어머니는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고 돌아가셨지만 하나님께서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셔서 무엇으로도 그 감사함을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어머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가족들이 그때부터 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전도관에 호의적이었던 큰오빠는 물론이고 반대하던 작은 오빠와 조카, 그리고 조카의 시어머니까지 그때 전도되어 지금도 천부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조카의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전도관식으로 장례예배를 드려서 시어머니가 곱고 예쁘게 피셨는데, 전도관을 심하게 반대하던 조카 남편이 그 모습을 보고 180도로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조카의 남편이 돌이켜서 전도관에 나오기 시작한 것은 물론 아들딸과 친척들까지 전도해서 지금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전도관은 아름답게 핀 시신을 보고 전도된 수가 많다.’고 하는데 저도 그렇고 조카의 경우에도 딱 들어맞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권능이 계시니 누구에게든 이 권능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올해로 86세가 된 저는 구원의 소망을 날마다 마음에 새겨 봅니다. 하나님 일을 할 때 마음속에 벅차올랐던 하늘의 기쁨이 지금도 생생하기에 오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하며 온전히 그 뜻대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기장신앙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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