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따르기를 결심하고 다니던 장로교회에 발길을 끊다

안순식 승사(3)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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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하나님께서 설교를 마치고 단에서 내려가시면 목사들과 여러 인사들이 등단하여 자신의 체험담을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윤치영 장관은 아내가 수차례의 큰 수술을 받고도 고치지 못했던 위장병이 하나님께 안찰을 받은 후 씻은 듯이 나았다며 군중들 앞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또 어떤 고위 관료는 은혜를 받고 자신의 생활이 변화되었다며 이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던 일들이 이제는 양심에 거리껴서 도저히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토록 귀한 은혜를 주심에 감사드린다며 눈물로 이야기하는 목사도 있었습니다.

`은혜를 받아 죄를 소멸받고 구원을 얻는 것 이상 귀한건 없어`
이 은혜와 가르침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나님을 모르고 허무감에 빠져 지낸 시간이 너무도 안타까워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벙어리가 말하는 것보다, 병이 낫는 것보다 은혜를 받아 죄를 씻는 것이 귀하다. 죄를 소멸 받아 구원을 얻는 것이 최고로 귀한 것이다.” 저는 이 은혜와 가르침을 진작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며, 하나님을 모르고 슬픔과 허무감에 빠졌던 지난 시간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충만한 기쁨 속에서 ‘이런 은혜가 있구나! 이런 세상이 있구나!’ 하며 가슴이 벅차오르던 그때 –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따라야겠다고 결심한 저는 이전에 다녔던 장로교회와 발길을 완전히 끊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56년 5월, 대신동 간장 공장 건물에 “부산전도관”이 세워지고 하나님께서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오셔서 매 주일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곳에 사람들이 계속해서 몰려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정도에까지 이르러, 영주동 산언덕에 웅장한 전도관 건물을 신축하게 되었고, 저도 공사 현장에서 돌을 고르고 모래를 나르면서 건설에 동참했습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열심을 다해 일하는 그곳에는 찬송 소리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대학생, 농부, 근로자, 공무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조를 이루어 손발을 착착 맞추었고, 고향도 다르고 말씨도 달랐지만 모두들 한마음이 되어 일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제단이 건설되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오기 전까지 살았던 중국 하얼빈은 당시 손꼽히는 국제도시로 하루에도 유행이 35가지나 바뀐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곳에서 유년 시절부터 성장한 저는 장신구에 관심이 많아서 패물을 수집하고 옷차림에 맞게 치장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었습니다. 그런데 전도관 건설에 동참하고부터는 그런 치장에 드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재빨리 세수를 하고 건설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 저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영주동 산언덕 – 제단을 짓는 그곳에는 어떤 취미나 일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수려한 경관 속에 지어진 부산전도관에 하나님께서 매주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다 무슨 이유에선지 서너 달이 지나도록 오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뵙고 은혜 받는 시간을 가장 기다리던 저는 참으로 안타까워서 ‘언제나 우리 제단에 오실까요?’ 하며 밤낮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얼마 후 드디어 부산제단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했을 때, 설교를 하시던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언제나 우리 제단에 오실까요?’ 하며 기도하는 소리가 내 귀에 하도 쟁쟁히 울려서 오늘 부산제단에 오게 되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고 감사하여 한없이 눈물만 흘렀습니다.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주시는 하나님, 그때를 생각하면 언제든지 가슴이 뭉클해지곤 합니다.

그 후 1958년 12월 저는 소사신앙촌(경기도 부천에 건립된 천부교인들의 마을, 소사·덕소·기장의 3개 신앙촌 중에서 가장 먼저 건설되어 제1신앙촌이라고도 불렀다.)에 입주를 했습니다. 몇 년간 신앙촌 내 상점에서 일하던 저는 1960년부터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난생처음 해 보는 장사였지만 품질 좋은 신앙촌 제품은 어디서나 환영을 받았기에, 아는 집도 없고 지리를 잘 몰라도 서울과 부천 등지를 다니며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정다운 이웃같이 친밀해진 고객들의 집을 몇 군데만 다니면 메리야스, 양재, 간장, 카스텔라 등의 다양한 물건이 순식간에 다 팔려서, 장사를 하고 남는 시간에는 신앙촌에 들어가 건설대의 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원래 저는 감기만 걸려도 위중한 상태에 빠질 만큼 허약한 체질이었지만, 소사신앙촌에 입주한 뒤로는 몸이 아주 건강해져서 기쁘고 활기차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바쁜 하루를 시작하기 전, 소비조합 한 명 한 명에게 안수해 주시며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시던 하나님의 모습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또렷이 떠오릅니다.

하루는 소사신앙촌 오만제단에서 새벽예배를 드릴 때, 어느 순간 시원하고 상쾌한 물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부산 초량집회에서 체험했던 바로 그 은혜가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이 은혜가 떠나가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한 발자국 딛기조차 조심하며 걸음을 걸었지만 언제인지도 모르게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은혜가 지속될 수는 없을까 하며 안타까웠던 저는 하나님을 모시고 소비조합 여러 명이 모인 자리에서 그것을 여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시기를 “지금 여러분들의 신앙은 그 은혜가 지속되기는 어렵고, 기쁨이 오고 몸이 가벼우며 잠이 덜 오는 그런 정도의 신앙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한없이 기쁘고 즐거우며, 새우잠을 자도 피곤한 줄 모르고 몸이 가벼웠던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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