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계신 단상 앞에 눈송이 같은 이슬성신이 내려”

<신앙체험기 506회 소사동교회 박래숙 권사>
발행일 발행호수 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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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동교회 박래숙 권사

저는 1937년 인천광역시 동구 창영동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던 어머니를 따라 감리교회를 다녔는데 1956년경 어머니께서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 집회에 참석하신 후로 제게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집회에 다녀오신 후로 “앞으로는 박태선 장로님 교회에 가야 한다. 박 장로님은 보통 분이 아니시다. 거기가 진짜다”라고 하시며 저도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 말로는 집회에서 향취를 맡았다고 하시는데 그게 무엇인지 저로서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오래 다니던 교회를 두고 다른 교회에 가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어머니의 확신에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박 장로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도착한 곳은 인천의 한 짠지 공장에 마련된 예배실이었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사람들로 가득 찬 예배실에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예배를 드렸고, 늦게까지 남아 철야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참 기도에 집중하고 있는데 과거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6.25 전쟁 당시 폭격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하던 때의 기억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먹을 것이 없어 모두가 굶주리고 있던 때에 미군들이 배에 구호 물품을 싣고 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구호 물품 나눠주는 곳에 가보니 넓은 바닥에 강냉이, 수수 가루 등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가져가게 했습니다. 당시 열다섯이었던 저는 커다란 보자기에 강냉이 가루를 가득 퍼담았고,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다시 가서 한 번 더 퍼왔습니다. 저는 그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뒷사람은 생각도 않고 너무 욕심껏 퍼왔던 제 행동이 부끄럽고 후회되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려웠던 그 시절에 큰 구루마에 장작을 가득 싣고 가는 사람 뒤를 따라가다가 몰래 장작 한 개비를 뽑아 달아난 뒤 저잣거리에 가서 돈이나 떡으로 바꾼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사람들은 그때는 다들 어려웠던 시절이라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 말에 위로받고 잘못을 애써 외면해 왔습니다. 하지만 철야기도를 드렸던 그날은 너무나 추하고 더러웠던 과거의 죄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하고 오랫동안 울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지독한 탄내가 났습니다. 예배실 안에서 날 만한 냄새가 아니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기도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코를 손으로 감싸 쥐며 어디서 타는 냄새가 난다고 하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것이 바로 죄타는 냄새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죄가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고 과연 박 장로님이 세우신 교회는 무언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열심히 다녀보기로 했습니다.

그 후 숭의동에 인천전도관 건물을 새로 짓기 시작했고 저도 작게나마 일손을 보태게 되었습니다. 저는 친구들과 바닥에 구들장 까는 일을 맡았고, 구들장 위에 바른 시멘트가 마르기를 기다리면서 친구들과 밤새 찬송을 부르며 즐겁게 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불렀던 찬송가 ‘나의 갈길 다 가도록’은 지금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인천전도관이 지어지고 얼마 뒤에 저는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며 찬송을 부르시던 중 단상에서 눈송이 같은 것이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몽글몽글한 눈송이들은 흩날리면서 예배실로 퍼져나갔고, 저는 신기한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옆에 있던 어머니께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눈송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말로만 듣던 이슬 같은 은혜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슬비 또는 안개 같은 은혜를 봤다고 했는데 제 눈에는 꼭 눈송이 같아 보였습니다.

1957년 4월에는 서울 중앙전도관 낙성 집회(1957. 4. 25.~5. 4)가 있었습니다. 낙성 집회 기간에는 제2회 전도관 체육대회(4. 25~4. 27)도 함께 열려 서울운동장에서 배구, 농구, 축구, 릴레이 달리기 등 다양한 종목의 경기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인천 대표로 경기에 출전하여 배구와 육상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배구 등 경기에 직접 참여하실 때면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날은 전국의 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선의의 경쟁을 벌였던 즐겁고 가슴 벅찬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집회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는데 하루는 하나님 말씀을 듣던 중 아주 좋은 향기가 바람처럼 저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향이었기에 저는 그것이 어머니가 전에 맡았다는 향취 은혜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카시아 꽃향기보다 더 진하고 좋은 그 향기를 조금 더 맡고 싶었지만 향기가 어느새 사라져서 저는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향기를 잡을 수만 있다면 잡아두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인천집회(1958. 5. 29.)를 알리는 특전대

얼마 뒤 하나님께서 소사신앙촌을 만드신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인천전도관 식구들 중에서도 건설대로 자원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생겨났고, 저도 뒤늦게 자원하여 소사신앙촌 건설대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땅을 파서 건물의 기둥 세우는 일을 했는데 일을 하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고, 식사 준비를 위해 커다란 쌀가마니를 번쩍번쩍 들면서도 무거운 줄 몰랐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현장에 오셔서 건설대원들에게 자주 안수를 해주셨고, 안수를 받은 건설대원들은 힘이 나서 더욱 신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몸이 약했던 제가 어떻게 건설대 일을 했을까 싶지만, 그때는 힘든 줄도 모르고 즐겁기만 했습니다. 함께 일하던 건설대원들도 ‘참 신기하다. 무거운 것도 가뿐하게 들리는 것이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참 많이 하곤 했습니다.

소사신앙촌 건설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서 저는 메리야스 공장으로 부서를 옮겨 일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촌 메리야스가 품질 좋기로 입소문을 탔던 때라 공장은 활기차게 운영되었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그만큼 보람을 느끼며 기쁘게 일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는 오버로크 작업자들에게 일감을 가져다주기 위해 원단을 나르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원래 다니던 길이 아닌 기계 바로 옆을 지나가다가 빠르게 회전하는 기계의 모터에 치마 끝자락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치마가 모터 속으로 휘말리면서 저는 몸의 중심을 잃게 되었고, 다리까지 모터에 감겨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다행히 그 순간 모터가 멈춰서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다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저는 정신을 잃었고, 그 뒷이야기를 동료들을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사고를 목격한 동료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저를 업고 바로 하나님 앞으로 데려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저를 축복해 주시더니 “이제 일어나라!”고 하셨고, 그 순간 제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신이 드나?”라고 물으셨고, 저는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괜찮다고 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저는 꾸벅 인사드린 후 두 발로 걸어서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다리를 크게 다쳐 정신을 잃었던 제가 스스로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다리를 보니 피부에 난 상처에서 진물이 나오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솜을 붙여 놓았습니다. 며칠 후에 솜을 떼어보니 깨끗하게 아물어서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후 저는 고향인 인천으로 내려왔다가 백령도로 이사를 가게 됐는데 그곳에는 전도관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삶이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십여 년 동안 교회에 가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예배를 드리지 못하니 마음이 괴롭고 답답했던 저는 다시 인천으로 이사를 갔고, 그리웠던 인천전도관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 후 1970년대 초반에 기장신앙촌에 내려가 하나님께 안수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 오래 교회에 가지 않았던 저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죄송했습니다. 혹시 꾸중하지는 않으실까 걱정하며 안수를 받는데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죄짓지 마. 죄지으면 안 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무딘 마음으로 생활했던 제 모습을 다 아시고 하신 말씀인 것 같아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죄송했습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하나님을 따라야겠다는 뼈아픈 결심도 그날 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점점 심해져서 머리 빗질도 못 하고, 세수도 못 할 정도로 심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가보니 등뼈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뒤로 많이 물러난 상태라며 수술을 권했습니다. 저는 수술을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보라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축복일 날 버스 맨 뒷자리에 누워서 기장으로 내려갔습니다. 기장에 도착해서 축복을 받으러 가는데 하필 하나님 계신 곳 바로 앞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넘어진 저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며 “괜찮아?”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시더니 넘어진 저를 향해 강하게 축복해 주신 후 이제 됐으니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신기하게도 허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에 통증이 사라져 버린 저는 기장 내려올 때 버스 뒷좌석에 누워서 왔던 길을 집에 돌아갈 때는 똑바로 앉아서 갔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제가 하나님께 축복받고 병이 씻은 듯 나았다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회자되었습니다. 저 역시 너무나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었기에 집에 가는 내내 마음속으로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얼마나 많이 기도드렸는지 모릅니다.

인천전도관에 다니던 시절부터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배를 마치신 하나님께서 예배실 안에 가득한 그 많은 사람을 한 명도 빠짐없이 안수해 주시면,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병이 나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증거하는 사람들의 환희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놀랍고 신기한 광경이었는데 제게도 그 크신 권능을 베풀어주셨음이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따르며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깨달은 뒤로 어디를 가나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왔고, 천국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진정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그 귀하신 뜻을 따라 맑고 성결하게 살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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